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68)
67소년의 소망
“또 닭 한 마리가 없어졌어요.”
“쯧. 이걸로 대체 몇 마리 짼지.”
따끈따끈한 감자를 까먹던 중, 나는 부모님의 말씀에 손을 멈췄다.
매일 아침마다 듣게 되는 말.
처음에는 놀라고 무서웠지만, 이제는 호기심과 의문만이 샘솟는다.
“그놈의 요마 때문에 정말….”
“그러게요. 밤마다 무서워서 잘 수가 없으니….”
…요마가 아닌데.
옛날에 실력 좋은 사냥꾼이었다던 그램 할아버지가 내게 알려 줬다.
닭이 사라진 우리 집 양계장, 그곳에 남은 발자국은 늑대의 것이라고, 무리에서 쫓겨난 늑대는 간간히 마을의 가축을 훔쳐 간다는 설명을 들었을 때, 그럼 왜 어른들에게 알려 주지 않느냐고 나는 정말 이해가 안 돼서 물어봤지만, 할아버지는 그냥 허허 웃기만 했다.
그래서 아빠랑 엄마에게 말했다, 어제 그건 늑대의 짓이라고.
그런데 쓸데없는 소리 말라고 혼났다. 분명 늑대의 짓인데, 왜 자꾸 요마라고만 하는 걸까?
“무서우니까.”
언제 촌장 할아버지네 집에서 본 적 있는 은식기처럼 하야면서도 훨씬 반짝거리고 산에 피어 있는 제비꽃보다 훨씬 예쁜 보랏빛 눈을 가진 소녀는, 내 의문에 딱 자르듯 말했다.
요마가 늑대보다 무서운 거 아니었나? 왜 더 무섭게 생각하는 거지?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스스로는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겨우 늑대 따위를 두려워하는 나약함과 그 늑대조차 잡기 무서운 비겁함을 숨기려고 요마라는 망상을 꺼내 들었을 뿐이야.”
소녀의 말은 언제나 어려웠다.
그리고 차갑고 날카롭기까지 했다.
저렇게 고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으니 좀 더 좋게 말하면 훨씬 예뻐 보일 텐데.
그렇지 않아도 예쁘기는 하지만….
어쨌든 어른들이 늑대를 무서워해서 못 잡고 있다는 건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는 계속 가축이 사라진다. 그램 할아버지가 알려 준 대로라면 언젠가는 사람도 피해를 볼지 모른다.
그럼 나나 부모님은 물론, 이 소녀까지 위험할 수 있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도중, 나는 문뜩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늑대가 무서워서 잡을 수 없다면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이 잡으면 된다. 예를 들면, 바로 내가.
“멍청이.”
내 생각을 들은 소녀의 차가운 비웃음은 솔직히 화나면서도 가슴 아팠다. 나는 소녀 때문에 이러는 건데, 내 결의를 그냥 비웃고 말다니.
원래 말투가 그런 걸 알고는 있어도 이때만큼은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소녀랑 내기했다.
늑대를 잡으면 내 부탁을 하나 들어주고, 잡지 못하면 소녀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그리고 혹시 어른들이 모르게 절대 비밀로 하겠다는 약속까지 받았다.
“네가 죽어도 아무도 모를걸.”
왠지 내가 죽을 걸 확신하는 듯한 말, 나는 그것을 듣고 조금 울컥했다. 그리고 두고 보자면서 소녀와 헤어졌다.
어차피 약초를 캐다 줄 때만 만나 줄 뿐, 평소에는 아는 척도 안 하는 소녀니까.
정말 내가 죽어도 신경 안 쓸지 모른다. 하지만 소녀만큼은 날 기억해 줄 거라는 기대를 위안 삼아-그렇다고 죽을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지만-나는 늑대를 잡으러 숲으로 갔다.
그램 할아버지의 집에서 활과 덫과 단검 및 건포와 모포 등등을 가져온 데다가 숲에서 며칠 자는 것 정도는 익숙하기에 새삼 불편한 건 없었다. 할아버지 몰래 가져온 건 죄송하지만 늑대를 잡아 가면 용서해 주시겠지.
여기저기에 덫을 설치하고 우연히 걸려드는 토끼를 구워 먹거나 숲에서 약초를 캐며 시간을 보내던 중, 나는 마침내 늑대를 발견했다.
…근데 할아버지.
늑대가 이렇게 무섭다는 말은 없었잖아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큰 덩치에 날카로운 이빨과 붉은 안광이 어린 섬뜩한 외눈을 가진 늑대가 덫에 걸린 토끼를 으적거리는 것을 보며, 나는 왜 어른들이 늑대가 무섭다고 한 건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도망칠 수는 없다. 부모님이나 친구들은 몰라도 소녀까지 날 비웃게 될 거로 생각하니, 두려움 대신 용기가 뭉클뭉클 솟아났다.
활을 꺼내 들고 화살을 겨냥하길 잠시, 할아버지가 가르쳐 준 대로 호흡을 가다듬은 나는, 놈이 토끼를 삼키기 위해 고개를 쳐든 순간 시위를 놓았다.
푸욱―!
“캐앵!”
발톱에 긁힌 듯한 상처가 남아 있는 눈에 화살이 박힌 늑대가 개소리를 내며 땅을 뒹구는 모습을 보고 나는 안심했다. 그래, 늑대라도 결국 좀 사나운 개잖아?
굳이 무서워할 필요가….
“크르르릉…!”
…있구나.
어느새 구르던 몸을 일으키고, 털을 곤두세우며 나를 노려보는 늑대의 모습은, 정말 오줌을 지릴 정도로 무서웠다.
거, 겁먹으면 안 돼.
맹수는 겁먹은 걸 먼저 노린다고 했잖아. 단검을 뽑아 들고 늑대를 마주 보길 한참, 처음에는 어떻게 버틸 수 있었지만, 늑대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물러나거나 도망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눈을 사납게 번뜩이며 내 주변을 맴돌았다.
늑대를 피해 조금씩 움직이던 도중, 내가 나무뿌리에 발이 걸려 넘어지며 이것이 함정이었음을 깨달았을 때, 놈은 이미 나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그 뒤의 일은 솔직히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기억나는 것은 내 목을 거의 파고들 뻔했던 날카로운 이빨의 한기와 단검을 쥔 손에 전해진 소름 끼치는 감촉뿐이었다.
어쨌든 나는 늑대를 잡는 데 성공한 것이다.
환호를 지르고, 만세를 하며, 한참이나 삶의 기쁨을 만끽한 뒤, 나는 늑대의 사체를 가져가려다 관뒀다.
늑대와 싸우며 상처 입은 몸으로 이걸 짊어지고 가는 건 무리였다.
가죽이 조금 아깝기는 했지만, 어차피 단검으로 난도질해 놔서 쓰기도 힘들 정도였기에, 나는 늑대의 머리만 잘라 마을로 향했다.
이걸 보면 부모님은 뭐라고 할까.
분명 겁도 없다고 혼내겠지만 결국 자랑하고 다니실 거다.
다른 애들은 이제 감히 내 대장 자리를 넘보지 못하겠지.
그리고 소녀는….
소녀에게 했던 내기를 생각하고 날아갈 듯한 기분으로 마을에 돌아온 나는, 그러나 더 이상 기뻐할 수 없었다.
엄청난 폭음이 울려 퍼지는 골목길에는 어째서인지 어른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겁먹고 지켜보는 골목 안쪽에는 낯익고 낯선 몇 명의 사람이 있었다.
이상한 하얀 옷을 입은 사람과 검은 복면을 쓰고 있는 사람은 누군지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길에 쓰러져 있는 금발의 여인이 세레나 누나라는 건 안 눈에 알아봤다. 괜히 마을 제일의 미녀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무엇보다 날 놀라게 한 것은, 복면을 쓴 사람 뒤에 무릎을 꿇고 있는 반짝이는 머리와 예쁜 눈의 소녀였다.
어딘가 다치기라도 한 듯, 입에서 피를 흘리는 소녀를 보고 앞뒤 가릴 거 없이 곧바로 골목으로 뛰어 들어가려 했던, 나는 어른들의 제지를 받게 되었다.
어째서 나를 막느냐고, 왜 세레나 누나랑 소녀를 안 구하느냐고 따지는 내게 어른들은 설명해 주었다.
저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은 ‘신관’이라는 아주 훌륭한 사람이라는 것을. 세레나 누나는 사실 ‘기사’-검을 가지고 있으니까-라는 것을.
그리고 소녀가… 바로 ‘마족’이라는 것을.
촌장님의 말에 따르면 마족이란 요마보다 무섭고, 나쁜 존재라 가까이만 있어도 재앙을 부른다고 했다. 지금까지 마을에서 없어진 가축이나, 조니 할머니가 돌아가신 거나, 베르 아저씨가 다리가 부러지신 것도 모두 마족 때문이라고.
그래서 신관님이 마족을 잡는 중이니 우리가 함부로 방해하면 안 된다고. 그러면 나쁜 아이라고 말하는 어른들을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지?
가축을 잡아먹은 건 늑대였고, 조니 할머니는 무려 2년째 오늘내일하시며, 묏자리까지 미리 봐 두셨던 분이다. 베르 아저씨도 무거운 짐을 들다가, 실수로 넘어져 다치셨을 뿐이다.
소녀가 잘못한 건 전혀 없다.
뭔가 잘못되어 있다.
어른들은 무조건 신관님이 옳다 했지만 다친 소녀의 모습을 본 순간부터, 나는 그것이 잘못임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잘못된 것은 고쳐야만 했다.
어른들의 손을 뿌리치고 골목에 뛰어든 나는 신관님에게 말했다.
이건 잘못된 거라고, 소녀는 아무 잘못도 없다고.
다행히도 신관님은 물러나 주었다.
신관님이 뭔가 잘못 알고 계셨던 거겠지. 이제라도 오해가 풀려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일어난 소녀가 달려드는 걸 보고 가슴이 두근했던 나는, 소녀가 끌어안은 복면인을 보고 머리를 긁적거렸다.
응, 뭐, 어쩔 수 없지.
코드 아저씨는 같은 가족이니까.
이럴 땐 가족부터 챙기는 법이니까.
처음에는 몰랐지만, 나중에는 알 수밖에 없었다.
소녀를 위해 나서 싸워 줄 사람은, 그리고 소녀가 저렇게 안을 사람은, 코드 아저씨랑 세레나 누나뿐이었으니까.
세레나 누나를 안아 든 코드 아저씨랑 소녀가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나는 섭섭함을 느꼈지만 실망하진 않았다. 저런 게 소녀의 매력이니까. 응, 그렇지.
그리고 집으로 돌아간 후, 나는 종아리 50대라는 무서운 벌을 받고 그대로 앓아눕게 되었다.
그런데도 억울하지 않았던 건, 나를 끌어안고 엉엉 울던 어머니랑 자리에 누운 내 머리를 쓰다듬어 준 아버지의 따듯한 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다음 날, 그램 할아버지를 찾아간 나는 사과하고 몰래 가져갔던 물품을 돌려드렸지만, 할아버지는 허허 웃으며 사양하셨다.
“다 늙은 노인네한테 그런 게 무슨 소용 있겠냐? 그냥 네가 가지거라.”
그리고 처음으로 나를 칭찬해 주었다.
비록 바보 같은 짓이었지만 용감한 바보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던 그 말이 칭찬인지 아닌지는 헷갈리지만. 어쨌든 나는 좀 기쁘고, 좀 우쭐해졌다.
하지만 우연히 소녀를 만난 것에 비하면 그 기쁨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제는 고마웠어.”
우와아…!
소녀가, 그 얼음장 같던 소녀가 어색하게나마 해 준 감사의 말에 나는 그야말로 넋이 나갈 만큼 기뻤다.
종아리 50대가 아니라 500대를 맞아도 소녀의 감사를 들은 이상, 내게 후회란 없었다.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에?
소녀의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해 나는 잠시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지만, 잠시 후 그것이 소녀와 했던 내기의 대가를 말하는 것임을 깨닫고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워져 버렸다.
아니, 솔직히 생각해 둔 게 있긴 있다. 하지만 막상 그것을 말하려고 하니 숨이 턱 막히며 심장이 요동쳐 왔다. 늑대를 잡았을 때보다 더 무섭다.
차라리 늑대를 10마리 잡아 오는 게 더 나을 거 같을 정도로.
하지만 아무리 어려도 나는 알 수 있었다. 이 말을 할 수 있는 건 지금뿐이라는 걸. 마음을 가라앉히고, 호흡을 다듬길 잠시.
감았던 눈을 뜨고 소녀의 예쁜 얼굴을 보니 다시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렸지만, 숨통이 막히기 전에 가까스로 준비해 둔 말을 내뱉을 수 있었다.
좀 많이 더듬고, 작은 데다, 엉망이었지만 소녀는 틀림없이 내 말을 알아들었다.
왜냐면…
“안 돼.”
…곧장 대답이 튀어나왔으니까.
늑대에게 머리통을 깨물린 듯한 충격에 해롱거리던 나는 무심코 이유를 물었다.
그리고 후회했다.
“좋아하지 않으니까.”
…아아. 소녀의 차가운 목소리는 왜 이렇게 예쁘고 잔인할까.
이런저런 다른 이유도 없이 그야말로 칼로 딱 자르는 거부. 좋아하지 않는다는데, 여기서 더이상 어떤 이유가 필요할까.
내기를 지키라고 따지지는 않았다.
할아버지한테 그만큼 구차한 짓은 사내가 하는 법이 아니라고 배웠고,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물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사내로서의 자존심 때문일까.
“취향이 아니야.”
…그냥 묻지 말걸.
점차 쌓여만 가는 후회 속에서 나는 휘청거리는 몸을 부여잡으며,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그게 금단의 질문임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묻고야 만 것은 어리석은 오기.
“…있어.”
끝났구나.
나는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소녀와 얘기해 본 적은 적지만, 없는 소리를 하지는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 차가움 속의 순수함에 반했던 나니까.
그래도 재차 질문을 던진 것은, 복 터진 놈에 대한 질투 때문이랄까.
치졸하게 괴롭힌다든지 그런 짓을 할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내 자존심을 멋지게 뭉개 버린 놈이 누군지도 모르고 넘어가는 건, 사내가 할 짓이 아니다. 응, 그렇고말고.
“…얼음처럼 냉정하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 데다, 항상 무뚝뚝한 말밖에는 할 줄 모르는 사람. 하지만 마음은 따듯하고, 자상하고, 부드럽고, 믿음직스러운… 좋아할 수밖에 없는 사람.”
…우리 마을에 그런 애가 있었나?
이전에는 본 적 없는 따듯한 눈으로 누군가를 생각하는 소녀의 말에 무럭무럭 치솟는 질투심과 함께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나는, 이어진 소녀의 말에 눈을 깜빡거렸다.
“다른 부탁은 없어?”
없는데.
…아니, 잠깐. 이렇게 쌈박하게 차일 거라곤 생각 못 했단 말이야. 응?
그러니까 한심한 듯 보지 말아 줘. 제발!
소녀의 차가운 시선에 허둥지둥한 끝에 나는 결국 두 눈을 딱 감았다.
그리고 늑대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미는 심정으로 말했다.
“…바보.”
우우… 울고 싶어진다.
그래도 가능성이 아주 없는 건 아니잖아.
이상형은 이미 알고 있으니까 2, 3년 정도만 죽어라 노력하면!
나도 소녀가 반할 남자가 될 수 있다고!
내 말에 소녀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은 일러.”
차가운 건 여전하지만 평소의 비웃음은 보이지 않는 미소와 그 엉뚱한 대답에 넋을 잃고 있는 내게 소녀는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안녕. 잘 있어.”
…어라?
왠지 평소답지 않은 인사에 허둥지둥 손을 흔들어 대답하면서도, 나는 소녀의 뒷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뭘까. 이 느낌은?
무겁고, 칙칙하고, 우울한 느낌을 안고 집에 온 나는 밤새 잠들 수 없었다. 단순히 차인 슬픔 때문만이 아니라. 마지막에 손까지 흔들며 작별을 고하던 소녀의 모습이, 나를 심란하게 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다음 날 아침, 날이 밝자마자 아침도 거른 채, 나는 소녀의 집으로 향했다. 마을의 가장 바깥쪽에 있는 소녀의 집은 원래 낡고 오래된 흉가였다.
그런데 소녀가 이사 온 후, 완전 말끔한 새집으로 변했다.
할아버지는 실력이 뛰어나진 않아도, 꽤나 숙련된 목수의 솜씨라고 감탄했는데, 실력 있는 거랑 숙련된 게 뭐가 다른 지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그런데 그 말끔하게 바뀐 새집이 오늘따라 왠지 예전처럼 낡아 보였다.
…설마?
내가 아무리 문을 두드리고 열심히 불러 봐도 소녀는 나오지 않았다.
자상한 세레나 누나나 무뚝뚝한 코드 아저씨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침을 넘어 해가 머리 위를 지나가고, 저녁을 넘어 해가 지고, 달이 뜰 때까지도 닫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문 앞에 웅크려 밤을 새우고 다시 아침 해가 뜬 뒤에야, 나는 문의 손잡이를 잡을 수 있었다.
끼이익.
그 하루의 기다림이 무색하게도 문은 너무나 쉽게 열렸다.
아니, 사실 문이 잠겨 있지 않는다는 건, 처음에 문을 두드릴 때부터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차마 문을 열지 못했던 것은… 이미 예상했기 때문이다.
활짝 열린 문 너머로 보이는 너무나 고요하고 적막한 텅 빈 공간을.
…가 버린, 거구나.
소녀가 내게 한 작별 인사가 그야말로 작별을 고하는 것이었음을, 그것이 내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였음을….
나는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소녀가 이곳에 돌아올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소녀를 다시 만날 기회도 없을 것이다.
그 생각이 들자마자 나는 그냥 울어 버리고 말았다.
사나이는 함부로 울면 안 되지만.
아무리 사나이라도 울 수밖에 없는 때가 있음을, 나는 처음으로 알았다.
대체 얼마나 울었을까.
눈이 퉁퉁 붓고, 목이 쉬어서 더 이상 울 힘이 없어졌을 때쯤에서야, 나는 겨우 소녀의 집을 떠날 수 있었다.
…그래, 소녀가 마을을 찾아오지 않는다면 내가 소녀를 찾아가면 된다.
지금은 너무 어려서 무리더라도, 조금만 크면 마을을 떠나 소녀를 찾고, 소녀가 한눈에 반할 정도로, 멋진 사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결의를 굳혔다.
부모님이든, 할아버지든 그 누구도 나를 막지는 못할 것이다.
내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아무리 20년은 이르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정말 20년이나 기다려야 하는 건 아니겠지?
절대 빈말은 하지 않는 소녀의 성격을 지금만큼은 애써 외면한 채, 나는 힘차게 걸음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