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70)
69악당의 심란
나도 이제는 어언 석양을 바라보는 시기, 평생을 봉급 세고, 진급 쉽고, 위험하지만, 스릴이 넘치는 직장(악의 조직)에서 살아오며 수많은 영웅을 상대했고(대개는 도주로 끝났다) 숱한 고난을 넘어(조직은 망하고 몸만 건졌고) 수많은 악행을 시도해 온(거의 실패하긴 했어도) 악당 중의 악당으로 살아왔다.
하나 아무리 숙련된 악당이라도 세월의 힘은 어쩔 수 없었으니 쑤시는 삭신과 평화로운 세계 정세에 한계를 느끼고 은퇴를 결심한 것이 얼마 전.
저축이 힘든 직장살이를 하면서도 나름대로 알뜰살뜰 모아 둔 은퇴 자금으로 시골에 작은 집 한 채 마련해 노후를 즐긴다는 좀 소박하긴 해도, 봉급쟁이들에게는 꿈만 같은 은퇴 계획은 거의 이루어지는 듯싶었다. 최소한 며칠 동안은.
그런데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인고.
은퇴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웬 영웅 녀석이 찾아와서 동숙하게 된 덕분인지, 아니면 퇴직금이라도 건져 보겠답시고, 폐허에서 주워 온 계집애가 마족이었던 탓인지, 내 은퇴 생활은 쫑 나 버렸다.
나름 애착 있던 은거지를 떠난 지도 열흘, 거의 야반도주하는 심정으로 집을 팔아 치우고 최소한의 짐만을 챙겨 길을 나선 덕분에 내 상황은 거의 빈털터리나 다름없었다.
크으윽… 내 노후 계획이 이렇게 깨져 버리다니.
이게 다 저것들 때문이다!!
나는 눈에 띄지 않도록 힐끔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묵묵히 뒤를 쫓아오고 있는 녀석과 계집애를 보고 이를 빠득 갈았다.
금발에 푸른 눈의, 여신 같은 완전미를 품은 미녀.
은발에 자색안의, 인형 같은 조형미를 지닌 소녀.
노예 시장에 팔면 억대를 가뿐히 넘어설 딱 봐도 최고급 상품들이지만, 그 외관에 속아서는 안 된다.
하나는 검의 천재라 할 수 있는 대영웅, 하나는 대악마 아크넬의 힘을 지닌 마족이니까.
저것들을 노예 시장에 팔면? 노예 시장은커녕 배후의 조직까지 몰살될 것이다.
나? 당연히 가장 먼저 목이 댕강 날아가겠지.
내가 어쩌다 저런 것들을 만나 가지고는….
그렇게 통한의 눈물을 씹어 삼키며 묵묵히 걸음을 옮기던 나는 슬슬 삭신이 쑤셔 오는 것을 느끼고 발을 멈췄다.
“오늘은 여기서 야영을 한다.”
“네.”
“알았어요.”
어디까지나 내가 힘들어서가 아니라 야영할 때가 됐음을 강조하기 위해 무뚝뚝하게 말한 나는 짐을 내려놨다.
그리고 숲속으로 들어가 주변을 살피고 인기척이 없는 것을 확인한 직후, 그대로 땅 위에 주저앉았다.
“끄으응…”
어이구, 팔이야, 다리야.
내가 전치 12주의 중상을 입은 게 고작 열흘 전, 비록 성물의 힘으로 부상을 수습하기는 했지만 본래라면 당장 앓아누워도 부족한 상태다. 이 몸으로 짐까지 짊어진 채 온종일 걷자니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그러나 숙련된 악당이란 결코 자신의 나약함을 드러내지 않는 법!
녀석과 계집애가 혹시 날 짐으로 판단하고 버리거나 잡아먹으려 드는 사태를 막기 위해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고통을 삼켜야만 했다.
끄응, 일단 이 몸부터 완치해야 하는데….
나는 성물을 손에 감아쥐었다.
그리고 기도문을 외우며 한숨을 내쉬었다. 계집애를 쫓아온 것이 하필 빙설관 레닌이고, 그 괴물 새끼에게 암흑 교단에서의 신분을 들킨 게 문제였다.
아무리 본거지가 북방이라도 겨울 신전과 암흑 교단은 거대한 세력.
본격적인 추적이 시작되기 전에 도망쳐야 한다. 그리고 빨리 신분 세탁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빌어먹을.
그냥 그 괴물 새끼를 보자마자 맨발로 튀었어야 하는데….
하여튼 뭐 하나 되는 일이 없어요.
내심 신세 한탄하며 부상을 간단히 치유한 뒤 나는 마른 나뭇가지를 주워 야영지로 돌아갔다.
“잘 다녀오셨습니까?”
모닥불 자리에서부터 잠자리나 요리 도구까지 이미 모든 정리가 끝난 야영지 앞에서 마중 나온 녀석에게 고개를 끄덕인 나는 문뜩 계집애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리스는 어디 있나?”
이제 와서 도망이라도 쳤으면 골치다.
위기 상황을 넘기기 위해서였다고는 해도 레닌에게 그 계집애를 보호하기로 한 이상 계집애가 무슨 짓을 저지를 경우, 그건 모조리 내 책임이 돼 버리니까.
“…잠시, 물을 뜨러 갔습니다.”
흐음, 하기야 계집애가 아무리 멍청해도, 이 한겨울에 짐까지 두고 도망치는 바보짓을 하진 않았겠지.
나는 나뭇가지를 쌓고 불을 붙였다. 그리고 활활 타오른 모닥불 앞에 앉아, 불을 쑤시는 척하며 마음껏 그 온기를 쬈다.
후우… 이제야 좀 살 거 같네.
얼었던 몸이 녹아드는 기분에 잠겨 있던 나는, 그러나 금방 그 아늑함에 깨어나야만 했다.
“한 가지,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젠장, 하여튼 쉴 틈을 안 줘요.
녀석에 대한 분노와 짜증을 애써 집어삼키며,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원수 같은 영웅이라고는 해도 지금의 내게 녀석은 최고의 보험이자 호위. 여기서 섣불리 감정을 드러내는 건, 내 명을 재촉하는 짓밖에는 안 되니까.
“아리스는… 어떻게 만나셨습니까?”
“로드 오브 킹덤의 폐허 속에 묻혀 있던 것을 구해 냈다.”
특별히 어려운 질문은 아니었던 만큼, 나는 즉각 대답을 내놨다.
그리고 녀석의 의도를 알려고 머리를 굴렸다. 그래, 놈 또한 신의 축복을 받은 영웅. 마족에 대한 거리낌이 있는 게 당연하다.
다만 함께 지낸 정이 있기에, 차마 계집애를 버리지 못하는 것뿐일 터.
그건 안 되지. 암, 안 되고말고.
“마족이란 불쌍한 존재다.”
“불쌍…하단 말씀입니까?”
녀석의 얼굴에 희미하게 스쳐 지나가는 당혹감. 그렇게 허를 찔려 빈틈을 드러낸 녀석에게 나는 거침없이 말을 이어 간다.
“마족이 대륙에 나타난 것은 기껏해야 수십 년 전. 그들은 타고난 강대한 마력과 흡혈의 특성 때문에 탄생하면서부터 많은 배척과 시련을 겪어야 했다.”
“그들은… 악마의 피를 이은 마의 일족이었으니까요.”
“그래. 그렇기에 그들은 어디서도 머물 수 없었고, 어디로도 도피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결국 이십여 명에 지나지 않는 숫자로 전 세계를 상대로 싸워 나갈 수밖에 없었지. 다만 자신들이 살아갈 곳을 만들기 위해.”
“로드 오브 킹덤 말씀이군요.”
“하지만 그들은 실패하고, 멸망했다. 오직 홀로 살아남게 된 그 아이에게 있어, 가족이란 마지막 희망이고 안식처인 셈이다.”
“…….”
녀석은 더 이상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고, 나 또한 굳이 쓸데없는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여러 감정이 얽혀 있는 녀석의 얼굴만 봐도 이미 흔들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으니까.
사실은 뻥, 새까만 거짓말, 완전 사기지만, 내가 어떻게 그런 걸 다 알고 있겠냐?
그냥 여기저기서 들은 헛소문이지.
그걸 최대한 불쌍하게 짜 맞춰 늘어놨을 뿐.
녀석이 고민에 잠긴 모습을 바라보며 내심 음험한 흉소를 흘리던 나는, 다시 불의 온기에 몸을 맡겼다.
몸에 박혀 있던 한기가 녹아내리며 따스한 온기가 상처 입은 피륙과 뼈마디를 달래는 감각 속에, 나는 평온에 잠겨 들었다.
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던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 하늘에는 이미 석양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타닥!
나는 주변을 힐끔 돌아봤다.
그리고 약간 불길이 사그라진 모닥불 앞에서 수프를 끓이는 녀석의 모습에 내심 혀를 찼다.
쯧쯧. 저러다간 불이 살기는커녕 오히려 꺼지겠다.
나는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녀석이 모닥불을 쑤시던 나뭇가지를 쥐고, 불을 살려 주었다.
불길을 너무 오래 쫴서 그런지 약간 얼굴이 붉어진 녀석에게 나는 나직이 물었다.
“아리스는 아직 안 왔나?”
“네. 아직 안 왔습니다.”
계집애가 걱정되는지 약간 어두워진 녀석의 얼굴, 나는 드러나지 않도록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시냇가라고 해 봤자 여기서 10분 거리도 안 된다. 이미 지나온 곳이니 길을 헤맬 이유도 없다. 그런데, 아직도 안 돌아왔다면 둘 중 하나다. 그대로 줄행랑을 쳤거나, 엄청난 농땡이를 피우고 있거나.
이 계집애, 구해 주고 재워 주고 먹여 준 은혜도 잊고 감히 농땡이를 펴? 내 이걸 그냥…!
나는 고민할 필요도 없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디 가십니까?”
“아리스를 데려오마.”
“그런 일이라면, 제가….”
“아니, 괜찮다.”
녀석에게 맡겨 놓으면 말로 잘 타일러 데려올 터, 농땡이 피운 계집애를 그렇게 다루면 안 되지!
이번에야말로 숙련된 악당의 무서움을 보여 주고 말겠다는 굳은 결심 아래 나는 녀석을 뿌리치고 시냇가로 향했다.
그리고 잠시 후, 물끄러미 냇물을 보는 계집애를 발견했다. 척 봐도 농땡이 피우는 게 빤한 광경.
하지만, 나는 서두르지 않았다. 보다 확실한 증거 현장을 잡기 위해, 나무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낀 채 계집애가 무슨 농땡이를 피우고 있는지 지켜보았다.
“바보.”
…얼씨구? 자알 논다.
냇물을 향해 툭 하고 혼잣말을 내뱉는 계집애의 헛짓거리에 어처구니없어하길 잠시, 아무래도 더 건질 게 없으리란 판단한 나는, 또 뭐라고 중얼거리는 계집에게 말을 건넸다.
“뭘 하는 거냐?”
벌떡―!
뭐, 뭐야? 깜짝 놀랐잖아?
갑자기 튕기듯 몸을 일으킨 계집애, 그 돌발 행동에 놀란 나는 급히 표정을 관리했다. 다행히 내가 무뚝뚝한 표정을 복구할 때까지 가만히 앞만을 보고 있던 계집애는 한참 뒤에야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근데, 이 계집애 왜 이래?
싸구려 목각 인형이라도 된 것처럼, 뻣뻣한 움직임에 돌처럼 굳어 있는 몸, 거기에 희다 못해 밀랍처럼 창백한 안색까지. 농땡이 치다 걸린 것치고는 심각한 모습에 나는 계집애를 다그치기 전에 머리를 굴렸다.
대략 3초 후, 그럴싸한 추측을 떠올린 나는 나지막이 말문을 열었다.
“몸은 괜찮나?”
“괜찮아…요.”
역시, 몸 상태가 안 좋아서 그런 거였군, 평소보다 약간 늘어진 대답과 살짝 숙인 고개에 나는 내심 혀를 찼다. 빙설관 레닌은 지상 최강의 괴물 새끼, 놈과 싸우며 흑마법을 사용했으니, 몸이 정상이면 오히려 이상하다. 내 몸을 치료할 때마다 핑계 삼아 계집애한테도 기도를 해 주고 있기는 했지만, 원래는 몇 년은 요양이 필요한 상태다. 그런 몸으로 무리하게 여행을 하고 있으니 약해빠진 몸이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렇게 잠시 관찰한 끝에 나는 계집애의 시선이 발끝에 고정돼 있음을 눈치챘다.
“앉아 봐라.”
“…으, 응?”
계집애가 냇가에 있는 바위 위에 걸터앉자, 나는 주저 없이 그 앞에 앉아 계집애의 신발을 벗겨냈다.
“뭐, 뭐 하는 거야?!”
“가만있어라.”
쯧, 시끄럽게 웬 소리를 지르고 난리야, 난리가.
나는 가벼운 윽박지름으로 말문을 막았다. 그리고 계집애의 발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왜 그래…요?”
고생 한번 안 하고 자란 계집애답게 부드러운 발을 살펴본 나는 숨기듯 다리를 움츠리던 계집애의 발목을 잡아 들었다.
“물집이 생겼군.”
“…아….”
흥, 내 이럴 줄 알았지. 예전에도 그랬지만, 정말 자존심이 센 계집애다. 발이 이렇게 될 때까지 아프다는 말도 않다니. 솔직히 나로서는 짜증 나는 일이다.
이 여행은 하루 이틀로 끝날 게 아니다. 최소 수십 일에서 몇 달이 넘는 도피행이다. 그런데 무리하다가 쓰러지면 대책이 없다. 심지어 이건 물집만 잡힌 수준이 아니다. 근육과 혈관까지 똘똘 뭉친 것이, 이대로 며칠만 지나면 그야말로 발병 날 지경이었다.
“…안 그래도 돼.”
시끄러, 이 계집애야. 나는 뭐 좋아서 이러는 줄 아냐?
계집애의 거부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나는 성물을 꺼내 가느다란 발목에 감았다. 그리고 성호를 그으며 기도문을 암송했다.
“밤은 만물 만생에 평등이 전해지나니, 죄로써 상처 입고 악으로써 피 흘리는 이들에게도 고통을 씻고 고난을 이겨 낼 휴식이 주어짐이라.”
은은한 성력이 자그마한 발에 스며들며 물집이 아무는 것을 보며 나는 내심 혀를 찼다.
제대로 된 신관이라면 모를까, 성물의 힘만으로는 결국 이 정도가 한계다. 이대로라면, 몇 시간은 기도문만 외워야 할 것이다.
쩝, 어쩔 수 없군, 나는 계집애의 발을 가볍게 주물렀다.
숙련된 악당에게 능숙한 아부는 필수인 법, 그 일환으로 익혀 둔 마사지 기술을 고작 이런 계집애한테 쓰는 건 영 탐탁지 않지만, 몇 시간이나 기도문을 외울 수야 없는 노릇이다.
“아…!”
근육이 풀리며 통증을 느꼈는지 가볍게 신음을 흘리는 계집애를 무시하며 나는 마사지에 집중했다.
‘흑야의 축복’을 비롯한 온갖 비전을 바탕으로 내가 독자적으로 완성한 이 마사지 기술은 뭉친 근육이나 막힌 혈관을 풀어 주는 효과가 있다. 대신 편안함이나 아늑함과는 거리가 먼 만큼, 정작 아부에는 사용하기 힘든 기술이지만…. 뭐, 그러니 고작해야 삼류인 거지.
그렇게 기도와 마사지를 병행한 끝에 치료를 끝낸 나는 발목에 감아 둔 성물을 풀었다. 그리고 신발까지 신겨 주는 친절을 베푼 뒤, 슬쩍 계집애를 올려다보았다. 억지로 아픈 마사지를 받은 게 화가 났는지, 아니면 도움을 받은 게 자존심이 상했는지 고개를 들어 시선을 피하는 계집애를 보며 내심 코웃음 친다.
행. 네까짓 게 화가 났으면 어쩌려고?
계집애가 성을 내듯 곧장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 내 비웃음은 절정에 달했다.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휘청거리며 앞으로 쓰러지려는 계집애, 나는 그 몸을 가볍게 받아 주었다. 그리고 조소를 애써 삼키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무리할 거 없다.”
기껏 치료해 놨는데 여기서 나자빠져 상처라도 입어서 여정에 차질이 생기면 어쩌라고, 응? 그러다 암흑 교단에 덜미라도 잡히면 책임질 거냐?
“…무리하는 거 아니니까… 비켜.”
얼씨구? 꼴에 자존심은 있다 이거냐?
계집애는 차가운 말과 함께 나를 밀어냈다. 그리고 겨우겨우 몇 걸음을 옮긴 끝에 결국 시냇가 앞에 주저앉았다.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뭉쳤던 근육과 혈관을 풀어 버렸으니, 다리에 곧장 힘이 들어갈 리가 없지. 적어도 한두 시간은 꼼짝없이 앉아 있어야 할 터. 이대로 계집애가 꼴값 떠는 걸 비웃고 싶지만, 그러면 수프가 졸다 못해 눌어붙을 것이다.
끄응, 하여튼 짐덩이라니까. 나는 짜증과 귀찮음을 억눌렀다. 그리고 앞으로 몇 걸음을 옮겨 뒤로 돌아앉았다.
“해가 지고 있다.”
“…으, 응?”
응은 뭐가 응이냐?
밥 먹을 시간이라는 거지.
“업혀라.”
“업히라고요?”
“저녁 시간에 늦는 것보다는 이쪽이 낫다.”
일일이 이유를 설명해 주자니 정말 귀찮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주제에 마족이랍시고, 쓸데없는 자존심만 높은 이 계집애는 이렇게 안 하면 안 업힐 테니까.
하지만 이 계집애야. 네 자존심과 따듯한 저녁 식사, 둘 중 어느 게 더 중요한지는 명백하지 않냐? 응? 그러니까 제발 작작 하고 빨리 좀 업혀라. 자존심 때문에 업히지 않고 머뭇거리는 계집애를, 나는 차가운 말로 재촉했다.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셈이냐.”
“…….”
그제야 겨우 등에 업힌 계집애를 받쳐 든 채 끙차 일어난 나는 야영지를 향해 걸어갔다.
허리가 약간 들쑤시기는 하지만, 워낙 작고 가벼운 계집애다 보니 별로 부담은 되지 않았다.
짐보다도 가벼울 정도면 할 말 다한 셈이지.
쯧, 아무래도 살 좀 찌워야겠군. 이래서야 일이나 제대로 할 수 있나. 목과 손을 통해 느껴지는 가는 팔다리와 가벼운 몸무게에 내심 혀를 차며 나는 그렇게 저녁 식사를 향해 걸음을 옮겨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