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71)
70마왕의 심란
나의 이름은 아리트리스 D. S.
멀지 않은 과거, ‘마왕’이라 불리던 이였다.
하지만 ‘로드 오브 킹덤’과 함께 모든 것을 잃고 죽어 가던 나를 구해 준 것이 저 무뚝뚝한 사내, 사라진 ‘프리 나이츠’의 마지막 수장이자 북방의 사교 ‘암흑 교단’의 전투 사제 코드 렐 스핀이었다.
그는 나를 가족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인간으로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지상 최강의 인간’과 대적하면서까지, 나를 지켜 주었다. 하지만 내가 마족이라는 정체가 밝혀진 덕분에 우리는 마을을 도망치듯 떠날 수밖에 없었다.
…벌써, 열흘이구나.
날짜를 헤아려 본 나는 살짝 뒤를 돌아보았다. 열흘 전 떠난 마을이 새삼 보일 리가 없다.
그런데도 나는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그 마을에서 보냈던 평화로운 나날을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것처럼….
“오늘은 여기서 야영을 한다.”
“네.”
“알았어요.”
나와 세레나는 길가의 공터에서 짐을 풀었다. 모포를 깔고 필요한 것만 딱딱 꺼내 두는 등, 처음 며칠은 익숙하지 않아 애를 먹었지만, 이제는 세레나랑 엇비슷하게 준비할 수 있었다.
응, 됐다.
내 잠자리를 준비한 뒤, 세레나가 요리 도구를 꺼내는 것을 보고 나는 사내가 내려놓은 짐을 들어 올렸다.
야영할 때, 사내는 곧장 장작을 구하러 간다. 그래서 이제까지는 세레나가 짐을 풀어 줬고.
하지만 오늘만큼은 내가 사내의 잠자리를 준비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왠지 기분이 들떠 온다. 내가 그렇게 막 사내의 짐을 풀려던 순간, 하나의 손이 그것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이 자리는 풍향 때문에 연기가 와서 안 좋아요. 아리스.”
“아….”
대체 어느새 짐 정리를 마친 걸까,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그의 가방을 옮겨 다른 자리에 짐을 풀기 시작한 금발 벽안의 여인, 세레나를 멍하니 보던 나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세레나. 그건, 내가….”
“아, 그러고 보니 오늘 저녁에는 물이 많이 필요할 거 같네요. 대신 좀 떠다 주시겠어요?”
“응.”
뭘까, 이 느낌은. 언제나처럼 아름다운 미소에 부드러운 음성. 그런데도 왠지 거부하기 힘든 세레나의 부탁에 나는 결국 냇가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사내의 짐을 세레나에게 맡겨 두고….
…기분 탓이겠지? 그래, 분명 여행에 적응이 안 돼서 그럴 것이다. 나는 가벼운 세수로 잡념을 씻어 냈다. 그리고 물통에 물을 채워 야영지로 돌아갔다. 물의 무게가 제법 묵직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는 마을에서도 해 봤기에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야영지에 도착한 순간 나는 그대로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두근―.
막 타오르기 시작한 작은 모닥불, 그 앞에 앉아 있는 사내와 얼굴을 마주 대고 있는 세레나의 모습이 나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한다.
뭘 하고 있는 거지?
살짝 내려 감긴 채 바르르 흔들리는 눈꺼풀과 긴장한 듯 묘한 기쁨으로 붉게 달아오른 얼굴, 그리고 살짝 벌려진 입술은 너무 매혹적이라,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세레나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그 아름다운 얼굴이 사내를 향해 점차 다가가는 모습에 그만 손이 풀려 버렸다.
탁―!
마법은 그렇게 깨져 버렸다. 그 순간 나는 도망치듯 몸을 돌려 달려갔다. 아니, 그냥 도망쳐 버렸다. 마음을 조여드는 강력한 충격에서, 생각을 뒤흔드는 복잡한 혼란에서, 그리고 살짝 뜬 눈꺼풀 사이로 나의 심장을 날카롭게 꿰뚫어 보던, 너무나 차갑고도 섬뜩한 푸른 눈동자로부터.
쉬지 않고 달려 시냇가에 도착한 뒤에야 겨우 멈춰 선 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봐서는 안 되는 것을 보아 버린 듯한, 잊고만 싶지만 절대 잊을 수 없는 그 광경이 계속해서 내 머릿속에서 메아리친다.
뭐였을까? 그 광경은….
왜였을까? 그 심정은….
누구일까? 그 여인은….
넋이 나간 채, 머릿속의 생각에 빠져 있기를 한참….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나는 고개를 도리질 쳤다. 침착하게, 흥분하지 말고, 생각하자. 그냥 좀 얼굴을 가까이 댔을 뿐이다. 단지 예상 못 한 모습에 놀랐을 뿐이고 왠지 그림자 때문에 낯설게 보였을 뿐이다.
응, 그래. 그런걸.
왜냐하면, 세레나는 우리… 가족…이니까.
“…….”
그제야 나는 잊고 있었던 의문을 기억해 냈다.
세레나는 대체 사내와 어떤 관계일까? 대륙에 명성이 자자한 영웅, 검의 명가 라바일가의 후예, 고금 이래 제일의 검의 천재. ‘하늘의 검’ 천검자 세레나 R. 라바일.
그녀에게 검과 가문을 버리고, 마을 처녀로 살아가게 만든 관계란 무엇일까?
그리고 가족이라는 것은, 부녀로서의 가족일까? 친척으로서의 가족일까? 아니면?
나는 더 이상 생각을 이어 갈 수 없었다.
세레나뿐만이 아니라, 나 자신까지 포함된 질문의 해답을 찾아 헤맬 용기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회피하듯 고개를 숙이자 맑은 시냇물에 무언가가 비쳐 보인다.
마음의 벽을 잃고 가면의 보호조차 잊어버린… 어두운 눈에 우울한 표정까지 하고 있는… 못생긴 계집애를 보며 나는 무심코 입을 열었다.
“…바보.”
스스로의 더없이 차가운 질책에 계집애의 얼굴이 더욱 서글퍼지는 것을 보며, 나는 몸을 감싸 쥐었다.
그렇다. 나는 그 사내의 가족이었다. 언제나 날 위해 싸워 준 그의 행동이, 언제나 날 똑바로 보아 준 그의 시선이, 언제나 날 진심으로 대해 준 그의 마음이, 그 무엇보다 분명한 증거.
하지만 따지고 보면 나는 그와는 피 한 방울 섞이지도 않고, 만난 지 채 몇 개월도 안 된 남, 거기다 악마의 피를 이은 마의 일족이다. 이런 나를 가족으로 받아 준 것만 해도 은혜, 그러니까 그 이상을 바라서는 안 된다는 건 안다. 그것은 단지 과욕일 뿐이라는 것도 안다.
그런데도 나는 그 사내에게… 아니, 그에게 가족 이상이 되고 싶다.
왜냐하면… 나는, 그를….
“뭘 하는 거냐?”
“……!”
심장이 멈출 뻔했다. 무심코 터져 나올 뻔한 비명을 삼키며 나는 용수철이 튕기듯 몸을 일으켰지만, 차마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 미칠 듯이 두근거리는 심장이, 불이 난 듯 후끈거리는 얼굴이, 그리고 당장 무너질 듯 힘이 빠져 버린 다리가, 지금 뒤를 돌아봐선 안 된다는 것을 알려 준다.
진정해. 진정해. 응? 놀랄 거 없잖아. 언제나 들어 온 목소리야. 항상 봐 온 얼굴이야.
이제 와서, 고작 속으로 중얼거린 생각을 들었을까 봐 긴장할 것 없어. 그걸 무심코 말해 버렸다면 몰라도…?!
진정하려다가 하마터면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던 나는 가까스로 정신 차렸다.
마음에 벽을 쌓고 얼굴에 가면을 쓴다. 이미 무너진 벽에 깨진 가면이라 해도.
십여 년 동안이나 날 지탱해 왔던 방패다. 길게까진 바라진 않는다.
그냥 잠시, 지금 이 순간만 버티면 되니까. 겨우 얼굴을 식힌 나는 다리에 힘을 줬다.
그래, 나는 세계의 반을 다스리고, 대지의 로스타와 적월의 육 기사를 꺾은 마왕이다.
고작 한 사내의 얼굴을 무서워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애써 일으킨 용기가 무색하게 뒤로 돌아서는 내 동작은 뻣뻣하여 무슨 통나무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시냇가의 앙상한 나무에 등을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있던 반백 머리의 사내는 차가운 눈으로 그런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두근―
그의 눈을 마주치는 순간, 애써 일으켰던 자신감은 덧없이 사그라졌다.
두근거리는 심장 하나 다스리지 못해 꽁꽁 굳어 있는 겁쟁이를 향해, 그는 나지막이 물어 왔다.
“몸은 괜찮나?”
“괜찮아요.”
나를 걱정해 주는 걸까? 마력 폭주와 흑마법의 후유증은 있다. 마력의 흐름이 불안정하고, 가끔 두통이 나니까. 하지만 그건 시간이 지나면 차차 나아질 것.
그나마도 그가 틈틈이 해 주는 기도 덕분에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
그 배려에 다시 빨개진 얼굴을 숨기기 위해 나는 살짝 고개를 숙이고 발끝만을 내려다보았다.
“앉아 봐라.”
“으, 응?”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해서 그를 올려다보자,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사내.
그 압박감에 나는 결국 큰 바위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다짜고짜 신발을 벗겨 오는 그의 행동에 숨을 들이켰다.
“뭐, 뭐 하는 거야?!”
“가만있어라.”
가, 가만있으라니…. 어떻게 가만있으라는 거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그 무뚝뚝한 음성에 저항할 수 없었다.
마치 최면에 걸린 것처럼, 혹은 목덜미가 붙잡힌 고양이처럼, 나는 붉어지려는 얼굴을 애써 진정시키며, 그가 신발을 벗기는 것을 잠자코 봐야만 했다. 하지만 마침내 맨발이 드러나고 그가 차가운 시선으로 내 발을 직시하자 나도 모르게 다리를 움츠리며 물음을 건넸다.
“…왜 그래…요?”
이게 내 목소리라니. 너무 쥐꼬리만 한 그 소리는. 부끄러워하는 계집애의 목소리 자체였다. 스스로의 한심함에 가면조차 잊은 내게는 천만다행스럽게도, 그는 내 얼굴을 올려다보지 않았다. 하지만 다짜고짜 발목을 잡아 오는 손길은 내게는 놀랍다 못해 위험천만한 것이었다. 자연스럽게 발목을 들어 올리는 그 손길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굳어 있는 내게 그는 무뚝뚝하게 말해 왔다.
“물집이 생겼군.”
“아….”
나는 그제야 그가 발을 살펴본 이유를 깨달았다. 하긴, 그는 로드 오브 킹덤에서 나를 데리고 길을 떠났을 때도 이렇게 발을 살펴 주었다. 그런데, 그 빤한 목적도 모르고 괜히 당황하다니. 나 자신의 멍청함에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발을 쓸어 오는 그의 손길은 내 심장을 두근거리게 한다.
“안 그래도 돼.”
이번만큼은 목소리에도 꽤 신경을 썼기에, 나는 차갑게 그의 배려를 거절할 수 있었다.
다만, 그것이 내 한계였다. 내가 애써 짜낸 말을 무시하듯 묵묵히 초승달 목걸이를 꺼내 들어 발목에 감아 오는 그의 행동을 빤히 보면서도 나는 한마디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오른쪽 발목에 목걸이를 감고, 그는 성호를 그으며 기도문을 암송했다.
“밤은 만물 만생에 평등이 전해지나니, 죄로써 상처 입고 악으로써 피 흘리는 이들에게도 고통을 씻고 고난을 이겨 낼 휴식이 주어짐이라.”
초승달 목걸이가 은은히 묵광을 발하며 발을 감싸 오는 따스한 온기에 나는 편안함을 느꼈다.
원래 성력은 마력과 상극, 그 때문에 아무리 뛰어난 신관이라도 마법사의 상처를 치유하는 건 쉽지 않다. 하물며 마족인 내게 성력이란 독이나 마찬가지. 그럼에도 그의 성력은 날 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까지 편안하게 해 주었지.
이것이 암흑 교단의 성력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가 특이한 것일까? 따듯한 온기 속에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그러나 결론을 내기도 전에, 평온함을 잃어버렸다.
“……!”
부드럽게 발을 문질러 오는 손길, 나는 그 갑작스러운 행동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차마 그만두라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의 집중을 깨트릴 수 없어서라는 건 변명, 그 손길을 거부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잠자코 그의 손에 발을 맡겼다.
하지만 잠시 후, 나는 그것이 엄청난 실수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목걸이의 온기와 비교도 안 될 만큼 따듯한…. 아니, 아예 불처럼 뜨거운 그 손이 맨발에 직접 닿아 오는 것만으로도 내 심장은 요동쳐 왔다.
뜨거워…. 하지만 그건 그야말로 시작에 불과했다.
부드럽게 쓰다듬고, 천천히 누르고, 주무르는, 그 손길은 너무 능숙하기 그지없어 보통 때라면 기분 좋게 잠겨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손길은 지나칠 정도로 능숙했다. 좀 편안해지거나, 기분이 좋은 정도를 넘어 위험할 정도로 좋을 만큼.
아파… 아니, 간지러워…?
처음에는 좀 아프다 싶던 감각, 점차 뭉쳐 있던 근육이 풀려 감에 따라 그것은 묘하게 기분 좋은 간지러움으로 변해, 내 몸속으로 파고 들어왔다. 먹이를 탐하는 뱀처럼 탐욕스럽고 은밀하게, 그런데도 결코 싫지만은 않은 그 감각이 발끝에서 종아리와 허벅지를 타고 올라와 부드러운 복부에 똬리를 틀고 심장까지 집어삼킨 순간, 나는 폭발해 버렸다.
“아…!”
이건, 무슨…?
터질 듯 두근거리는 심장의 박동과 함께 순식간에 머리끝에서 손끝, 발끝까지 퍼져 나간 열기가 짜릿한 전율을 불러일으킨다. 온몸이 눈과 귀가 된 것처럼 예민해지며 척추를 일직선으로 관통하는 열기에 무심코 신음을 토해 낸 입을 급히 틀어막는다.
너무나 생소하고, 너무나 강하고, 너무나 뜨겁고, 너무나 두렵고, 너무나 간지러운.
단지 ‘너무나’라고밖에 할 수 없는 이상한 감각. 그리고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그 감각을 이상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뜨겁게 달아오른 채 바르르 떨리는 몸과 스스로도 믿기 힘들 정도로 촉촉한 신음이 나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하나 그 이상한 감각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예민해진 발을 그의 손이 거세게 쓸어 옴에 맞춰 간지러운 감각과 뜨거운 열기, 그리고 오싹한 전율은 더욱 강력하게 내 몸을 관통해 왔다.
이 감각은… 대체 뭐지? 그 열기가, 그 감각이, 그 전율이 내게서 이성과 사고를 앗아 가 버린다. 마치 마구잡이로 짓밟혀 능욕당한 눈밭처럼, 엉망진창으로 하얗게 비워진 머리로 고개를 젖혀 터질 듯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고, 입술을 꽈악 다물어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삼킬 수 있었던 것은 거의 본능.
이상해….
거의 정지되다시피 한 사고가, 이 감각이 피를 삼킬 때와 비슷한, 그러나 전혀 다른 감각임을 깨달았을 때, 나를 지켜 주던 본능은 이미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아니, 한계에 도달했다는 말 정도로는 부족했다. 요동치는 심장에서 흘러나온 마력에 취해 단숨에 배신자로 돌아선 나의 본능은 이제 오히려 거센 파도가 되어 희미하게나마 남아있던 이성을 산산이 조각내며, 날 충동질하고 있었다.
아아…!
그것은 환희, 그가 날 만져 주고 있다. 그가 날 위해 주고 있다. 그가 날 탐하고 있다.
그의 온기가, 그의 손길이 직접 전해져 오는 기쁨이, 쾌감이 나의 등을 떠민다.
그를 만지고 싶고, 느끼고 싶다는 본능에 취해, 내가 마침내 신음을 토해 내려던 순간, 발을 매만지던 손이 멈추며 나를 파고들던 온기가 떠났다.
그가 발목에 감겨 있던 목걸이를 풀고 다시 신발을 신겨 줄 때까지….
이상한 감각에 취해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나는, 마침내 발 마사지가 끝난 것임을 깨달은 순간, 목이 부러져라 급격히 고개를 들어 올려야 했다. 그가 숙였던 고개를 들어 날 바라본 순간, 본능에 집어삼켜졌던 이성과 함께, 기억과 정신까지 온전히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나. 미쳤나 봐. 피를 마신 것도, 마력을 사용한 것도 아닌데도, 거의 흉안이 드러날 뻔했다.
아니, 아주 찰나 동안이나마 드러났다. 더구나 지금까지 흉안이 드러나더라도 최소한의 이성까지 상실한 적은 거의 없다. 하지만 좀 전의 나는 이성을 통제하기는커녕, 단지 본능에 휘둘리는….
한 마리의 짐승이 되어 있었다. 그 순간 느꼈던 감각이, 그 순간 했던 생각이, 그 순간 원했던 욕망이 하나하나 생생하게 기억나며 뺨과 귓불이 후끈후끈 달아올랐다.
마력 폭주나 흑마법의 후유증일까? 아니면 성력의 치료에 의한 뜻밖의 부작용일까?
어쨌든 중요한 건, 당장 날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굳이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 내 얼굴이 대체 어떤 꼴일지는.
사과보다 붉은 얼굴과 두근거리는 심장, 그리고 가늘게 떨림으로 손가락을 숨기기 위해 나는 곧장 바위에서 일어났고, 덕분에 그대로 넘어질 뻔했다.
뜨거운 열기와 전율에 한껏 희롱당한 몸에… 특히 그의 손이 직접 무참히 능욕당한 발에… 날 일으켜 세울 수 있는 힘 따위는, 단 한 점도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내가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마치 미리 준비하고 있던 것처럼, 나의 몸을 받쳐 준 그 덕분이었다.
“무리할 거 없다.”
두근―
날 받아 준 그가 귀 옆에서 속삭이듯 말한 무뚝뚝한 음성과 함께, 귓가로 스며들어 온 뜨거운 숨결에 나는 거의 미칠 것 같았다. 더욱 거세게 요동치는 심장이 목덜미까지 퍼져 나온 열기가 반사적으로 그의 목에 감기려는 팔이 모두 내 것이 아닌 듯만 싶다.
내가 내가 아니게 되는 듯만 싶다.
“무리하는 거 아니니까. 비켜.”
억지로 없는 힘을 짜내 그를 밀어낸다. 힘없이 무너지려는 다리를 가까스로 버텨서고,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던 나는, 그러나 결국 다섯 걸음도 옮기지 못하고 시냇가 앞에 주저앉고 말았다.
힘이, 안 들어가… 고작 그 약간의 동작만으로, 손 하나 까딱할 힘마저 모두 소진해 버렸다.
그렇게 몸 상태를 고스란히 드러낸 나의 시야에 비치는 것은 하나의 얼굴, 긴 은발 몇 가닥이 발그스레한 뺨에 붙어있고, 희던 피부는 도색한 듯 빨갛게 달아올라 있다.
살짝 벌려진 입술에서는 가쁜 숨이 새어 나오고 자주색 눈동자는 울 듯이 촉촉이 젖어 있다. 무엇보다 취한 듯 완전 무방비 상태인 주제에, 왠지 기쁜 듯 살짝 들떠 있으면서도, 뭔가를 갈구하는 듯한 그 표정은….
너무나, 색정적으로 보인다. 말도 안 돼. 그 낯선, 그리고 아름다운, 또 매혹적인, 그러나 요염한 소녀가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을 한참 뒤에야 깨달은 나는 숨을 잃었다.
인정할 수 없다.
납득할 수 없다.
이해할 수 없다.
용납할 수 없다.
하나 그 무엇보다 큰 충격은 이 얼굴을 그가 보았을지도 모른다는 것….
나, 어쩌지? 응? 어떡해?
거의 정신이 끊어질 듯한, 가히 공포라 해도 과언이 아닌 혼란 속에 나는 어떻게든 얼굴을 가라앉혀 보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얼음 가면을 만들어 쓰려고 해도 얼굴을 숨길 수는 없었다. 오히려 부끄러움과 두려움 때문에 가련함까지 더해진 그 소녀의 얼굴은 아예 눈 뜨고 봐 주지 못할 정도가 되어 있었다. 그런 스스로의 얼굴을 두고 허둥거릴 뿐.
그 무엇도 못 하고 굳어 있는 내게 한 줄기 음성이 들려온다.
“해가 지고 있다.”
“으, 응?”
대답과 함께 무심코 뒤를 돌아봐 버린 바보 같은 행동에 비명을 지를 뻔했던 나는 순간 눈을 크게 떴다. 내 바로 뒤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채, 그 넓은 등을 드러내고 있는 사내의 모습이 나를 숨죽이게 한다.
“업혀라.”
“업히라고요?”
“저녁 시간에 늦는 것보다는, 이쪽이 낫다.”
두근―
알고 있는 건가? 그 얼굴을 봐 버린 걸까? 나조차 모르던 나의 마음을 알아 버린 걸까?
비밀이 들켰을지도 모른다는 충격은, 의외로 크지 않았다.
다만, 홀린 듯 그 넓은 등을 바라보는 내게 그는 나지막이 말해 온다.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셈이냐?”
“… ”
마치 재촉하는 듯한 무뚝뚝한 음성, 절대로 배려하거나 도와주는 게 아니라는 듯 무뚝뚝하기만 한 그 태도가 오히려 따듯하게만 느껴지는 것은 어째서일까?
그래, 그는 아마 내 얼굴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내 생각을 알지 못할 것이다.
내 마음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이토록 무뚝뚝하게 날 대하지는 않을 테니까.
사실 그가 언제나 무뚝뚝했다는, 그런데도 이렇게 등을 대 주는 일은 처음이라는 진실은, 의식의 저편에서 외면한 채,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그의 등에 업혔다. 묵묵히 몸을 일으키며, 허벅지를 받쳐 드는 손길에 다시 심장이 요동쳐 온다. 그러나 전처럼 격렬한 요동이 아닌, 콩닥거리는 잔잔하고도 기분 좋은 울림 속에 나는 그의 등에 머리를 기댔다.
따듯한 등의 체온이, 그 너머로 전해져 오는 심장의 두근거림이, 단단히 허벅지를 받쳐 오는 손길이, 다시 얼굴을 달아오르게 하며, 심장이 좀 더 빠르게 콩닥거려 온다.
이대로는 그가 내 열기를 알게 될지도 모른다. 그가 내 심장 소리를 들을지도 모른다.
내 얼굴을 돌아볼지도 모른다. 내 마음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나는 그에게 기댄 머리를 치우기는커녕, 오히려 그의 등을 더욱 꼬옥 끌어안았다. 마음을 들키는 게 두려웠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혹시라도 모를 거부, 그 뒤에 있을지 모를 변화가 두려웠을 뿐, 사실은 이 마음을 그대로 전하고 싶었다. 굳이 지금이 아니라도 좋으니까. 언젠가는 내 마음을 전할 수 있기를 바랐다. 설령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조용히 그의 심장 소리와 나의 심장 소리가 만들어 내는 잔잔한 울림 속에서 나는 영원하고만 싶은 행복 속에 잠겨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