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72)
71영웅의 심란
그것은 10년 전 어리석던 내가 자존심만으로 살아가던 시절, 가문을 일으키고자 ‘데스 쉐도우’에 투신했을 때, 무모한 만행의 대가로 죽었어야 할 내게 비전의 검술을 아낌없이 전수해 주고 목숨까지 걸고 나를 구해 준 이가 있었다.
스승이자 은인이던 그의 도움 덕분에 나는 한 명의 검사로 거듭날 수 있었지만, 10년 전 그를 잃음으로써 나는 인간임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죽은 줄 알았던 그와 재회한 것은 운명, 다시 인간이 될 기회를 얻은 것은 기적. 그리고 사내로서의 그를 인식하며 여인으로서의 자신을 자각한 것은 행운이지만, 그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겨우 1년의 시간밖에 남지 않은 것은 더없는 불행이었다.
그것을 생각하며 입술을 살짝 깨물던 나는 앞장서서 걸어가던 그가 멈추자 잡념을 떨쳤다.
“오늘은 여기서 야영을 한다.”
“네.”
“알았어요.”
그가 짐만 두고 숲속에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마을을 떠난 이후로 벌써 열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민가조차 들르지 않은 만큼, 야영지가 정해지면 곧장 장작을 구하러 가는 그의 행동에는 익숙해져 있었다. 아니, 그렇지 않더라도 상관없었다.
그의 모든 행동에는 이유가 있었고 결국은 납득할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단 한 가지만을 제외하고.
짐을 풀고 자리를 깔던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무언가를 끙차 들어 올리는 은발 자안의 소녀. 인형처럼 귀엽게만 보이는 그녀는, 그러나 사실 평범한 소녀가 아니었다.
악마의 피를 이어받은 존재, ‘마족(魔族)’.
인간의 생피를 탐하는 사악한 본성과 무한에 가까운 마력을 타고났기에 과거 전 대륙을 혼란으로 물들였으나 이제는 멸망한 것으로만 알려진 저주받은 일족. 그 마지막 생존자가 지금 내 앞에 있는 은발 자안의 소녀였다.
왜?
나는 무심코 의문을 떠올렸다. 비록 가족으로서 함께 지냈다고는 해도, 그것은 소녀가 정체를 숨기고 있었을 때의 일, 마족임을 안 뒤에도 소녀를 퇴치하기는커녕 이렇게 마을을 떠나면서까지 소녀를 보호해야 하는 지금의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차마 이 상황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가 소녀를 구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어떤 기적을 일으켰으며, 무엇을 희생했는지를 잘 아는 만큼, 그 뜻을 저버릴 수는 없었으니까. 그 때문에 마음속의 어둠을 억지로 짓누르며 소녀의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그 자그마한 손에 들려진 짐을 확인한 순간 피가 싸늘해지는 느낌을 받고 몸을 일으켰다.
채 정리가 끝나지도 않은 요리 도구를 버려두고, 성큼성큼 걸어가 소녀에게 다가가 그의 짐을 빼앗듯 집어 든 것은 거의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그러나 부드럽게 웃으며 소녀에게 건넨 말은, 무의식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의식하지도 않고도 거짓말할 수 있을 정도로 나는 거짓에 능숙하지 않았으니까.
“이 자리는 풍향 때문에 연기가 와서 안 좋아요. 아리스.”
“아…. ”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는 소녀를 뒤로하고, 나는 자리를 옮겨서 짐을 풀기 시작했다.
“세레나. 그건, 내가….”
“아, 그러고 보니 오늘 저녁에는 물이 많이 필요할 거 같네요. 대신 좀 떠다 주시겠어요?”
“응.”
내게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결국 물통을 들고 냇가로 향해 걸어가는 조금 시무룩한 소녀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내심 속삭인다.
-사실, 그 자리는 그렇게 나쁜 곳은 아니에요.
-저녁 요리에 쓸 물은 이미 충분히 있답니다.
그런데도 소녀에게 거짓을 말한 이유는 하나, 소녀가 그의 자리를 준비하는 것을 나 스스로가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릇됐다.
잘못됐다.
치졸하다.
비겁하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다고.
내 마음속의 어둠이 속삭여 온다. 이것이 한낱 짐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단지 그의 것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내게는 그릇됨을 무시하고라도 나서야 할 만큼,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내가 야영 준비를 끝마쳤을 무렵, 숲속에서부터 한 줄기 익숙한 인기척이 다가왔다.
“잘 다녀오셨습니까?”
마른 나뭇가지를 든 그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주변을 훑었다 싶은 순간, 한 줄기 음성이 나의 마음을 두들겨 왔다.
“아리스는 어디 있나?”
더없이 무뚝뚝한 음성.
그러나 그 속에서 소녀에 대한 걱정을 느끼고, 나는 무언가가 비틀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 그에게 소녀는 가족, 소녀를 걱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도 그 당연한 일이 불합리하게만 느껴지는 것은 대체 어째서일까?
“잠시, 물을 뜨러 갔습니다.”
내 대답에 그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고 모닥불 자리에 나뭇가지를 내려놓았다.
그 짧은 대답을 내놓기 위해 내가 평정을 쥐어 짜내야 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평소처럼 무뚝뚝하게 불을 피우는 그. 그 모습을 지켜보며 망설이던 끝에 나는 조용히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한 가지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내 갑작스러운 말에도 그는 동요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이렇게 물어 올 것을 예상했다는 듯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보며, 나는 나지막이 질문을 꺼냈다.
“아리스는 어떻게 만나셨습니까?”
그는 어떻게 소녀를 만나게 된 것인지, 어째서 소녀를 한 가족으로 받아 주고, 무엇 때문에 소녀를 아끼는 것인지, 많은 의문이 담긴 나의 질문에, 그는 무뚝뚝하게 답해 주었다.
“‘로드 오브 킹덤’의 폐허 속에 묻혀 있던 것을 구해 냈다.”
로드 오브 킹덤(Lord of Kingdom).
한때나마 세계의 반을 정복했으나, 결국 마족의 파멸과 함께 멸망한 왕국. 그 폐허에 마족인 소녀가 묻혀 있었다고 하면, 그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뒤를 잇는 것은 더욱 깊은 의문, 그는 왜 로드 오브 킹덤의 폐허에 간 것일까?
그곳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을 텐데. 그리고 왜 로드 오브 킹덤의 생존자인 것이 분명한 소녀를 구해서, 거둬 주었던 것일까?
“마족이란 불쌍한 존재다.”
“불쌍, 하단 말씀입니까?”
나는 무심코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저주받은 존재인 마족을 동정한다는 것은 나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으니까.
“마족이 대륙에 나타난 것은 기껏해야 수십 년 전, 그들은 타고난 강대한 마력과 흡혈의 특성 때문에 탄생하면서부터 많은 배척과 시련을 겪어야 했다.”
“그들은 악마의 피를 이은 마의 일족이었으니까요.”
“그래. 그렇기에 그들은 어디서도 머물 수 없었고, 어디로도 도피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결국 이십여 명에 지나지 않는 숫자로 전 세계를 상대로 싸워 나갈 수밖에 없었지. 다만 자신들이 살아갈 곳을 만들기 위해.”
“로드 오브 킹덤 말씀이군요.”
“하지만 그들은 실패했다. 악마가 신에게 봉인된 것처럼, 결국 신의 뜻과 힘에 의해 멸망하고 오로지 홀로 남게 된 그 아이에게 있어, 가족이란 마지막 희망이고 안식처인 셈이다.”
“…….”
그는 그걸 끝으로 침묵을 지켰고, 나 또한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당연하다고만 믿어 왔던 진실, 그것을 철저하게 부정하는 그의 말이 나의 머리와 마음을 뒤흔들어 놓고 있었다.
어떤 죄를 벌하면서도 거리낌을 느낀 적 없고, 어떤 악을 응징하면서도 주저하지 않았다.
죄악은 처벌하는 게 ‘정의’였으니까. 그 때문에 죄악의 존재인 마족을 멸살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 믿어 왔지만, 그는 그 사실을 부정했다. 그것은 분명 옳을 것이다. 그는 내게 잘못된 것을 가르쳐 준 적 없으니까.
그러나 납득할 수 없었다. 설사 그것이 진실이고 그릇된 것은 내 쪽이라 할지라도, 그의 곁의 마를 나는 용납할 수 없었으니까.
마음속의 어둠이 더욱더 부풀어 오르는 가운데, 상념에서 벗어난 나는 문뜩 그를 바라보았다. 모닥불 앞에 앉아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그, 그 숨소리는 너무나 평온하여 지금 그의 의식이 가라앉아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바보 같으니. 부상까지 입은 채, 레닌과 격전을 치르고, 열흘 내내 야영과 노숙만으로 버텨 왔으니. 그의 몸이 정상일 리가 만무한바 정신적으로나 체력적으로나 이미 한계일 것이다.
그런데도 전혀 힘든 기색을 드러내지 않은 채 소녀를 보살피고 나를 이끌어 온 그의 노력을 어째서 몰랐던 걸까?
잠든 그가 깨지 않도록 조용히 수프를 준비하며, 나는 계속 깊은 상념 속에 잠겨 들었다. 그에게 남은 시간은 1년뿐, 어떤 병인지는 몰라도 체력과 건강에 따라 그 수명이 늘어날 수도, 줄어들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건강을 살피는 건 불가능하다.
신전에서 요양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신전과 세인들의 눈을 피해 다닌다면. 건강을 챙겨 봐야 얼마나 챙길 수 있을까? 어떻게든 수를 내야 한다. 어떻게든….
두근.
서서히 끓기 시작한 수프를 휘저으며 나는 힐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언제나와 똑같이 무뚝뚝한 표정, 하지만 항상 봐 왔던 얼굴이기에, 그 속에서 잔잔한 평온함을 엿본 나는 일순 기묘한 두근거림을 느꼈다.
평소의 격렬하고, 따듯한 울림이 아니라, 은밀하고, 뜨거우며, 깊은 울림과 함께 검은 어둠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끼며 나는 그의 앞에 마주 앉았다.
전보다 흰머리가 부쩍 늘어났지만, 주름이 거의 보이지 않는 피부와 냉정하고도 강인한 인상 때문에 노쇠하기보다는 깊은 경륜만이 느껴지는, 신기한 얼굴을 마주 보다가 눈을 감으니, 오히려 더욱 선명하게 떠오르는 얼굴, 예민한 감각을 통해 느껴지는 한 줄기 숨결이, 따듯한 온기가, 부드러운 체향이 점차 이성을 흐트러트리는 가운데 내면에서 일어난 어두운 충동에 따라 나는 서서히 그와의 거리를 좁혀 갔다.
탕―!
“……!”
한 줄기 소음에 이성이 퍼뜩 돌아오며 번쩍 뜬 눈에 비치는 것은 숲 저편으로 도망치듯 사라져 가는 은빛 잔영.
아아. 보았구나.
스스로도 이상할 정도로 침착하게 몸을 일으켜 나는 은빛 바람이 사라진 자리로 걸어갔다.
그리고 흥건히 젖은 땅에서 텅 빈 물통을 집어 들었다. 소녀는 과연 무엇을 어디까지 봤을까? 왜 물통마저 던져둔 채, 도망쳐 버린 걸까? 몰래 저지른 짓을 들켰다는 부끄러움은 없다. 아니, 오히려 음습한 기쁨과 짜릿한 쾌감이 마음속의 어둠과 어우러져 희열을 이룬다.
그래, 그의 곁을 지키는 것은 나.
그의 마음을 받는 것도 나.
그와 같이 사는 것도 나.
그의 죽음을 지켜보는 것도 나.
신이나, 악마나, 용에게도 줄 수 없는 나의 권리.
그것을 저런 마족 계집애에게 줄 수는 없다.
묘하게 들뜬 기분으로 물통을 정리하고, 수프에 나머지 재료를 넣은 나의 시야에 아직 깊이 잠들어 있는 그의 얼굴이 비쳤다.
만약 그때 소녀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내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면, 혹은 그가 정신을 차렸다면, 과연 어떻게 됐을까?
뭐라고 할 수 없는 묘한 기분에 잠겨 있길 잠시, 나는 급히 모닥불로 시선을 돌렸다.
타닥!
움켜쥔 나뭇가지로 모닥불을 들쑤시자, 오히려 불이 꺼질 듯 약해졌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라도 다른 짓을 하지 않으면 깨어난 그의 시선을 받아 낼 자신이 없었으니까.
어둠의 산의 주인 쿠르타나 남부밀림의 12식인귀, 25눈을 뿌리는 자를 상대할 때의 용기나 좀 전의 무모함은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겁쟁이가 되어 모닥불을 들쑤시던 나는 서서히 다가오는 그의 기척에 숨을 죽였다.
그리고 그가 나뭇가지를 든 내 손을 겹쳐 쥐고서 모닥불을 헤집음에 따라 타오르던 나의 심장은 그의 한마디 말에 그대로 멈춰 버렸다.
“아리스는 아직 안 왔나?”
“네. 아직 안 왔습니다.”
스스로의 차갑게 식는 목소리를 딱딱하게 굳는 얼굴을 통제할 수가 없다. 나보다 마족 계집애를 염려하는 그의 행동이 마음속의 어둠을 들끓게 한다. 내 대답에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어딘가로 걸음을 옮겼다.
“어디 가십니까?”
몰라서 물은 것이 아니다. 다만 부정해 주기를 바랐을 뿐이지만, 그 바람은 너무나도 헛되이 깨져 버린다.
“아리스를 데려오마.”
순간적으로 울컥 치솟는 분노를 삼키며, 나는 애써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그런 일이라면, 제가.”
“아니, 괜찮다.”
나지막하지만 분명한 거부에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소녀를 데려가기 위해 그가 떠난 텅 빈 곳만이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이었다.
머리가 어지럽다.
심장이 욱신거린다.
어둠이 부풀어 오른다.
왜? 왜. 대체 왜?
진정 소중한 것은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일까?
처음 검을 쥐었을 때, 검을 친구고 가족으로 여겼지만, 내 곁에는 누구 한 명의 친구도 없었다. 검술을 얻고자 했을 때, 삼대 검류를 통합하고 검자의 위명을 얻었지만, 은인이던 그와 함께 인간성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인간성을 되찾은 지금, 인간이자 여인으로서의 마음을 얻었지만, 오히려 그의 마음은 더욱 멀어져만 갔다. 차라리 인간성을 되찾지 못했다면, 여인임을 몰랐다면 이런 괴로움은 없었을 텐데.
그런데도 그것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그 괴로움조차 그에게 받은 선물이기에, 점차 깊어지는 갈증 속에 나는 검을 뽑아 들었다.
스릉―
날은 예리하건만, 중간이 부러진 반신의 검. 내 마음과 같은 그 모습이 왠지 모를 서글픔을 느끼게 한다. 검이 부러졌기에 내 마음도 부러진 것일까? 아니면 내가 그릇됐기에 검이 부러진 것일까? 과거 그에게 물려받은 검을 도로 집어넣으며, 나는 조용히 숲 저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나는, 대체 어떻게 해야만 할까… ?
짙은 어둠 속을 헤매는 마음을 애써 외면한 채, 나는 그렇게 곤히 잠든 소녀를 등에 업고 돌아오는 그를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