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73)
72마왕의 독백
원래 나는 튼튼한 체질이 아니었다. 아니, 굳이 말하자면 약간 나약한 편이었다. 강대한 마력과 많은 부하들이 있었던 만큼, 직접 움직일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병약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고 마을에서 일을 하면서 체력도 붙었다. 그 때문에 강행군에도 약간의 물집만 생겼을 뿐 그 외에 특별히 아픈 곳은 없었다.
문제는 강행군보다 훨씬 치명적인 타격까지 버텨 낼 만큼 튼튼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몸은 괜찮나?”
“응….”
모포를 두르고, 모닥불 앞에 앉은 채, 나는 푹 고개를 숙였다. 우리에게 하루가 넘도록 이런 곳에서 시간을 보낼 여유 따위가 없다는 건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나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게 된 현실이 나를 면목 없게 하고 있었다.
고작, 감기 때문에….
이리저리 덧붙일 말은 많다. 하지만 아무리 날이 추운 겨울철이고, 열흘간의 여행으로 체력이 떨어진 상태라도 마왕이라 불리던 나 스스로의 자존심이 그런 구차한 변명을 용납할 수 없다.
그래도 굳이 한마디 하자면… 긴장이 풀렸기 때문이랄까.
어제의 그게, 그러니까… 너무 기분이 좋고 나른해서… 그래서… 그만….
그 감각을 떠올림과 동시에 화끈한 열기가 목덜미부터 귓불까지 치솟자, 나는 황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니까! 어쨌든 이게 전부 코드 때문이다. 나는 부끄러움과 자책감 등등을 똘똘 뭉쳐 시선을 통해 그에게 쏘아 보내다가 갑자기 몸을 일으키는 그를 보고, 깜짝 놀라 흠칫 고개를 숙였다.
“어디 가십니까?”
“잠시 바람을 쐬고 오겠다.”
“이미 해가 저물었습니다.”
“늦진 않을 거다.”
세레나의 말을 무뚝뚝하게 받으며, 숲속으로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내심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 이후, 도저히 그를 마주 볼 수가 없어졌다. 그 차가운 눈을 보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그 무뚝뚝한 음성만 들어도 얼굴이 뜨거워지는데, 어떻게 그를 마주 볼 수 있을까?
그가 사라진 것에 안도감마저 느끼던 나는 이마를 만져 오는 서늘한 손길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열은 많이 가라앉았군요.”
“응.”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세레나의 말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은 감기가 나아가서 그런 게 아니라, 그가 떠난 덕분에 열이 가라앉았을 뿐이라고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감기가 걸린 날 위해, 종일 곁에서 간호를 해 준 세레나에게는 고맙다 못해 미안할 지경이었다.
특히 어제 있었던 그 일을 생각하면, 하면 안 될 일을 한 듯한 죄책감마저 느껴진다.
또한 그 일이 있기 전, 우연히 엿보게 된 그와 세레나의 모습이 쉽사리 그녀에게 말을 걸지 못하게 한다.
어떡해야 할까? 고민에 잠겨 있길 잠시, 마음을 굳힌 나는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세레나. 내가 마족이라는 거… 알고 있었어?”
“아니요. 그때까지는 모르고 있었어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녀를 지켜보길 잠시, 세레나가 모닥불을 보며 담담히 돌려 둔 대답에 나는 약간의 용기를 얻고, 대화를 이어 갔다.
“마족이 사람의 피를 마시는 존재라는 건 알지?”
“예.”
“그를 따라온 이후 사람의 피에 손을 댄 적은 없어. 하지만 그 전까지는 많은 피를 마셨고, 숱한 피를 흘렸어.”
그래,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과거, 아무리 시간이 지난다 해도, 아무리 잊으려 한다고 해도 내가 저지른 죄는 사라지지 않는다. 비록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할지라도 ‘로드 오브 킹덤’의 군주로서, 마족을 이끌던 내가 그것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과거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내 죄를 변명할 생각은 없어. 용서받을 수 있을 거라고도 생각 안 해.”
힘없는 약자를 상대로 횡포를 부린 적도, 남들에게 그런 짓을 용납한 적도 없다. 그러나 스스로가 정의임을 믿으며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대의를 품고, 나와 싸워 온 이들에게 자비를 베푼 적도 없다.
아홉 마술사 중 대지의 로스타의 숨통을 끊고 광검자를 상대로도 살아남았던 적월의 육 기사를 참살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영웅이 내 손에 죽어갔다. 후회치 않는다면 거짓, 괴롭지 않았다면 기만, 내가 짊어진 죄업을 되돌릴 수 있다면, 모든 마족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면 이까짓 목숨은 얼마든지 버릴 수 있다. 그런데도 이 죄 많은 삶을 끝맺을 수 없는 것은, 그것이 나를 위해 죽은 수하들을 부정하는 헛된 기만에 지나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에게 삶의 소중함을 배웠기에 아무리 후회스러울지라도 죽을 수는 없었다.
더더욱 오래, 그리고 가능한 한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만이 내게 남은 마지막 책임이고 의무니까.
“이런 나를 도와준 걸… 후회하지 않아?”
음성이 흐트러지고, 손끝이 떨려온다. 그 빙설관 레닌에게조차 느껴 본 적 없는 극심한 긴장감과 두려움이 나를 떨리게 한다.
천검자 S. R. 라바일.
역사상 최연소 검자로서 ‘데스 쉐도우’를 필두로 수많은 악을 물리치고 드높은 명성을 쌓아 온 영웅 중 영웅, 로드 오브 킹덤과 충돌한 적은 없다 해도, 악을 용납지 않는 그녀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마족을 지키기 위해 레닌과 싸웠던 것은 이례적인 일.
이제 와서 그녀가 나를 부정한다고 해도 나로서는 다만 납득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아무리 슬프고, 괴롭고, 외로운 결론일지라도….
“후회했어요.”
두근.
심장이 거세게 두근거린다. 피가 싸늘하게 얼어붙는다. 이미 예상하고 있던, 그러나 결코 바라지 않은 대답이 숨을 막는다. 차라리 묻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차라리 듣지 않았으면 나았을 것을. 그것을 알면서도 끝끝내 자초한 고통의 칼날이 날카롭게 마음을 파고들어 온다.
“저 자신에게 후회했죠.”
부드럽고 나지막하며, 조용한 음성.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이어짐에 따라 점차 고개를 숙이며 모포를 잡고 있던 팔이 움츠러든다.
하지만 두터운 모포와 모닥불의 열기도 싸늘하게 식어가는 몸을 데워 주지는 못했다.
그때, 모포 위로 날 감싸 오는 온기가 있었다.
“가족을 지켜 주지 못한 걸, 어떻게 후회하지 않았겠어요.”
두근.
뒤에서 나를 끌어안아 오는 따스한 체온과 귓가에서 조용히 속삭여 오는 잔잔한 음성이 얼어붙은 피를 녹여 온다. 너무나도 바랐지만, 차마 바랄 수 없었던 그 상냥한 말이 나의 심장을 뜨겁게 요동치게 하고 있었다.
“마족인 나를… 아직 가족으로 생각해 주는 거야?”
“그분의 가족은 저에게도 가족이니까요.”
정말일까? 정말로, 그녀는 나를 아직 가족으로 생각할까? 정말로, 나는 이들에게 버림받지 않은 걸까?
정말로, 나는 행복을 잃지 않은 걸까?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그러나 너무나 따스한 감정에 빠져 있던 내게 부드럽게 가라앉은 한 줄기 음성이 들려왔다.
“그분을 만나기 전에는 저 역시 아리스와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
부드러운 음성에 담긴 미묘한 감정의 흔들림. 그것이 오로지 그 사내에게서 비롯된 것임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나는 의문을 떠올렸다.
세레나는 어째서 그를 따라다니는 것일까?
그녀의 정체가 천검자 S. R. 라바일이라는 것은, 그리고 그가 ‘프리나이츠’의 마지막 수장이자, ‘암흑 교단’의 전투 사제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둘 사이에 어떤 과거가 있는지. 그것만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더 이상 과거 따위는 중요하지 않기에 그 뒤를 캐거나 굳이 물어볼 생각은 없었지만, 의문마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이어진 세레나의 말에 나는 내심 놀랄 수밖에 없었다.
“10년 전 ‘데스 쉐도우’의 훈련생으로 잠입해 있었을 때, 저는 그곳에서 교관으로 계시던 그분을 처음으로 만나게 됐어요.”
“데스 쉐도우에서?”
일격 필살의 삼대 검류 중 ‘그림자 베기’를 이어 대륙 제일의 암살 조직으로 불리던 데스 쉐도우. 세레나가 검자로 불린 계기가 그 데스 쉐도우를 몰살시킨 업적 때문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데스 쉐도우에서 만났었다는 것은 정말 생각조차 못 한 일이었다.
더구나 그가 데스 쉐도우의 교관이었다니.
물론 자격은 충분했을 것이다. 그는 쌍검자의 후예니까. 하지만 그가 왜 데스 쉐도우의 교관 따위를 했던 것일까?
“그곳에서 그분은 제게 검술을 가르쳐 주셨을 뿐만 아니라, 목숨을 걸고 제게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셨어요. 저 따위는 한평생을 노력한다고 해도 도저히 갚지 못할 정도로.”
나는 갑자기 불안해졌다.
그토록 궁금했던 세레나가 그를 따르는 이유를 드디어 알게 됐는데, 왜 이렇게 불안한 걸까?
“코드는. 세레나의 은인이었구나.”
“네. 아리스와 마찬가지예요.”
두근.
모포를 잡고 있던 손에 세레나의 손이 겹쳐지며, 심장이 조용히 두근거린다.
긴장이나 흥분으로 인한 격렬한 울림이 아니다. 잔잔한, 그러나 확고하고도 분명한 미동이 서서히 손끝에서부터 파고들어 온다.
“처음 만났을 때는 경계했죠. 배움을 얻게 되면서부터 존경했죠. 은혜를 입고, 감사했고, 떠나게 되면서 그리워했죠. 그리고 다시 만나면서 기뻐했고, 가족이 되어 행복했어요.”
두근.
손가락 끝에서부터 손목을 파고든 흔들림에 심장의 울림이 더욱 느려져 간다. 마치 독이 퍼져 나가듯 흔들림이 퍼진 몸은 서서히 감각을 잊어 간다. 세레나는 나와 같았다. 그에게 도움받고, 가르침받은 것까지, 모든 것이 비슷했다.
하지만 과연 그게 끝일까?
그녀가 그에게 품고 있는 감정은 단지 존경이나 감명만이 전부인 것일까?
“그리고 이제, 저는. 그분을 사랑해요.”
두근.
뱀의 독니처럼 날카로운 한기에 물린 심장이 일순 박동을 잊는다. 심장으로부터 퍼져 나간 독기가 혈관을 타고 나와 피를 차갑게 식히고 몸을 굳힌다.
아아. 그랬다.
역시, 세레나는 그를 좋아하고 있었다. 나 역시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단지 나 역시 그를 사랑하고 싶은, 그러면서도 그녀를 계속 좋아하고 싶다는 비열한 욕심 때문에 모른 척하고 있었을 뿐이다. 세상에서 단둘뿐인 나의 가족, 세상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두 사람. 좋아하는 가족이 둘이나 된다는 건 더없는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왜 몰랐을까?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고 행복할 수는 없다는 걸. 너무나 좋아하고 사랑하기에 오히려 불행해질 수도 있다는 걸. 이제야 그 불안의 실체를 알게 된 나는, 그저 굳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후훗. 이건 비밀이니 꼭 지켜 주세요. 아리스는 어려서 아직 모르겠지만, 사랑한다는 건. 좋아하는 거랑 달리 많이 부끄러운 일이거든요.”
아니야. 사랑하는 거랑 좋아하는 게 다르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알고 있어. 왜냐면… 나도 세레나처럼… 그를… 코드를….
“알았어….”
말할 수 없다. 나를 도와주고, 받아들여 준 세레나에게… 어떻게 그런 걸 말할 수 있을까?
“고마워요. 아리스 같은 가족이 있어서 저도 행복해요.”
“응….”
그 잔잔하고도 부드러운 음성에 나는 다만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래, 그와 세레나라는 가족을 두었다는 것만 해도 내게는 더없는 축복, 그러니까 설령 그 이상의 것을 얻지 못하더라도, 숨겨진 진심을 언제까지나 묻어 둬야 할지라도 더 이상의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된다. 이대로도 나는 이미 충분히… 행복하니까.
무겁게 가라앉는 상념을 다잡은 뒤에야 나는 문뜩 깨달았다.
세레나의 체온은 따스하게 나를 감싸고 있지만, 모포 위로 겹쳐져 있는 손만은 차갑다는 걸.
맞잡을 때마다 온기를 전해 주던 그녀의 손이 이제는 오히려 밤처럼 싸늘하게 식어 있다는 걸.
그 사실을 깨닫자 마음을 찾아드는 것은 왠지 소중한 무언가를 잃은 듯한 커다란 공허함이었다.
끝내 넘쳐난 한 방울의 공허함이 눈가를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며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