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74)
73영웅의 독백
타닥. 타닥.
짙은 밤의 어둠 속에서 조용히 타오르는 모닥불. 그 기묘한 불꽃의 흔들림에 잠겨 있던 내 귀에 한 줄기 음성이 스쳐 지나갔다.
“몸은 괜찮나?”
“응….”
더없이 무뚝뚝한 그의 물음에 답하는 것은 모포를 두른 채 앉아 있는 은발 자안의 소녀.
열로 인해 하얀 피부에 떠오른 홍조는 귀엽고도 가련한 아름다움을 그려 낸다. 그러나 나의 차갑게 식은 심장은 이 마족 소녀에게 어떤 애정도 느끼지 못했다.
그때, 그가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어디 가십니까?”
“잠시 바람을 쐬고 오겠다.”
“이미 해가 저물었습니다.”
“늦진 않을 거다.”
무뚝뚝한 대답만을 남긴 채, 그는 숲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무정함에 아려오는 가슴의 통증을 묻으며, 소녀의 이마에 손을 대자 열기가 느껴져 온다. 갑작스러운 손의 감촉에 놀란 듯 고개를 번쩍 든 소녀에게 나는 미소를 꾸며 냈다.
“열은 많이 가라앉았군요.”
“응.”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소녀, 가벼운 감기였던 데다가, 휴식을 취한 만큼 열은 이미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런데도 그 체온이 뜨겁게 느껴지는 이유는 오히려 내 손이 차갑기 때문이라는 것을 싸늘하게 얼어붙은 심장이 알려 준다.
종일 병간호를 도맡기는 했지만, 그 안에 소녀에 대한 걱정 따위는 없었다.
오히려 싸늘한 어둠만이 자리 잡고 있을 뿐, 이미 극심한 부상을 입었음에도, 그는 우리의 안전을 위해 길을 재촉했다. 그런데 이런 마족 계집애가 감기 따위로 일정을 지체하게 하고 그의 보살핌까지 받는다니.
나는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간호를 도맡아 한 것이다.
차라리 감기가 아니라 치명적인 질병에 걸렸다면, 그래서 며칠 내로 죽게 되었다면 이런 가식적인 미소가 아니라 진심으로 기쁘게 웃어 줄 수 있었을 텐데….
“세레나. 내가 마족이라는 거 알고 있었어?”
“아니요. 그때까지는 모르고 있었어요.”
별로 듣고 싶지도 않은 소녀의 말에 나는 모닥불에 시선을 고정한 채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러한 나의 태도에도 소녀는 짜증스럽게 계속해서 대화를 이어 간다.
“마족이 사람의 피를 마시는 존재라는 건 알지?”
“예.”
“그를 따라온 이후 사람의 피에 손을 댄 적은 없어. 하지만 그전까지는 많은 피를 마셨고, 숱한 피를 흘렸어.”
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걸까? 이것은. 스스로가 마족이라는 게 자랑스럽다는 건가? 아니면 자신이 과거에 이룬 업적을 얘기하며, 같잖은 희열이라도 느껴 보려는 건가?
72주문의 마왕을 비롯해, 수많은 마족이 이뤄 낸 죄악과 업보를 내세워 무얼 하자는 거냐.
더럽고 추잡한 마족의 계집애야.
“과거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내 죄를 변명할 생각은 없어. 용서받을 수 있을 거라고도 생각 안 해.”
그래, 당연한 말이다. 아무리 개과천선을 맹세한다 한들 이미 지은 죄는 사라지지 않고 쌓인 업은 용서받지 못한다. 어리다는 변명은 하지 마라. 뉘우쳤다는 고백은 소용없다.
그딴 짓으로 죄책감과 후회를 묻어 버린 채 혼자만 행복하게 살겠다는 이기심을 그 누가 용납할 수 있을까? 진정으로 스스로의 죄를 후회한다면 쓸데없는 말 대신 자결이라도 해 버려라. 목을 통해 넘어오려는 독기와 어둠으로 가득한 욕설을 참아 누르고 있던 내게 소녀는 나지막이 질문을 건네 온다.
“이런 나를 도와준 걸… 후회하지 않아?”
마치 궁지에 몰린 새끼 고양이처럼 겁먹어 떨고 있는 소녀의 모습에 얼어 있던 심장이 조용히 박동하며 싸늘한 냉기가 혈관을 타고 흘러나온다.
“후회했어요.”
그것은 단 한 점의 거짓도 없는 진심.
“저 자신에게 후회했죠.”
다만 그 깊고도 어두운 후회를 되새기며, 나는 앞에 앉아 있는 아리스를 끌어안았다.
“가족을 지켜 주지 못한 걸 어떻게 후회하지 않았겠어요.”
그는 내가 반드시 지켜 내야 하는 은인이었다. 그런 그가 이런 마족 계집애 때문에 ‘신의 힘’에 대적해야만 했던 그 일을. 그 모습을 단지 지켜봐야만 했던 나 자신을. 이런 마족 따위를 지키고자 했던 과거를. 나는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었다.
“마족인 나를 아직 가족으로 생각해 주는 거야?”
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나를 속이고, 그를 이용하기 위해 가족이라는 껍데기를 쓰고 있던 주제에, 아직까지도 그 껍데기로 우리를 우롱하려 드는 이것의 더러운 속내가 너무 역겹게 느껴진다. 그런데도 나는 구역질을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그분의 가족은 저에게도 가족이에요.”
그래. 그렇다. 설령 마족이라 할지라도 배려하는 그는 결국 이 더러운 마족 계집애의 정체를 알고서도, 가족으로 인정해 주었다. 그리고 그가 이미 결정을 내린 이상 내게 그것을 거부할 선택권이란 없었다.
애초부터 내가 이 소녀를 보살펴 줬던 이유조차 단지 이 소녀가 그의 가족이기에. 그리고 마족임을 몰랐기에 그랬을 뿐이니까.
그렇게 정체를 숨기고 나를 조롱한 주제에, 이제 와서 그것을 비꼬는 듯한 그 말이 나의 속을 뒤틀리게 했다.
그에게 남은 시간은 단 일 년뿐.
그것을 송두리째 잡아먹어 놓고도 가족이라는 방패를 내세우는 악귀 같은 마족이 내 가슴속에서 꿈틀거리던 어둠을 이끌어 낸다.
그가 치른 희생도 모른 채, 내가 지닌 불행도 모른 채, 다만 홀로 행복해지려는 마족 소녀를, 그리고 소녀에게 느껴지는 그에 대한 마음을… 나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그분을 만나기 전에는 저 역시 아리스와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
팔 안에 느껴지는 소녀의 체온을 느끼며 조용히 말을 속삭여 나가기 시작했다.
마음속에 꿈틀거리는 짙고도 깊은 어둠을 담아, 차가운 피와 음험한 독기를 숨긴 채.
“10년 전 ‘데스 쉐도우’의 훈련생으로 잠입해 있었을 때, 저는 그곳에서 교관으로 계시던 그분을 처음으로 만나게 됐어요.”
“데스 쉐도우에서?”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말하고 싶지 않았던 과거. 그러나 마음속에 꿈틀거리는 어둠은 내게 숨겨 두었던 과거를 드러내게 한다.
“그곳에서 그분은 제게 검술을 가르쳐 주셨을 뿐만 아니라, 목숨을 걸고 제게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셨어요. 저 따위는 한평생을 노력한다고 해도 도저히 갚지 못할 정도로….”
그래. 그래서 나는 목숨으로 그 빚을 갚으려 했고, 남은 한평생을 그의 곁에서 머물기를 바랐다. 하지만, 너무나도 잔혹한 운명의 장난에 그리고, 이 마족 계집애에 의해 내 간절한 바람은 헛되이 깨져 버리고 말았다. 그런 내 바람을 깨트린 장본인은 태연하게 내 말을 받아 온다.
“코드는… 세레나의 은인이었구나.”
“네. 아리스와 마찬가지예요.”
그에게 죄를 저지른 죄인이라는 점에서 나는 이 소녀와 다름없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나는 더더욱 이 소녀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경계했죠. 배움을 얻게 되면서부터 존경했죠. 은혜를 입고 감사했고, 떠나게 되면서 그리워했죠. 그리고 다시 만나면서 기뻐했고, 가족이 되어 행복했어요.”
부드러움을 가장한 목소리 안에 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따스해지는 온기를, 그것마저 넘어선 열기를 담아 넣는다. 이 마족 계집애에게, 절망을 주기 위해서.
“그리고 이제, 저는… 그분을 사랑해요.”
흠칫 맞닿은 몸을 통해 심장이 얼어붙는 듯한 동요를 느끼며, 나는 진심으로 기쁘게 웃는다.
“후훗. 이건 비밀이니 꼭 지켜 주세요. 아리스는 어려서 아직 모르겠지만, 사랑한다는 건, 좋아하는 거랑 달리 많이 부끄러운 일이거든요.”
얼음물에 빠진 아기 고양이처럼 바르르 몸을 떠는 소녀에게 나는 늑대처럼 거침없이 이빨을 박아 넣는다.
“알았어….”
그 순간, 내 마음을 채운 것은 비틀린 쾌감, 그 떨리는 음성에 담긴 슬픔이, 소녀에게서 빼앗은 행복이,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은 욕심이, 이제 오직 나만의 것이 된 단 하나의 자리가 내게 어둡고 잔혹한 희열을 느끼게 한다.
“고마워요. 아리스 같은 가족이 있어서. 저도 행복해요.”
“응.”
이것이 비루한 짓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상대가 마족이라는 것이 변명은 되지 못한다는 것은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뿌듯한 만족감 속에 미소 짓는다. 그 어떤 얼음보다도 싸늘하고, 그 어떤 칼날보다 날카로운 미소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