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75)
74악당의 독백
산길과 숲길을 가로지르는 열흘간의 강행군.
혈기만으로 드라고니아조차 찾아낼 수 있을 것만 같던 30년 전이라면 모를까. 레닌에게 입은 부상조차 낫지 않은 지금은 정말 죽어날 정도로 벅찬 일정이었다. 그러나 겨울 신전과 암흑 교단이라는 무시무시한 위협이 바로 등 뒤에 붙어 있는 이상. 내게 선택의 여지란 없었다. 이 때문에 억지로 유지해 온 강행군이었거늘….
“몸은 괜찮나?”
“응….”
그럼 당장 일어나지 그러냐. 이 짐덩어리야!
모포를 두른 채 모닥불 쬐는 계집애를 보며, 나는 내심 빠득빠득 이를 갈았다.
혹시라도 여정에 지장이 생길까 싶어, 마사지 기술까지 친히 펼쳐 준 것이 바로 어제.
그래, 무려 24시간 전이다.
그런데, 이 몸의 노고에 감사한 마음으로 없는 힘까지 짜내 분발하기는커녕, 고작 감기에 걸려 뻗어 버리다니!
응? 이게 말이 돼? 말이 되냐고!!
계집애의 행태 덕분에 강행군은커녕, 만 하루 동안 자리를 지키게 된 나는 통탄스러운 심정을 애써 억눌렀다.
마음 같아서야 이걸 질질 끌고라도 가고 싶지만, 환자를 데리고 강행군을 하는 건 미친 짓이다. 십중팔구 환자가 죽는 건 기본. 속도는 떨어지는데, 체력 소모는 배가 되니까.
그렇다고, 계집애를 여기 버리고 갈 수도 없다.
이런저런 사정은 둘째 치고, 계집애에게 찰싹 달라붙어 병간호에 전념하고 있는 녀석이 그걸 용납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잘난 영웅 나리한테 고작 감기 때문에 가족을 버리겠다고 얘기해 봐라. 그날부로 내 인생은 끝나는 거다. 끄으응….
앞으로의 여로와 여유 시간, 그리고 남은 식량 등등을 계산해 새로운 일정을 짜 본 나는 절망했다. 솔직히 아무리 강행군을 한다고 해도 겨울 신전과 암흑 교단의 눈을 벗어나기는 어렵다. 일개 민중에서부터 고위 귀족까지 신앙을 통해 각계각층에 퍼져 있는 종교 세력의 이목은 웬만한 일국의 정보력을 능가하니까.
아니, 차라리 국가라면 낫다. 국가라면 국내에서는 강해도 국외에서는 빈약해지는 만큼 어떻게든 국경만 넘어가면 되니까. 하지만 비참한 바다의 기현자가 말했듯, 종교에는 국경이 없는 법.
대륙 어디로 가든, 종교 세력의 정보망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다.
물론, 아예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문뜩 한 곳을 떠올린 나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거길 가느니 차라리 북부로 가는 게 낫지.
요마 피하자고 악마 소굴에 갈 수야 없잖은가?
고민을 거듭하던 나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디 가십니까?”
“잠시 바람을 쐬고 오겠다.”
“이미 해가 저물었습니다.”
“늦진 않을 거다.”
잠든 계집애와 귀찮게 캐묻는 녀석을 뒤로하고 나는 혼자 숲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자리를 잡고 앉아 지도를 펼쳐 보았다.
끙. 어두워서 잘 보이지도 않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악당이란 언제 어디서 누구의 앞에서라도 결코 빈틈을 보이지 않는 법!
이미 열흘이나 강행군을 한 주제에 이제 와서 여로를 가지고 끙끙대 봐라.
녀석이 계집애보다 나부터 내버리려 할지도 모른다.
으으음… 좋아, 차분하게 생각해 보자.
멀리 도망쳐도 소용없다면 숨어 버리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
하지만, 숨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이 겨울에 산속에 처박혔다가는 굶어 죽기 십상.
더구나 겨울 신전의 그 괴물 새끼나 암흑 교단의 ‘그 자식’이라면.
설사 어둠의 산이나 이름 없는 골짜기, 하늘 섬이라도 끝끝내 날 찾아낼 것이다.
그 괴물 새끼의 무력이나, 그 자식의 교활함을 생각해 볼 때 평생은커녕 한 달도 안 걸리겠지.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단 하나, 사람들 속에 숨는 것뿐이다.
숙련된 악당이란 어디서든 완벽한 마을 사람 A로 위장할 수 있어야 하는 법! 그런 면에서 이쪽은 내 전문 분야라 할 수 있다.
다만, 이번에는 상대가 너무 안 좋다. 수많은 악의 조직을 깨부숴 온 겨울 신전과 그 겨울 신전과 맞서며 교세를 불려 온 암흑 교단이기에.
북부의 음지와 양지를 양분하고 있는 두 종교 세력이라면, 아무리 꼭꼭 숨어 봤자 길게 잡아 반년 내로 꼬리를 잡힐 것이다. 그래도 반년이 어디냐. 일단 당장 추적을 따돌리는 게 중요하겠다.
우선은 시간부터 벌고 보는 거….
응?
그렇게 지도를 들여다보며 고민하던 도중에 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모든 기척이 잡아먹힌 듯한 고요한 정적, 아무리 인적이 드문 한밤중의 숲속이라도 지나치게 무겁고 고요한 분위기가 내 신경을 곤두서게 하고 있었다.
…누구지?
숙련된 악당으로서의 본능으로 누군가 있다는 사실을 직감한 나는 숨을 죽였다.
하지만 아무리 신경을 곤두세워도, 느껴지는 것은 죽음처럼 깊고도 어두운 정적뿐.
…그 녀석인가?
상대의 정체를 추정해 본 나는 내심 혀를 찼다. 이렇게까지 기척을 죽일 수 있는 것은 데스 쉐도우의 훈련생이었던 그 녀석 정도였으니까. 그저 잠깐 숲에 들어왔을 뿐이거늘, 그새를 못 참고 내 뒤를 쫓아오다니, 영웅이 왜 이렇게 인내심이 부족하단 말인가!
“나와라.”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몰래 숨어 있을 그 녀석에게 따끔하게 일침을 가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정작 흔들리는 수풀 사이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 그림자를 확인한 순간, 나는 그대로 얼어붙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스스스―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녹색의 비늘과 머리 한가운데 솟아나 있는 새하얀 뿔, 등 뒤에 접혀 있는 한 쌍의 넓은 날개, 뱀이나 도마뱀과도 한없이 비슷하면서도, 그 어떠한 파충류와도 다른 노르스름한 눈.
인간 세상의 그것과는 천지 차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상대의 모습을 본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할 정도로 굳어 버렸다. 기괴한 모습에 질려 버렸기 때문이 아니다. 그 모습이 익숙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겨울 신전이라면 예상했다. 암흑 교단이라면 예측했다. 제국 같은 변수까지 상정 범위 내의 일이었다. 설사 그 괴물 새끼나 교활한 자식이 나타나더라도 대응할 방법 정도는 생각해 두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내 앞에 나타난 ‘이것’만큼은 상정 범위 밖이었다.
“KRRRRRR….”
당장이라도 사냥감을 덮치려는 맹수처럼 자세를 낮추며 송곳니를 드러내는 그것을 보고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숙련된 악당이란 아무리 예상 밖의 사태가 벌어진다 할지라도 냉정하게 대응할 수 있어야 하는 법!
지, 진정하자. 진정, 진정!
가까스로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힌 후, 나는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고민하며 일단 시간을 벌기 위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로군.”
“KARRRRRKCAA.”
긍정하듯 눈을 번들거리는 놈을 보며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내가 이것을 상대로 도망칠 수 있었던 것은 이것이 극심한 부상을 입었던 덕분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다시 한번 내 앞에 나타난 이상. 더 이상 과거와 같은 행운을 기대할 수는 없을 거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무엇을 원하나?”
목이 바짝바짝 말라 오는 상태에서도 나는 어떻게든 평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30년이라면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다. 물론 그건 인간을 기준으로 한 이야기지만, 그 사이 이것의 생각이 달라졌다면… 경우에 따라 협상의 여지 또한 존재했다.
하지만 그것의 노르스름한 눈을 보고 나는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단지, 눈빛만 보고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30년 전에 이루지 못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나를 찾아왔을 뿐이라는 사실을. 이것에게 타협 여지 따위는 없다는 진실을. 그것을 깨달은 나는 내씹듯이 말을 뱉었다.
“나를 그 무덤으로 끌고 갈 셈이냐?”
“KYAOOOO.”
칼날처럼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노르스름한 눈으로 긍정을 표하는 그것을 보며 나는 이를 악물었다. 나는 이것의 힘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 괴물 새끼라도 고전을 면치 못할 이것에게 내가 상대가 될 리가 만무, 저항 따위는 그저 무가치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포기할 수 없었다. 어차피 내 삶에 나보다 약한 적수는 없었고,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위기 따위도 없었다. 이제 와서 이런 것 따위에게 두 손 들고 간단히 포기할 정도로 내 삶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웃기지 마라!”
흔들리려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나는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노르스름한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 보며 폐를 쥐어짜듯이 말을 토해 냈다.
“지상 최강이라 불리던 ‘미친 폭풍의 광검자’도 나를 죽이지 못했고, ‘빙설관 레닌’도 나를 이기지 못했다.”
살기와 살의, 분노와 광기로만 가득하던 검도 신성한 권능, 불굴의 신념이 담겨 있던 권각도.
“‘암흑의 의지를 품은 자’조차 나를 붙잡지 못했고, 중앙제국의 ‘황제’조차 나를 막지 못했다.”
암흑 교단의 모든 사제의 정점에 위치하던 자도 대륙의 삼분지 일을 지배하는 최고의 권력자도.
“‘이름 없는 골짜기의 공포’도 나를 땅에 묻지 못했고, ‘하늘 섬의 떠돌이’도 끝끝내 나를 잡아먹지 못했다.”
그 누구도 찾아내지 못했던 마역에 숨은 자도, 그 누구도 도달하지 못했던 비역에 숨은 자도.
“그들 중 누구도 나의 욕망을 막지 못했고, 나의 집착을 꺾지 못했다.”
필요하면 동료조차 배반하고, 원한다면 스승조차 죽이고, 방해되면 가족조차 버리고, 유용하다면 제자조차 속이고, 해야 한다면 연인조차 배신한다.
살아남기 위해서 무엇이든 해 왔던 나의 삶은, 분명 더없이 치졸하고, 비열하며, 추악하다. 하지만 바로 그랬기에, 나는 여태까지 악으로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런데 고작 너 따위가, 내 삶에 손댈 수 있을 듯싶으냐?”
오직 살아남기 위해 악이 되었던 자로서, 죽지 않기 위해 삼류가 돼야 했던 이로서, 이 삶을 지탱하는 하나의 집념과 각오를 담아 나는 고한다.
“꺼져라. 아직도 과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어리석은 짐승아.”
달빛이 나뭇가지에 스쳐 바스라지고, 어둠이 수풀에 스쳐 부스러지는 가운데 심장의 박동과 호흡만이 천둥처럼 울려오는 익사할 것처럼 무거운 침묵이 나를 감싸든다.
영원히 이어질 듯만 싶던 그 정적을 깨트린 것은, 한 줄기 나지막한 울음소리였다.
“CRRRRR….”
다만 그 소리만을 남긴 채 조용히 몸을 돌린 놈은, 녹아들 듯 모습을 감췄다. 그 그림자가 수풀 속으로 모습을 감출 때까지. 나는 묵묵히 어둠 속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뒤에 있던 나무에 털썩 등을 기대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
나는 식은땀으로 인해 축축하게 젖은 등과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은 몸의 감각을 느끼며 심각한 고민에 잠겨 들었다.
…설마 그것이 나타날 줄이야.
일단 이렇게 물러갔지만, 그것은 이번뿐. 놈이 언제 다시 나타날지는 알 수 없는 일, 그걸 대비하려면 계획을 변경할 필요가 있었다.
…아무래도 ‘그곳’에 가 봐야겠군. 원래 그런 곳에서 시간 낭비할 생각은 없었지만, 지금은 무력적인 강화가 시급했다.
잠시간의 고민 끝에, 결심한 나는 몸을 일으켜 야영지로 걸음을 향하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 흐릿하게 남아 있는 천 년의 향기를 뒤로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