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79)
78영웅의 득오
‘…….’
그것은 영원과 같은 정적, 어떤 행동도 없이 지속되는 침묵의 바닷속에서 유일하게 들려오는 것은 나 자신의 심장 박동뿐.
그마저도 멈춰 버릴 듯, 얼어 버릴 듯 점차 가늘게 이어지던 끝에 마침내 한 가닥 파동이 정적의 공간을 깨트린다.
까앙!
불꽃에 새하얗게 달궈진 두 쇳덩이가 그의 손에서 휘둘러진 망치에 짓눌리며 날카로운 금속성을 터트린다.
“세인들은 무위지경을 하나의 경지라 하지만, 무위지경의 진체는 무위(無爲)이자, 무위(無位)이고, 무위(無違)인 세 개의 경지로서 이뤄진다.”
깡―!
목이 바짝 마르며, 침이 삼켜진다. 무위지경에 대한 이야기는 수도 없이 많다. 그러나 일검자라는 선조를 두었던 나조차 무위지경을 셋으로 나눠 설명하는 것은 생전 처음 듣는 가르침이며, 충격이었다.
까앙―!
“무위(無爲)라 함은 이룸에 뜻을 두지 않는 경지이다. 검을 이룬 형태를 벗는다면 초입이요, 검이 따르는 형식을 벗는다면 중도요, 검에 담아내는 형의를 벗어야만 경지를 이뤘다 할 수 있다.”
깡!
우렁차면서도 날카롭기보다는 맑은 금속성, 위아래로 겹쳐 있던 두 검 조각이 서서히 뭉쳐져 가는 가운데 그의 음성은 나지막하게 이어진다.
그것은 내가 알면서도, 전혀 모르는 무위였다.
내가 찾은 무위지경이란 검형을 벗고, 검식을 잊어, 검의를 얻는 것.
검자가 평생을 노력할지라도 감히 얻을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없는 검의. 그것마저 버려야 하는 것이 진짜 무위지경이라니, 그 말대로라면 나는 아직 무위지경에 이르는 도중에 있을 뿐, 아직 검경을 제대로 얻지 못한 것이다. 더욱이 그 가르침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까앙―!
“무위(無位)라 함은 위치에 뜻을 두지 않는 경지이다. 검을 쥐는 위치를 벗는다면 초입이요, 몸이 서 있는 위치를 벗어난다면 중도요, 마음을 두는 위치를 벗어야만 경지를 이뤘다 할 수 있다.”
깡―!
손이 부르르 떨리며, 주먹이 쥐어진다. 검을 쥐는 위치? 몸이 서 있는 위치? 마음을 두는 위치? 그런 것을 나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하나 그 말을 듣는 순간, 날 스쳐 지나가는 무언가를 느낄 수는 있었다. 오각도, 예감도, 지각도 아니다. 그 모든 것과도 같으나, 그 모든 것을 초월한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척추를 타고 올라와 심장을 울리고, 머리를 깨우치는 느낌.
그 아련함에 빠져 있는 나의 눈앞에서 모루에서 두들겨지던 무쇠는, 어느새 1미터가량으로 길게 늘어나 있었다.
가운데를 양분하고 있는 긴 금을 제외하면, 완연히 하나로 보이는 그 무쇠의 중심에 그는 작은 칼을 갖다 댔다.
쩌겅―!
특별히 힘을 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단숨에 쇳덩이를 반으로 잘라 냈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화로에 던져 넣었다.
“무위(無違)라 함은 어김에 뜻을 두지 않는 경지이다. 검을 써서 어김을 벗는다면 초입이요, 몸을 움직여 어김을 벗는다면 중도요, 마음이 생겨나 어김을 벗어야만 경지를 이뤘다 할 수 있다.”
화르륵―!
풀무질에 의해 짙푸른 불꽃이 거세게 일어나, 쇠붙이를 다시 녹여 가는 가운데, 그의 가르침 또한 내 안에 차츰 녹아들어 온다.
검과 생각과 영혼에 어김이 없다니, 나는 그것은 이해조차 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나는 마음 깊이 받아들였다. 그것은 틀림없이 옳으리라는 믿음이 내게 그것을 기억하게 만든다.
어김을 벗어나는 것은 물론, 위치를 벗어나는 것조차 이제야 고작 이룸에 머물고 있는 나로서는 무리였다. 그러나 지금의 이룸을 벗어나는 것이라면…
그 방법을, 그는 내게 직접 알려 주었다. 그리고 난, 그것을 충분히 행할 수 있다.
그저 모호한 자신감 따위가 아니다. 평생 검을 쥐고 살아온 검사로서의 본능이 내게 그 사실을 알려 주고 있었다.
화로에서 다시 꺼낸 두 쇠뭉치를 하나로 만들고 반으로 잘라 다시 화로에 넣는 것을 반복하는 무쇠처럼 굳건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의 의식은 차츰 내면의 세계로 침잠되어간다.
그 안에 자리한 것은 오롯한 하나의 검 형태도 형식도 버렸지만, 그렇기에 더욱 뚜렷하게 남아 있는 의지.
일격 필살의 삼대 검류를 통합하여 오로지 일격 필살의 의지만이 남게 된 필살검,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에게 많은 영향을 받고 그와 나 사이를 이어 주고 있는 그것을 향해 나는 마음의 손을 뻗는다.
내가 평생 쌓아 올린 검의 정화이자 의지의 결정, 오직 검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나의 삶, 그 자체. 단순한 집착이라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소중한 그것의 검신을, 나는 움켜쥔다. 세게 쥐면 쥘수록 칼날이 마음을 파고들며, 저릿한 통증을 일으킨다.
어찌 아프지 않을까? 스스로를 송두리째 깨 버리려는 것 같은 짓인데, 통증이 일면서 커질수록, 모든 것을 잃을 듯한 두려움 또한 깊어져 간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그저 손을 떼면 끝이다. 약간의 상처가 나긴 했지만,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낫게 될 것이다.
그러면 검을 잃고 폐인이 돼 버릴 위험도, 몸을 떨리게 하는 이 두려움도 벗어날 수 있다.
그 깊지만, 결코 길지는 않은 갈등 끝에… 나는 마음의 검을 쥐고 있던 손을 풀었다. 그리고 힘껏 움켜쥔 주먹으로, 검을 후려친다.
어차피 그에게 얻은 것 그가 아니었으면 이미 10년 전 잃었을 것, 그저 돌려준다고 생각하면 될 뿐!
파강―!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마음속의 검이 깨지는 순간, 귀가 아닌 마음으로부터 터져 나온 그 울림이 나의 심장을 찔러 온다.
우득, 빠드득. 찌지―직!
목 안에서 비릿한 덩어리가 울컥 치솟으며, 전신이 뒤틀리기 시작한다.
폭발할 듯 거세게 두근거리는 심장, 터질 듯이 요동치는 혈관, 끊어질 정도로 팽팽하게 경직된 근육, 마비될 정도로 예민해진 신경, 부러질 것처럼 비틀리는 관절, 평생 동안 단련해 온 나 자신의 힘이 검을 배반한 스스로의 신체를 공격해 온다.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 의념만으로 심장의 박동까지 조절 가능할 정도로 혹독한 수련을 쌓아 왔다. 그렇기에 나 자신이 검을 부정하는 것이 이런 결과를 낳으리라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도… 후회는 하지 않는다. 설사 검을 잃을지라도, 설혹 연이 끊길지라도, 곁에 남을 수만 있다면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주르륵….
울컥 쏟아져 나온 핏물이 턱까지 흘러 내려가 한 방울씩 떨어져 내릴 때마다, 몸의 균열은 더욱 크고 심해져서 도저히 회복하기 불가능한 단계로 접어든다. 이미 검을 쥐는 것 따윈 불가능하다. 아니, 제대로 된 거동조차 힘들어지고 있다.
라바일 가문의 장녀 S. R. 라바일.
역대 최연소 검자이던 천검자, 일격 필살이라 일컬어지는 삼대 검류의 전승자는, 이제 죽어 버린 것이다. 아직 살아 있는 것은 오로지 세레나 R. L.
검사는커녕 제 몸 하나도 돌보기 힘든, 이제는 폐인과 같은 한 명의 여인일 뿐이다.
그나마도 이 충격에서 살아남을 때의 이야기다. 너무 강인하게 단련된 몸은, 그렇기에 숨통까지 틀어막을 듯 생명을 부숴 온다. 그리고 검과 함께 찾아온 자신을 잃은 충격은 정신을 좀먹으며 마음을 황폐하게 한다.
이대로는 설혹 살아남을지라도, 백치가 될 것이다. 미리 고통을 예상했지만, 실제는 상상을 뛰어넘었다. 반동을 예상했지만, 최악보다 최악이었다. 그래도 나는…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다. 이것이, 그의 가르침이니까. 이게 바로… 나…니까….
혼미해 가는 정신과 흩어지는 생명의 끝. 모든 게 흐릿해지고, 모든 게 아련해지는 그 공허 속에 잠겨 들던 나는 문뜩 깨달았다.
깡―까강. 깡―까강―!
어두운 눈에도 불구하고, 막막한 귀에도 불구하고, 시야가 어두워질수록 청각이 막막해질수록 더 찬란히 빛나며, 더 맑게만 울려와 눈에 비춰지고, 귀로 파고들어 달아올라 스며드는 검신과 그 소리가 오직 그것만을 바라보면서 두드려 대는….
나의 은인이고, 나의 스승이며 유일무이한 희망, 절대 불변의 바람, 그 강인한 사내가, 그 상냥한 존재가, 내 앞에서 보여 주며, 내 앞에서 들려주어, 내게 가르치고자 하고 내게 전달하고자 한 진정한 무위에 이르는 길이 내 눈앞에 놓여 있다는 것을….
깡―까강!
깡―까강!
이미 반으로 부러져 쇳덩이나 다름없던 검, 과거의 추억이 담겨 있다고 해도 다만 그뿐인, 망가져서 고철이나 다름없어진 검을 그는 무자비하게 화로에 던져 버렸다.
하지만 그 화로에서 녹은 쇠를 끝없이 달구고, 망치로 두들기는 것을 반복하는 그의 모습은 무뚝뚝할지언정 결코 무정하지만은 않았다.
정말 검을 폐물로 생각한다면, 진정 검에 가치를 두지 않는다면, 어찌 저토록 정성을 다해 검을 두드릴 수 있을까?
당장 내가 죽는다 할지라도, 아니 세상이 무너진다 할지라도, 곁눈질 한 번 하지 않고 오로지 검만 두들길 듯한 그 모습이 나를 빠져들게 한다.
아무리 형편없이 망가졌더라도, 아무리 쓸모없어 보일지라도, 아무리 소용없다 생각될지라도, 다만 원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저토록 소중하게 두드릴 수 있다니…
한낱 신외지물인 검이라도 그러할진데, 나 자신의 몸을 이렇게 포기해도 되는 것일까?
깡―!
아니, 아니다. 그는 내게 포기 따위를 가르쳐 준 적은 없고, 나 또한 누구에서도 그런 것을 배운 적은 없다.
까강―!
그래, 그렇다. 의지만으로 스스로의 몸을 망가트릴 수 있다면, 의지만으로 스스로의 몸을 회복치 못할 이유 또한 없을 터….
깡―! 까강―!
한 번 실패했다고 포기할 필요 따위는 없다. 철은 두드리면 두드릴수록 강해지는 법.
그리고 내 몸은, 세상의 그 어떤 강철보다 강하고도 유연하게 단련되어 왔다.
화르르륵―!
망가진 몸은 단지 불에 녹은 것에 불과하다. 절망도, 후회도, 슬픔도, 한탄도, 이왕 녹일 것이라면 모두 같이 녹여 버려라.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의지로써, 그것을 뭉쳐 다시 몸을 두드려라.
우득―
뒤틀리던 뼈가, 근육이, 혈관이, 신경이 멈춘다. 오직 순수한 일념으로 세포 하나하나를 제어한다.
빠드득. 뒤틀렸던 몸이 하나하나 풀려 감에 따라, 몸을 찢어발기는 듯한 고통이 정신을 마비시킨다. 극한의 고통을 부여한다는 분근·착골·타심·묵혈·예감의 5대 고문법을 한꺼번에 쓰면 이렇게 될까?
악문 이 사이로 잇몸이 터지며, 전신이 미친 듯이 바들바들 떨려 온다.
하지만 멈추지 않는다. 내가 싸워 온 적 중 약한 자 따위는 없었다. 모두 나를 죽일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때로는 이겼지만 때로는 비기고 때로는 패했다.
‘데스 쉐도우’와 싸울 때는 생사의 고비를 넘겼고, 12식인귀를 상대로는 고전을 면치 못했으며, 세빌리아와는 가까스로 동수를 이룰 수 있었다.
쿠르타를 상대로 진정한 공포를 느끼고 1년 동안이나 검을 쥐지 못했고, 레닌에게는 검이 부러지며 절망하기까지 했다.
그 어떤 고난도 쉽게 이겨 낸 적은 없지만, 결코 짓눌려 포기한 적은 없다.
설사 빙설관 레닌과 다시 싸운다 할지라도, 부러진 검을 들고 맞설지언정 싸워 보지도 않고 물러날 생각 따위는 없으니까.
그런데 고작 이런 고통 따위에 내 몸을, 내 의지를 포기할 수는… 없다!
찌지―직!
살이 찢어지고 피부가 갈라지는 감각과 함께 모든 고통이 갑작스럽게 사라진 순간, 한 줄기 번개와 같은 충격이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를 관통해 온다.
이, 건…!
발끝에서부터 시작해 종아리를 타고, 허벅지로 올라와, 하복부에 뭉쳐, 가슴에서 머물고, 목을 넘어 머리까지 퍼져 오는 전율.
그것은 감각 하나하나에 전해지는 입맞춤이고, 세포 하나하나가 어우러지는 교합이었다.
하복부에 뭉친 자극은 열기가 되어, 사지백해로 퍼져 나감으로써 온몸을 뜨겁게 달군다.
따듯하다고 하기에는 애무처럼 부드럽고, 뜨겁다고 하기에는 절정과 같이 격렬한 열기의 흐름은 쾌락마저 느끼게 한다.
아아…!
마치 정욕에 빠진 짐승처럼 그 열기에 녹아든 정신은 순수한 본능에 따라 더욱 큰 쾌감을, 더욱 깊은 열망을 쫓아 내달린다. 끝없는 노동에 새어 나오는 숨이 가빠지고, 척추를 타고 치달리는 자극에 허리가 요동치며, 기묘한 열기로 하복부보다 더 깊은 곳이 은밀하게 젖어들 때, 극한까지 예민해진 신경은 짜릿한 감각과 함께 전신의 세포 하나하나로부터 열기를 전해 온다. 그리하여 뭉쳤던 열기가 폭발한 순간, 철퇴처럼 강렬한 열락에 의해 허리가 휘고, 손끝부터 발끝까지 모든 근육이 팽팽해지며 가느다란 신음이 터져 나온다.
“읏…!”
거센 신음과 함께 민감해졌던 신경이 가라앉고, 근육이 차례대로 이완된 뒤에야 육신에 녹아들었던 의식이 분리된 나는 어느새 몸이 원래대로 돌아와 있음을 깨달았다.
아니, 단지 원래대로 돌아온 것이 아니다. 마치 철을 두드려 강철을 만들 듯, 더 강인해진 힘이 전신에서 흘러넘쳐 온다. 그렇게 두드려진 몸이 강철이 되었다면, 불에 녹은 정신이 이룬 것은 한 자루의 검.
형도, 식도, 의도 버린 채 검이라는 것만으로 증명하는 불의무형의 존재, 그것을 마음에 담음으로써 나는 이미 인간의 형상을 한 검이 되어 있었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한때나마 무위지경, 무아지경, 심마지경, 물아지경의 사대검경을 깨우쳤다 생각했던 내가 얼마나 어리석고 오만했는지를, 나는 단지 성문의 먼 밖에서 성벽 위로 힐끗 보이는 성탑을 발견하고, 그 안에 들어섰다 착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가까스로 성문을 지나, 하나의 탑 안에 발을 들였음을 말이다.
기나긴 대륙의 역사에도, 어째서 여러 검경을 깨우친 검자가 없었는지 이제는 알 것 같았다. 그들은 그러지 못한 게 아니다. 단지 그럴 필요도, 여유도 없었을 뿐이다.
무위지경이라는 탑 안에 들어섰음에도 탑의 꼭대기는 너무나 멀어 보이지도 않는다.
평생을 정진해도 감히 도달하기는커녕, 가늠조차 할 수 있을지 모를 정도로 아득함.
이것을 앞두고 다른 검경을 돌아다니다니, 그런 여유를 부리는 검사 따위가 감히 검자라 불릴 수 있을 리가 없다. 결국 나는 우물 안의 개구리였다. 아니, 개구리도 하늘 높은지는 안다고 하였으니, 우물을 하늘이라 여긴 나는 그보다 못하다.
나는 단지 타고난 재능과 뛰어난 검술, 강인한 신체라는 편법으로 검자를 흉내 내고 있었을 뿐. 이제야 다른 검자와 동일한 선에 도달한 것이다. 이 탑을 계속 오른다면, 다른 검자들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가 이룬 경지를 넘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참의 시간 동안 깨달음을 정리하고 조용히 눈을 뜬 내게 그는 어느새 완성된 한 자루의 검을 내밀었다.
“쥐어라. 이 검의 이름은 ‘수호하는 자= INAY FULRD MLN-FRIM-RHE ECAE’, 악으로부터 수호하는 검일지니, 너의 의지가 꺾이지 않는 한 어떠한 악도 이 검을 꺾지 못할 것이다.”
“…예.”
나는 그가 내민 검을 떨리는 손으로 받아 들었다. 그 형식은 롱소드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황금빛과 은백색이 교차하는 검면 위에 은은한 빛을 발하는 백금색 문자가 새겨져 있고, 때때로 보석처럼 붉은 광채를 발하는 그 검은 내가 봐 온 그 어떤 예술품보다도 아름다웠다.
우우웅―!
그리고 검을 움켜쥐는 순간, 나는 느꼈다.
검에서 시작되어 전신으로 퍼져 나오는 울림을….
단지 쥐는 것만으로도, 내가 이 아름다운 검과 하나가 되었음을….
어떻게… 이런 검이 있을 수가 있는가?
단순히 예술적인 가치만이 아니다. 이토록 가볍고, 예리하며, 강인한 검이라니….
한순간 검과 일체화됨으로써, 그 모든 것을 단숨에 직관한 나는 경탄했다.
대륙 27대 명검 중 하나이자, 라바일 가문의 가보인 ‘참암검’조차 이 검에 비할 바는 못 된다. 더구나 이 신비하고도 강대한 기운이라니….
가히 신화시대에 신과 악마, 용들이 만든 신검이나 마검, 용검과도 비견될 만한 검이었다.
검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던 나를 두고, 그는 하나의 검은 팔찌를 아리스에게 건네주었다.
“받아라. 이 팔찌의 이름은 ‘용의 그림자= りゅう・かげ’. 악을 다스리는 권세의 인장이니, 네가 원하는 한 어떠한 악도 너를 속박지 못할 것이다.”
“으응….”
검은 용의 형상을 한 팔찌를 받아 들고, 당혹스러운 기색을 드러내는 아리스의 모습에서 나는 저 팔찌, ‘용의 그림자’ 또한 이 ‘수호하는 자’ 못지않은 기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의 능력이라면 형태에 구애받지 않을 테니까,
그 팔찌를 차고 복잡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가 나와 시선을 마주치고는 싱긋 웃는 아리스를 나는 웃음으로 맞이해 주었다.
지금까지의 어두움이나 질투 따위가 아닌, 그저 편안하고 잔잔한 마음을 담아….
다만, 일말의 부끄러움까지는 숨기지 못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