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8)
7일류 검사의 고행(4)
“어째서…?”
왜 내 검을 안 피한 걸까.
왜 나를 죽이지 않은 걸까.
왜 2교관을 쓰러트린 걸까.
그가 2교관의 검을 막아 주지 않았다면 내 목은 이미 바닥에 나뒹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5교관이 나를 구해 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렇게 혼란에 빠져 있던 나를, 5교관은 차가운 음성으로 질책해 왔다.
“자신의 살기 때문에 남의 살기를 느끼지 못하는 검사라니. 멍청한 놈.”
“……!”
그 싸늘한 음성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나는 생사결에 치중해 주의력을 잃었다.
하지만 이 사내는 그 상황에서조차 2교관의 살기를 잡아냈다.
검사로서의 기량에 있어, 결국 나는 이 사내의 반의반도 따라잡지 못한 것이다.
그는 내게 하나의 주머니를 던져 주었다.
“탈출에 필요한 물건을 몇 개 챙겨 뒀다. 안에 들어 있는 지도를 따라가라.”
“무슨 뜻입니까?”
나를 죽이기는커녕, 탈출을 도와주다니.
게다가 꼭 필요한 물건만 들어 있는 주머니는 이미 예전부터 오늘 같은 일을 대비해 준비해 둔 것처럼 느껴졌다.
더 깊은 혼란에 빠진 내게, 5교관은 냉정하게 말했다.
“착각하지 마라. 너는 어디까지나 미끼에 지나지 않는다.”
“미끼, 입니까?”
“그렇다.”
나는 겨우 상황을 이해했다.
생각해 보면 5교관도 언젠가는 ‘데스 쉐도우’를 벗어나야 하는 입장.
내 정체는 이미 들통났다.
그렇다면 그도 조직에 남기 힘들 것이다.
지난 1년간, 그가 나를 철저하게 교육한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니까.
그 점을 고려하면 이 냉정한 사내가 이참에 나를 미끼로 삼아 탈출하려는 것도 당연했다.
“…당신에게 입은 은혜는, 그걸로 갚으면 되는 겁니까?”
“그 이상은 필요하지도, 바라지도 않는다.”
짧은 침묵 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끼가 되는 게 자살행위라는 건 안다.
하지만 5교관은 내게 검을 가르쳐 준 은인이다.
생사결보다는, 차라리 이런 방법으로 관계를 정리하는 것이 더 낫다.
그래, 그렇지만….
왜 이 결과과 허전한 걸까.
어차피 그에게 나는 단순한 계약 상대.
뭔가를 바라도, 원해도 안 되는 관계인데.
“이것도 받아 둬라. 도피 생활을 하려면 필요할 거다.”
내가 머뭇거리고 있을 때.
5교관은 또 하나의 주머니를 건네줬다.
묵직한 무게를 볼 때 결코 적지 않은 돈.
이런 것까지 주는 이유는, 가능한 한 오래 미끼 역할을 해 주길 원해서일 것이다.
적어도 이 숲을 벗어날 때까지는 살아남으라는 뜻이기도 하다.
“시간이 없다. 어서 가라.”
“그렇다면, 당신은?”
“나에 대한 생각은 끊어라. 너는 그저 이곳을 탈출해 살아남을 것만 생각하면 된다.”
나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래, 5교관이라면 이미 자신만의 탈출 계획을 가지고 있을 터.
미끼인 내게 그것을 밝힐 이유는 없다.
“언젠가는… 당신의 진짜 후계자와 검을 겨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단 한 번도 그를 이겨 보지 못했는데, 이렇게 헤어져야 하는 분함을 억누르며.
나는 그를 스쳐 지나갔다.
아마도 다시는 5교관을 만날 수 없겠지.
그렇다면 그 후계자라도 만나 검을 겨뤄 보고 싶다.
내가 간접적으로나마 그에게 설욕할 수 있는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그때, 뭔가 기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멍청한 녀석….”
무겁다기보다는 가볍고.
차갑기보다는 따듯하며.
낯익기보다는 낯설기만 한.
분명 실소라 할 만한 것이 섞인 음성.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긴 했지만, 나는 내 귀를 믿기 힘들었다.
그리고 여전히 차가운 5교관의 모습은, 내 불신감에 한층 더 힘을 실어 주었다.
내가 목소리를 착각하는 일 따위는 있을 리 없다.
하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저 5교관의 실소라는 것은 내게 있어 현실의 붕괴처럼 느껴졌다.
잠시 후, 나는 고개를 되돌렸다. 그리고 굳어진 몸을 억지로 움직여 계속 나아갔다.
5교관이 웃은 게 믿기지 않았다.
현실감이 무너지는 느낌이 들 만큼.
그래서 그 자리에서 도망친 것이다.
검사에게 도주는 수치지만, 내게는 현실감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했다.
나는 그렇게 애써 혼란을 떨쳐 냈다.
동시에 전력을 다해 숲속을 치달렸다.
이제 추살대는 내게 몰려들 것이다.
내가 미끼가 된 틈을 타, 5교관은 조용히 사라질 테고.
그 사실을 떠올린 나는 다시 허전함을 느꼈다.
이 허전함은 대체 무엇 때문일까?
‘데스 쉐도우’를 떠나서는 아닐 것이다.
이미 그림자 베기를 얻었으니까.
물론 5교관과 헤어져서도 아닐 것이다.
이미 전장의 불꽃을 얻었으니까.
그래, 그렇다. 그래야 한다.
그렇지만, 그 둘은 결코 같지 않았다.
‘데스 쉐도우’를 떠날 때는 시원함마저 느꼈지만, 5교관을 뒤로하면서는 답답함마저 느낀 것이 그 사실을 증명했다.
하지만 나는 그 사실을 외면했다.
지금은 살아남는 데 집중해야 한다. 이런 잡념에 흔들릴 때가 아니었다.
그렇게 집중한 덕분인지.
나는 하루 동안 추살대를 따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데스 쉐도우’의 영역인 이 숲에서 끝까지 추적을 피할 수는 없었다.
촤악!
30번째. 아니, 31번째였나?
나는 또 한 명의 추살대를 처리했다.
그리고 시체의 옷자락으로 검에 묻은 피를 닦아 냈다.
필요 없어진 옷자락을 동쪽에 흘려 두고 흔적을 지우며 북쪽으로 움직이길 한참.
은밀한 토굴을 찾아낸 나는, 좀 떨어진 수풀 속에 숨어 휴식을 취했다.
-전투가 끝난 직후라도 경계를 소홀하게 해선 안 된다.
-항상 병장기의 손질을 잊지 말고, 급할수록 천천히 생각하여 행동하라.
-숨기 좋은 장소일수록 찾기 쉬우며, 마음의 사각이야말로 가장 찾기 어려운 장소임을 명심하라.
그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나는 내심 경탄했다.
필요 없다고 생각한 생존 기술이었다.
하지만 정작 지금, 생존 기술은 검술 이상으로 내게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5교관이 가르쳐 준 것은, 말 그대로 반드시 살아남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나는 다시 궁금해졌다.
직접 경험해 봤기에 알 수 있다.
이 생존 기술은 사선을 수없이 넘나들며 체득한 기술이라는 사실을.
그는 어떤 삶을 살아왔기에, 이런 생존 기술을 익혀 낼 수 있었던 걸까?
나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이 있다면 하나.
5교관이라면 벌써 추살대를 따돌렸으리라는 것.
설령 아직 꼬리가 붙어 있더라도 더 이상 미끼가 필요가 없을 상황이리라.
그렇게 판단한 나는 숨는 데 주력했다.
추살대라도 숲 전체를 뒤질 수는 없다.
포위망을 짜서, 조금씩 좁혀 들어오는 정도가 한계지.
하지만 그의 가르침에 따르면, 움직이는 포위망에는 반드시 빈틈이 존재한다.
그 빈틈을 발견해서 돌파하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한 탈출 방법이었다.
포위망이 붕괴하면, 추살대를 정비할 시간이 소모될 것이다.
내게는 그 시간만으로도 추적을 뿌리칠 자신이 있었다.
적어도 첫 번째 포위망을 돌파한 뒤, 미처 예상치 못한 두 번째 포위망에 발이 잡히기 전까지는 말이다.
“여기까지다. 7호.”
1교관을 비롯한 수십 명의 추살대를 보며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보이는 이들만이 전부가 아니다.
수풀 속, 그늘 뒤, 나무 위까지.
사방에서 수많은 시선이 느껴졌다.
여러 의미로 상정을 벗어난 상황이었다.
추살대가 이렇게 많이 동원된 것도.
1교관으로도 부족해, ‘데스 쉐도우’의 정예인 ‘검의 그림자’까지 나선 것도.
그러나 나는 곧 동요를 가라앉혔다.
아무리 상황이 나쁘더라도, 다수의 적을 앞에 두고 동요를 드러낼 수는 없었다.
“순순히 투항해라. 그러면 목숨만은 보장해 주마.”
“…….”
나는 침묵했다.
1교관이라면 거짓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보장해 주는 것은 ‘목숨’뿐이리라.
고문에 의해 아는 것을 모조리 토해 내고, 폐인이 돼서 감금되는 걸 과연 살아남는다고 할 수 있을까?
결국 내게 주어진 선택지는 오직 하나.
손에 쥔 검을 믿고, 적과 싸우는 것뿐이다.
“…결국 이렇게 되는군.”
나의 투기를 느꼈음일까.
고개를 저은 1교관은 검을 움켜쥐었다.
그런 그의 뒤에서는, 수십 명의 요원이 동시에 검을 뽑아 들고 있었다.
의외라면 의외다.
1교관은 암살자이기보다는 검사.
방심할 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처음부터 수하들을 앞세울 이는 아니었는데.
“그래. 어차피 바위와 불꽃의 마지막 후계자가 쉽게 검을 꺾으리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방금 그 말을 듣고 깨달았기 때문이다.
‘데스 쉐도우’에 내가 잠입했을 때부터, 그들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하지만 그 정도는 처음부터 각오했다.
거슬리는 것은, 불꽃의 후계자라는 말.
물론 내가 5교관의 검을 배운 것은 맞다.
그러나 나는 어디까지나 실험 대상일 뿐, 그의 후계자가 아니다.
더구나 마지막 후계자라니.
정말 터무니없는 소리다.
내가 굳이 반박한 것은 그래서였다.
“저는 전장의 불꽃의 후계자가 아닙니다.”
“너는 5교관에게 전장의 불꽃을 배웠을 텐데.”
“예. 하지만 그의 후계자는 아닙니다.”
1교관은 이해할 수 없는 난제를 본 듯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미간을 편 그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과연, 그다운 방식이로군.”
알 수 없는 말.
의미 모를 시선.
무엇보다 불길한 느낌에 나는 오싹 몸을 떨었다.
그 묘한 감각은 내게 속삭였다.
1교관을 더 떠들게 하면 안 된다고. 그러니 당장 1교관을 베어 죽이라고.
“분명히 말해 두지. 네가 전장의 불꽃의 후계자는 아니라 해도, 5교관이 남긴 처음이자 마지막 후계자임은 분명하다.”
불길함은 더욱 뚜렷해졌다.
1교관은 허언을 할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확언을 하는 걸까.
만약 5교관이 투검자의 후예임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면.
전장의 불꽃을 뺏어 내기 위해 철저하게 조사했다면, 내가 그의 첫 제자라는 것은 알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마지막까지 확신하는 걸까?
그 방법은 오직 하나뿐인데.
내가 무의식중에 짐작하고 있던, 그러나 결코 알고 싶지 않던 결론을 1교관은 간단하게 내려 주었다.
“이미 죽은 자가 더 이상 후계자를 기를 수는 없을 테니까.”
거짓말이다.
결코 그럴 리 없다.
5교관은 나보다 뛰어난 검사였다.
진리의 탑의 현자만큼 박학다식했고, 무엇보다 살아남는 데 탁월한 전문가였다.
그런 그가 나를 미끼로 삼기까지 했다면 ‘데스 쉐도우’라도 5교관을 죽일 수 있었을 리 없었다.
…그래.
나를 미끼로 삼기까지 했다면.
“5교관 또한 너와 마찬가지로 전장의 불꽃 때문에 조직에 받아들여진 인물. 그렇기에 그는 섣불리 검술을 보이지도, 전하지도 않았다. 전장의 불꽃을 전하는 순간 자신의 이용 가치가 사라지고 조직에 의해 처분되리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
믿을 수 없다.
나를 현혹하기 위한 거짓말이다.
1교관의 말이 진실이라면, 5교관은 내게 검술을 가르쳤을 리가 없다.
“그렇기에 5교관은 목숨을 걸고 너를 길러 냈고, 죽음을 각오하며 스스로를 미끼로 삼아 네게 도주할 시간을 벌어 준 것이다.”
우습다.
웃기지도 않는다.
목숨을 걸고 검을 배운 것도, 미끼가 된 것도 5교관이 아닌 나였다.
그런데 1교관은 반대로 말하고 있다.
진실을 모조리 뒤집어 나를 속이려 하고 있다.
결코 믿기지 않고, 그렇기에 믿을 수밖에 없는, 너무나 잔혹한 거짓말로.
“만약 내가 아니었다면 그는 충분한 시간을 끌었을 테고, 우리가 여기서 조우하는 일도 없었을 테지.”
알아듣기도 힘든 엉터리 거짓말.
그러나 그 속에 숨겨진 하나의 의미를, 나는 혼란의 와중에도 정확히 깨달았다.
“당신이, 그를…?”
“그래, 그는 나와의 정당한 대결 끝에 죽음을 맞이했다.”
이것이야말로 1교관의 말이 거짓이라는 증명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5교관이, 1교관과의 대결에서 패할 리가 없으니까.
“만약 2교관과의 싸움에서 입은 어깨의 부상만 아니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가 죽은 이상, 너의 도주도 여기서 끝이다.”
어깨의, 부, 상.
말의 칼날이, 가슴을 꿰뚫는다.
심장이 잘려 나가는 듯한 충격 속에 나는 깨닫고 말았다.
1교관의 말은 진실이었다는 것을.
그의 후계자라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을.
그런데도 끝내 부정한 것은, 그의 죽음을 인정하기 싫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웃어야 했지만 울 수 없었다.
울어야 했지만 웃을 수 없었다.
왜 좀 더 빨리 알지 못했을까.
아니, 왜 좀 더 빨리 인정치 못했을까.
헛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나는 결국 마지막까지 그를 부정하고, 결국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저항한다면, 사지 정도는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망연해진 상태에서도, 1교관에게 대응해 검을 치켜드는 몸.
그 속에서 나는 다시 한번 깨달았다.
설령 그 누가 죽더라도, 내 손은 검을 놓지 않을 것이라는 ‘환희’를.
그것은 내 의지로는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한계라는 ‘절망’을.
희비가 교차하는 비통함 속에서, 나의 검은 휘둘러졌다.
촤악―!
부딪침은 없었다.
그저 한 자루 검이 부러지고, 누군가의 목이 떨어져 나갔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이미 1교관의 시체 대신, 부나방처럼 달려드는 추살대에게 검을 겨누고 있었다.
그래, 그렇다.
이것이 어쩔 수 없는 나 자신.
내게 중요한 것은 오직 한 자루 검뿐.
그렇기에 나는 드높은 이상도, 드넓은 야망도 가질 수 없다.
내게 의미 있는 것은 오직 검뿐이니까.
나는 모든 것을 검으로 맺고 끊는 자.
스스로의 마음까지도 검에 맡기는 자.
오직 손에 쥔 검 하나밖에 모르는 자.
슬픔의 눈물조차도 검으로 흘리는 자.
그러나 어쩔 수 없다.
나는 삼류도, 이류도 아닌 일류.
평생토록 그 끝을 추구하는 자니까.
그렇게 한 명의 검사로서.
나는 내일을 죽여 간다.
* * *
휘이잉―
무거운 바람이 치솟아 오르는 계곡.
그 장소를 향해, 느릿느릿하게 다가가는 하나의 인영이 있었다.
질질 끌리는 발.
힘없이 늘어진 어깨.
반쯤 감기다시피 한 눈.
거기에 피범벅이 된 옷까지.
모든 면에서 산 시체로만 보이는 인영은, 그 상태에서도 꾸준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나무와 수풀이 대신 나타난 절벽 앞에서는, 인영 또한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인영을 멈춘 것은 절벽이 아니었다.
온통 피와 흙먼지로 뒤덮인 채, 절벽 앞에 꽂혀 있는 한 자루의 검.
그것이 어린 검사를 굳게 하고 있었다.
“…….”
어린 검사는 검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무너지듯 무릎을 꿇었다.
검을 쥔 손도 지금만은 바닥을 짚었고, 살기로 팽만해 있던 육신 또한 긴장을 풀었다.
대신 어린 검사의 마음을 가득 채운 것은 슬픔과 한탄.
되돌릴 수 없는 후회와 그리움이었다.
“… 당신께서는 제게 정말 많은 것을 주었습니다.”
검, 지식, 삶. 그리고 죽음까지.
피 한 방울 흐르지 않는 타인에게 주기에는, 너무 많고도 귀중한 것들.
“너무나 깊고도 순수했기에, 오히려 마지막까지도 그 깊은 은혜를 깨닫지 못한 저의 어리석음이… 그저 안타깝고도 후회될 뿐입니다.”
백 마디 말이 있든, 어찌 이 은혜를 말할 수 있을까.
천 마디 글이 있든, 어찌 이 후회를 적을 수 있을까.
어린 검사가 할 수 있는 일은 평소처럼.
그러나 평소에는 결코 하지 못했던, 영영 대답을 듣지 못할 대화를 홀로 이어 나가는 것뿐이었다.
“이 은혜는 죽어서도 갚지 못할 정도로 깊으니, 저는 살겠습니다. 반드시 살아서 조금이나마 당신께 보답하고, 죽어서도 다시금 은혜를 갚겠습니다.”
어린 검사는 절벽에 꼽힌 검을 뽑았다.
그리고 슬픔으로 젖어 있던 눈에, 굳은 의지를 세웠다.
“이것은 검에 건 맹세일지니, 나의 검과 피와 긍지가 사라지는 그날까지 이 맹세는 반드시 지켜질 것이다!”
어린 검사의 맹세는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맹세를 마친 후, 그 검을 천으로 감싼 어린 검사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서서히 절벽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이것은 오직 어린 검사만이 아는 이야기.
십 대의 나이에 일격 필살의 삼대 검류를 통합한 천재.
단신으로 ‘데스 쉐도우’를 궤멸시킨 사상 초유의 영웅.
사상 최연소 검자로 불릴 천검자 세레나 R. 라바일.
그녀가 자신의 처음이자, 마지막 스승에게 보내는 작별 인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