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81)
80마왕의 득오
마로써 태어나 마를 지배하는 자, 모든 마를 다스리고 통치하는 자, 절대 무한의 마력을 사역하는 자, 홀로 일천의 군세를 상대하는 자, 세상 그 누구보다 탐욕스러운 자, 세계를 파멸로 이끄는 파멸의 왕, 그 운명의 이름이 바로 마왕이라.
벗어날 수 없는 운명에 대한 절망은 아무리 쏟아 내고, 흘려 내도 끝없이 솟아났다.
그 질척질척한 절망이 열기로 뒤바뀌기 전, 나는 한 손을 가슴에 대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안 돼, 이대로는 정말 ‘마왕’이 돼 버린다. 그것이 결코 피할 수 없는 운명일지라도.
적어도 지금 이곳에서 그렇게 돼서는 안 된다. 나는 땅에 쓰러진 어미 멧돼지에게 다가갔다. 아픈 어미를 지키려는 듯, 새끼 멧돼지들이 다시 달려들어 왔지만.
한 마리, 한 마리를 조용히 다독이며 어미 멧돼지의 상처를 살펴보았다.
“다행히, 그리 심하진 않구나.”
멧돼지의 갈비뼈가 부러진 것을 확인하고, 나는 근처에서 뽑은 약초를 상처에 발라 주었다.
그리고 짧은 나뭇가지를 대고, 옷을 찢어서 만들어 낸 천으로 단단히 동여맸다.
간단한 응급조치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미안해.”
마지막으로 멧돼지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뒤, 나는 ‘검은 벌레 풀’과 ‘눈물 흘리는 꽃잎’을 채집해 도망치듯 꽃밭을 벗어났다. 헤어날 수 없는 절망의 무게에 짓눌려, 터벅터벅 대장간으로 돌아온 나는 문뜩 낯선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깡! 까앙―! 깡! 까앙―!
무슨 소리지?
그 기묘한 소리를 쫓아 대장간으로 돌아와 문을 열자, 후끈 밀려 나온 열기에 나는 일순 주춤했다. 그리고 감았던 눈을 뜬 뒤에는 대장간 한가운데 무릎 꿇고 있는 세레나와 화로 앞에서 망치질에 전념하는 그를 보고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대체 뭘 만들고 있는 거지? 세레나는 왜 이러고 있는 거고?
그 순간, 망치질 소리가 멈추며 모루만을 주시하던 그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나는 그의 눈동자를 빠져들듯 마주 보다가 어느새 다가온 그가 무뚝뚝하게 입을 연 뒤에야 퍼뜩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마법과 마술, 마도의 경계가 무엇인지 아나?”
너무나 간단한 질문, 굳이 현자나 마법사가 아니더라도 마법에 대해 약간의 식견만 지닌 이라면 그 차이가 주문의 수에서 비롯된다는 것쯤은 당연한 상식으로 알고 있다.
숫자야말로 악마의 힘, 그렇기에 악마의 수는 아흔아홉이며 악마학이 저주받은 학문이라 불리는 것이니까.
그러나 그 차가운 눈동자에 넋을 잃은 나는, 창피하게도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아니…요.”
이런, 바보 같으니, 얼빠진 대답에 귀가 빠지게 부끄러워진 내게 그는 ‘검은 벌레 풀’과 ‘눈물 흘리는 꽃잎’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작은 그릇에 그것을 넣고 빻으며, 나지막이 말문을 열었다.
“법(法)이란 구속됨이고, 술(術)이란 따름이고, 도(道)란 이룸이다. 마에 통제되면 법이 되고, 마와 합일하면 술이 되고, 마를 지배해야 도에 이름이니, 지금까지 마도사가 나오지 않은 것은 봉인된 악마라는 구속에 지나치게 얽매였기 때문이다.”
두근.
순간의 놀람이 부끄러움을 송두리째 뺏어 간다.
왜 하필이면 지금, 내게 그런 말을 하는 거지?
설마… 내 상태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는 건가?
아니, 그건 말도 안 된다. 설령 진리의 탑의 현자나 아홉 명의 마술사, 또는 각 신전의 삼대 신관이라도 불가능한 일인데…!
그런 나의 경악과는 별개로, 그는 무뚝뚝하게 음성을 이어 갔다.
“악마가 곧 마일지는 모르나, 마가 곧 악마인 것은 아니다. 하니 악마가, 아니 마에 대해 아는 것에서부터 마도는 시작되고, 마에 대해 알게 되는 것으로 마도는 끝맺는다.”
생각 속에는 죄가 생기고 ‘念中罪’
뜻 속에 악이 숨어들듯이 ‘意中惡’
마음 안에는 마가 있으니 ‘心中魔’
이 이치를 알지 못한다면 ‘未得知’
절대로 도를 얻지 못한다. ‘不得道’
생각이 곧 형상을 이루고 ‘念卽想’
뜻이 곧 통달에 도달하듯 ‘意卽通’
마음이 곧 자신을 만드니 ‘心卽我’
이 이치를 깨닫게 된다면 ‘悟得知’
누구나 도에 이르게 된다. ‘必得道’
“이것은 과거, 신화시대 때 동방서해에 존재했던 만(卍)나라에서 전해졌다는 자구다. 이 30자의 구결이라면 마도를 깨우치는 데 약간의 도움을 줄 것이다.”
두근.
심장이 거세게 요동쳐 온다. 약그릇을 치우고 검은 팔찌와 두루마리를 꺼내며 그가 해 준 말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나의 영혼을 울린다. 한낱 마술의 도해나 해석 따위가 아니다.
그야말로 ‘마’ 자체를 정의하고 논하는, 오로지 도(道)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그 가르침에 내 안의 마가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마를 이뤄 내려면 우선 마를 벗어나야만 한다.
마를 벗어나려면 우선 마를 다스려야만 한다.
마를 다스리려면 우선 마를 받아들여야 한다.
마를 수용하려면 우선 마를 이해해야만 한다.
마를 이해하려면 우선 마를 느껴 봐야만 한다.
마를 느껴 보려면 우선 마를 이뤄 내야만 한다.
하나에서 시작해 다시 하나로 돌아가는 이치이자,
하나로 끝나지만 하나로 끝나지 않는 이해.
그것을 깨닫는 순간, 내 안에서 무언가가 터져 나왔다. 희열일까? 쾌락일까? 전율일까?
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그렇기에 분명하게 정의 내릴 수 있는 그것, 한낱 주문의 숫자로는 결코 헤아릴 수 없고, 절대 도달할 수도 없는, 그 기나긴 길(道)의 끝자락이 지금 이 순간 내 손에 걸려 있었다.
마가 나의 운명이라면 마를 인정하는 것 또한 하나의 길, 그 길에 도달하면… 흑마법의 후유증을 억누르는 것도 가능하다. 아크넬의 분노는 곧 아크넬의 마력, 그러니 아크넬의 마력을 억누를 수만 있다면, 분노까지도 함께 제어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아크넬이 아홉 대악마 중 하나라도, 나의 한 손은 마도(魔道)의 끝자락에 닿아 있다. 이것을 완전히 이룬다면, 흑마법의 후유증을 신경 쓸 필요조차 없어진다.
그리고 나는 이미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빨리 마도에 도달할 수 있을 지름길을 알고 있었다. 신과 악마가 지상에 남아 있던 신화시대, 그 당시 동방서해에 위치했다는 나라, ‘만(卍)’. 존재 자체가 전설인 나라에 전해진 이 자구라면… 분명히 나를 마도로 이끌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내면에 잠겨 30자의 구결의 되새기며 나는 기묘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신화시대에 대해 남은 것은 말 그대로 신화뿐, 예외라면 일부 현자들이 찾아낸 기록 정도다.
그런데 그는 어떻게 만나라에서 전해지는, 그것도 이처럼 신비한 구결을 알고 있는 걸까? 하나 이어진 그의 행동에, 나는 그 하찮은 의문을 깨끗하게 잊어버렸다.
촤르륵―
한 손으로 낡은 두루마리 양피지를 펼쳐 들고, 다른 손가락 끝에 은회색 즙을 발라 아직 달아올라 있는 검신에 대고, 그는 나지막이 말문을 열었다.
“VHLV JS RHE ECAE.”
…무슨 말이지? 그 생소한 언어에 의아해하길 잠시, 나는 깨달았다. 그것은 오래전 멸망한 사메리카 왕국의 언어, 엘그리시라는 것을….
“VHLV JS INAY FULRD.”
하지만 저런 엘그리시어가 있었나?
아니, 그보다 저 빛은… ?!
두루마리에서 흘러나온 은은한 빛이 그의 손을 타고 검신으로 스며드는 모습을 보고, 나는 경악으로 숨 쉬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VHLV JS SI MLN.”
맙소사. 설마, 그럴 리가…! 나는 그가 쌍검자의 검술로 산적을 베는 것도, 암흑 교단의 체술로 빙설관 레닌을 상대하는 것도, 직접 성력을 사용하는 것도 보았다.
하지만 그중 어떤 것도, 지금만큼 나를 놀라게 하지는 못했다.
그가 말을 끝맺는 것과 함께 산산이 부스러진 두루마리가 빛이 되어 사라진다.
그 대신 검신 위로 떠오른 백금색의 문자가 나의 추측에 확증을 더해 준다.
…정말, ‘주술 문장’이라고?
증거를 보면서도 불신을 거두지 못한 내 앞에서, 그는 또 다른 두루마리를 꺼내 든 뒤 검은 팔찌를 움켜쥐고 다시 그것을 읽어 나갔다.
“あるかく·じょうくう·ちゃった·かげ”
카사나타까지…! 대륙의 동쪽 끝의 작은 섬나라 카사나 왕국, 그 언어인 카사나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알려진 그 어떤 카사나타 중에서도 지금 그가 읽고 있는 말은 없으리란 사실을 나는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てんしょう·だい·さだまる ·うたいおどる”
…어떻게 이럴 수가? 도저히 믿기 힘들었지만, 믿어야만 했다.
두루마리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그리고 그 음성 하나하나에서 느껴지는 힘이, 그 무엇보다 분명한 증거이니까.
“かぜ ·しんちん·みきわめる ·てんち”
이게, ‘주술사’의 힘이란 건가?
또 하나의 두루마리가 빛으로 화해 사라지며, 팔찌에 떠오른 검붉은 문자를 보며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주술’, 그것은 오랜 역사를 지닌 국가에만 존재하는 더없이 신비하고도 비밀스러운 힘, 한때 마왕이라 불리던 나조차, 주술이 각 나라의 언어를 바탕으로 ‘주술 문장’이라는 고유의 주문을 만들어 힘을 발휘한다는 것, 그리고 그 주문에 나라의 모든 힘이 깃든다는 사실만을 겨우 알고 있을 뿐이다.
주술에 대한 지식부터가 알려진 것이 드문 만큼, ‘주술사’란 철저하게 비밀에 싸여 있는 존재다. 나 또한 어쩌다 우연히 알게 됐을 뿐, 숱한 전쟁을 치르면서도 각국의 비밀 병기이자 최후의 보루라는 주술사를 만나 본 적은 없다.
아니, 주술사가 실존하는지조차 의심한 적도 있다. 쌍검자가 사용한 것으로 유명한 쌍검 ‘필승불패의 만가’를 비롯해 몇몇 명검이나 기보에 주술이 사용됐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실제로 주술을 견식 해 본 적은 없었으니까.
한데 설마 눈앞에서 직접, 그것도 그가 주술을 쓰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코드, 나 정말 이것만은 묻고 싶은데… , 당신… 정말 못 하는 게 뭐야?
내가 경탄을 넘어 질색까지 하며 보는 가운데 붉은 가루를 뿌린 검과 팔찌를 화로에 넣었다가 다시 빼내어 마무리 작업을 마친 그는, 세레나에게 검을 내밀었다.
“쥐어라. 이 검의 이름은 ‘수호하는 자=INAY FULRD MLN-FRIM-RHE ECAE’, 악으로부터 수호하는 검일지니, 너의 의지가 꺾이지 않는 한 어떠한 악도 이 검을 꺾지 못할 것이다.”
“…예.”
세레나가 떨리는 손으로 검을 받아 드는 그 낯설고도 드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그가 갑자기 시선을 돌리며 검은 팔찌를 내밀자, 세레나 이상으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받아라. 이 팔찌의 이름은 ‘용의 그림자=りゅう・かげ’, 악을 다스리는 권세의 인장이니, 네가 원하는 한 어떠한 악도 너를 속박지 못할 것이다.”
“으응.”
나한테… 주는 거야? 이걸?
경직된 몸을 겨우겨우 움직여, 그가 갑자기 나에게 내민 검은 팔찌를 받고 나는 홀린 듯 그것을 바라보았다.
팔을 나선형으로 칭칭 휘감아 드는 꼬리, 섬세하게 조각된 뿔과 이빨, 보석처럼 붉게 빛나는 눈과 기묘한 광택으로 번뜩이는 몸체, 무엇보다 표면에 빽빽하게 새겨진 기묘한 문자가 비늘을 대신해 미묘한 굴곡을 만들어 내며 그 신비감을 드높인다.
과거 세계의 반을 지배했던 자로서, 나는 온갖 기진이보를 모으고 구경해 봤고, 그중에는 제국 보물 창고에 들어갈 만한 보물이나, 드라고니아에나 있을 법한 기보조차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분명 이보다 더 화려하거나 아름다운 보물 또한 있었다.
하지만 이토록 신비한 느낌을 주는 보물은,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한참 팔찌를 넋 놓고 바라보고 있던 나는 문뜩 무언가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마족인 나를 가족으로 여기고 이런 보물을 기꺼이 선물해 준 그의 마음이 너무나 고맙고도 감격스러워서 그만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울어서는 안 됨을 알기에 나는 웃었다. 그리고 망설이던 한 가지 결심을 굳혔다.
‘떠나자.’
이것이 배신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 마력이 폭주해, 주변의 모든 것을 날려 버릴지 모르는 위험이 있는 한, 내게 주어진 선택이란 오로지 그것뿐이었다. 세레나를 위해서도, 나 자신을 위해서도, 그리고… 그를 위해서라도.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차마 결심하지 못한 것은 그만큼 이별이 아쉬웠기에.
다시는 그와 세레나를 만나지 못하고, 평생을 산속에 틀어박혀 홀로 살 각오가 부족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됐다. 늦어도 10년, 그 정도면 마력을 수습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이, 그리고 다시 이들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내게 용기 있는 결단을 내릴 수 있게 해 주었다. 조금은 마음이 아프고 조금은 서글프지만, 그래도 거짓되지만은 않은 가면 위로 한 줄기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나는 이들의 곁을 떠날 결심을 굳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