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82)
81영웅의 휴식(1)
그에게서 검과 팔찌를 나눠 받은 뒤, 나는 아리스와 대장간을 정리하고,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곧장 휴식을 취했다. 그동안의 강행군으로 인해 지쳐 있었던 만큼, 아리스는 침대에 눕자마자 그대로 잠이 들었고, 나 또한 피로가 쌓인 만큼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벽과 천장과 침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안가의 잠자리는 더없이 편안했고, 하룻밤 만에 피로의 대부분을 풀어낼 수 있었다.
부스럭….
‘누구지?’
아직 날이 어둑한 아침 무렵, 희미한 인기척에 잠에서 깨어난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곁에 둔 검을 움켜쥐었다.
어제까지는 느끼지도 못했을 정도로 은밀한 기척. 그러나 검경을 깨닫고 감각이 열린 뒤부터 보다 많은 것을 보고 들을 수 있게 되었기에 가까스로 그 기척을 느끼는 것이 가능했다.
나는 2층의 창문을 열고 바깥을 살폈다. 그리고 가방을 메고 숲으로 걸어가는 그의 모습을 보고 의아함을 느꼈다.
이 이른 아침에 어딜 가시는 거지? 건강도 좋지 않으신 몸으로. 홀로 산에 들어간다는 사실에 걱정하기도 잠시, 나는 곧 걱정을 떨쳤다.
다른 누구도 아닌 저분이 산짐승에게 해를 입으실 리는 없을 테니까, 수풀 사이로 완전히 그 모습을 감출 때까지 그분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몸을 돌렸다.
아리스는… 아직 자고 있구나.
곤히 잠들어 있는 소녀를 깨우지 않기 위해 나는 조용히 안가를 나섰다. 그리고 뒤쪽의 샛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 샛길의 끝에서, 어제 아리스에게 들었던 꽃밭을 발견한 나는 약간 씁쓸한 심정을 느꼈다.
꽃밭을 얘기하면서도 소녀는 무표정했다. 하지만 보석처럼 빛나던 보랏빛 눈동자만은 꽃밭에서 느낀 감동과 기쁨을 가득 담고 있었다.
‘어리석은 짓을.’
대체 뭘 기대했던 걸까?
나는 고개를 저어 잡념을 떨쳤다. 그리고 꽃밭의 중심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림자 베기’, ‘전장의 불꽃’, ‘바위의 검’.
일격 필살의 삼대 검류로 명성을 떨쳐온 세 검술, 그것을 그가 통합하여 기틀을 만들고, 내가 완성해 낸 총 12식의 검술 ‘홍염의 불꽃’.
그러나 내가 지금까지 알던 ‘홍염의 불꽃’은 실질적인 의미로 완성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림자 베기와 전장의 불꽃만 알았을 뿐.
바위의 검까지는 모르고 있었기에 추측에 근거해 홍염의 불꽃을 창안했다. 그렇기에 그림자 베기와 전장의 불꽃으로 만들어낸 전사식은 높은 완성도가 있는 반면, 바위의 검이 섞인 중사식은 부분적으로 미흡하거나, 잘못된 부분이 남아 있었다.
단지 워낙 정교하게 만들어진 검술이기에, 미흡한 나로서도 부족한 부분을 채울 수 있었다.
하지만 후사식은 그조차 이론만을 만들어 냈을 뿐, 검식조차 제대로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 이론을 바탕으로 검식을 갖춰 냈기에 나는 후사식을 완성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단지 착각에 지나지 않았다. 검경을 얻은 지금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홍염의 불꽃, 일격 필살의 삼대 검류를 통합하여 만들어 낸, 일격 필살의 극에 도달한 검술의 진정한 모습. 서서히 호흡을 고른 나는, ‘홍염의 불꽃’을 차례대로 펼쳐 나가기 시작했다.
촤르륵!
어깨만을 움직여 섬광으로 허공을 꿰뚫고, 팔을 거두지 않은 채 연이어 바람을 가른다.
수많은 검영을 흩뿌리며 은밀히 꽃을 베어 내고, 동시에 네 줄기 검광을 분출해, 허공에 띄운 꽃을 8조각의 꽃잎으로 조각낸다.
전사식은 속도와 기교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최소한의 체력 소모로 적을 베기 위한 검식이다.
용병 검술인 ‘전장의 불꽃’과 암살 검술인 ‘그림자 베기’가 결합했기에 만들어질 수 있었던 가장 완벽한 효율성을 지닌 검술이기도 하다. 그러나 ‘홍염의 불꽃’에서 전사식은 기초일 뿐, 그 본격적인 위력은 중사식부터 시작된다.
후우웅!
한 걸음을 내디디며 휘두른 검이 대지를 쪼개고, 빙글 돌며 내뻗은 검광이 사방을 베어 넘긴다. 땅을 살짝 긋다가 거세게 올려 친 검에서 일어난 바람이 수많은 꽃을 허공을 띄우는 가운데, 느릿한 검을 중심으로 폭발하듯 꽃잎이 휘날린다.
중사식은 근력과 체력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적을 반드시 쓰러트리기 위한 검식이다.
기사 검술인 바위의 검을 중심으로 삼은, 가장 막강한 파괴력을 지닌 검술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조차 ‘홍염의 불꽃’의 극의는 아니다.
‘홍염의 불꽃’은 검식을 펼치며 생기는 충격을 축적함으로써, 펼치면 펼칠수록 더욱 강해지는 검술, 후사식은 그 특성이 극대화한 검식이며, 그 위력은 검술의 한계마저 초월한다.
하지만 후사식의 위력은 양날의 칼, 모든 충격을 흡수하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극한까지 단련된 내 몸으로도, 지금까지는 반절의 힘만을 축적할 수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검경을 깨닫고 새롭게 탈바꿈한 육신과 감각은 검의 모든 충격을 완벽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니,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푸욱―!
“하아… 하아….”
들어 올릴 힘도 없이 늘어진 팔, 터질 듯이 두근거리는 심장, 멈출 듯이 가쁜 숨결, 당장에라도 쓰러질 듯 체력이 소진된 상태로 나는 땅에 꽂아 넣은 검에 의지해, 몸을 지탱했다.
완성된 후사식의 부담이 엄청나리라는 것쯤은, 처음부터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내 신체에 가해진 충격은 그런 내 예상을 훨씬 초월한 것이었다.
고작 10식, 후사식 중 절반만을 펼쳤음에도 이 꼴이라니 만약 검경을 깨닫기도 전에 이것을 사용했다면, 나는 진즉에 죽거나 폐인이 됐을 것이다.
그러나 나를 섬뜩하게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사실이었다.
“이게, 진정한 ‘홍염의 불꽃’의 위력….”
힘겹게 주변을 둘러본 후, 나는 다리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검식을 펼치기 전까지만 해도 화려하던 꽃밭, 하나 지금 이 순간, 이 드넓은 꽃밭에서 멀쩡한 꽃은 단 한 송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본연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린 채 엉망진창으로 뭉개져 버린 꽃밭의 모습이, 아니 정확히는 꽃밭을 이렇게 만든 검의 위력이 나를 섬뜩하게 만들고 있었다.
10식까지만 펼쳤을 뿐인데도 이런 위력이라니, 만약 11식을 넘어 12식까지 펼칠 수만 있다면 대체 어떤 위력이 나올지,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를 확신할 수 있었을 뿐이다. 진정한 ‘홍염의 불꽃’은, 신이나 악마도 베어 버릴 수 있는 절대 필살의 검이라는 사실을.
스윽―
어느 정도 체력이 회복되자, 나는 천천히 땅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무쇠라도 바스러질 충격에도 불구하고, 깨져 나가기는커녕 금 하나 가지 않은 ‘수호하는 자’를 보고, 나지막이 탄성을 토해 냈다.
신체에 가해지는 부담이 커지는 만큼, 완전한 홍염의 불꽃은 검에도 큰 충격을 준다.
만약 검이 그 충격을 제대로 받아 내지 못하면, 신체에 가해지는 부담은 몇 배가 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수호하는 자’는 놀라운 검이었다. 단지 강도나 예리함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수호하는 자’는 뛰어난 탄력과 유연성을 지니고 있기에 자체적으로 충격을 흡수할 수 있다. 그러한 특성은 홍염의 불꽃의 성질과 맞물려, 검술의 위력을 훨씬 증가시키면서도, 신체에 가해지는 부담감은 오히려 반감한다.
오직 ‘홍염의 불꽃’을 위해 만들어진 검, 그것이 이 ‘수호하는 자’였던 것이다.
아마도 그는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홍염의 불꽃의 진정한 위력은, 대륙 27대 명검조차 감당해 낼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그렇기에 신화시대에 잊힌 전설, 짙푸른 용의 불꽃으로‘수호하는 자’를 제련해 주었을 것이다. 그는… 원래 그런 이니까.
어떤 예술품보다 아름다운 검을 집어넣고, 나는 조용히 몸을 돌렸다. 땅에 떨어진 꽃잎을 조용히 밟으며 꽃이 사라진 꽃밭으로부터 걸음을 옮기길 잠시, 마침내 안가로 돌아온 나는 우뚝 발을 멈췄다.
휘이잉―
산턱을 타고 불어오는 바람은 너무나 상쾌해, 마치 천상의 것처럼 신비롭게까지 느껴진다.
그렇게 조용히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작은 아기 멧돼지와 장난치고 있는 소녀의 모습이 나를 멈추게 했다. 숲속을 노니는 어린 요정의 모습이 이러할까?
은을 녹여 낸 것처럼 반짝이는 은발을 휘날리며, 아기 멧돼지와 장난을 치는 소녀는 너무 귀여워, 그 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던 도중 나는 문뜩 가슴이 따끔해지는 통증을 느꼈다.
그래, 나는 알고 있다. 이것이 무슨 감정인지, 왜 이런 통증을 느끼는 것인지, 내가….
내게는 없던 순수함을 가진 저 소녀를 내심으로는 부러워하며 동경하고 있다는 사실을. 태어나면서부터 가문을 위해 검을 들어야 했다는 사실 따위는 변명이 되지 못한다.
악마의 피를 타고나 인간의 피를 마시며 살기에 신에게 저주받은 더럽고도 추악한 마의 일족, 그런 마족의 일원으로서 인간을 증오하고, 인간에게 증오받으며 살아왔을 것임에도 저토록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는 소녀 앞에서 대체 무슨 변명을 할 수 있을까?
그렇기에 나는 비겁해져야만 했다. ‘어둠의 산의 주인’ 쿠르타나 ‘12식인귀’, ‘25눈을 뿌리는 자’와 겨루면서도 지켜 왔던 긍지를 버리고 추하고 저열해져야만 했다.
나는 결코 가져 본 적도 없고, 가질 수도 없는 순수함을 지닌 소녀를, 정당하게만은 상대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그로 인해 마음을 짓누르는 죄책감은 나 자신의 죄악을 명확하게 느끼게 한다.
그러나 결코 나의 행동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비록 그릇됐을망정, 그것이 모두를 위한 최선임을 믿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 어떠한 죄악을 저지르고라도… 단 하나뿐인 소망을 이루고 싶었으니까.
마음을 묵직하게 눌러 오는 죄악감을 외면한 채 나는 아리스를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신기한 멧돼지네요.”
“응.”
그제야 내 존재를 눈치챈 듯, 보라색 눈동자로 나를 물끄러미 보길 잠시, 아리스는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리며, 아기 멧돼지의 귀를 살짝 잡아당겼다.
뀌익―
“따라오라는 거야?”
뀌익. 뀌익.
아리스가 마족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멧돼지가 특별한 걸까? 마치 말이 통하기라도 하듯, 멧돼지와 얘기를 주고받던 끝에 아리스는 살짝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잠깐 다녀올게.”
멧돼지를 따라가겠다고 말하는 인형처럼 무표정한 얼굴의 소녀를 보며 나는 복잡한 고민에 잠겼다. 왠지 친근해 보이는 둘의 모습을 보면, 별로 위험이 있을 거 같지는 않다.
하물며 아리스는 마족.
빙설관을 상대로 보여 줬던 그 힘은 고작 산짐승에 위협받을 것이 아니었다.
“같이 가도록 해요.”
그런데도 나는 아리스를 혼자 보낼 수 없었다. 여전히 마음을 누르고 있는 죄책감 때문일까? 아니면 그저 순수하게 걱정이 되기 때문일까?
나 스스로도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이 소녀가 위험에 처하는 일만큼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알았어.”
아리스의 얼굴에 스친 옅은 웃음을 보며, 나는 잠시나마 죄책감을 잊고 미소를 지었다.
만약을 대비해 배낭 하나를 챙겨 들고, 나는 아리스와 함께 멧돼지를 따라나섰다.
뒤뚱거리는 아기 멧돼지를 따라가기를 한참, 아기 멧돼지는 점차 산 위로 우리를 안내했다.
이 멧돼지는 무슨 의도로 우리를 유인하는 걸까?
새끼 멧돼지에게서 악의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단지 그 사실 하나만으로 안심하기에 내가 거쳐 온 삶은 너무나 추악했다.
‘데스 쉐도우’는 검술을 목적인 것을 숨기고 그와 나를 조직에 받아들였고, 25눈을 뿌리는 자 세빌리아는 속세에 염증을 느끼고 은거했으며, 12식인귀는 너무나 평범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어둠의 산의 주인 쿠르타는…. 순간 등골을 스쳐 지나간 오싹한 느낌에 나는 무심코 진저리 쳤다.
이미 몇 년이나 지난 일인데도, 쿠르타가 내게 새긴 공포는 아직도 선명했다.
아흔아홉 악마의 시종인 아흔아홉 요마, 그중에서도 서열 1위를 차지하고 있던 최강의 요마 쿠르타.
그 대요마의 힘은 너무나 전율적이어서 나는 쿠르타를 퇴치한 이후, 무려 1년 동안이나 검을 들지 못했다. 당시 내가 쿠르타를 쓰러트린 것은 기적.
지금 다시 싸워도 승리를 자신할 수 없을 만큼, 강하고 사악하던 요마 쿠르타를 상대할 때조차, 나는 단 한 줌의 악의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렇기에 나는 방심하지 않았다.
설사 악의가 없더라도 상대가 한낱 짐승이라도, 내가 무조건적으로 마음을 맡길 수 있는 상대는, 세상에 오직… 두 명뿐이니까.
뀌이익!
“여긴… ?”
새끼 멧돼지의 길고도 긴 인도를 따라, 절벽에 둘러싸인 분지에 도착한 나는 당황했다.
바위투성이 분지에 깔려 있는 후덥지근한 안개가 내게 무언가를 떠올리게 했다.
“이건… 설마?”
그를 잃은 이후, 10년에 걸친 방랑은 내게 많은 경험을 쌓게 해 주었다. 그 경험이, 내게 한 가지 추측을 가능하게 했다. 나는 반신반의하며 안개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예상한 광경을 보고, 탄성을 토해 냈다. 바위와 자갈로 뒤덮인 암석 지대 가운데에서 펄펄 끓으며 수증기를 토해 내는 작은 샘.
본래는 동방 지역에서나 볼 수 있는 그 희귀한 광경이, 나를 놀랍게 하고 있었다. 설마 이런 곳에 온천이 있었을 줄이야.
다른 지역에서는 아예 찾아볼 수조차 없으며, 극동의 화산지대에서도 드문 것이 온천이다.
그나마도 대부분은 권력자가 독점하고 있기에, 온천지대의 주민들조차 함부로 이용하지 못하는 그 귀한 온천이, 이런 외딴 산속에 있다니.
여러모로 의외의 광경이었다.
“샘이, 끓고 있어… ?”
아리스는 온천에 대해 모르는 걸까? 안개 가운데 있는 온천을 살펴보다가, 나지막한 신음을 듣고 소녀를 돌아보던 중 나는 옷자락을 당겨 오는 작은 손길을 느꼈다.
“세레나, 여기는 위험해.”
“네? 위험하다니요?”
이곳이 유황천이라도 된다는 말일까? 하지만 유황 냄새가 나는 것도 아니고, 전에 본 온천과 다를 것이 없어 보이는데…?
무표정한 얼굴에 긴장감을 담은 소녀의 모습에 뒤늦게 서야 경계심을 깨워 주변을 살핀다.
하지만 이어진 아리스의 말을 듣고, 나는 경직돼 버릴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물이 끓는 걸 보면… 이 샘은 지옥에 흐르는 화염의 강, 아르넬타의 지류일지도 몰라. 그러니까 어서 나가자.”
“아…. 아, 아리스….”
온천은 동방에서도 드문 만큼, 다른 지역에는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았다. 나도 우연히 온천을 본 적 있기에 알아봤을 뿐, 보통은 온천에 대해 모르는 게 당연하다.
그러니 이런 오해를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아니지만….
쿡… 쿡쿡쿡…!
나는 애써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해 보려 했지만, 끝끝내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아 낼 수 없었다. 마치 야생 짐승을 만난 고양이처럼, 바싹 긴장한 채 온천을 경계하는 아리스.
그 모습이 꼭 끌어안고 싶을 정도로 귀여워서, 내게 도저히 웃음을 참지 못하게 했다. 고개를 옆으로 틀고, 한 손으로 입을 막아 웃음을 가릴 수 있었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랄까.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리스는 한결 다급하게 내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세레나, 빨리 나가야 해.”
“자… 잠시만요. 아리스, 그런 게 아니에요.”
“뭐?”
웃음을 참는 게 이렇게 힘들 줄이야. 가까스로 말을 할 수는 있었지만, 끊임없이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기 위해 나는 지옥과 같은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그래도 필사적인 노력으로, 나는 겨우겨우 웃음을 참아 낼 수 있었다.
“이건 온천이라는 거예요.”
“온…천?”
난생처음 듣는다는 듯, 의문이 섞인 얼굴을 한 아리스에게 나는 차근차근 온천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무심코 새어 나오려는 웃음기를, 미소로 가린 채.
잠시 후, 모든 설명을 들은 아리스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깊이 숙인 고개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새빨갛게 달아오른 귓불만으로도 아리스의 심정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기에 나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좋은 선물을 받았네요.”
“으응….”
그래. 이것은 아리스이기에 얻을 수 있었던 행운, 나라면 상대가 아무리 어린 새끼라도 이렇게 선선히 멧돼지를 따라오지 못했을 것이다.
멧돼지가 나를 안내해 주지도 않았을 테고. 순수하게 상대를 믿은 아리스가 아니었다면, 결코 이 온천을 발견할 수 없었을 터.
패배감이라고 하기에는 왠지 만족스럽고, 질투라고 하기에는 너무 따스하며, 시기라고 하기에는 약간 부드러운, 묘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는 문뜩 한 줄기 심술을 느꼈다.
과거 온천에 처음 들어가 봤을 때의 기억이 온천을 보고 당황한 아리스의 모습과 어우러져 묘한 장난이 생각났다.
“그럼, 한번 들어가 볼까요?”
“지금?”
“마침 수건도 있으니까요.”
이러려고 배낭을 챙겨 온 건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수건은 충분히 있었다.
그러니까 본래의 목적이야 어찌 됐든, 마침 아침 수련으로 적당히 땀을 흘린 나로선 이처럼 좋은 온천을 구경만 하기에는 아까웠다.
“…….”
아리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침묵을 지켰다. 찬성인지 반대인지 알아보기 힘든 모습.
하지만 나는 그녀의 눈에 어린 곤혹스러움을 분명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그렇게 곤혹스러워하는 소녀를 태연하게 보며, 나는 싱긋 미소 지어 보였다.
“괜찮죠, 아리스?”
무표정한 얼굴에 서린 곤혹스러움이 짙어지며, 그 자줏빛 눈동자를 갈등으로 흔들던 끝에 은발의 소녀는 마침내 고개를 숙였다.
“알았어….”
“후훗, 그럼 들어갈까요?”
왠지 맥이 빠진 듯한 표정으로 아리스가 큰 바위 뒤로 돌아가는 것을 보며, 나는 쿡쿡하며 자그마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역시, 아직은 어리구나. 벗은 몸을 보이는 게 부끄러운 걸 보면 아무리 마족이라도 어린 소녀임이 분명하다. 아니, 어쩌면 그런 부끄러움도 모르는 내가 특별한 것일지도 모른다. 어릴 때부터 남자들 사이에서 검을 휘둘렀고, 자라서는 스스로 ‘데스 쉐도우’에 들어가 남자 훈련생들과 함께 숙식을 같이해야 했으며, 후에는 세계 각지를 떠돌며 살아왔던 만큼, 내게 부끄러움 같은 것은 사치였다.
여성으로서 소양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명가의 후예로서 지켜야 할 의무일 뿐. 부끄러워하거나 수줍어하는 등의 소녀적인 감성은, 나와는 무척이나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웃음을 거둔 나는 천천히 옷을 벗기 시작했다. 튼튼한 가죽 장화에서 발을 빼내자, 맨발에 매끌매끌한 자갈의 감촉이 전해진다.
목 아래를 조이는 여행복의 끈을 풀어 헤치고, 상의를 벗어 내자 가슴의 갑갑한 느낌이 줄어든다. 피부에 착 달라붙은 가죽 바지의 허리끈을 풀고, 양다리를 하나씩 하나씩 차례대로 빼어 내자, 겨울답지 않게 따스하게 달궈진 공기가 환히 드러난 종아리를 부드럽게 간질여 온다. 가슴을 단단히 동여맨 무명천을 풀어 헤치자 답답함이 풀리며 시원한 공기가 폐로 들어왔다. 그렇게 마지막 한 장의 속옷까지 벗어 내고 나는 머리가 젖지 않도록 틀어 올린 뒤, 옷과 배낭을 정리해 검과 함께 주변에 있던 바위틈에 넣어 놓고, 천천히 온천에 몸을 담갔다.
하아….
온천에 들어서는 순간, 피부로 스며든 열기가 몸을 달구는 것을 느끼며 나는 나른한 기분에 잠겨 들었다. 겨울의 찬바람과 여정에 의한 피로와 수련으로 딱딱하게 경직된 근육이 열기에 한 올씩 녹아내리는 기묘한 느낌이 심신을 상쾌하게 만들어 온다.
그렇게 온천의 열기에 몸을 녹이고 있길 잠시 바위 뒤에서 조심스럽게 걸어 나온 아리스를 보고 나는 무심코 눈을 크게 떴다. 훤히 드러난 나신은, 여성이라기에는 아직 작았다.
그러나 하얀 목부터 어깨와 귀여운 가슴을 타고 가느다란 허리와 보드라운 복부를 지나, 매끄러운 종아리를 넘어 발까지 이어진 곡선은 소녀 특유의 싱그러운 매력을 뽐내, 그녀 또한 이미 한 명의 여인임을 느끼게 한다.
특히 그 새하얀 피부는 너무나 투명해, 이 안개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것처럼 느껴지고, 두 팔 사이로 살포시 드러난 앙증맞은 가슴은 오히려 살짝 가려져 있기에, 더 확연하게 풋풋한 아름다움을 발하며 보호 본능을 자극해 온다.
아리스… 이렇게 귀여운 건, 반칙이에요.
나는 묘한 당혹감을 느꼈다.
물론 아리스가 귀여운 소녀라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평소 무표정하던 얼굴에 뚜렷하게 부끄러운 기색을 드러낸 그녀에게는 나조차도 무심코 끌어안아 버리고 싶을 정도로 깊고도 위험한 매력이 있었다.
만약 내가 남자였다면….
아니, 그냥 자제력이 조금만 약했더라면, 이대로 위험한 길로 빠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를 한껏 곤혹스럽게 만든 채, 아리스는 온천가의 바위에 살며시 올라앉아, 작고도 예쁜 발을 온천수에 조심스럽게 담갔다.
첨벙―
마치 바다를 처음 본 고양이처럼 담그기 무섭게 발을 빼내고, 신경이 곤두선 눈으로 온천을 바라보는 아리스, 그 모습을 본 나는 무심코 웃음을 흘렸다.
“쿡….”
아, 이런…
내 웃음소리를 들은 순간, 아리스는 양팔과 무릎을 모아 몸을 가렸다. 그리고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나를 보았다.
삐진 듯 살짝 눈을 치켜뜬 소녀의 모습이 밉거나 무서워 보이기는커녕 붉어진 얼굴과 절묘하게 어울려 그 부끄러움을 확연히 드러냄으로써 나에게 미소를 거두지 못하게 한다. 도저히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한 것일까. 무언가 결심한 듯, 입을 꾸욱 다문 소녀, 아리스는 그 결심을 행동으로 실천해 보였다.
첨벙!
저런, 뜨거울 텐데….
나는 곧장 온천으로 뛰어든 아리스를 걱정했다. 검사로 단련된 나조차 열기를 느낀 온천이다. 아리스의 얇은 피부로는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내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온천에 담근 부위만이 아니라, 목덜미까지, 소녀의 피부는 단숨에 벌겋게 달아올랐으니까.
그러나 정작 뜨거움을 느끼고 있어야 함에도, 아리스는 혼절하기는커녕 미동도 하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마족이라서 열기를 느끼지 못하는 걸까?
아예 가능성이 없는 추측은 아니었다. 마족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으니까.
그 대상이 레닌조차 위협할 정도로 무서운 폭염의 마법을 사용하던 아리스인 만큼, 더더욱.
그 추측이 점차 확신으로 변해 가며, 나는 왠지 모를 아쉬움과 감탄을 느꼈다. 은빛 머리카락을 살짝 휘감은 채, 온천의 열기 때문에 살짝 달아올라 촉촉하게 젖어 연분홍빛을 띤 그 몸은 요염하면서도 일말의 풋풋함을 담고 있고, 봉긋한 가슴은 한 손으로 쥘 수 있을 만큼 작아 아리스가 아직 어린 소녀임을 알려 준다.
그러나 잘 익은 복숭아처럼 살짝 깨물어 버리고 싶게 하는 탐스러움은 절로 침을 삼키게 하는 묘한 매력을 풍긴다.
무엇보다 그 매력을 한껏 끌어내는 것은 얼굴, 균형 잡힌 매끄러운 턱선과 오뚝한 콧날, 크면서도 살짝 날카로운 느낌의 눈매는, 길고도 가느다란 속눈썹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자색안을 돋보이게 한다. 그리고 변함없이 무표정한 얼굴은 완벽한 조형미를 갖춘 가느다란 몸에 더해져 인형과 같이 이질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
하지만 나를 감탄케 한 것은, 그 아름다운 나신만은 아니었다. 무엇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인데도….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더 뚜렷하게 드러나는 고결한 기품이 나를 새삼 놀라게 했다.
여러 귀족을 만나본 내 경험상 이런 기품은 우연히 생기는 것이 아니었다.
거의 태어나면서부터 몸에 배다시피 해야 겨우 얻을 수 있는 분위기로 그중에서도 일국의 왕족에게서나 볼 수 있는 고귀한 지배자의 품격이, 아리스의 몸에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배어 있었다.
모든 마족이 이러한 기품을 가지고 있는 걸까? 아니면 아리스가 특별한 걸까?
한 줄기 의혹을 조용히 덮어 둔 채, 나는 아리스에게 말을 건넸다.
영웅&마왕&악당 [4권]
지은이 무영자
발행일 2020년 5월 29일
펴낸곳 (주)코핀 커뮤니케이션즈
홈페이지 http://www.copinnove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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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영자,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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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979-11-90769-53-2 [05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