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84)
83마왕의 휴식
이상하네.
나는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침에 침대에서 눈을 뜨자마자, 그와 세레나가 없음을 깨닫고, 집을 뒤져 보았다. 하지만 나는 둘을 찾지 못했다. 찾은 것은 잠시 나갔다 오겠다는 그의 편지뿐, 그것은 내 의문에 대한 답으로는 부족했다.
이런 산중에서 어딜 갈 데가 있다고 이른 아침부터 집을 나간 거지?
물론 두 사람이 무슨 봉변을 당했다거나, 나를 두고 도망쳤을 거라는 걱정은 들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잘 때 둘만 집을 나섰다는 사실은, 조금 마음을 복잡하게 했다.
부스럭.
두 사람을 찾아 집밖을 둘러보던 중, 나는 느닷없는 인기척에 흠칫 뒤를 돌아보았다.
그 인기척의 주인은 세레나도, 그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왠지 낯익은 얼굴에 나는 두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너는…?”
뀌익!
수풀 속에서 빠끔히 고개를 내밀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아기 멧돼지.
어제 꽃밭에서 만났던 것이 틀림없는 녀석을 나는 그냥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무리 인간을 본 적 없는 산속의 짐승이라도 어제 그런 꼴을 당했으면, 보통 도망칠 테니까.
그런데, 이 멧돼지는 왜 나한테 다가오는 걸까?
도망치기는커녕, 뒤뚱뒤뚱 다가와, 옷자락을 물고 늘어지는 아기 멧돼지의 머리를 나는 손가락으로 살짝 밀어 보았다.
뀌익―!
내 손에 주르륵 밀려난 아기 멧돼지, 그러나 절대 이대로 물러날 수 없다는 듯 다시 내 옷자락을 물고 늘어진다. 그 모습이 왠지 재밌게 느껴져 아기 멧돼지의 머리를 쿡쿡 건드리던 나의 귀에 한 줄기 고요한 음성을 들려온 것은, 그로부터 잠시 뒤의 일이었다.
“신기한 멧돼지네요.”
“…응.”
세레나가 왔구나, 그 음성을 따라 옆을 돌아본 순간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아침 햇살은 너무 밝아 저절로 눈이 부시다. 하지만 그 빛살이 비치는 그녀의 모습에 비하면 그 광채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침 햇살을 받은 황금빛 머리카락은 순금의 폭포수처럼 화려하게 눈을 매혹시키고, 대리석 조각상보다 반듯하고 섬세한 오관은 부드러운 미소와 어우러져 극한의 미를 보여 준다. 지상에 강림한 빛의 여신의 모습이 이러할까? 그 눈부신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나는 살짝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정말 예쁘구나. 세레나는, 가족이 아닌 다른 입장으로 새삼 깨달은 사실, 천 명의 용병이 전멸한 광풍의 혈전에서 살아남았던 적월의 육 기사나, 아홉 마술사 중에서도 전략 마술에 가장 능하던 28대지에 서는 자 로스타를 상대할 때조차 이처럼 막막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그들은 내 손에 쓰러졌으니까 본연의 무력 따위를 떠나, 순수한 미모만으로 세계 정복이나 빙설관의 타도 수준의 막막함을 느끼게 하는 여인, 그러면서도 미워할 수도 없는 이 막강함이라니….
절로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애써 삼키며, 나는 아기 멧돼지의 귀를 살짝 잡아당겼다.
뀌익―
“따라오라는 거야?”
뀌익. 뀌익.
아기 멧돼지는 그제야 물고 있던 옷자락을 놓고,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설마, 내 말을 알아듣는 건 아니겠지? 지성을 가진 요마라면 몰라도 평범한 짐승에게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없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설마 하며 고민한 끝에 나는 세레나를 돌아보았다.
“잠깐 다녀올게.”
“같이 가도록 해요.”
걱정…해 주는 건가?
세레나가 멧돼지와 나를 돌아보다가 조용히 내놓은 대답에 나는 순간 말을 잃었다. 내가 그냥 소녀라면 모를까. 이미 마족이라는 걸 뻔히 알고 있으면서 고작 멧돼지에게 해라도 입을까 봐 걱정하다니, 그 씀씀이가 불필요한 것임을 뻔히 알면서도, 왠지 마음이 따스해지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알았어.”
정말, 어쩔 수 없구나. 왠지 한숨이 나올 것 같은, 하지만 어째 웃음이 나오는 기묘한 느낌 속에 나는 세레나와 함께 멧돼지를 따라나섰다. 산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니만큼 배낭 하나를 챙기기는 했지만, 특별히 위험하거나 한 일은 없었다.
아기 멧돼지는 산 위로만 계속 올라갔을 뿐, 별다른 행동은 하지 않았으니까.
대체 어디까지 가려는 걸까?
내 의문에 대한 해답이 밝혀진 것은 한참 뒤, 어떤 절벽 아래의 분지에 도달했을 때였다.
뀌이익!
“여긴…?”
이 안개는 뭐지?
아기 멧돼지가 수풀 사이로 우리를 안내한 곳은 짙은 안개에 뒤덮여 있는 기묘한 분지였다. 이상할 정도로 후덥지근한 정체불명의 그러나 결코 위협적이기는 않은 그 안개에 나는 내심 의문을 품었다.
“이건… 설마?”
“……?”
세레나는 뭔가 알고 있는 걸까?
조금 놀란 듯한 모습으로 안개를 살펴보길 잠시, 그녀가 거침없이 안개 안으로 걸음을 옮기자, 나는 별다른 고민 없이 그 뒤를 따랐다. 특별한 경계나 걱정 따위는 하지 않는다.
숱한 전쟁과 혈전을 겪으며 쌓아 온 경험이, 마족으로서의 타고난 감각이, 무엇보다 세레나의 평안한 모습이 내게 안전에 대한 확신을 주고 있었다. 그리고 세레나를 따라 열기의 근원에 도달한 뒤, 나는 너무 놀라 입을 벌렸다.
“샘이, 끓고 있어… ?”
냄비 안에 있는 물이라면 모를까, 산 한가운데 고여 있는 샘이 펄펄 끓고 있다니, 산에 내리쬐는 햇볕이 너무 뜨거워서 그런 건가? 아니, 이렇게 안개가 짙게 껴 있는데 햇볕이 샘을 끓인다는 건 말도 안 된다.
그렇다면… 설마?
한 가지 유력한 가정을 떠올린 순간, 나는 세레나의 옷자락을 다급히 잡아당겼다.
“… 세레나, 여기는 위험해.”
“네? 위험하다니요?”
“이렇게 물이 끓는 걸 보면… 이 샘은 지옥에 흐르는 화염의 강, 아르넬타의 지류일지도 몰라. 그러니까 어서 나가자.”
“아….”
그래, 그런 게 틀림없다. 자연적으로 땅에서 물이 끓을 리 없다. 여기가 드라고니아나 이름 없는 골짜기, 하늘 섬이라도 아닌 바에야 뭔가 신비한 힘이 작용했을 게 분명하고, 그렇다면 이 열기를 설명할 방법은 그것뿐이다.
아마 아득한 신화시대 당시, 아크넬이 여름의 신 오비네스과 싸우다 지상에 아르넬타의 강을 불러냈을 때, 그 여파로 만들어졌던 구멍일 것이다. 비록 지옥에 흐르는 아르넬타처럼 화염이 넘쳐흐르고 있지는 않지만, 아르넬타의 지류라면 인간에게 좋을 게 없다.
그런데 세레나는 왜 이러는 거지? 이 심각한 상황에 당장 물러나기는커녕, 고개를 살짝 돌린 채 바르르 몸을 떠는 세레나, 그 모습에 나는 당혹감마저 느끼며 그녀의 옷자락을 재차 잡아당겼다.
“세레나, 빨리 나가야 해.”
“자… 잠시만요. 아리스, 그런 게 아니에요.”
“…뭐?”
그런 게 아니라니? 다시 고개를 돌려, 의아해하는 나를 본 세레나, 그녀의 얼굴은 어째서인지 곤혹스러워 보였다.
“이건 온천이라는 거예요.”
“온…천?”
온천이라니? 그게 뭐지?
의문, 그리고 왠지 모를 불안감마저 느끼는 내게 세레나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차근차근 온천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세레나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온천이 아르넬타강의 지류가 아니라, 지열에 의한 자연 활동임을 알게 된 나는 갑자기 투명 마법이 애타게 그리워졌다. 투명 마법을 사용하면, 고개를 숙이고 땅만 보지 않아도 내 빨개진 얼굴을 숨길 수 있을 테니까.
“좋은 선물을 받았네요.”
“…으응….”
멧돼지는 이걸 보여 주고 싶었던 거구나, 어느새 사라진 아기 멧돼지를 생각하니,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교차했다. 나는 어제 그런 짓을 저질렀는데, 오히려 이런 선물까지 받다니….
“그럼, 한번 들어가 볼까요?”
“지금?”
“마침 수건도 있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배낭 안에 수건이 있었지. 하지만 문제는 수건이 아니다. 나중에 따로 들어온다면 모르겠지만… , 지금 온천을 쓰려면 세레나랑 같이 들어가야 한다는 게 가장 큰 문제다. 힐끔 세레나를 훑어본 나는 입을 꾸욱 다물었다. 무심코 한숨을 내쉬고 말 것 같았으니까.
“괜찮죠, 아리스?”
안 괜찮아. 안 들어가. 절대 안 돼!
마음속으로는 수십, 수백 번을 단호하게 외쳤다. 하지만 예쁜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티 없이 맑은 눈동자로 나를 보는 그녀에게 차마 그것을 입 밖으로 말할 수는 없었다.
“알았어….”
“후훗, 그럼 들어갈까요?”
순수한 선의라는 건 무섭구나.
정말, 거의 신전으로 끌려가는 듯한 심정으로 나는 큰 바위 뒤로 돌아가 머뭇머뭇 옷을 벗었다.
아무리 짙은 안개가 깔려 있어도, 이 정도 거리라면 충분히 보일 테니까.
팔을 교차하듯 모아 상의의 밑자락을 잡았다. 그대로 팔을 위로 들어 올리자, 상의가 거꾸로 뒤집혀 머리 위로 빠져나온다. 온천의 열기에 땀으로 흠뻑 젖어 있던 피부 위로 시원하게 스쳐 지나가는 바람을 느끼며, 나는 살짝 허리를 숙였다.
여행용의 튼튼한 가죽 단화의 끈을 풀자, 작은 발은 너무나 쉽게 빠져나온다.
그리고 자갈이 깔린 땅을 밟으니, 둥글둥글한 자갈이 자르륵 발을 간질여 온다. 애써 그 간지러움을 참으며 허리띠를 풀자, 헐렁한 바지가 스르륵 다리 사이로 흘러내렸다. 그렇게 속옷 한 장만을 남긴 채 환하게 드러난 땀으로 젖어 있던 하반신에 바람이 스쳐 지나가자, 후덥지근한 안개 속에서도 서늘함을 느끼고,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살짝 떨었다.
부. 부끄러워….
그 추위 때문이 아닌 얇은 천 두 장만을 걸치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이 내 몸을 바르르 떨리게 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멈출 수도 없는 노릇, 벌써 온천에 들어간 세레나를 힐끔 살펴보고, 나는 당장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애써 참으며 머뭇머뭇 허리춤으로 손을 갔다 댔다. 복부 밑의 얇은 천을 살짝 잡아 끌어 내린다.
부끄러움을 애써 참으며 살짝 무릎을 들어 올려 한쪽 다리를 끄집어내자, 그 하얀 천 조각은, 남은 다리를 타고 부드럽게 미끄러져 내린다.
그리고 마지막, 최후의 선이라고 할 수 있는 가슴에 손을 대고,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마지막 속옷을 쥐었다. 그러나 단지 그것만으로도 가슴에 살짝 걸쳐 있다시피 한 천 조각은, 너무나 쉽게 벗겨져 내 가슴을 시리게 한다.
…겨울 온천 따위, 정말 싫어!
내 가슴을 시리게 하는 싸늘한 겨울바람과 괜히 이런 곳에 있는 온천에 대한 원망을 마음에 꾹꾹 눌러 담으며 바위틈 깊숙이 옷을 밀어 넣은 후, 나는 양팔로 가슴을 가린 채, 조심스럽게 바위 뒤에서 걸어 나갔다.
그리고 세레나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온천 안에 있는 작은 바위 위로 건너가, 바위 위에 살짝 걸터앉은 채 온천에 발끝을 담가 봤다.
참방―
담그는 순간, 반사적으로 다리를 움츠린 나는 질린 눈으로 온천을 내려다보았다. 뜨거울 거라고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목욕물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열기라니.
이, 이렇게 뜨거운 곳에 몸을 담가도 돼? 정말?
“쿡….”
우우웃!! 세레나는 왜 저렇게 태연한 거야!! 내 모습이 그토록 재밌어 보였던 걸까?
온천 속에 자연스럽게 몸을 담그고 있던 세레나가 숨기듯 흘려 낸 가는 웃음소리에 나는 차라리 불구덩이에 들어가는 게 낫다 싶을 정도의 열기가 얼굴로 몰리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다행히 불구덩이는 아닐지언정 그 비슷한 것은 지금 내 앞에 있었다.
첨벙!
몸에 대한 안전보다 자존심의 보호를 신중함보다 과감함을 선택한 대신 나는 거의 졸도할 뻔했다.
아, 안 돼. 아크넬의 폭염까지 부리는 내가 한낱 온천의 열기 때문에 졸도할 수는 없어.
그것도 세레나 앞에서는, 절대로!
마왕으로서의 자긍심과 더불어, 여인으로서의 자존심에 의지해, 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붙잡았다. 그리고 당장 온천에서 뛰쳐나가려는 몸을, 억지로 물속에 밀어 넣었다.
열기를 조금이라도 줄이고자. 태연함을 가장해 머리를 쓸어 넘기던 내게, 세레나는 조용히 말을 건네 왔다.
“기분이 좋지요, 아리스?”
…세레나, 지금 놀리는 거지?
지옥 구덩이에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 그 말에, 한마디 해 주기 위해 그녀를 째려본 순간, 나는 넋을 잃어버리고야 말았다.
머리카락을 풀어 헤친 나와 달리 금발을 틀어 올린 덕분에 환히 드러난 목덜미, 너무나 아름다워 절로 시선을 끌어들인다. 그런데도 그 아름다움은 세레나가 지닌 매력 중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부드러운 어깨선을 따라 곧게 뻗은 팔에서부터 군살 하나 없이 가는 허리와 매끄러운 복부, 그리고 물속에 깊이 잠겨 있음에도, 미려한 각선미를 또렷하게 드러내는 두 다리까지 얼핏 가녀린 듯싶으면서도 부드러운 살결 속에 탄탄한 근육을 숨긴 그 몸은 완벽한 균형미란 어떤 것인지 보여 준다.
특히 봉긋하게 솟아나 있는 뽀얀 가슴은, 너무나 탄력 있고 부드럽게만 보여서, 왠지 만져 보고 싶다는 열망을 들끓게 한다.
성숙한 여인의 매력이 듬뿍 담겨 있는 느낌이랄까?
그러나 그 아름다움의 절정은 역시나 그 미모, 섬세한 얼굴선은 반듯한 오관을 돋보이게 하고, 부드러운 눈매는 푸른 눈동자를 선명히 드러낸다.
게다가 온천의 열기로 촉촉하게 젖은 피부와 앵두처럼 도드라진 붉은 입술은 침을 꼴깍 삼켜 버릴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두근.
…왜, 왜 내 심장이 요동치는 거야!
홀린 듯 세레나를 바라보다가, 심장의 격동 소리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나는 침착하게 마음을 가라앉혔다. 세레나가 절세미녀라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이토록 절감한 것은 처음이다. 같은 여자조차 홀려 버릴 정도의 그야말로 미의 여신과 같은 아름다움이라니.
이 모습을 보고도 그녀에게 반하지 않는다면, 그건 남자가 아닐 것이다. 설령… 얼음 심장을 지닌 듯만 싶은 그라도….
두근.
심장이, 아련하게 조여 온다. 내가 이들 곁에 머물 수 있는 것은 이 순간뿐, 흑마법의 후유증을 다스릴 때까지는 이들 곁을 떠나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이, 나를 안타깝게 한다.
비록 후유증이 나으면 다시 찾아올 것이라도, 그 과정에서 몇 년이 걸릴 줄 모르는 만큼, 재회를 기약하기조차 힘들었다. 그리고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먼 훗날 재회했을 때, 그와 세레나는 지금과 달라져 있으리라는 사실을…. 이 여인은 결국 그의 마음을 열리라는 진실을, 거기에 내 자리 따위는 없으리라는 현실을….
“…세레나.”
“네.”
살짝 고개를 들어 올리는 그녀의 목덜미로, 하나의 땀방울이 구슬처럼 또르르 굴러 내리며, 미려한 목선을 돋보이게 만든다. 움직임 하나하나가 매혹적이기 그지없지만, 그 매력은 단지 미모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다.
다만 고개를 들어 올리는 동작 하나에서조차,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고귀한 기품은 명가에서 자란 아가씨의 품격을 담고 있고, 이 뜨거운 열기 속에서도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단아한 자세는, 단련된 검사로서의 수양을 드러낸다.
마왕이라 불리던 나조차 동경할 수밖에 없는 고귀하면서도, 강인하고, 아름다운 여인. 신의 작품과도 같은 푸른 눈을 마주 보며 나는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나, 원래 인간은 싸워야 할 적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어.”
과거의 나는 그토록 어리고도 어리석었다. 그러나 그와 함께했던 하루하루가, 그가 해 준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그녀의 배려 하나하나가 나에게 알려 주었다.
마족도, 인간도 결국엔 같은 사람이라는 걸, 원한에 연연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는 걸, 행복하게 사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다는 걸….
“하지만 코드랑 같이 살게 되면서 꼭 인간이 적인 건 아니라는 걸 알았어. 그리고 언제나 날 도와주고, 보살펴 주고, 웃어 준 세레나 덕분에 좋은 인간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됐어. 다만 누군가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편안하고 따듯해질 수 있다는 걸 알게 됐고.”
만약 세레나가 없었다면, 인간을 이해하고 평범하게 살아가기 위해 더욱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있었기에, 나는 보다 빨리, 보다 충실한 삶을 살 수 있었다.
“코드와 세레나 같은 가족이 있어서, 나는… 행복해.”
부끄럽다. 내심을 말하는 게 이렇게 부끄러울 줄이야. 하지만 그 이상으로 마음을 채우는 것은 온기, 이런 내심을 밝힐 수 있는 가족이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나 자신이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변했다는 사실이 마음을 따스하게 채워 온다. 그렇게 부끄러움과 만족감을 느끼며 나는 웃었다.
비록 이제 이들 곁을 떠나야만 할지라도 그 이별이 아무리 가슴 아픈 일이라도, 이들이 나의 가족이라는 것은 변치 않는 사실, 그리고 이들과의 추억은, 앞으로도 마음 깊은 곳에 남아 나의 힘이 돼 줄 것이다.
“아리스….”
내 말이 너무나 갑작스러웠던 것일까? 세레나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잠시간의 머뭇거림 끝에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그 붉은 입술이 살짝 벌어지려던 순간, 벌어지던 입술이 꾸욱 다물어지며 그녀의 얼굴을 당혹감과 긴장감이 채워 들었다.
“아리스, 이리로!”
“…왜?”
다급하게 나를 끌어안고, 갑자기 온천 밖으로 뛰쳐나가는 세레나. 그 이유를 몰라 어리둥절해하던 나는, 잠시 후 일어난 이변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쿠궁―쿠구궁――!!
너무나 아득하게 들려옴에도, 너무나 웅장하고도 커다란 굉음, 그 소리의 끝에 안개로 둘러싸인 허공 위에서 거대한 암석 무리가, 우리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