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86)
85영웅의 각오
쿠구궁―!
우박처럼 쏟아져 내리는 암석 속에서 나는 아리스를 안은 채 필사적으로 몸을 날렸다.
앞으로 달려가다가 오른쪽으로 몸을 날리자, 아슬아슬하게 하나의 바위가 왼쪽에 내려 박힌다.
앞에 틀어박히는 암석을 피해 뒤로 물러나고, 화살처럼 튀어 오른 파편을 피해 뛰어오르며, 굴러오는 바위를 두 암석 사이로 들어가 피한다. 눈으로 볼 여유, 귀로 들을 시간 따위는 없다. 극한의 오감조차, 이런 상황에는 혼란을 더할 뿐. 다만 검사로서의 육감 하나에만 의지한 채 간발의 차로 위험을 비켜 내며, 최대한 안전한 곳을 향해 몸을 피해 낸다.
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난 것일까. 암석을 피하기 위해 온 정신을 곤두세우느라 시간의 흐름마저 잊고 있던 사이, 나는 어느새 절벽의 붕괴가 멈췄음을 깨달았다.
그 직후, 내가 가장 먼저 한 행동은 아리스의 상태를 살펴보는 것이었다.
“괜찮나요?”
“…응.”
정신없이 피하느라 먼지투성이 되기는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소녀는 다친 곳 하나 없었다.
만약 아리스를 지켜 내지 못했다면 어땠을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왜 갑자기 절벽이 무너진 것인지 몰라도, 붕괴가 절벽 윗부분에서 그친 게 다행이었다. 절벽이 통째로 무너져 분지 자체가 함몰됐다면, 아무리 나라도 어쩔 도리가 없었을 테니까. 하나 아직 모든 위험을 넘긴 것은 아니었다.
“아리스. 뒤로 물러나세요.”
마침 옆에 굴러다니던 배낭에서 수건을 꺼내, 급하게나마 아리스에게 둘러 준 뒤, 나는 방해되지 않을 정도로만 몸을 가리고, 온천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흙과 바위부터 나무에 이르기까지, 절벽이 붕괴되며 떨어진 낙하물은 다양했다. 그러나 그 수많은 낙하물 중에서도 특이한 하나의 낙하물에서 느껴지는 기척이, 나에게 긴장감을 곤두세우게 하고 있었다.
검은… 잃어버린 건가?
절벽이 무너질 때의 충격으로 튕겨 나간 듯, 배낭 주변에서 검은 찾아볼 수 없었다.
분명 검에까지 신경 쓸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당장 검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이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검조차 없이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이 기척은 만만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촤아아아악――!!
“……!”
온천수가 폭발하듯이 치솟으며, 그 안에서부터 솟구쳐 나온 것을 본 순간, 나는 숨을 멈췄다. 집채만 하다고밖에는 할 수 없는 거대한 덩치, 형상조차 모르게 전신을 뒤덮고 있는 회색 안개, 더없이 사납고도 격렬한 살기.
무엇보다, 불꽃처럼 이글거리는 핏빛 눈동자가 나의 등줄기에 소름이 돋게 했다.
…이건…!
예상치 못한 상황에 내가 경직된 찰나, 온천에서 뛰쳐나온 ‘그것’의 입이 벌어지며 무시무시한 굉음이 토해져 나왔다.
뀌이이이익――!!
귀가 저릿저릿하게 울리며, 몸이 흔들린다. 단순한 굉음 따위가 아니다. 심신에 직접적으로 타격을 가해오는 포효, 치명적이라고는 하기에는 부족하지만, 위협적이라고 하기에는 충분한 공격에 나는 반사적으로 검경을 일깨워 청각을 제어했다.
하나 내가 검경을 일깨우기까지 짧은 틈을 ‘그것’은 결코 흘려보내지 않았다.
두두두두두두두――!!
땅이 파헤쳐지고, 안개가 휘날린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돌진해 오는 ‘그것’을 마주하며, 나는 주먹을 굳건히 움켜쥐었다.
저 돌진을 맨손으로 상대한다는 게, 얼마나 무모한 짓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혼자의 몸이라면 모를까, 아리스를 등 뒤에 두고 보호하고 있는 이상, 내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남은 방법은 단 하나뿐.
“하아아아압!”
그림자 베기를 통해 호흡법을 배운 이후, 10년 동안 굳이 힘을 끌어내기 위해 기합을 내지른 적은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기합과 함께 일 권을 내질렀다. 적을 앞두고 검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약점과 ‘그것’에 대한 공포를 기세로 극복하기 위해서, 그렇게 내가 전심전력으로 뻗어 낸 일 권은 안개를 휘감은 채 우리를 향해 달려들던 ‘그것’의 미간에, 정확히 틀어박혔다.
쿠우우웅――!!!
그 순간 터져 나온 것은, 망치로 바위를 후려친 듯한 쩌렁쩌렁한 굉음, 내 권격은 ‘암석의 힘’을 기반으로 뻗어 낸 것, 그 안에는 바위라도 부술 파괴력이 있었기에. ‘그것’의 돌격을 잠시나마 저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게 들려온 소리는, 단지 그 굉음 하나만이 아니었다.
우드득!
나는 어디까지나 검사, 체술은 기초적인 수준에 불과했다. 그렇다 해도 ‘홍염의 불꽃’으로 단련되고, 검경을 깨달음으로써 진일보한 나의 근골이 고작 한 번의 돌진도 못 막고 부러질 줄이야…!
심신 양쪽으로 극심한 충격이 전해지는 가운데, 나는 확신했다.
‘이것’은 결코 단순한 짐승이 아니라는 것을, 과거 조우했던 어둠의 산의 주인과도 같은 존재, 아흔아홉 악마로부터 지옥의 힘을 부여받은 시종. 바로, ‘요마’라는 사실을!
뀌이이이익――!!
미간 정중앙에 일 권을 맞고 주춤했던 것도 잠시, 요마가 다시 괴성을 토해 내며 한 발을 내디디자, 내 몸은 너무나도 쉽게 주르륵 밀려났다.
‘암석의 힘’은 어디까지나 순발력과 체중 이동을 이용해 일시적으로 힘을 증폭시키는 기술로 체중 자체는 변하는 일이 없는 만큼, 이런 식의 힘 싸움으로는 이길 방도가 없다.
아니… 설사 기술 싸움으로 밀어붙인다고 해도, 이미 한 손이 부러진 지금으로서는 승산이 없다. 하지만 반드시 지켜야만 할 것이 있었기에…. 나는 오히려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부러진 주먹을 뒤로 당기며, 반대쪽 팔을 앞으로 뻗어냈다.
퍼엉!!
무쇠 덩어리를 후려치면 이러할까?
단순히 ‘암석의 힘’만이 아닌 ‘홍염의 불꽃’ 특유의 기법까지 이용해, 전력을 다해 뻗어 낸 일장은 손바닥만 아니라 어깨, 허리와 다리까지 온몸에 충격을 주었다. 내 조잡한 체술을 고려해 볼 때, 원래는 뼈가 부러지더라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래도 권격이 아닌 장타를 사용한 데다, 전신으로 충격을 흘려 낸 덕분에 가까스로 골절만은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팔이 부러질 것을 각오한 일장은, 확실히 그만큼 효과가 있었다.
뀌이이익…!
미간의 정중앙에 장타를 맞고, 비틀거리며 물러나다가 쿵 주저앉는 요마.
설사 근골이 강철과 바위로 돼 있더라도 두개골을 넘어 뇌로 충격이 파고든 이상, 결코 멀쩡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 효과는 단지 그것뿐.
거목의 내부도 으스러트릴 장타를 맞고도, 요마는 뇌가 곤죽이 되기는커녕, 금방 정신을 차리고 머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더 늦기 전에 움직여야 한다.
아직 대미지가 남아 있을 때 추가적으로 타격을 가하기 위해, 나는 땅을 박차고 앞으로 달려나갔다. 바로 그 순간, 한 줄기 다급한 고함이 내 뒤에서 터져 나왔다.
“피해!!”
소녀의 경호성은 나를 일순 당황하게 했다. 초인적으로 발달한 오감은 알려 주고 있었다. 요마는 아직 움직일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이성적인 판단은 냉정하게 말하고 있었다. 놈을 쓰러트릴 기회는 지금뿐이라는 것을, 그러나 검사의 본능은 알려 주고 있었다. 지금은 목소리를 믿어야만 한다는 것을!
내가 아리스의 경호성을 듣고, 앞으로 달려가다가 옆으로 몸을 날린 순간, 요마로부터 화살처럼 쏘아져 나온 짙은 안개 덩어리가, 내 옆구리를 스쳐 땅에 틀어박혔다.
퍼어엉!!
화끈거리는 옆구리의 통증과 뒤에서 후두둑 튀어 오르는 돌과 자갈의 파편, 만약 피하지 못하고 정통으로 맞았다면 치명상을 면하기 힘들었을 공격에, 나는 무심코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상태로도 마법을 사역할 수 있다니…!
비록 ‘어둠의 산의 주인’에 비하면 가소로워도, 그 힘은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처음 한 번의 공격의 뒤를 잇듯, 빗줄기처럼 우수수 쏟아져 내리는 안개의 화살, 결코 회피를 불가능하게 하는 그 광범위한 공격이,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안 돼!’
지나치게 넓은 범위로 쏟아지는 마법의 공격에, 나는 아리스를 보호하기 위해 급히 물러났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허공이 기묘하게 일그러지며, 안개의 화살이 무언가에 가로막힌 것처럼 연이어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퍼벙!!
우우웅…!
나는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비록 뚜렷하게는 보이지 않지만, 아지랑이처럼 일그러져 있는 공간의 장벽, 그것이 무엇인지 짐작되는 게 없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너무 확실하게 알 수 있었기에. 나는 그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과거 ‘25눈을 뿌리는 자’ 세빌리아와의 싸움에서 견식한 바가 있는…. 극한의 방어력을 지닌 마법 아닌 마법.
마력… 장벽?
오직 9명의 마술사만이 가능한 주문 없는 마법, 마력 장벽을 넋을 잃고 멍하니 보다가, 나는 서서히 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보았다.
달빛과 같이 아름다운 은발을 휘날리며, 섬뜩한 핏빛 눈동자로 요마를 노려보는 소녀를.
“멈춰.”
뀌, 뀌이익!
그것은 단지 나지막한 한마디의 말에 불과했다. 하나 그 한마디에 동요하는 요마의 모습을. 나는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어둠의 산의 주인에 비하면 한참 부족할지라도, 그 힘과 기세는 분명 요마라는 이름에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하고도 사나운 것이었다.
그런데 말 한마디로 저 요마를 눌러 버리다니.
마족이기 때문에?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마족이 악마의 피를 이은 마의 일족이라면, 요마는 악마를 따르던 시종, 아무리 마족이라 할지라도 기세만으로 요마를 위협할 수 있을 리 없다.
만약 그런 일이 가능한 마족이 있다면, 그것은 고금을 통틀더라도 오직 한 명.
적월의 육 기사 중 다섯의 피를 마시고, 스물여덟 대지에 서는 자의 숨을 끊고, 오직 홀로 삼천 군세를 몰살시킨 자뿐…. 그 찰나의 의심을 따라 순식간에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기억.
빙설관 레닌이 서쪽 땅끝까지 찾아왔던 것은, 고작 평범한 마족 하나를 잡기 위해서였을까? 아니, 그 전에 홀로 로드 오브 킹덤을 무너트린 지상 최강의 힘을 지닌 인간의 손에서 과연 평범한 마족이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아리스, 당신은 설마…!
내가 경악과 의혹에 잠겨 있는 사이, 소녀는 지금까지와는 반대로 내 앞을 가로막고, 요마를 향해 한 팔을 내밀었다.
“위대한 폭풍의 지배자 세이너스여! 나 그대의 영혼을 품은 자, 그대의 권능을 원하는 자, 그대의 권위를 다스리는 자이니. 내가 원하는 것은 크레도스에서 뿜어져 나온 두 줄기의 바람, 심신을 찢어발기고 혼백을 날려 버리는 지옥의 광풍, 전쟁의 신 에티스의 진군과 기술의 신 드라비크의 기병을 막은 태풍이고, 세계의 허파에서 토해져 나온 태곳적 용의 숨결이니, 나 그대의 봉인을 풀어 지상에 크레도스의 바람을 불러내리라!”
소녀의 손에서 생겨난 바람의 구슬이 폭발하듯이 요마에게 쏘아져 나간다.
요마는 회색의 안개로 풍환을 막아 내려 했지만, 그것은 가차없이 안개를 꿰뚫으며, 요마의 몸통 정중앙에 틀어박혔다.
그리고… 거대한 폭풍이 터져 나왔다.
쿠과과과광――!!
뀌이이이이익…!!
온천에 있던 안개를 모조리 집어삼키며, 요마의 거체를 하늘 높이 날려 버리는 폭풍에 나는 무심코 숨을 삼켰다.
마법에는 문외한인 나라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결코 평범한 마법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세상을 통틀어 단 99명의 마법사 중에서도, 9인의 마술사 외에는 사용조차 할 수 없으며, 설사 마술사라도 한 번 쓰는 것만으로 마력의 태반이 날아갈 수밖에 없다는, 마법을 넘어선 힘, 마술이라는 것을….
하나 그런 마술을 사용하고도, 소녀는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단지 차가운 눈으로 폭풍 속을 노려봤을 뿐.
쿠우웅!!
얼마나 높이 떠올랐던 것일까? 한참 뒤에야 하늘에서 떨어진 요마의 거체는, 엄청난 굉음을 내며 땅속으로 사라졌다. 단단한 암반에 움푹 파인 구덩이와 그곳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뻗어 있는 균열, 그것은 좀 전의 폭풍이든, 낙하든 어느 하나라도, 감히 생물이 버텨 낼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알려 주고 있었다.
그런데도 요마는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선홍빛 눈으로 나와 아리스를 노려보며, 다시 그 거대한 입을 쩌억 벌렸다.
뀌익… 뀌이이이익――!!
쿠르르르릉―!
이제 심신에 영향을 끼치는 정도를 넘어, 절벽 자체를 울리는 사나운 포효와 함께 서서히 그 크기를 부풀려 가는 요마를 보며, 나는 왼손을 으득 움켜쥐었다.
더… 강해지고 있다. 단지 소리가 체구만이 커진 것이 아니다. 몸이 저릿저릿해질 정도로 강해진 그 기세가, 요마가 쓰러지기 전보다 최소한 배는 더 강해졌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세레나. 도망쳐!”
마치, 심장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자수정 같은 눈동자에 단호한 결의를 담고, 요마를 정면에서 노려보고 있는 아리스, 그 소녀가 나지막이 내뱉은 두 마디 말이, 나의 피를 싸늘하게 만들고 있었다.
“아리스… 무슨 말을…!”
“나라면 쉽게 이길 수는 없어도 적어도 시간을 끄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어. 그러니까 그사이… 코드를 데려와 줘.”
“……!”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강인한 신체와 돌진력에, 마법의 힘까지, 어느 것 하나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지만, 이 요마의 가장 무서운 힘은 따로 있었다. 무쇠도 으스러질 충격도 버텨 내는 생명력과 갈수록 더욱 강력해지는 정체 모를 잠재력, 설사 내가 검을 들고 있었다고 해도, 승리는커녕 생존조차 장담할 수 없게 하는 그런 끝 모를 무언가가 이 요마에게는 있었다.
아리스 또한 그것을 느끼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 요마를 잡으려면 성력을 쓰는 그가 필요하며 그를 불러오기 위해서는, 누군가 남아 요마를 저지해야 한다는 현실을, 그러나 검이 없는 데다가 팔까지 다친 지금, 나는 요마의 시선을 끄는 것조차 힘들었다.
반면 마력 장벽이라는 절세의 방패와 마술이라는 한없이 궁극에 가까운 창.
그리고 무한한 마력을 지니고 있는 소녀라면, 이기지는 못할망정 간단히 지지는 않을 것이다. 너무나 합리적이고 납득할 수밖에 없는 판단에 나는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그것이 옳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도 나는 물러나지 못했다.
적을 눈앞에 두고, 이 가녀린 소녀를 두고, 지켜야 할 가족을 버려두고 등을 돌려야만 한다는 사실을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으니까.
“…어서!”
나보다 어린 나이와 가녀린 몸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강인하며,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누군가를 위해 싸우는 것쯤은 익숙하다는 듯, 짧은 말로 나를 재촉하는 소녀의 모습에 나는 입술을 꽈악 깨물었다. 어차피 이대로 있어 봤자 아무 도움도 안 된다. 지금은 물러나는 게 아리스를 돕는 방법이다. 그러니 물러나자. 물러나야만 한다. 물러나는 것이 옳다.
하지만, 이렇게 물러난다면… , 나는 이제, 두 번 다시 이 소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볼 수 없을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나는 주먹을 쥐고 소녀의 앞을 가로막고 나섰다.
“…세레나!!”
느닷없는 행동에 놀란 것일까? 아니면 날 질책하는 것일까? 비명에 가까운 고함을 내지르는 소녀를,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이게 어리석은 짓이라는 건 저도 알고 있어요.”
당장이라도 요마가 달려들 수 있음을 알기에, 마력 장벽이라도 완전한 것은 아님을 알기에.
“하지만 아리스.”
아무리 무한한 마력을 지닌 마족이라 할지라도, 설사… 신화시대 이후, 최고 최강의 마력을 지니고 있다는 72주문의 마왕이라고 할지라도.
“저는… 그분에게서 가족을 뒤에 두고 도망치는 법 따위는 배운 적 없답니다.”
그녀는 내게 있어 지켜야 할 가족이었고, 나는 그녀를 지켜야만 하는 검사였다.
“그리고 검이 없다고 해서 짐이 될 정도로 약하지도 않아요.”
검이 없을지라도 나는 검사였다. 손이 부러졌어도 상관없다. 다시는 검을 들지 못해도 좋다.
내가 살아 있는 한,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내 심장이 뛰고 있는 한.
이 소녀를 두고 도망치는 일 따위, 나는 결코 할 수 없었으니까.
“바보.”
그런 나의 뒤에서, 아리스는 나지막이 음성으로 타박해 왔다. 하지만 타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는 듯, 혹은 웃는 듯 구분이 가지 않는, 다만 그 따스함만이 분명히 느껴지는 그 음성에 나는 조용히 미소를 머금었다.
쿠웅―!
그런 우리들을 향해, 다시 돌진해 오는 요마, 아리스의 마력 장벽은 성벽처럼 돌진을 막아 냈다. 하나 두 번, 세 번. 돌진이 반복될 때마다 마력 장벽은 흔들려갔다.
쩌적…!
마침내 한계에 달한 듯,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한 마력 장벽을 보며, 나는 조용히 호흡을 골랐다. 팔이 부러지는 것을 각오한 일격도 요마를 쓰러트리지 못했다. 하물며 몇 배는 더 강해진 지금 통할 리가 없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설사 남은 왼팔마저 부러진다 해도 좋다. 그렇다고 해도 내게는 두 다리가 남아 있다. 다리마저 부러진다 해도 상관없다. 이빨이 모두 부러질 때까지 그 목을 물어뜯고, 두개골이 깨질 때까지 머리를 부딪치더라도, 나는 반드시 아리스를 지켜내고 말 것이다.
-파강!!
마치 유리처럼 산산이 깨져 나가는 마력 장벽, 그와 동시에 요마가 토해 낸 안개 덩어리를 향해, 내가 이를 악물고 일 권을 내뻗으려던 순간.
푸욱―!
어디선가 날아온 한 자루 검이 나의 앞에 수직으로 틀어박혔다. 고귀한 금빛과 은빛의 줄무늬로 몸을 감싼 채, 은은한 붉은 광채를 두른 그 검의 모습에 정신을 못 차리고 경직돼 있던 나의 귀에 한 줄기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왔다.
“잡아라.”
“……!”
생각할 시간, 판단할 필요 따위는 없었다. 다만 그 무뚝뚝하고 나지막한 지시에 따라,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오직 나 한 명을 위해, 그분께서 직접 만들어 주신 검을 움켜쥐었다.
“VHLV JI RHE, ECAE KUW FULRD.”
우우웅―!
언젠가 들어 본 적 있는 그 낯선 언어가 허공에 울려 퍼진 순간, 검신에 새겨진 기묘한 문자가 빛을 발하며, 검을 중심으로 터져 나온 광채가, 사방에 가득한 안개와 날아들던 요마의 마법을 녹여 버렸다. 그것은 너무나 놀랍고도 강대한 힘이었지만, 나는 그 사실에 놀라지 않았다. 아니… 놀라지 못했다.
나도, 아리스도, 심지어 요마조차 싸우고 있던 서로를 앞에 둔 채 멍하니 그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보았을 뿐이다.
저벅. 저벅.
짙은 안개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그분을 향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