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88)
87악당의 각오
악당과 절벽 사이에 맺힌 인연은 길고도 깊다. 영웅들을 쫓아갈 때나, 영웅들에게나 쫓길 때나 십중팔구 종착점은 절벽이기 마련인데, 이는 절벽이라는 지형이 죽은 척하거나, 도주할 시간을 버는 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특성을 쓰기 위해서는 한 가지, ‘절벽에서 떨어지고도 살아남을 수 있어야 한다.’라는 무시무시한 전제 조건을 극복해야 하지만, 신의 가호를 업은 영웅들은 상관없다.
절대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도 그들은 오히려 별 기연을 다 얻어서 돌아오니까.
그렇기에 숙련된 악당에게, 절벽에서 영웅을 상대하는 것은 절대적인 금기나 다름없었다.
물론 영웅들과 달리, 악당에게 신의 가호는 없다. 하지만 대신 끈질긴 생명력에 힘입어 추락을 대비한 온갖 수단을 습득해 둠으로써, 악당도 절벽을 최후의 보루로 삼기는 했다.
그렇기에 영웅에게나 악당에게나, 절벽은 기사회생의 성지인 것이다.
나 역시 72가지 생존술 중 하나로서 ‘절벽 추락 대책’을 완벽하게 습득한 숙련된 악당이었고, 그렇기에 절벽에서 대책 없이 추락했음에도, 어떻게든 즉사는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즉사를 면했다고 해서 살아났다는 뜻은 아니었다.
“쿨럭!”
절벽에 등을 기댄 채, 목 깊은 곳에서 검게 썩은 피를 토해 내며, 나는 몽롱한 정신으로 스스로의 상태를 점검했다. 살가죽이 벗겨 나가다시피 한 오른손바닥, 뼈부터 근육과 혈관까지 완전 망가진 왼팔, 추락할 때의 충격으로 접질려져 부어오른 발목, 낙석에 충돌하며 부러져 내장까지 파고든 갈비뼈, 어디 하나 멀쩡하다고 할 수 없는 몸. 특히, 심각한 것은 내장을 파고든 갈비뼈였다.
이미 내장 손상이 일어난 이상, 내 목숨은 죽음에 한 발 걸친 것이나 다름없다.
성력으로 내출혈을 최소화하고 있긴 하지만, 성물의 힘을 빌린 쥐꼬리만 한 성력으로, 내상을 완치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니까.
‘…어처구니가 없군.’
나는 허탈하게 절벽 위를 올려다보았다. 멧돼지 따위에게 이런 꼴을 당해서가 아니라, 지금 내가 이런 꼴이 된 진정한 이유가, 나를 어처구니없게 하고 있었다.
“방심했나.”
애초부터 이렇게 되는 것이 당연한 결과였다. 느긋하게 좀 쉬어 볼까 하는 생각에, 굳이 혼자서 안가를 나선 것이나, 게다가 허리가 쑤신다는 이유만으로 검조차 내버려 둔 채 산을 오른 것이나, 절대 숙련된 악당이 할 짓거리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멧돼지 같은 맹수를 상대로, 도망치는 것조차 포기한 채, 싸우려고 했으니 백 번 죽어도 할 말이 없는 어리석은 짓거리였다.
“아니, 잊고 있었던 거로군.”
지상 최강의 인간을 상대로 살아남고, 검자나 마족 같은 것들과 함께 지내다 보니, 어느새 내 주제를 잊고 있었다. 나는 그들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아무리 노력해도 내 한계는 고작해야 삼류, 숱한 잡기와 잔꾀로 그 한계를 극복해 왔지만, 그래도 내가 삼류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내게 운명이나 신의 가호 따위가 없다는 사실 또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방심으로 죽음을 자초한,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자조하던 나의 앞에, 하나의 그림자가 스르륵 떨어져 내렸다.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나?”
“KRRRR….”
몸에 두른 녹색 비늘과 팔을 뒤덮은 털가죽, 무엇보다 머리에 우뚝 솟은 뿔과 등 뒤의 넓은 날개가 눈에 띄는 짐승은 파충류의 노르스름한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봤다.
그래, 고집 하나로 천 년을 버텨 왔던 이것이다. 고작 그 정도에 물러났을 리가 없지.
주변에 머물며 틈을 노리고 있었을 뿐일 터,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은, 이것에게 최고의 기회일 것이다.
“CYAA.”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리며, 짧은 울음소리를 토해 낸 뒤, 그것은 조용히 몸을 일으켜 나를 향해 걸어왔다. 길게 늘어진 비늘 자락으로 지면을 스르륵 훑으며, 내 바로 앞까지 다가온 그것이, 한 팔을 들어 올려 날카로운 손톱을 뻗어 오는 것을 보며,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게 손대지 마라.”
움찔.
뺨 바로 앞에 우뚝 멈춰 버린 손톱을 무시한 채, 나는 놈의 노르스름한 눈동자를 노려보았다. 파충류와 같이 이질적인, 그러나 이질감보다 아련함만으로 가득 찬, 과거의 사슬에 얽매여, 한낱 멧돼지마저 품을 수 있는 악의조차 잃어버린 그 눈을 마주하며, 나는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어리석은 망령아. 아직도 모르겠느냐? 죽음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고, 무덤이란 산 자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죽은 자에게 무덤 따위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 칼에 맞아 죽든 물에 빠져 죽든 죽음인 것처럼, 시체가 불타서 재가 되든 짐승의 먹이가 되든, 죽은 자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런데도 다만 죽음에 집착하여, 평생 하나의 묘지를 지켜 왔으며, 기껏 묘지를 벗어나고도 죽음밖에는 바라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짐승을 나는 비웃는다.
탁!
나는 오른손으로 짐승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짐승의 팔을 끌어당겨, 그 손바닥을 내 가슴 위에 닿게 했다.
“명심해라. 나는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아직 거칠게 뛰고 있는 심장과 처절한 고통이 나의 생명을 증명해 주는 증거, 그것을 얇은 손바닥을 통해 확실하게 느끼도록 하며, 나지막이 말을 잇는다
“그리고 이 심장이 뛰고 있는 한, 나는 결코 ‘크레이 R. 스트라이커’라는 이름을 너의 묘지에 넘겨주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30년 전 이 짐승과 대항한 악당의 이름, 500명에 달하는 동료를 죽음으로 이끌었음에도 혼자 살아남아 도망 나왔던 유일한 생존자로서, 나는 스스로의 악의로, 묘지를 침범해 온 500명의 침입자를 도륙했던 묘지기를 노려보았다.
“네가 진정으로 나를 그 무덤으로 끌고 가고 싶다면 이 자리에서 나의 숨통을 끊어 봐라. 나의 심장을 파헤치고 나의 삶을 먹어 치워 봐라. 30년 전 그날처럼 다시 한번 내 앞에서 너의 악의를 증명해 봐라!”
나는 고개를 바짝 쳐들고 그것을 마주 보았다. 그 노르스름한 눈이 시야를 가득 채우고, 냉혈동물의 서늘한 숨결이 코끝을 스치는 가운데, 단단히 붙잡고 있던 그것의 손목을 풀어 내며, 나지막이 말을 끝맺는다.
“그럴 각오가 없다면 이만 돌아가라. 가련한 짐승아.”
“…KCRRR.”
마침내 체념한 것일까. 짧은 울음소리와 함께 스스륵 뒤로 물러난 짐승, 그것이 고개를 숙여 땅을 한 번 바라본 뒤,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나는 내심 조소한다.
그토록 긴 시간으로도 이해 못 한 어리석음을, 그토록 긴 시간으로도 꺾지 못한 완고함을, 제물로서 나 같은 악당을 택한 우둔함을, 1,000년 동안 악의조차 품지 못한 그 순수함을 비웃는다.
용의 묘지를 지켜 온 어리석은 짐승아. 네가 악의를 깨닫지 않는 한, 너는 결코 내게 목적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상대가 짐승이 아닌 신이나 악마라도, 감히 내게 삶을 포기하게 할 수는 없다.
설사 산 채로 살이 씹히고, 내장을 먹힐지라도.
이 숨통이 끊어질 그 순간까지, 나는 절대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으드득!
이를 악문 나는 떨리는 오른손을 뻗었다. 흙 속에 반쯤 파묻혀 있던 붉은 꽃을 뽑아 들어, 채집해 온 몇 가지 약초와 함께, 입에 털어 넣는다.
내가 이곳을 찾아온 두 가지 목적 중 하나, ‘통곡의 혈화’. 과거 약과 질병으로 세상을 지배하려던 악의 조직 ‘커스 블러드’에서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 낸 독도, 약도, 성수도, 환각제도 될 수 있는 꽃,
하지만 ‘통곡의 혈화’는 더없이 섬세한 약재, 제대로 쓰려면 정밀한 정제가 필요하다.
아무리 ‘커스 블러드’의 비전의 약제술인 ‘생명의 독수’를 알고 있는 나라도, 몇 가지 약초를 함께 복용하는 임기응변만으로는 정제는커녕 그 독성을 억누르는 것이 한계였다.
또, 아무리 독성을 억눌렀다고 해도 ‘통곡의 혈화’는 ‘미친 용의 눈물’의 재료로 그것을 통째로 삼킨 대가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두근. 두근! 두근!!
몸이 뜨겁게 달궈지며, 심장이 요동친다. 전신의 신경이 미친 듯이 경종을 울려 대고, 모든 근육이 찢어질 듯 뒤엉켜 들며, 과도한 압력에 혈관이 터질 듯 욱신거린다.
그리고 한순간 전신의 모든 통감이 열리며, 부상의 고통이 수백 배로 증폭되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악――!!
그것은 그야말로 통감의 한계를 초월한 고통.
한계를 넘어선 통증을 한꺼번에 전달받은 뇌가 스트레스로 인해 뜨겁게 달아오르는 반면, 특정 화학물질의 과다 생산으로 넓어진 혈관은 체액 부족 현상을 일으키며 몸을 싸늘하게 식힌다. 신체를 위한 안전장치인 통감이 오히려 쇼크로 신체를 죽이기 위해 날뛰는 잔혹한 죽음의 선고 속에서, 나는 이를 악물었다.
이… 내가… 고작, 이딴 일로, 죽을 성, 싶…으냐!!
빠드득…!
이가 바스러지는 소리가 귀를 울려오며, 땅을 파고든 손가락 끝에서 피가 터져 나온다.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어 듦에 따라, 체내의 체액은 가뭄철 논처럼 순식간에 줄어 가고, 허리가 부러질 듯 휘어지며 경련이 일어난다.
그러나 몸이 튕겨 오를 정도로 발작하면서도, 의식적으로 혈관을 강제 수축하고, 뇌를 자극해 한계를 넘어선 통증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나는 필사적으로 목숨을 부여잡았다.
고문 따위는 장난으로 여겨질 그 통증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계속 몰아쳐 왔으니, 그 고통은 이미 살아 있는 지옥과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 고통을 온건히 받아 냈다.
조금이라도 의지가 약해지면 죽을 것임을, 편해지려는 생각만 떠올려도 끝날 것임을,
정신을 잃는 그 순간을 죽음이 노릴 것을 누구보다도 분명히 알기에 그래야만 했다.
그 산지옥과 편안한 죽음의 경계 속에서 시간은 너무나 느려 일 초가 천 년 같았고, 고통은 갈수록 깊어 헤어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결코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악문 이빨 사이로 흐르는 것은 붉은 선혈, 땅을 파고든 손이 만든 것은 새빨간 고랑, 그래도 결코 입 밖에 비명을 내지 않는다.
대신 다섯 손가락을 더 깊이 박아 넣는다. 나는 스스로의 신체도 믿고 있지 않기에, 고통에 패배한 이빨이 혀를 깨물 것임을, 손이 눈을 후벼 뇌까지 파내리라는 것을 알기에 스스로 나의 입과 손을 봉인해야만 했다. 내 신체라도 그딴 짓은 용납할 수 없다.
혀를 불로 지지고 양손을 잘라 낼지라도 사지가 잘리고 오감을 잃는다 할지라도, 다만 이 삶을 지킬 수 있다면 상관없다.
죽음의 위기? 그딴 건 수없이 겪어 왔다. 하나 나는 수백의 위기에서 살아남았다.
신조차 내게 삶을 버리게 할 수는 없고, 악마도 내 삶을 포기하게 할 수는 없다.
심장에 검이 박히고 목이 잘려도 마찬가지, 그 어떠한 괴로움과 치욕도 예외는 아니다.
그 무엇을 희생하고 어떤 짓이라도 해서든 살아 있다면 나는 삶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설령 내일 당장 세상이 멸망한다 해도, 나는 오늘 삶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멸망 속에서도 나만은 살 방법을 찾아 홀로 고독해도 최후까지 살아남으리라.
그렇기에 나는 악일 수밖에 없는 자, 세상에서 나 자신만을 바라보는 자.
생존 하나만을 추구하는 비참한 자, 절대로 죽지 않는 최악의 악당이다!!!
아득하게 흔들리던 의식이 잠잠히 잦아든 것은, 너무 강렬한 자극을 견디다 못해, 통감이 거의 마비되다시피 했을 때였다.
“하아, 하아….”
가까스로 죽음의 위기를 넘겼음을 직감하고, 나는 악물었던 입을 열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지칠 대로 지친 몸은 기절하고 싶어 했지만, 나는 그런 정신을 억지로 부여잡았다. 통감과 함께 극도로 예민해진 감각을 통해, 사방의 모든 것이 감지되어 온다.
주변 안개의 미세한 흐름, 땅을 통해 전해지는 진동, 허공 너머로 들리는 소리, 살짝 코끝을 스치는 냄새, 혀에 느껴지는 공기의 맛,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예민해진 오감.
그것을 통해 주변의 정보, 지형, 상황 등 모든 것이 하나둘씩 머릿속에 흘러든다.
개미의 숫자마저 헤아리는 예민한 감각은, 시야를 가린 이 짙은 안개의 장막을 뚫고 전투의 기척 또한 명확하게 잡아낸다. 현재의 모든 것을 안다는 것은 과거의 모든 것을 안다는 뜻…. 주변에 남아 있는 흔적을 종합하여, 이곳에서 일어났던 일을 추리하여 정리한다.
그렇게 마련된 과거의 현재의 정보를 기반으로, 그 이상의 것을 내다보기 위해, 뇌의 잠재력을 한계까지 개방한다. 생각하고 계산하라.
이 세상에 완전이란 없고, 절대란 존재치 않는다. 천 번 벼락을 맞는 것보다 희박한 확률이라도, 어떤 상황에서든 살아날 방법은 존재한다.
그리고 단 하나만이라도 생로가 남아 있다면, 나는 반드시 그것을 찾아낼 수 있다.
한계에 가까워진 뇌가 뜨겁게 달아오른다.
시야가 붉어지고, 수많은 기억과 정보가 사고와 논리에 뒤섞여 머리를 잠식해 들어온다.
죽음. 파멸. 폭주. 실패. 절망. 자멸. 허무.
수십, 수백, 수천을 넘어선 계산과 예측, 그 끝에 있는 것은 처참한 죽음뿐이지만 나는 결코 생각을 멈추지 않고, 다음 실패를 향해 논리를 뻗어 간다.
실패 따위는 내게 일상과 다르지 않고, 절망 따위는 지금껏 항상 품고 살았다. 하여 삶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파멸을 나는 그 절망 끝에서 반드시 찾아낸다.
비록 그 삶에 의미란 없다고 할지라도, 최후의 최후까지 결코 포기할 수 없다.
쿠과과과광――!!
갑자기 엄청난 굉음과 함께 어디선가 불어닥친 바람이 안개를 휩쓸어 간다.
그렇게 안개가 사라지며 드러난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나는 흉소를 머금는다.
수백의 절망, 수천의 파멸, 수만의 죽음. 그 끝에서 찾아낸 단 하나의 삶이 나에게 웃음을 머금은 채, 늘어져 있던 사지를 움직이게 한다.
으득.
쓸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오른팔과 왼 다리뿐, 그나마도 극심한 통증을 감수하면 가까스로나마 움직일 수 있는 정도에 불과했지만, 나는 이를 악물며 땅에서 몸을 일으켰다.
찌익… 빠드득.
고작해야 몸을 일으킨 것만으로, 전신에서 무언가 찢어지는 듯한 느낌이 전해진다.
그렇게 몸이 내지르는 비명을 무시한 채, 오른손으로 왼 팔목을 붙잡아, 왼손을 주머니에 꽂아 팔을 고정한다. 그리고 안개 저편을 향해, 서서히 한 걸음을 내딛는다.
저… 벅.
두 다리는 천근만근보다도 무거워, 한 걸음이 천리보다도 더 아득하게만 느껴지고, 몸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린다.
하나 나는 그 모든 고통과, 비틀린 상태를 고스란히 받아들이며 등을 꼿꼿하게 편다.
그리고 오히려 보다 강하게 걸음을 내디디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절벽이 무너지는 충격에 튕겨 나온, 칼집째 바위틈에 꽂힌 검을 쥔다.
걸음을 내디디며 칼집의 검을 뽑고, 걸음을 멈추면서 검을 뒤로 당긴다.
그리고 시야를 뒤덮은 안개 너머를 육감 아닌 오감만 이용해 직관하여, 남은 전력을 모아서 팔을 휘두르며, 손안의 검을 목표를 향해 내던진다.
쉬우웅―
안개를 가르며 날아가는 검, 그 모습은 순식간에 안개 속에 묻혀 버렸지만, 나의 오감은 빙그르르 날아간 검이 목적했던 곳에 정확히 틀어박혔다는 것을 알려 준다.
문제는 그다음, 정작 바로 앞에 검을 두고도, 무엇 하나 행동하지 못한 채, 당황하고 있는 어리석은 녀석의 행동에 나는 짜증이 왈칵 치솟는 것을 느꼈다.
‘멍청한 녀석’.
상을 차려 줬으면, 적어도 떠먹는 것 정도는 직접 하란 말이다!
“잡아라.”
들끓는 짜증과 노기를 애써 억누르며, 애써 침착하게 한 마디 말을 내뱉는다.
그리고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흠칫 검을 집어 드는 녀석의 기척을 느끼며, 준비한 말을 영창한다.
“VHLV JI, RHE”
그것은 다만
“ECAE KUW FULRD.”
악을 수호한다.
우우웅―!
주문에 응하듯 터져 나온 밝은 섬광, 나는 사방의 모든 안개를 몰아내며, 명확하게 길을 인도하는 그 빛줄기를 향해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저벅. 저벅.
짙고도 깊은 안개를 헤치고 지나, 아주 미약하게나마 트인 시야.
그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낸 녀석과 계집애, 그리고 그야말로 집채만 하게 거대해진 채, 짙은 운무를 휘감고 있는 멧돼지를 보면서도, 나는 동요하지 않았다.
녀석과 계집애에 대한 것은 이미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멧돼지의 변화에 대해서라면, 원인까지도 짐작이 갔다.
바로 이 온천.
멧돼지의 흉성이나 그 힘을 생각해 볼 때, 평소부터 이 온천을 자주 이용하면서, 지옥의 힘을 축적했을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통곡의 혈화’를 먹어 치우고도, 맹수 특유의 강인한 생명력으로 목숨을 건져, 더더욱 튼튼하게 생체 개조가 됐을 수도 있다.
문제는 절벽의 붕괴로 인한 충격, 그 붕괴로 비롯한 균열이 지반까지 이르렀다면, 원래 조금씩만 스며 나와야 할 지옥의 마력이 폭발하듯 온천에 녹아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물이 높은 데에서 낮은 데로 흐르듯, 온천의 마력에 익숙해져 있던 멧돼지의 신체에, 그 막대한 마력이 모조리 흘러듦으로써, 특수한 변이를 일으키게 된 것이다.
악마와 함께 지옥에 거하는 존재, ‘요마’라는 형태로서….
하지만 그것은 통제되지 않는 무질서적인 폭주, 지금은 온천과 안개의 마력을 먹어 치우며, 끊임없이 강해지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 마력이 육신의 한계점을 넘어서는 순간, 그것은 폭발해 이 산을 통째로 날려 버릴 것이다. 설사 그 폭발을 피하더라도 이 내출혈로는 살아날 가능성이 희박하다.
그러나 이중 삼중으로 겹친 죽음의 위기에서도 나는 동요하지 않았다. 다만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 들끓는 마력에 의해 핏빛으로 물든, 짐승답지 않은 살기와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