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90)
89영웅의 결의
도대체 무슨 일을 겪었던 것일까? 그 옷은 피와 흙먼지로 가득하고, 그 몸은 온갖 상처로 뒤덮여 있다. 보기만 해도 그 몸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손만 다친 나와는 차원이 다른 부상을 입고, 죽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의 고통을 겪고 있음을 나는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그런데도 아무 동요도 없이 걸어온 그분은, 우리 앞에 멈춰 선 채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아리스, 세레나.”
숨 쉬는 것조차 고통스러울 상태임에도 여전히 흔들림 없는 그 목소리를 따라 나는 홀린 듯 그를 바라보았다. 비록 보이는 것은 그의 뒷모습뿐이었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그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지기는커녕, 언제나와 같이 무표정하리라는 현실을, 그 눈빛은 얼음보다 차갑고 날카롭게 요마를 노려보고 있으리라는 사실을.
그리고 이어진 그분의 말에 나는 일순 숨을 잊었다.
“나를 믿을 수 있나?”
……!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도 들어 본 적 없는 말이 다름 아닌 그분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이 나를 놀라게 했지만, 그러한 놀람과는 별개로 마음만은 이상할 정도로 차분했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지만, 그렇기에 생각할 필요조차 없는 물음은 내게 망설임 없이 대답을 토해 내도록 했다.
“물론입니다.”
“…응.”
내게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베풀어 준 은인이자, 단둘밖에 없는 가족인 그가 아니라면, 세상의 그 누구를 믿을 수 있을까? 때문에 나는 망설임 없이 그의 물음에 답했고, 이어진 그의 말에도 놀라지 않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너희들을 목숨, 내게 맡겨라.”
나는 한 손으로 검을 굳게 움켜쥐는 것으로 그 요청에 대한 대답을 대신했다.
이 목숨은 어차피 10년 전 그에게 받았던 것, 이제 와서 그가 다시 가져간다 할지라도, 나는 기쁜 마음으로 목숨을 맡길 것이다. 이미 대답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일까?
뒤조차 돌아보지 않고 고개를 살짝 끄덕인 그는, 요마를 향해 나지막이 말을 던졌다.
“와라. 짐승아.”
꾸이익…!
그 상태는 그야말로 최악, 골절에서부터 내출혈까지, 이미 치명상을 입은 것은 명백했다.
그런데도 그는 양손을 주머니에 꽂아 넣은 채,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고 요마를 도발했다.
“달라진 것은 없다. 너는 여전히 강인한 짐승이고, 나는 여전히 나약한 인간이다.”
종잇장 하나 움직이지 못할 몸으로, 한 걸음조차 움직이기 힘든 다리로, 대나무처럼 허리를 꼿꼿하게 편 채 요마를 한낱 짐승으로 치부하고, 스스로를 단지 인간으로 자칭하는 그 등은, 너무나 넓고도 커다랗게 느껴진다.
“그러나 명심해라 악수(惡獸)여, 네가 악의(惡意)로써 죽이고자 하는 상대는 어떤 패배와 굴욕과 추악함조차 넘어서 살아남아 온 지상 최악의 인간이라는 것을.”
그 말에 담긴 것은 세월, 그 음성에 담긴 것은 인생, 그 목소리에 담긴 것은 과거.
그에 대해 안다 생각했던 나의 오만을 비웃듯, 끝이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짊어진 목소리로, 설사 신이나 악마가 상대라도 상관없다는 듯, 당당한 태도로 말을 끝맺는다.
“자아, 파멸할 각오가 되었다면 와라. 악수여!”
뀌이이익――!!
두두두두―!
그 외침에 응하듯 돌진하기 시작한 요마를 보며, 나는 무심코 입술을 깨물었다.
이 팔이 어디까지 버텨 줄지는 모른다. 하지만 ‘홍염의 불꽃’은 일격 필살의 검, 단 한 번만 제대로 휘두른다면, 일격에 요마를 참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문제는 마법을 뚫고 일격을 맞추기까지의 과정, 그와 아리스가 있으니 섣부른 회피는 할 수 없다.
그렇다고 검으로 요마의 마법을 막는다면, 일격을 날리기도 전에 팔이 망가져 버릴 것이다.
결국 남은 방법은 하나, 모든 공격을 몸으로 받아 내며 돌진하는 것뿐, 갑옷도 없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몰라도, 내 몸이라면 적어도 요마에게 일격을 날릴 때까지는 버텨 줄 것이다.
“아무리 큰 폭풍도 작은 나비의 날갯짓에서 비롯되며, 아무리 긴 여행길도 그 시작은 한 걸음에 지나지 않는다.”
……!
각오와 함께 요마를 향해 몸을 날리기 직전, 나는 흠칫 몸을 굳혔다.
목숨을 버리려는 나를 타이르는 듯한 그 음성이, 내게 요마에게 뛰어드는 대신, 한 걸음만을 내딛게 만들고 있었다. 그렇게 내가 그의 옆에 나란히 선 순간, 뒤에서부터 한 줄기 고요한 음성이 들려왔다.
“…폭풍의 지배자 세이너스여, 내가 원하는 것은 질풍이라.”
쿠궁―!!
뀌에에엑―!
대체 무엇을 한 것일까?
사방에 깔려 있던 안개가 흔들렸다 싶은 순간, 달려들던 요마의 거체가 부웅 허공을 날아 땅 위를 나뒹굴며 땅이 깨져 나갔다. 내가 비틀비틀 몸을 일으킨 요마를 멍하니 볼 때, 연이어 한 줄기 음성이 귀로 흘러들었다.
“바위는 어떠한 역경에도 물러나는 법을 모르며, 빗줄기는 바람과 함께 노닐되 땅을 잊지 않는다.”
그 말은 너무나 심오해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머리로 이해하기 전에 느껴지는 그 뜻을 따라, 나는 반사적으로 행동에 나섰다. 그리하여 내가 굳건히 한 걸음을 내디디며, 부드럽게 검을 들어 올린 순간, 수많은 안개 덩어리가 화살처럼 쏟아져 내렸다.
공격 일변도인 ‘홍염의 불꽃’으로는 막지 못할 막대한 안개의 세례를 보면서도, 나는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굳건한 일보에서 비롯된 힘을 위로 이끌어 냈다. 이 팔로는 그 힘을 받아 낼 수 없음을 알았지만, 이미 내 뇌리에 그런 걱정은 남아 있지 않았다.
다만 팔로 흘러든 그 힘을 부드럽게 분산시켜 가볍게 흔들 듯 검을 휘둘러 갔을 뿐이다
촤아악!
그것은 결코 바위처럼 강맹하지도, 그림자처럼 은밀하고 쾌속하지도, 불꽃처럼 화려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흔들리는 갈대처럼 휘둘러지며, 모든 안개를 베어 내고 튕겨 내는 검식은 너무나 부드럽고도 가벼워, 펼친 나 스스로도 넋을 잃고 그 검영을 바라볼 만큼, 우아하고도 아름다웠다.
“단단한 벽을 무너트리는 것은 언제나 작은 빈틈이며, 흩어진 구름은 비가 되어 다시 돌아온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다시 검을 휘둘러, 조각조각 난 채 흩어져 있던 안개를 베어 냈다. 막 폭발할 것처럼 부풀어 오르던 안개가, 검광에 헛되이 스러져 가는 가운데, 이어지는 그의 말을 따라, 나는 요마를 상대했다.
절묘한 틈을 통해 요마의 공격을 막고, 조금씩 반격하며 점차 우세를 점해 갔고, 그 우세가 확연해지면 확연해질수록, 내 마음에는 하나의 확신과 경이감이 커졌다.
요마의 마음이라도 읽어 내는 것처럼 정확한 예측, 기묘한 은유를 사용하고 있음에도, 수천 마디의 말보다 알기 쉬운 지시, 이런 신비가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검가에는 검에 관련된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며, 그중에는 동화나 전설 같은 이야기 또한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전설 중에는, 1,000년간 드라고니아를 지켜 왔다는 신화의 존재, 용의 수호자 ‘용검자’가 물아지경을 바탕으로 만들어 냈다는, 하나의 비전에 대한 것도 있었다.
본래 물아지경이란 절대적인 감각을 얻는 검경, 온갖 검경 중에서도 가장 터득하기 힘들다는 그 깨달음을 용검자는 1,000년간 발전시켜, 단지 오감과 육감을 발달시키는 것을 넘어 천지만물과 소통함으로써 모든 것과 의사를 나누는 경지를 이뤄 냈으니, 닫혀 있는 마음의 자물쇠를 넘어, 세상의 문을 열 수 있는 그 비전을 검사들은 이렇게 칭했다. ‘세계의 열쇠’라고.
그것이야말로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요마를 몰아붙일 수 있는 힘의 정체, 광검자의 ‘미친 폭풍의 검’이 등장하기 전까지, 가장 궁극에 가깝다 칭해지던 검의 극의였다.
어떻게 그가 세계의 열쇠를 사용할 수 있는지? 그 의혹과 경탄 속에, 그의 지시대로 검을 휘두르며, 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
일격 필살의 파괴력을 끌어내는 데 치중해 신체에 무리한 부담을 주는 ‘홍염의 불꽃’을, 이토록 부드럽게 펼치는 게 가능하다는 충격과 스스로가 펼쳐 내는 검무의 아름다움에 나는 넋을 잃고 빠져들어 있었다. 그 때문에 이어진 그의 지시에도 나는 저항 없이 따랐다.
“물러나라.”
……?!
무심코 뒤로 물러나 버리고 나서야, 아리스와 나를 뒤에 남겨 둔 채 앞으로 걸어 나가는 그를 보고 나는 내심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그가 ‘세계의 열쇠’를 지니고 있더라도, 저 몸으로 요마를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니까,
하지만 그러한 나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는 불꽃이 스러지는 듯한 한 걸음만으로 요마의 돌격을 자연스럽게 피해 내며, 주머니에서 한 팔을 꺼내 들었다.
“영혼조차 집어삼키는 슬픔. 그것이 너의 악이라면….”
성물에 휘감긴 손이 안개를 꿰뚫으며, 바위처럼 단단하던 요마의 미간에 틀어박힌다.
그 가벼운 일 수에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돌처럼 굳어진 요마의 곁을 천천히 지나가며, 그는 나지막이 말을 끝맺었다.
“너의 악의(惡意), 받아 가겠다.”
촤악―!!
멧돼지의 미간에서 손을 뽑아낸 그의 몸 위로, 스쳐 지나가는 것은 한 줄기 기묘한 격변.
우득. 우드득!
뼈가 뒤틀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빠르게 자라난 머리가 목덜미를 뒤덮는다.
하지만 피부 밑에서 일어난 변화에 비하면, 머리카락의 급성장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피부 밑으로 숨겨진 부러진 뼈가 붙고, 찢어진 근육이 재생되며, 터졌던 혈관이 복구된다.
그 기적과 같은 광경을 보며, 나는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설사 삼대 신관 중에서도 하나인 신관장이라도, 저만한 부상을 단숨에 회복시킬 수는 없다.
그렇지만 세상에는 단 하나, 굳이 신의 기적에 의지하지 않고도, 저런 회복력을 발휘할 수 있는 방법이 존재했다. 심장이 터지거나 목이 잘리지 않는 한, 결코 죽지 않는 강인한 생명력과 아무리 베이고 찔리고 뭉개지더라도 순식간에 낫는 재생력을 부여함으로써, 사용자를 불사신에 가깝게 만들어 주는 비전,
그러나 그 대가로 인간의 피를 마시고, 그 심장을 뜯어 먹어야만 하기에 영혼을 팔아야 하는 저주받은 비술 그리고 단 십여 명의 검사가 남부 밀림을 공포로 지배할 수 있게 해 준, 악마의 비법이 존재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아니, 오직 나만이 알고 있다고 믿었다. 그렇기에 나는 비틀비틀 몸을 일으킨 요마가, 그의 외침을 듣고 도망치는 모습을, 그리고 마치 심지가 다 한 촛불처럼 그대로 쓰러지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당신께서… 어떻게 12식인귀의 ‘불사의 심장’을 알고 계시는 겁니까?
7년 전 내가 쓰러트린 마귀들의 능력이, 절대 나타날 리 없는 상대에게서 나타난 현실을 나는 그렇게 한참이나 망연히 지켜봐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