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91)
90마왕의 결의
두 팔을 주머니에 넣은 채, 안개 사이에서 걸어 나온 그의 모습은 여유롭다 못해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느껴져, 내게 잠시 이 상황의 긴장감마저 잊도록 했다. 하지만 나와 세레나 곁을 지나간 그의 기척과 그리고 안개 속에 울려 퍼진 한 줄기 음성은 이것이 꿈이 아닌 현실임을 알려 주었다.
“아리스,세레나.”
흠칫.
마치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그 나지막한 부름에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사내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치 요마로부터 나와 세레나를 지키려는 듯, 우리 앞에 버티고 서 있는 그의 등은 너무나 넓고도 굳건하게 보인다. 그리고 이어진 그의 말은 나는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나를 믿을 수 있나?”
내게 믿음이라는 것은 한정된 것이었다. 내가 믿을 수 있는 것은 같은 마족뿐이었고, 인간이란 어디까지나 경계의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바로 한 달 전의 나였다면, 이 말을 듣고 망설임 없이 냉소를 던졌을 것이다. 하지만 다음 순간, 나는 이미 대답을 내놓고 있었다.
“물론입니다.”
“…응.”
단 한 번도 내게 거짓된 적 없고, 나를 위해 몇 번이나 목숨 걸고 싸워 준 인간, 그리고 나의 마음에 깊이 자리 잡은 이 사내를, 나는 이미 그 누구보다도 분명하게 믿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의 이어진 말에도,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너희들을 목숨, 내게 맡겨라.”
세계의 반을 지배했던 자, 모든 마족들의 군주, 신화시대 이래 최강의 마력을 지닌, 81주문의 마왕, 그런 내게 목숨을 맡기라는 그의 말은 무뚝뚝한 만큼 오만하게 들렸지만, 나는 순순히 받아들였다.
“와라. 짐승아.”
꾸익, 뀌이익!
도발적인 음성에 사나운 괴성을 토해 내는 요마, 그 전신에서 넘실거리는 것은 막대한 마력.
모든 요마 중 최강이라 불리던 어둠의 산의 주인과도 비견될 강대한 힘. 하지만 그런 요마를 앞두고도, 그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달라진 것은 없다. 너는 여전히 강인한 짐승이고, 나는 여전히 나약한 인간이다.”
자신의 나약함을 말하는 것과 달리, 얼음처럼 차갑고 냉혹한 목소리로 그는 요마에게 고한다.
“그러나 명심해라 악수(惡獸)여, 네가 악의(惡意)로써 죽이고자 하는 상대는 어떤 패배와 굴욕과 추악함조차 넘어서 살아남아 온 지상 최악의 인간이라는 것을.”
숨이 막혀 온다. 그것은 거짓 없는 진실, 그의 일생을 담은 선포라는 느꼈기에 나는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일까? 그리고 그는 대체 어떤 삶을 살아온 것일까? 내가 답 모를 의문을 담아 지켜보는 가운데, 그는 요마를 상대로 당당히 선고한다.
“자아, 파멸할 각오가 되었다면 와라. 악수여!”
뀌이이익――!!
두두두두―!
마치 그의 말을 알아들은 듯, 돌진하는 요마를 보며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그라도 버텨 낼 수 있을 리가 없고, 세레나 또한 이미 한계인 것은 명백한 일, 내가 어떻게든 해야만 한다. 하지만 마력을 함부로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주춤하게 했다. 만약, 만에 하나라도 폭주를 하게 된다면….
“아무리 큰 폭풍도 작은 나비의 날갯짓에서 비롯되며, 아무리 긴 여행길도 그 시작은 한 걸음에 지나지 않는다.”
무슨… ?!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마치 시를 읊는 듯한 말, 그것을 통해 전해져 오는 하나의 뜻이, 나를 당황하게 했다. 하지만 그런 당혹감과는 별개로, 나는 이미 주문을 영창해 가고 있었다.
나는 그를 믿는다 말했고, 그는 내게 목숨을 맡기라 했다. 그것만으로도, 망설일 필요는 남아 있지 않았다.
“…폭풍의 지배자 세이너스여. 내가 원하는 것은 질풍이라.”
폭풍이 의미하는 것은 바람의 마법, 나비의 날갯짓이 의미하는 것은 1개의 주문, 그것을 요마의 진로 한 걸음 앞에 펼쳐 내자, 지면에 얕고도 넓게 잔잔하게 바람이 진흙 같은 바람의 늪지를 만들어 낸다.
고작 1개의 주문, 인간이 상대라도 살상력을 기대하기 힘들며 잠시 발을 늦추는 게 고작인 이런 마법이 강대한 요마에게 통할 리가 없었다. 하나 그런 나의 생각은 그 작은 마법이 빚어낸 광경을 본 순간, 산산이 깨져 나가고 말았다.
쿠궁―!!
뀌에에엑―!
‘맙…소사’.
달려들던 속도 그대로 땅을 나뒹굴어, 데굴데굴 구르는 요마를 보며 나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아무리 달려드는 속도가 있었다지만, 요마에게 고작 약소급 마법이 통할 줄이야.
더구나 이 어지간한 마술 못지않은 효과는, 81개의 주문을 터득해, 마왕이라 불리던 나조차도 상상조차 못 한 일이었다. 그러나 나의 경악은 오래가지 못했다.
고작 1개의 주문만으로도 치솟은 마력의 열기가 나의 심장을 뜨겁게 옥죄여 들며, 모든 것을 불태우고 싶은 파괴욕과 갈증, 그리고 그보다 더 깊은 욕망을 이끌어 내고 있었다. 그때, 한 줄기 믿기 힘든 소리가 들려왔다.
“바위는 어떠한 역경에도 물러나는 법을 모르며, 빗줄기는 바람과 함께 노닐되 땅을 잊지 않는다.”
“……!”
나는 순간 내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바위란 강한 마력의 표현, 비란 마력의 흐름을 뜻하고, 바람은 마력의 폭주를, 땅은 마력의 분출을 상징한다. 즉, 지금 그는 내게 마력을 제어하지 말고, 오히려 더욱 강하게 쏟아 내라고 말하고 있었다. 지금 내게 있어 그것은 자살행위, 심지어 그와 세레나마저 포함해 모든 것을 파멸로 이끄는 행위였다.
망설임은 있었다. 그러나 나는 결국 선택했다. 억제하고 있던 마력을 풀어 놓자, 심장에 갇혀 있다가 뛰쳐나온 마력이 고삐 풀린 말처럼 전신의 혈관을 치달린다. 그렇게 전신의 혈관이 터질 듯한 감각과 함께 정신이 아득해진다 싶은 순간, 한 줄기 음성이 나를 이끌었다.
“단단한 벽을 무너트리는 것은 언제나 작은 빈틈이며, 흩어진 구름은 비가 되어 다시 돌아온다.”
더 이상 생각할 여유나 따위는 없었다. 다만 본능적으로 그 말에 따라, 들끓는 마력을 손끝으로 분출시켰을 뿐이다. 그것은 본래 마력을 폭발시키는 행위, 한계에 도달해 있던 폭주의 정점이자, 나의 심신을 무너트릴 마지막 격발이었지만, 그 당연한 결과는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하나의 이변만이 나를 경악케 했을 뿐이다.
우우웅―
한 줄기 그 기묘한 울림과 함께 들끓던 마력이 어디론가 빨려 간다 싶은 순간, 팔에서 뻗어 나온 서늘한 기운이, 내 심장의 열기를 식히고 혈관을 치달리던 폭풍을 잠재웠다.
“……!”
서열 3위의 대악마 아크넬, 서열 5위의 대악마 세이너스, 아흔아홉 악마 중 정점에 있는 아홉 대악마. 그 둘의 마력이 어둠에 삼켜지듯 사라지며, 어느새 나의 통제로 돌아와 있었다.
나는 떨리는 눈으로 그 힘의 근원을 돌아보았다. 내 가느다란 손목에 차여진 팔찌, ‘용의 그림자’가 스스로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마력의 거친 흐름을 가라앉히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가…!’
물론 대륙 36대 기보에는 온갖 보물이 있으며, 그중에는 스스로 움직이는 기보도 있긴 하다.
내가 예전에 쓰던 기보 서열 4위의 기보, ‘흑룡의 의장’만 해도 그런 보물로 착용자의 마력에 반응해 자유롭게 변형되며, 도검은 물론 철퇴의 충격까지 막아 낼 수 있기에 마법사에게는 둘도 없는 보물이었다. 그러나 이 ‘용의 그림자’에 비하면, 그 ‘흑룡의 의장’조차 장난감에 불과했다. 마력을 제어할 수 있는 보물이라니…!
이만큼이나 마력을 자유롭게 통제할 수 있다면, 한계를 넘어선 마법조차 사용할 수 있다. 마법사라면 목숨을 걸고 탐낼 보물인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하나, 이 ‘용의 그림자’만 있다면, 더 이상 흑마법의 부작용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용의 그림자’는 마력에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마력의 근원이 되는 악마의 악의와 사념, 그 모든 것을 의지대로 제어함으로써, 마력을 통제할 수 있게 해 주는 보물인 것이다.
마치… ‘봉인구’와 같이 순간, 등줄기를 스치는 것은 오싹한 전율, 99개의 봉인구는 악마를 가두기 위해, 신화시대에 신이 만들어 낸 궁극의 신기, 그리고 이 ‘용의 그림자’는, 능히 100번째 봉인구라 해도 과언이 아닌 절세 보물이었다. 아무리 주술의 힘을 빌렸다 할지라도, 신기와 견줄 보물을 인간이 만들어 내다니…!
“물러나라.”
그것이 뜻하는 의미를 알기에, 전신에 돋아나는 소름을 주체할 수 없던 나는, 그의 나지막한 말에 반사적으로 옆으로 물러났다. 지금 물러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 그의 말에는 나는 물론, 세레나도 감히 거역하지 못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그렇게 우리를 뒤에 남겨 둔 채, 그는 요마를 향해 천천히 걸어 나갔다.
요마는 발악하듯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철벽도 부술 돌진을 앞두고도, 그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다만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한 팔을, 천천히 빼 들었을 뿐.
“영혼조차 집어삼키는 슬픔. 그것이 너의 악이라면….”
한 줄기 나지막한 음성과 함께, 멧돼지의 거구와 그의 몸이 교차했다 싶은 순간,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들던 멧돼지의 몸이 거짓말처럼 우뚝 멎어 버렸다.
“너의 악의(惡意), 받아 가겠다.”
촤악―!!
멧돼지의 미간에서 그의 손이 뽑혀 나오며, 방대한 양의 마력이 분출됐다 싶은 순간, 그의 몸을 지나가는 것은 기묘한 격변.
우득. 우드득!
뼈가 뒤틀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길게 자란 반백의 머리가 목덜미를 뒤덮는다.
그것은 또 어떤 주술의 힘일까? 나로서도 짐작조차 가지 않는 신비한 힘으로, 그가 방대한 마력을 산산이 흩어 버리는 것을, 그리고 쓰러졌다가 다시 몸을 일으킨 요마가 그를 피해 도망치는 것을 나는 경탄 속에 망연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저 강대하기 그지없던 요마를, 가지고 놀듯 가볍게 쫓아 버리다니.
‘…코드, 나 정말 이것만은 묻고 싶은데, 대체 당신의 진짜 정체는 뭐야?’
아무리 주술의 힘을 빌렸더라도, 어떻게 인간이 신의 권위를 침범할 수 있는 거지? 마왕이라 불리던 나조차, 악마의 권능을 벗어나지 못했는데? 온갖 의문을 담아 그를 바라보던 나는, 결국 아무것도 얻어 내지 못한 채 그에게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그에게 무언가를 얻을 필요가 없었다.
그는 한낱 정체 따위보다, 훨씬 귀하고 중요한 것을 아낌없이 내어 주는 이였으니까,
당장 이 ‘용의 그림자’만 하더라도 마력 폭주를 걱정 않게 해 주는 지고의 보물, 이것만 있다면 나는 이곳을 떠날 필요가 없었다. 계속 그와 세레나와 지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니, 설령 그에게 받은 것이 아무것도 없어도 내게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그는 단지 존재 자체만으로, 내게 그 무엇보다 소중하고, 안타깝고, 애달픈… 그런 대상이었으니까.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뗐다. 그리고 놀란 표정의 세레나를 바라보며, 내심 조용히 속삭였다.
‘미안해, 세레나. 지금부터 미리 사과해 둘게. 나는 어쩔 수 없는 마왕인가 봐. 결국 마왕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나 봐. 마왕이란 포기 따위는 모르는 존재니까. 원하는 건 반드시 손에 넣는 욕심쟁이니까. 이건 어쩌면 세레나에 대한 배신일지도 몰라.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참고 인내할 수는 없는걸, 설사 내가 마왕이 아니라도, 사랑을 포기하는 소녀란 없으니까.’
나는 그렇게 팔에 차여진 ‘용의 그림자’를 끌어안으며 각오를 굳혔다. 세레나의 가족인 아리스가 아닌, 81주문의 마왕 아리트리스 D. S로서, 단 하나의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서….
* * *
그래, 최후의 그 순간까지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나는 무엇을 익히든 일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내게 용을 품고 살아갈 여력 따윈 없다는 것을, 나는 결국 비루한 삼류 악당에 불과하다는 것을, 나는 삼류를 벗어난 그 순간 죽게 된다는 것을, 그것이… , 내가 악을 추구함으로써 신에게 받은 저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