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92)
91용의 휴식
-30년 전.
그것이 감았던 눈을 떴을 때, 본래 붉게 물들어 있던 대지에 더 이상 피와 시체는 남아 있지 않았다. 대신 그 위에 늘어서 있는 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막대한 양의 무덤과 묘비.
그리고 넝마보다 넝마 같은 몸을 하고도, 홀로 그 무덤을 만든 한 인간의 뒷모습이었다.
“보아라. 가련한 짐승아.”
“KRRR….”
짐승이 알 수는 있었다. 하지만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세상과 이어지는 열쇠를 손에 넣은 뒤로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낯선 경험이었지만, 그 인간의 마음에 걸린 자물쇠는 작은 열쇠로 열기에는 너무 무겁고도 난해했기에 짐승은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다만 그 말에 따라 묘지를 둘러볼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어째서 죽어야 했다고 생각하느냐? 있지도 않은 전설의 보물을 탐냈기 때문에? 감히 더럽혀서는 안 되는 용의 무덤을 더럽혔기 때문에? 아니면 너의 분노를 샀기 때문에? 나를 배신하여 죽이려 했기 때문에?”
“…….”
짐승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홀로 500여 개의 무덤을 만들어 낸 대가로, 피와 물집으로 가득 물든 거친 손을 들어 올려, 술을 묘지에 흩뿌리는 인간을 지켜보는 것만이 짐승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이었다.
“나는 이제 떠날 것이다.”
“KROOO.”
짐승은 순간 흠칫하며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등 뒤의 찢겨진 날개에서부터 비늘 갑옷 사이로 화살이 박힌 새하얀 허벅지, 털가죽 토시와 함께 칼날에 베인 가는 팔뚝, 등, 곳곳에 남은 부상의 통증은 짐승을 제지하며 그 매끄러운 아미를 찡그리게 했다.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든, 그리고 어떻게 하고 싶든 나는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 말과 함께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인간을, 짐승은 힘겹게 마주 보았다. 밤이 물러나며 낮이 찾아드는 새벽의 시간, 그 아침 햇살은 분명 따사롭고 아름다움에도 그의 얼굴 뒤로 떠오르고 있는 태양은 기이할 정도로 따갑고도 뜨거워 짐승의 노르스름한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천 년이나 묶은 무덤 따위에 발이 묶일 생각도, 이제는 슬픔이라는 악조차 잃어버린 너 같은 짐승을 보살펴 줄 생각도 없다.”
“KOUUU….”
자신을 구해 주기 위해 다른 498명의 보물 사냥꾼을 적대한 인간, 그리하여 자신을 도와 그들 모두를 참살하고도, 손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그들의 무덤을 만들어 준 인간은 그렇게 짐승의 눈물을 손으로 훑어 주고, 조용히 몸을 돌렸다.
“그러니 짐승아. 네가 나를 다시 만나고 싶다면 이곳을 벗어나 봐라. 네가 천년의 시간을 잊게 됐을 때, 498명의 보물 사냥꾼이 죽어야 했던 이유를 알게 됐을 때, 잃어버린 악의를 되찾게 됐을 때, 너의 악의로 나의 악의를 꺾을 각오가 됐을 때.”
저벅. 저벅.
길게 늘어선 무덤을 지나, 1000년 동안 감춰져 있던 용의 무덤의 경계를 걸어 나가며, 인간은 마지막으로 말을 끝맺었다.
“나를 찾아와 네 악의를 증명해 봐라.”
새벽에 밀려 스러지는 어둠과 같이 그 말만을 남기고 떠나 버린 그 인간의 뒷모습을 짐승은 망연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참 후, 짐승은 조용히 한쪽 무릎을 꿇고, 가느다란 목을 숙여 녹색 머리카락을 찰랑거리며 그 인간을 배웅했다. 드라고니아에 들어선 499명의 인간 중, 유일하게 보물을 탐내지 않았던 이, 그리고 자신에게 천 년의 슬픔만을 받아 간 이, 그럼으로써 드라고니아를 정복한 자신의 주인을 그 충실한 노예인 용검자는 그렇게 조용히 떠나보냈다.
먼 훗날, 다시금 만나게 될 그날을 기약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