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94)
93영웅의 위장
그것은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사고였다. 상단의 창고에 쌓아 뒀던 짐이 무너져, 창고에서 일하던 잡역부들이 다친 것이다. 부상이 심한 환자는 즉시 신전에 실려 갔다. 하지만 그리 심하게 다치지 않은 환자들은 그냥 그대로 집으로 보내져서 하루 휴가를 얻었다.
문제는 그렇게 집에 돌아온 직후, 다리의 통증이 심해진 환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잡역부가 사는 빈민가는 신전에서 멀었고, 창고에서 일어난 사건에 더불어 갑작스러운 화재로 정신없이 바쁜 신관들은 환자 한 명을 위해 빈민가에 올 여유가 없었다. 하여 초조해하다 못한 환자의 가족은 얼마 전부터, 빈민가에 머물고 있는 약술사를 찾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지금 이 순간, 내가 이 환자를 살펴보고 있는 이유였다.
“끄으응.”
살짝 부어 있는 환자의 다리에 약을 바르고, 부목을 대어 단단히 붕대를 감은 후, 나는 가방에서 작은 약병을 하나 꺼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몇 개의 단환을 덜어 내, 옆에 서 초조한 눈으로 환자를 지켜보던 허름한 옷의 소녀에게 건네주었다.
“진통제입니다. 효과는 그리 좋지 않지만, 그렇다고 너무 많이 복용하면 위험할 수도 있으니 고통이 극심할 때만 한 알씩 주십시오.”
“그, 그럼 저희 아버지는 이제 괜찮은 건가요?”
너무 간단히 치료가 끝나 불안했던 것일까?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어 오는 소녀에게, 나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예. 다행히 뼈에 미세한 금이 간 정도니, 일주일 정도면 움직이지 않고 요양하시면 다 나을 겁니다. 이후에 신관님께 찾아가시면 하루 이틀이면 완치되실 겁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허리를 숙이는 소녀에게 고개를 저어 보인다. 환자가 입은 부상은 크게 심각하지 않았고, 그렇기에 의술에 대해서는 기초적인 수준만을 아는 나도 치료할 수 있었다. 결코 감사를 받을 만한 일이 아닌 것이다.
“저… 이제 와서 말씀드리기는 죄송하지만, 가진 게 이것뿐이라….”
감사의 인사 후, 소녀가 망설이며 내놓은 다섯 개의 동전에, 나는 무심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꼬질꼬질한 손때가 묻어 있는 동전들, 분명 이 가난한 생활 가운데도, 먹을 것을 안 먹고, 입을 것은 안 입으며, 필사적으로 아껴 온 흔적이 안타까움을 느끼게 한다.
“이걸로 부족하시다면 나중에라도 꼭 갚겠습니다.”
“아니요.”
나는 조용히 고개를 저어 보이고, 소녀의 손에서 하나의 동전을 집어 들었다.
“이거면 충분합니다.”
“하, 하지만 그걸로는 약값도 안 될 텐데….”
“괜찮습니다. 어차피 그렇게 비싼 약도 아니니까요.”
남은 동전이라도 모두 주려는 소녀의 성의를 나는 정중하게 사양했다. 그리고 추운 날씨 때문인지, 뺨이 빨개진 소녀의 마중을 받아 집을 나섰다.
사실 이 한 푼의 동전도 받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 내게는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
과거… 나는 영웅이라 불렸다.
하지만 여러 이유로 검을 놓고 은퇴했고, 외딴 마을에서 두 가족과 평온한 삶을 보냈다.
그러나 어떤 사정 때문에 마을을 떠났고, 얼마 전에야 약술사로 신분을 위장한 채,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루반 공국의 수도, 루바젤의 빈민가에 말이다.
하필 이런 빈민가에 거처를 마련한 것은, 타인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집을 구할 돈이 부족하다는 이유도 있었다.
단순한 위장을 넘어 실제로 약술사 일을 하는 것도 그래서였다. 하지만 빈민들을 상대로 치료를 하니 제대로 돈이 모일 리가 없었다. 이번 일만 해도 오히려 적자였으니까.
마음 같아서야 가문의 돈을 쓰고 싶었지만, 가문을 떠나 놓고 손을 벌릴 면목은 없었다. 무엇보다 그분이 결코 그런 일을 승낙하실 리가 없다는 것이, 나를 답답하게 했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까…?
그렇게 고민하면 걸음을 옮기던 도중, 나는 문뜩 한 명의 소년을 발견했다.
가녀린 체구를 품이 넉넉한 옷으로 가리고, 둥그스름한 모자를 눌러써서 머리카락을 숨긴, 예쁘장한 외모의 소년에게, 나는 조용히 말을 걸었다.
“아린. 아린?”
“…응?”
뭔가 생각에 잠겨 있던 것일까? 아니면 아직 가명이 익숙하지 않기 때문일까?
내가 두어 차례 그 이름을 부른 뒤에야, 소년은 퍼뜩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익숙한 자색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내 손에 들린 왕진 가방을 힐끔 내려다보았다.
“왕진 다녀오는 길이야?”
“네. 장은 잘 보셨어요?”
“…글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왠지 확답이 없이 말꼬리를 흐리는 모습에, 나는 약간 의아함을 느꼈다. 하지만 딱히 안색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기에, 빙긋 웃으며 한 손을 내밀었다.
“…….”
잠시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작은 손을 내밀어 손을 맞잡은 소년과 함께 나는 다시 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아직은 남장이 불편한 듯, 어색하게 걸음을 옮기는 아리스의 모습에 나는 무심코 한 줄기 미소를 머금었다. 사정 때문에 정체를 숨기고 있는 만큼, 가명과 변장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그렇기에 우리는 세란과 아린이라는 가명으로, 약술사인 그분의 제자로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것도 남장을 한 채로 말이다.
원래 검사로서 바지와 갑옷이 더 익숙한 내게, 그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원래 귀여운 소녀인 아리스라면, 남장을 불편한 것도 당연했다.
물론 나라고 남장이 편하기만 하진 않았다. 의복 같은 경우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지만, 겉으론 드러나지 않도록 평소보다 꽉 조여 맨 가슴의 압박감은, 충분히 불편했으니까.
그런 면에서 약간 품이 넉넉한 옷만으로, 문제를 해결한 소녀에 대한 부러움을 삼키며 나는 아리스와 함께 작은 집에 들어섰다.
작은 화덕과 테이블, 몇 개의 의자, 그리고 선반에 놓여 있는 여러 약을 제외하면, 무엇 하나 없이 쓸쓸한 실내. 그 가장 안쪽에 있는 흔들의자에는, 한 사내가 조용히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목덜미까지 오는 반백의 머리를 질끈 묶고, 수염으로 얼굴의 반을 가린 그분의 모습은, 평범한 약술사처럼만 보였다. 하지만 그는 사실 평범한 약술사가 아니었다.
영웅이라 불린 내게 검술을 가르쳐 준 스승이자, 스스로를 희생하여 내 목숨을 구해 주었던 은인. 그리고 내가 일생을 바치기로 맹세한 가족 혹은 그 이상의 존재가 바로 이분이었으니까.
“다녀왔어…요.”
“다녀왔습니다.”
그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 무뚝뚝하다 못해 냉담한 태도에도 아리스는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다만 화덕 위에 수프 냄비를 올려놓고 담담하게 식사를 준비했을 뿐.
고작 이 정도에 동요하기에는 그녀나, 나나 그분과 함께 지낸 시간이 너무 길었다.
하지만 그토록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음에도, 정작 그분에 대해 아는 것은 적다는 사실이 내 마음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분이 투검자의 후예라는 것은 10년 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암흑 교단의 전투 사제이신 걸 알고는 감탄했고, 용검자의 비전을 아시는 것에는 경이를 느꼈다. 하지만 나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얼마 전, 그분이 요마를 상대하며 쓴 하나의 비술이었다.
지금으로부터 7년 전, 세상을 떠돌며 수행을 하고 있던 도중, 나는 남부 밀림에 걸음을 들여놓게 되었다.
거대한 맹수와 맹독을 지닌 독충, 바닥없는 늪지나 길이 없는 기묘한 미로까지 온갖 악조건으로 가득한 남부 밀림은, 지상에 존재하는 지옥처럼 험난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것은 맹수도, 독충도, 늪지도 아닌 바로 인간이었다.
불사에 가까운 무시무시한 생명력과 각자 일류 검사에 비견할 실력을 바탕으로 남부 밀림을 공포로써 지배하던 12식인귀.
그들은 식인귀라는 칭호 그대로, 밀림의 주민을 잡아먹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 만행에 분노한 나는 12식인귀와 맞섰다.
일류 검사 열 명은 검자와도 버금가는 존재, 심지어 불사에 가까운 재생력을 지닌 그들을 정면으로 쓰러트리는 것은, 나조차 힘들었다. 하지만 내게는 다른 검자들에게는 없는 두 가지 이점이 있었다.
첫째는 불사신이라도 일격에 벨 수 있는 검술 ‘홍염의 불꽃’을 익히고 있다는 점이었고, 둘째는 ‘데스 쉐도우’의 비전 암살술을 모두 습득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두 가지 이점을 가지고 암습과 도주를 반복하며, 나는 12식인귀를 차례차례 각개격파 했고, 몇 차례 생사의 고비를 넘긴 끝에 결국 12식인귀를 모두 토벌할 수 있었다.
그 격전을 치른 뒤, 현지인의 도움으로 찾아낸 그들의 비처에서 나는 12식인귀가 품었던 불사의 비밀을 찾아냈다. 인간의 심장을 뜯어 먹고 피와 살을 섭취해 불사의 생명을 얻는 저주받은 비술.
‘불사의 심장.’
과거에 사라진 악의 조직 ‘데몬 소울’이 절대 해서는 안 될 금기를 저질러 만들어 낸 그 악마의 비술을 나는 즉시 소거해 버렸고, 12식인귀의 시체도 모두 불태워 버림으로써, ‘불사의 심장’이 부활할 가능성을 없앴다. 그런데 설마, 다른 누구도 아닌 그분이 ‘불사의 심장’을 익히고 있었을 줄이야….
“수프가 끓고 있다.”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있던 도중, 그분의 무뚝뚝한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생각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뭔가 펄펄 끊는 소리와 함께 전해져 온 향긋한 향기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아.”
보글보글. 피로 때문에 잠시 졸고 있었던 것일까?
그제야 화덕에서 수프가 끓는 걸 눈치챈 듯, 서둘러 냄비를 꺼내 드는 아리스를 보며 나는 내심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직 어린 소녀인 아리스에게 있어 이런 곳에서 지내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건 그분 역시 마찬가지라.
그분도 허겁지겁 수프를 덜어 내는 아리스를 질책하지 않고, 묵묵히 지켜보기만 하셨다.
그로부터 잠시 후, 우리는 세 접시의 수프로 식사를 시작했다.
특별히 맛있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더없이 따스한 수프로 배를 채우고, 내가 아리스와 함께 잠자리를 준비할 무렵, 문밖에서 한 줄기 인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여보시오! 여보시오! 아무도 안 계시오?!”
탕탕탕!
문밖에서 들려온 다급한 소리에, 나는 반사적으로 그분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예상한 대로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고개를 가로젓는 그분의 모습에는, 가벼운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진료 시간을 결코 넘기지 않을 것, 이것은 약술사를 시작하면서 세운 철칙이었다.
그분 자신부터 몸이 성치 않은 상태로, 무한정 환자를 진료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으면서도 무심코 확인을 구한 스스로를 질책하며, 나는 마음을 굳히고 문 앞에서 입을 열었다.
“오늘 진료는 이미 끝났습니다. 내일 다시 오십시오.”
“미, 미안하지만 급한 환자가 있어서 그렇소.”
“죄송합니다만, 진료 시간에 예외는 없습니다.”
“제발 부탁이오. 지금 우리 주인어른께서 생사의 고비를 헤매고 계시니, 죽은 사람 살리는 셈 치고 잠시만 시간을 내 주시오!”
“…….”
나는 입술을 꽉 깨물고 침묵을 지켰다. 도움을 청하는 상대를 돌려보내려 하다니, 스스로의 비겁함이 마음을 무겁게 한다.
하지만 지금 내게는 중요한 것은 단 하나, 그분의 남은 삶을 평안하게 지키는 것뿐이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을 정도로 비열해질 수도 있었다.
미안합니다.
“들여보내라.”
“……?!”
나는 문 너머의 상대에게 사죄하다가, 뜻밖의 말에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하얀 머리카락 사이로 나를 꿰뚫어 보는, 얼음처럼 날카로운 시선을 보고 순간 몸을 굳혔다.
아…!
나는 문뜩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분은 ‘데스 쉐도우’를 상대로 나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했고, 홀로 도적단의 소굴에 뛰어들었으며, 심지어 맨손으로 빙설관 레닌을 막아서거나, 치명상을 입고 요마에게 대적하기까지 했다.
그러한 그분의 눈앞에서 가족을 위한다는 변명을 내세워, 도움을 청하는 이를 외면했던 스스로의 비겁함이, 나를 부끄럽게 했다.
“…알겠습니다.”
끼이익.
아직 부족하기만 한 스스로를 자책하며, 나는 닫혀 있던 문을 열었다.
빈민가에서는 드물게 두꺼운 옷을 입고 있음에도, 코끝이 새빨갛게 얼어붙은 중년인의 모습에 나는 재차 마음이 아려 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이 추운 날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애타게 뛰어다닌 그를 외면한 잘못을 반성하며,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들어오시지요.”
“…아, 예.”
갑작스럽게 문이 열린 것이 뜻밖인 듯, 중년인은 머뭇거리며 집 안에 들어와, 조심스럽게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 중년인을 향해, 그분은 여태까지와 같은 무뚝뚝한 음성으로 말을 건넸다.
“그럼 얘기를 들어 보도록 하지.”
위압감이 담겨있는 그분의 음성에 압도된 듯, 중년인은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 가기 시작했다.
“그 일이 시작된 건 대략 며칠쯤 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