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95)
94마왕의 위장
“자아, 쌉니다. 싸요.”
“세베크의 빙산에서 직수입한 빙수 있습니다. 맛보고 가세요!”
“이 검으로 말할 것 같으면 대륙 제일의 장인 가문 트레이브가에서 만들어진 것으로서….”
식재료나 음식부터 장식품, 무구까지 그야말로 온갖 물품이 한가득 넘쳐흐르는 거리. 아무리 작은 나라도 명색이 일국의 수도답게 세이나르 같은 시골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활기찬 시장에서, 나는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이렇게 인간들 사이에 섞여 있지만, 나는 사실 인간이 아니었다.
이 세계 최후의 마족이자, 세계의 반을 제패했던 왕국의 마지막 군주. 신화 이래 최강의 마력을 지닌 81주문의 마왕. 그것이 바로 나의 진실된 정체였다.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과거의 일. 로드 오브 킹덤이 무너진 이후, 폐허에서 죽어 가던 나는 한 사내에게 구해져 과거를 잊고 평범한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아니, 살아가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 정체가 발각됨으로써, 그 작은 바람은 산산이 깨졌고, 우리는 결국 도망치듯 마을을 떠나와야만 했다.
그렇게 마을을 나선 이후, 우리는 외딴 산속에서 며칠 동안 머물렀다. 여행으로 쌓인 피로를 풀고, 뜻밖의 사건으로 입은 부상을 치유하기 위해서기도 했지만, 그 외에도 한 가지 준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약 열흘 전, 모든 준비를 끝마친 우리는 떠돌이 약술사와 그 제자라는 신분으로, 루바젤에 걸음을 들여놓았다. 산중에 있던 대장간에서 사내가 위조한 인장과 왠지 엉망이 된 꽃밭에서 채집한 약초 덕분에 우리는 쉽게 루바젤에 발을 들여놓았고, 그 직후 운 좋게 찾은 빈집에 짐을 풀었다.
빈민들조차 버릴 만큼 허름하던 집이었지만, 사내의 솜씨 덕분에 어느 정도는 집다워졌고, 다시 정착할 곳을 찾게 됐다는 사실에 나는 순수한 기쁨을 느꼈다. 하지만 그 기쁨 이면에는 의문 또한 있었다.
산에 머무는 그 며칠 사이 약초를 채집해서 약으로 만드는 제약솔, 그리고 빈민들을 상대로 보여 준 치료술이 나에게 한 가지 의문을 풀어내지 못하게 했다.
…대체 그의 정체는 뭘까?
절정의 검술을 지닌 쌍검자의 후예, 지상 최강의 인간과 맞선 암흑 교단의 전투 사제, 봉인구를 제작해 낼 수 있는 신비한 주술사, 거기에 뛰어난 목수이자, 대장장이이며, 약술사이기까지 하다니.
인간에게 주어진 재능은 각각이라고는 해도, 그만큼이나 다재다능한 인간은 본 적이 없었다. 아니, 그런 인간이 있다는 것 자체를 상상조차 한 적이 없었다. 대체 그의 정체는 뭘까? 그리고 어떤 과거를 살아왔기에, 그런 능력이 있는 걸까?
“이봐요, 손님. 물건을 상하게 했으면 변상을 해야 할 거 아니요!”
생각에 잠긴 채 길을 따라 걸어가던 도중, 나는 소란을 듣고 무심코 고개를 들렸다.
온갖 상가와 사인들이 뒤엉켜 있는 시장가. 그곳에 흔히 널려 있는 골동품점 앞에는 빼빼 마른 한 상인이, 깨진 항아리의 파편을 앞에 두고 고함을 내지르고 있었다.
“귀하의 말이 옳다. 물건을 상하게 했으면 변상을 해야지.”
아마 먼 외국에서 온 여행객인 것일까? 고급스러운 적갈색 망토를 걸치고, 머리 깊이 두건을 눌러쓴 인물은 독특한 억양으로 상인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하지만 그런 여행객의 답변에, 상인은 오히려 더욱 펄펄 날뛸 뿐이었다.
“말로만 옳다고 하지 말고 돈을 달란 말이오, 돈을!”
“좋다. 귀하가 원하는 대로 변상을 해 주겠다.”
여행객의 시원스러운 대답에 상인은 일순 입을 다물고 눈을 깜빡거렸다.
이곳은 어차피 복잡하기 그지없는 시장통. 스쳐 지나간 항아리가 떨어져 깨졌다고 해도 책임의 반은 항아리를 잘못 둔 상인에 있다.
그런데도 억울해하기는커녕,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여행객의 반응은 뜻밖의 것이었다.
“크, 크흠. 뭐, 변상만 해 주신다면야….”
언제 자신이 날뛰었냐는 듯, 손바닥을 싹싹 비벼 대는 상인. 그 행동을 보고 내가 고개를 내저을 때 여행객의 시원한 음성이 이어졌다.
“하지만 지금은 그대가 원하는 화폐가 없으니 차후에 사람을 보내도록 하겠다. 그리 알도록 하라.”
“…….”
…뭐?
다만 그 말만을 툭 하니 던져 놓고, 몸을 돌려 이쪽으로 천천히 걸어오다가, 어느새 내 바로 앞에서 우뚝 멈춰 선 여행객을, 나는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뭔가 할 말이 있는가. 소년이여?”
아….
나는 잠시 당황했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내가 여행객의 앞을 가로막듯 서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물론 그건 우연히 그렇게 됐을 뿐.
그냥 한 걸음만 비켜서면 끝날 일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옆으로 물러나지 않았다. 단순한 키나 그 무언가의 차이를 떠나, 내가 당연히 비켜야 한다는 듯한 말투에 왠지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유치한 오기에 불과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적절한 이유가 있었기에, 나는 옆으로 물러나는 대신, 묵묵히 한 손을 들어 여행객의 뒤를 가리켰다.
“…….”
두건 속에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길 잠시. 여행객은 내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다가오는 상인을 보고, 의아한 듯 물었다.
“아직 용건이 남았는가. 상인이여?”
“당신,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요!?”
상인은 불을 토하듯 버럭 고함을 내질렀지만, 그에 대한 여행객의 반응은 참으로 담담했다.
“흠, 본인의 루반 공국어가 어디 잘못됐나 보군.”
…….
누가 외국인 아니랄까 봐, 말을 말 그대로 알아듣는 여행객의 말에, 상인을 비롯한 구경꾼 모두 할 말을 잃었다. 물론 여행객의 어색한 말투를 봐도 루반 공국어가 낯설다는 것 정도는 분명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언어가 잘못되면 잘못됐지, 자신의 행동에는 문제없다는 그 태도라니.
그제야 나는 이 여행객의 본질이 단지 외국인이라든가 하는 데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인간은, 본래부터 황당한 작자라는 것을.
“…공국어가 아니라, 당신 태도가 문제야.”
“음?”
참다 보다 못한 내가 그 착각을 지적해 주자, 여행객은 뜻밖이라는 듯 짧은 소리를 내고,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마치 ‘내 어디가 문제라는 말인가?’라고 주변의 구경꾼들에게 묻는 듯한 행동. 하지만 처음부터 이 상황을 보고 있던 만큼 구경꾼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여 줌으로써, 이 세상에 아직 상식과 논리가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
“흐음. 본인의 어디에 문제가 있었단 말인가?”
하지만 시선만으로 대화를 나눌 수는 없는 법, 스스로가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 도통 모르겠다는 듯 고민하는 여행객의 모습에 나는 무심코 한숨을 내쉴 뻔했다.
뭔가 위장하거나 꾸며서 그런 거라면 모를까 그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인 태도는, 아무리 봐도 꾸며진 것이 아니었다.
오죽하면 골동품 상인조차 맥이 빠진 얼굴로 여행객을 바라보고 있겠는가.
“크흠, 손님. 거 나중에 사람을 보내 주겠다고 하셨지만, 제가 그 말을 믿기가 좀 힘들어서 말입니다.”
너무 황당해서 흥분도 잊은 듯, 골동품 상인은 차분하게 문제를 지적했다. 어떻게 해서든 배상금을 받아 내기 위한, 그 설명은 무척 논리적으로 들렸지만, 적어도 여행객에게만큼은, 그 논리성을 제대로 전하지 못했다.
“지금 본인이 귀하를 상대로 거짓말을 했다는 뜻인가?”
그 순간, 소리가 사라졌다.
조용히 가라앉은 음성과 함께 여행객의 주변에 내리깔린 무거운 분위기가 시끌벅적한 시장가 한가운데에, 정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제대로 답하라. 대답 여하에 따라서는 본인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하겠다.”
“아, 아니, 저어. 그, 그런 게 아니라 말입니다….”
식은땀을 비 오듯 뻘뻘 흘리며, 변명하려 애쓰는 상인을 멍하니 지켜보다가,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대체 뭐야. 이 인간은?
논리고 무엇이고를 다 떠나서, 단지 음성만으로 타인을 압도하는 기세라니, 물론 선천적으로나 후천적으로든 이런 카리스마를 지닌 이들이 없는 건 아니다.
지금 이 여행객에게서 느껴지는 기세는, 마왕이라 불리던 나조차도 흠칫할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당신 말이 진실이라는 보장이 없잖아.”
그렇기에 나는 상인 대신 입을 열었다. 본래 이런 일에 참견하는 취미는 없었지만, 미묘하게 신경을 자극해 오는 여행객의 기세가 그리고 알 수 없는 일말의 호기심이 결국 내게 입을 열게 했다.
“그건 본인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뜻인가, 건방진 소년?”
무겁다. 망토의 두건 속에 가려져 있음에도, 마주한 것만으로도 뭉개질 듯 위압적인 시선에 나는 드러나지 않도록 손을 꽉 움켜쥐었다.
바로 이것이었다.
내가 여행객을 상대로 비키지 않은 이유이자, 여행객의 말에 참견하고 나선 이유.
한없이 높은 데에서 깔아 보는 듯한 그 시선이 나를 자극해, 반발하도록 하고 있었다. 웬만한 인간이었다면 굴복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마왕이라 불렸던 이로서의 자존심은 오히려 꼿꼿하게 여행객을 마주 보게 했다.
“대체 뭘 보고 당신을 믿으란 말이지?”
“…….”
내 말이 신경에 거슬렸는지 여행객은 배는 강렬한 시선으로 나를 보았고, 나 또한 지지 않고 여행객을 마주 보았다.
우리 사이에 흐르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구경꾼들은 숨을 죽이고 눈치를 보았지만, 다른 사람들 따위는 이미 내 안중에도 없었다.
다만 여기에서 물러설 수 없다는 오기만이, 나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을 뿐이었다.
“…과연.”
그렇게 마주 보길 잠시.
여행객은 뜻밖에도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상인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나지막이 질문을 건넸다.
“귀하도 이 건방진 소년과 같은 생각인가?”
“예? 아, 아니, 그렇다고 하기보다는 그저….”
나와 여행객의 기세 싸움에 영향을 받은 듯, 상인은 창백한 얼굴로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말이라기보다는 언어의 짜깁기, 하지만 그것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듯, 여행객은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 확실히 본인을 믿을 근거가 없기는 하군.”
팔짱을 낀 채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길 잠시, 여행객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망토 사이를 잇고 있는 끈을 풀어내고, 한 손으로 망토의 위 자락을 움켜쥐었다.
펄럭―!
“어?”
여행객이 벗어 던진 적갈색 망토는, 그대로 바람을 타고 상인의 품에 떠넘겨졌다. 그렇게 자신의 망토를 상인에게 건넨, 여행객은 다시 팔짱을 끼고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귀하가 본인을 믿기 힘들다면 그것으로 변상을 하겠다. 혹시라도 불만이 있다면 말하도록 하라.”
나는 구경꾼들과 함께 멍하니 여행객을 보았다. 돈이 없으니 물건으로 값을 치르겠다는 것, 그 자체는 꽤 합리적인 행동이었다.
여행객의 망토는 척 보기에도 고급품. 골동품 한두 개 값은 너끈할 물건이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넋을 잃은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불꽃처럼 화려한 진홍색 웨이브 머리, 보석처럼 빛나는 루비빛 눈동자, 오만한 듯이 치켜떠진 가는 눈매, 세베크의 빙산처럼 오뚝한 콧날에, 핏방울을 머금은 듯한 연홍빛 입술, 도자기처럼 매끄러운 피부까지, 화려하면서도 고고한 아름다움을 한껏 뽐내는 그녀의 매력적인 모습이 주변의 모든 구경꾼들의 넋을 잃게 하고 있었다.
구경꾼들을 탓할 일은 아니었다.
심지어 세레나를 매일 봐 온 나조차도, 순간적으로 얼이 빠졌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그 무엇보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그 화려한 미모보다는 조금 다른 쪽이었다.
세, 세레나보다 커….
몸에 달라붙어 몸매를 강조하고 있는 옷 위로 오만하게 팔짱을 끼고 있는 매끄러운 팔목.
그 사이에서 당장이라도 터져 나올 듯이 자리 잡고 있는 풍만한 가슴에, 나는 넋을 잃었다.
세레나만 해도 반칙에 가깝다고 생각했건만, 그녀마저 능가하는 가슴이 있다니. 거의 마술에 직격당한 듯한 충격이었다.
“건방진 소년. 귀하의 이름은?”
정신적인 치명상을 입고 헤매길 한참, 나는 오만하기 그지없는 루비빛 눈동자를 보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타인의 이름을 물을 때는 자기 이름부터 밝히는 게 예의잖아?”
나는 차갑게 쏘아붙였다.
그 물음에 담긴 오만하기 그지없는 태도가, 흥미롭다는 듯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무엇보다 볼수록 나를 비참하게 하는 그 지방 덩어리가, 내 마음을 묘하게 꼬이게 하고 있었다.
“흐음. 현명한 소년의 말이 옳군.”
내 냉담한 태도에도 그녀는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그럼 귀하의 이름을 듣는 것은 다음으로 미루도록 하겠노라.”
…이 여자는 루반어를 누구한테 배운 거야?
그녀는 고풍스럽다고 해야 할지, 엉망진창이라고 해야 할지, 그 구분이 애매모호한 말과 함께 의미를 알기 힘든 미소만을 남긴 채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주변에 몰려 있던 구경꾼들이 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좌우로 물러나며, 그 한가운데 생겨난 길로, 위풍당당하게 사라진 여행객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끝에 나는 이내 설레설레 고개를 내저었다.
정말이지… 세상엔 별 인간이 다 있구나.
나는 새로운 깨달음 속에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 타오르는 듯한 진홍색 머리와 루비처럼 붉은 눈동자는 쉽게 잊히지 않았다.
왜일까?
분명 처음 보는 인물인데…, 왠지 본 적이 있는 듯한 기묘한 느낌이, 나를 깊은 생각에 잠겨 들게 했다.
“아린. 아린?”
“… 응?”
깊은 상념에 잠겨 있다가, 반복되는 부름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나는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허름한 집으로 가득한 빈민가.
그 길목에서 푸른 눈으로 나를 보는 것은, 태양처럼 빛나는 금발을 한 줄기로 묶어 내리고, 약술사 특유의 녹색 바탕에, 하얀 장식이 들어간 옷을 입은 미청년…처럼 보이는 인물이었다.
“왕진 다녀오는 길이야?”
“네. 장은 잘 보셨어요?”
“…글쎄.”
기묘한 찜찜함 때문에 내가 말꼬리를 흐리자, 조금 의아해하던 미청년은, 이내 싱긋 웃으며 한 손을 내밀어 보였다.
“…….”
잠시 그 얼굴을 바라보던 끝에 나는 이내 그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손을 통해 전해지는 온기를 느끼며, 남장을 한 세레나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아무리 약술사로 위장했다고 해도, 본명이나 본모습을 그대로 사용할 수는 없는 노릇.
그래서 우리 모두는 가명을 사용해야만 했고, 나와 세레나는 남장으로 성별을 숨기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조치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남장 자체가 워낙 익숙하지 않은 데다, 여성인 것이 드러나지 않도록 신경을 쓰자니 평소보다 쉽게 지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 면에서 남장이 익숙한 세레나에게 부러움을 느끼며, 그녀와 함께 도착한 집에서 나는 조용히 문을 열고 걸음을 들여놓았다.
며칠이 넘도록 머물고 있는데도, 아직도 낯설게만 느껴지는 작은 집. 하지만 그 안쪽에 앉아 조용히 창가를 바라보는 한 사내의 모습은 내게 이곳에서 평안함을 느끼도록 했다.
산에서의 그 사건이 일어난 이후, 목덜미까지 자라난 머리카락을 질끈 묶고, 단정한 수염으로 얼굴의 태반을 가리는 그의 모습은, 전보다 좀 더 나이 들어 보였다.
하지만 수염에 가려진 차가운 얼굴과 동작 하나하나에 느껴지는 위엄은 이전과는 다른 중후한 매력을 뽐내고 있었다.
“다녀왔어…요.”
“다녀왔습니다.”
우리의 인사에 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지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태도, 하지만 그런 태도에 이미 익숙한 만큼 나는 새삼 실망하는 대신, 벽 한쪽에서 활활 불을 지피고 있는 화덕에 수프 냄비를 올려놓았다.
따로 가사 할 공간이 있기는커녕, 이 단 칸짜리 집 안에서 요리나 식사는 물론 취침까지 해야 하는 것이 지금 우리의 처지였다.
…함께 붙어 자는 게 딱히 싫은 건 아니지만….
겨울의 추위를 피하기 위해, 화덕 앞에 셋이 같이 자는 잠자리를 떠올리자, 나는 왠지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와 세레나의 잠자리는 그의 양옆에 있었고, 덕분에 나는 며칠이나 잠을 설치고 있었다. 그래도 잠을 자기는 잘 수 있었으니, 한숨도 못 잔 첫날보다는 나아졌지만, 매일 밤마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수프가 끓고 있다.”
“…아.”
보글보글.
그의 지적을 듣고 나서야 수프가 펄펄 들끓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는 서둘러 냄비를 화덕에서 꺼냈다.
그리고 약간 졸아들기는 했지만, 그럭저럭 먹기는 나쁘지 않은 상태의 수프를 나무 식기에 덜어 냈다. 그렇게 세 개의 수프 접시를 올려놓은 채, 우리는 조용히 저녁식사를 시작했다.
식탁이 조금 부실하기는 했지만, 한겨울에 물가가 비싼 수도에서 얼마 안 되는 돈으로 마련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싱겁고 묽은 수프가 고작이었다.
그래도 내게는 이 정도만 해도 만족스러웠다.
며칠이나 굶어 가며 싸워야 했던 전장에 비하면, 하루 세끼 먹을 것만 있어도 축복이었으니까.
그렇게 식사를 마친 우리가 식탁을 정리하고, 잠자리를 준비하려 할 무렵, 갑자기 문밖에서 한 줄기 고함이 들려왔다.
“여보시오! 여보시오! 아무도 안 계시오?!”
탕탕탕!
…또 환자인가?
갑작스러운 소란에도 나는 동요하지 않았다.
아프면 신관을 찾아가는 것이 상식이지만, 워낙 신전과 멀리 떨어져 있는 탓인지 빈민가에는 이곳부터 찾아오는 이들도 있었다.
마침 문가에 있던 세레나는 그를 돌아봤다.
그리고 그가 미미하게나마 고개를 젓는 것을 확인하고, 살짝 한숨을 내쉰 뒤,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오늘 진료는 이미 끝났습니다. 내일 다시 오십시오.”
약술사는 어디까지나 약술사일 뿐이다. 내가 태어나지도 않았던 오래전에는 뛰어난 약술사들도 종종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 대다수의 약술사는 간단한 진통제나 해독제를 비롯해 보약 등을 만드는 것만이 전부였다.
약으로 위급한 환자를 치료하기는 힘들고, 그렇다고 정체를 위장하고 숨어 있는 처지에 암흑 교단의 성력을 사용할 수는 없으니, 위급한 환자라도 지금은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미, 미안하지만 급한 환자가 있어서 그렇소.”
“죄송합니다만, 진료 시간에 예외는 없습니다.”
“제발 부탁이오. 지금 우리 주인어른께서 생사의 고비를 헤매고 계시니, 죽은 사람 살리는 셈 치고 잠시만 시간을 내 주시오!”
“…….”
문 너머에서 들려온 간절한 애원에도, 세레나는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문 앞에서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의 마음속에 휘몰아치는 안타까움을 나는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큰 부상을 입고도 제대로 치료받지 못해, 죽어 가는 수하들을 지켜봐야만 했을 때, 수백 수천의 군세를 상대할 힘을 가지고도 고작 사람 한 명도 살리지 못하는 스스로의 무능력함에 대한 좌절을 느꼈을 때와도 같은 그 분위기가 나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하지만 아무리 안타깝다고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한 줄기 음성이 허공에 울려 퍼졌다.
“들여보내라.”
뭐?
침묵으로만 일관하고 있던 그의 무뚝뚝한 말에, 나는 일순 당혹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흔들의자에서 화덕을 바라볼 뿐, 말을 번복할 기미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끼이익―
처음에는 나와 마찬가지로 당황한 듯, 그를 보던 세레나는 이내 조용히 문을 열고, 밖에 있는 이에게 정중히 허리를 숙여 보였다.
“들어오시지요.”
“…아, 예.”
떨떠름한 표정으로 집 안으로 들어온 손님. 그 중년인을 나는 세세히 훑어보았다. 중년인의 복장은 수수하고 평범한 편이었다. 하지만 특별히 낡거나 더러워 보이지는 않았다. 빈민가에 깨끗한 옷이 드물다는 걸 고려하면, 이 인간은 빈민가 외부에서 온 인물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주인어른이 아프다는 말을 했지.
상황이 상황인지라 무심코 넘겼던 말을 되새겨 본 나는, 한 줄기 의문을 느꼈다.
이 중년인은 분명 어느 상류층의 하인일 터, 그렇다면 신전으로 가면 될 것을, 왜 이런 빈민가에 있는 약술사를 찾아온 건지. 그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으니까.
“그럼 얘기를 들어 보도록 하지.”
왠지 멍한 얼굴로 집 안을 살펴보다가, 그의 싸늘한 말에 일순 정신을 차린 듯, 중년인은 이야기를 풀어 가기 시작했다.
“그 일이 시작된 건 대략 며칠쯤 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