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97)
96영웅의 인연
중년인이 일하는 곳은 전통 있는 가문으로, 비록 특별히 권세를 떨치고 있지는 못하지만, 루반 공국에서는 누구나 알아주는 명문가였다.
그런데 며칠 전, 가주가 갑작스럽게 앓아누우며. 모든 문제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갑작스러운 병환에 신전을 찾아가 봤는데도 차도가 없자 당황한 고용인들은 수소문했고, 그 결과 이 증상을 치료할 수 있는 것이 매우 특수한 약뿐이라는 것을 알고 약술사들을 찾아다니고 있다는 것이었다.
성력이 통하지 않는 질병…인가?
하인으로부터 사정을 들은 나는 생각에 잠겼다. 부상이나 전염성 질병에 이르기까지 성력은 분명 만능에 가까운 치유력을 보이지만, 생체적 질병에 대해서는 취약하다.
그렇기에 싼값에 치료해 주는 신전이 있는데도, 약술사들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지만, 약이 통용되는 것은 감기처럼 간단한 질병뿐 하인이 말한 것과 같이 심각한 병을 고칠 수 있는 약은 천금을 줘도 구하기 힘들 만큼 귀했다.
…어떡해야 할까?
내 의술은 어디까지나 기초적인 수준, 간단한 외상이나 응급처치 정도라면 모를까.
심각한 질병을 치료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그분에게 시선을 향했다. 10년 전 내게 의술을 가르쳐 주었던 스승이자, 약술사로서도 뛰어난 실력이 있는 그분이라면 답변을 가지고 있으리란 기대를 가지고.
그리고 그분은, 내 기대를 배반하지 않았다.
“세렌. 왕진 나갈 준비를 해라.”
“알겠습니다.”
나는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무리 몸 상태가 좋지 않다고 해도, 구할 수 있는 이를 지나칠 분이 아니라는 것을 믿고 있었기에 나는 당황하지 않고 왕진 가방을 준비했다.
“아린. 집을 지키고 있어라.”
“아… 응.”
피곤한 아리스를 배려하신 것일까? 소녀에게서 받은 외투를 걸친 뒤, 그분은 지팡이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안내하시오.”
“예?”
“환자를 치료하려면 일단 만나 봐야 하지 않겠소.”
“아, 그렇다면…!!”
처음에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듯,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기도 잠시, 하인은 환한 얼굴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제, 제가 당장 마차를 가져오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아니. 그냥 걸어서 가도록 하겠소.”
대답을 기다릴 시간조차 아깝다는 듯, 지팡이를 짚으며 앞장서서 걸어가는 그분의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나는 외투와 함께 모자를 깊숙이 눌러쓴 뒤, 문가에서 물끄러미 밖을 보는 아리스의 손을 잡아 주었다.
“어쩌면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니, 너무 기다리지 말고 먼저 주무세요.”
“…알았어.”
이렇게라도 말해 놓지 않으면, 그분과 내가 돌아올 때까지 소녀가 기다릴 것을 알고 있었기에 나는 신신당부를 하고 그분을 따라나섰다.
서둘러 빈민가를 벗어난 후, 하인은 도심을 향해 우리를 안내했다. 명색이 일국의 수도인 만큼 허름한 건물만 가득한 빈민가와 달리, 도시의 중심부는 화려한 저택으로 가득했다. 그중에서도 하인이 안내한 곳은, 좀 수수할지언정 도심에서도 손꼽을 정도로 커다란 저택이었다.
이곳은…?
나는 우뚝 걸음을 멈췄다.
제국의 황궁에서부터 변방의 촌락까지 온갖 장소를 다 돌아다녀 본 내가, 고작 한낱 저택의 웅장함에 놀랄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어렴풋하게 떠오른 한 가지 기억이 나를 머뭇거리게 만들고 있었다.
“왜 그러시는지…?”
“…아무것도 아닙니다.”
설마, 그럴 리가.
이제 와서 돌아간다고 할까 봐 걱정되는 듯, 불안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하인에게 나는 살짝 고개를 내저어 보였다. 스스로의 기억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모자를 보다 깊숙이 눌러쓴 채, 나는 그분을 따라 저택 안에 들어섰다.
하지만 볼수록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기억과 묘한 익숙함은 나를 동요하게 했다.
“죄송하지만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제가 집사님을 모셔 오겠습니다.”
“알겠소.”
응접실까지 우리를 안내한 후, 하인이 서둘러 물러나는 것을 그리고 그분이 고급스러운 의자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는 것을 보면서도 나는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어렴풋한 기억에서 비롯된 불안감과 한 줄기 당혹감이, 나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었다.
벌컥―!
잠시 후 닫혀 있던 응접실의 문이 열리며, 유독 새빨간 얼굴로 성큼성큼 응접실로 걸어 들어온 노집사님의 모습을 보고,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이며 귀를 막았다.
바로 그 순간, ‘그것’이 응접실을 강타해 왔다.
“당신들이 주인어른을 치료할 수 있다는 약술사인가―!?”
우우웅―!
단지 소리 하나에 유리창이 부르르 떨리고, 벽에 장식돼 있던 전신 갑옷이 흔들리며, 심지어 그분의 미간마저 살짝 찌푸려지는 듯한 그 엄청난 광경에 나는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하신가?
그야말로 굉음이라고밖에는 할 수 없는, 15년 전에 비해 더욱 커지면 커졌지, 결코 약해지지는 않은 쩌렁쩌렁한 음성을 지닌 노집사님에게 그분은 싸늘한 목소리로 답변했다.
“치료할 수 있다는 소리는 한 적 없소.”
노집사님의 목소리가 벼락이라면, 그분의 목소리는 칼날이었다.
나지막하고 무뚝뚝하지만, 그만큼 날카롭게 마음을 파고드는 음성에 노집사님은 한층 더 새빨개진 얼굴로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그게 무슨 소린가?! 감히 트레이브 가문을 상대로 장난을 칠 셈인가!!”
빨개진 얼굴만큼이나 더 높아진 고함에도, 그분은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드러나지 않게 그분의 시선이 싸늘해졌음을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급히 입을 연 것은 그래서였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단지 환자를 보기 전까지는 치료할 수 있는 확답을 하기 힘들기 때문에….”
“에잇! 그게 그 소리 아닌가! 쓸데없이 변명만 하다가 또 무슨 만병통치약인가 뭔가 팔아먹고 갈 생각이라면 당장 돌아가게!”
이런….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성난 고함을 버럭버럭 토해 내는 노집사.
그 반응에 나는 곤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원래 다혈질이긴 해도 이 정도는 아니셨는데, 아무래도 우리 전에 어떤 사기꾼 약술사를 만나, 머리끝까지 화가 나신 모양이었다.
그때, 내가 걱정하고 있던 사태가 벌어졌다.
“무례하군.”
“……!”
그것은 영혼마저 얼어붙는 듯한 추위였다. 세베크의 빙산에 부는 눈보라보다 차가운 음성, 그 근원지에 있는 것은 평소보다 훨씬 냉혹한 눈을 한 그분의 모습이었다.
“뭐, 뭣이 어째?!!!”
얼굴이 대추처럼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 다시 고함을 버럭 내지르시는 노집사님을 보며 나는 곤혹스러움을 느꼈다.
아무리 현명하고 의로운 그분이라지만, 힘든 몸을 이끌고 도움을 베풀러 찾아왔음에도 이런 소리를 묵묵히 참아 내실 이유는 없었다. 당장 나부터 이곳이 다른 가문이었더라면, 결코 이 상황을 좌시하지 않았을 것이다.
“트레이브 가문에서 손님 대접을 이렇게 할 줄은 몰랐소.”
“이, 이…!”
싸늘한 눈보라와 들끓는 화기가 교차하는, 그 험난한 분위기에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노집사님은 기어코 우리를 쫓아낼 것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이 사태를 결코 두고 볼 수 없었다.
“진정하시지요. 제일러 집사님.”
“지금 진정하게 됐…응? 자네가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나?”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깊이 눌러쓰고 있던 모자를 벗었다.
노집사님은 이름을 부른 것에 의아해하시다가, 모자를 벗은 내 얼굴을 보고, 뭔가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셨다. 그리고 잠시 후 뭔가 기억해 낸 듯 당혹감을 드러내셨다.
“설마, 라바일 아가씨?!”
겨우 15년 전에 한 번 봤을 뿐임에도, 단번에 내 얼굴을 기억해 내는 명가의 집사다운 노집사님을 향해, 나는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니, 아가씨께서 어떻게…?”
어지간히 뜻밖이었는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노집사님의 모습에 나는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사실 이 저택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다시 트레이브 가문을 올 일이 있으리라고는 스스로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분을 따라 아리스와 도피행을 하는 사정을 밝힐 수도 없는 만큼 나는 살짝 말을 돌렸다.
“약간의 사정이 있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이제는 완전 흥분을 가라앉히신 듯, 노집사님은 더 내 사정을 캐묻지 않았다. 하지만 노집사님이 이후에 내놓은 말은, 나를 더욱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이렇게 찾아오셨으니 당장 도련님께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아니요. 죄송하지만 제가 찾아온 건 비밀에 부쳐 주셨으면 합니다.”
“예? 아니, 어찌 그런 말씀을…?”
하늘이 두 쪽이 났다는 소리를 들은 듯, 노집사님은 대경실색했지만, 내게 있어 그것만큼은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무엇보다, 지금 급한 것은 따로 있었다.
“그보다 이분과 함께 가주님을 뵐 수 있겠습니까?”
“이분이라 하시면?”
그제야 나와 함께 온 그분에게 생각이 미친 듯, 조심스럽게 그분을 바라보는 노집사님에게 나는 간단히 설명을 해 주었다.
“가주님의 치료를 위해 특별히 찾아 주신 분입니다.”
“아… 죄,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무례했습니다.”
노집사님은 몇 차례나 허리를 숙여 보였다. 그 모습은 얼핏 비굴하게까지 느껴졌지만, 원래 강직한 노집사님이 이러시는 이유는 가주님에 대한 걱정 때문이라는 것을 알기에 나는 오히려 안타까움마저 느꼈다. 그러한 노집사님의 사정을 이해하신 듯, 그분은 잠시간의 침묵 끝에 고개를 끄덕이셨다.
“괜찮소. 그보다 환자를 우선 보고 싶소.”
“예, 알겠습니다!”
내가 모시고 왔다는 사실을 알고, 좀 전과 달리 그분을 믿게 된 것인지 노집사님은 밝은 얼굴로 우리를 안내해 주셨다. 사실 트레이브 가문은 라바일 가문과 오랜 인연이 있는 가문이었다. 그 연은 멀게는 선조 일검자 때까지 올라가며, 가문이 몰락한 뒤에도 계속해서 연을 이어 왔다.
비록 15년 전 아버지와 함께 찾아온 것이 마지막이라고는 하지만, 그때 뵈었던 가주님에 대한 기억은 아직까지도 내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그런데 그런 가주님께서 이렇게 되시다니…!
침상에 누워 계신 헤일 가주님을 보고, 나는 피가 얼어붙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80년의 세월의 흔적을 느끼게 하는 주름이나, 노쇠한 육신 때문이 아니라, 의식을 잃고 계신데도 유독 혈색이 좋은 그분의 얼굴이, 그리고 겹쳐지는 한 가지 기억이 나로 하여큼 경악과 전율을 느끼게 했다.
“나가서 기다리도록 해라. 그리고 아무도 주변에 접근하게 하지 마라.”
“알겠습니다.”
침대 옆에서 가주님을 내려다보시길 잠시 그분께서 갑자기 내놓은 지시에 나는 조금도 주저함도 없이 침실을 나섰다. 그리고 밖에 기다리시던 제일러 집사님에게, 조용히 말을 건넸다.
“주변에 아무도 접근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약간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을 뿐, 제일러 집사님은 결국 아무것도 묻지 않고, 내게 조용히 허리를 숙인 뒤 물러나셨다.
그리하여 홀로 문 앞을 지키고 선 채 나는 조용히 생각에 잠겨 들었다. 성력이 안 통하는 병은 여럿 있으며, 나이가 들수록 그런 병에 걸리기 쉽기에 연로하신 헤일 가주님이 저렇게 되신 것도 그렇게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아니,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나의 생각은 헤일 가주님을 본 순간 산산이 깨져 버렸다. 왜냐하면 헤일 가주님은 지금 병환이 아닌, ‘잠자는 신의 향기’라는 특수한 독약에 중독되신 상태였기 때문이다.
별다른 증조도 없이 갑자기 쓰러져, 오랜 시간 의식을 잃고 누워 있다가 잠자듯 죽게 되기에 암살용으로 사용되는, 그 독약을 구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것은… 내 조부님을 돌아가시게 한 독약이었으니까.
저벅. 저벅.
복도 저편에서 느껴지는 인기척.
나는 상념에서 빠져나와 몸을 긴장시켰다.
헤일 가주님이 독에 중독된 이상 그것을 중독시킨 자가 있을 터, 그렇기에 나는 그분의 지시에 따라 주변에 사람을 물릴 것을 부탁한 것이다.
비록 사정을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제일리 집사님이라면 분명 잘 조치해 주셨을 터.
그런데도 접근해 오는 인기척이 있다는 사실에 검사로서 신경을 곤두세웠던 나는 정작 그 상대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에반 경?”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옅은 금발에 뚜렷하고도 선명한 갈색 눈동자.
그리고 하얀 갑옷을 입은 호리호리한 청년은 옅은 미소와 함께 내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세레나 양.”
에반. E. 트레이브.
트레이브 가문의 소가주이자 뛰어난 검술과 재능을 바탕으로 20대의 젊은 나이에 이례적으로 루반 공국의 왕실기사단장이 된 검사.
그리고 외모만이 아니라 검술, 지식과 성품까지 모든 면에서 모범이라 불리는 기사를 보며, 나는 그저 곤혹스러워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내 약혼자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