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99)
98마왕의 인연
성력이 안 통하는 병을 치료하는 약이라…?
그와 세레나가 하인과 함께 집을 나간 뒤, 홀로 남게 된 나는 생각에 잠겼다.
성력이 통하지 않는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은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하지도 못할 일에 나서진 않았겠지만….
그는 정말 그 병을 치료할 자신이 있는 걸까?
골똘히 고민에 잠긴 지 얼마나 지났을까? 슬슬 화덕의 온기가 약해져 갈 무렵, 갑자기 한 줄기 울림이 실내에 울려 퍼졌다.
똑똑.
…또 환자인가?
나는 낡은 문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나 세레나라면 노크를 할 리가 없으니, 십중팔구는 또 다른 환자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도 없고 세레나도 없는 상황. 의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환자를 맞이해 봐야,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었다.
내가 그냥 이대로 없는 척할지 아니면 말로 타일러 돌려보낼지 고민하던 사이, 상대는 기다림을 참지 못한 듯 입을 열어 왔다.
“여봐라. 아무도 없느냐?”
“……?”
순간 나는 당혹감을 느꼈다. 이 기묘한 루반 공국어 하며, 위엄이 묻어나는 음성이 낯익었기 때문이다.
끼이익.
설마 하며 문을 연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진홍빛 웨이브 머리카락과 루비빛 눈동자. 그리고 도도한 눈매와 풍만한 몸매를 지닌 낯익은 여인이, 나를 어이없게 하고 있었다.
“으음?”
그녀로서도 뭔가 뜻밖이었던 것일까? 고운 눈썹을 살짝 치켜뜬 채, 잠시 나를 바라보던 여인은 팔짱을 꼈다. 그리고 내게 짧은 질문을 토해 냈다.
“그대가 왜 여기에 있는가?”
“…그건 내가 물어야 할 말인데.”
나는 떨떠름한 심정을 느꼈다.
워낙에 뜻밖의 재회인 건 둘째 치고, 자기가 찾아와 놓고 오히려 질문하는 그 황당하기 그지없는 태도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어처구니없는 행동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저벅. 저벅.
“흐음, 집이 꽤 남루하군.”
…하아?
마치 자기 집이라도 되는 것처럼, 열린 문 안으로 태연하게 걸어 들어와, 흔들의자에 털썩 걸터앉는 그녀를 보며 나는 그야말로 할 말을 잃었다.
이 뻔뻔하고도 황당무계한 태도라니, 세넨의 달이 두 번이나 떠오를 시간 동안 나름대로 여러 사람을 만나 온 나로서도, 이런 괴짜는 정말 처음이었다.
“뭘 하는가. 손님이 왔으면 차라도 내오는 게 예의 아닌가?”
손님? 누가?
내가 어처구니가 없어서 멍하니 바라보자, 그녀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건방진 데다가 무례하기까지 한 소년이도다.”
빠직.
나는 늘어졌던 신경이 팽팽해지는 것을 느꼈다. 물론 내가 예의에 어색하다는 것은 누구보다 나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비록 한때는 ‘로드 오브 킹덤’의 군주였더라도, 이제는 그저 평범한 소녀로서, 고쳐야 할 행동이라고 내심 생각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이 오만방자하기 그지없는 여인에게 그런 소리를 듣는 것만큼은 절대로 사양이었다.
“…내가 당신한테 그런 소리를 들을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
나는 싸늘한 음성으로 그녀를 쏘아붙였다. 특별히 화가 났다고 하기보다는, 왠지 모를 억울한 듯한 심정이, 나에게 말에 날을 세우게 했다.
“흐음?”
하지만 내 싸늘한 말에도, 여인은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별 이상한 소리를 다 듣는다는 듯 빤히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당신, 대체 누구야?”
“흐음….”
오히려 더 답답해진 내가 던진 질문에, 그녀는 뭔가를 고민하는 듯 잠시 턱을 쓰다듬다가, 품에서 하나의 물건을 꺼내 들었다.
…지도?
정확히는 나침반과 지도가 더해진 듯한, 금속으로 만들어진 널찍한 황동색 원판 위에 대륙의 전토가 섬세하게 양각되어 있는 그것을 그녀는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리고 넋을 놓고 있는 나를 무시한 채,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BliTo여. 내가 찾는 자의 위치를 알려 다오.”
하아?
지도를 향해 속삭이는 목소리.
황당하다 못해 어이없는 그 광경에, 내가 고개를 내저으려던 순간,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금속 지도로부터 한 줄기 광채가 뻗어 나왔다.
파아앗!
처음에는 지도 전면에서 쏟아져 나오던 광채.
그것은 차츰차츰 그 크기를 줄여 가던 끝에 결국 대륙의 서쪽 위에 찍힌 아주 작은 점과 한쪽 방향을 향해 생겨난 화살표만을 남긴 채, 환상처럼 사라져 버렸다.
“흐음. 이번에도 잘못 찾아온 건가?”
저 위치는…?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길 잠시, 지도에 남은 점의 위치가 다름 아닌 루반 공국, 그중에서도 루바젤을 가리킨다는 것을 깨닫고, 퍼뜩 정신을 차린 내 뇌리에 문뜩 한 줄기 상념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 ‘추색의 지도’?
저 지도의 정체를 깨달은 순간, 나는 머리카락이 쭈뼛 일어서는 것을 느꼈다.
하나같이 신비한 힘이 깃들어있는 36대 기보, 그중에서도 추색의 지도는 28위의 보물로 얼굴과 이름을 아는 상대라면 설사 대륙 끝에 숨어 있다고 해도 찾아낼 수 있는 보물이었다. 문제는 이 여인이 찾는 상대가 누구냐 하는 것.
엉뚱한 사람을 찾아온 것이라면 다행이겠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추색의 지도를 지닌 이가 이곳에 우연히 찾아왔을 리가 없다.
“당신… 누굴 찾고 있는 거지?”
“음?”
한쪽 손으로 턱을 괴고, 다른 손 위에 올려놓은 지도를 내려다보며, 뭔가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여인은, 살짝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아, 그러고 보니 그대가 있었군.”
빠직―!
내 존재는 까맣게 있고 있었다는 듯, 그 무신경하기 그지없는 태도에 나는 치솟는 혈압을 누르기 위해 전력해야 했다.
마음 같아서야 아르넬의 염주라도 콱 날려 버리고 싶었지만, 상대의 정체도 모르고 그럴 수야 없었으니까.
“본인은 라바일 경을 만나러 왔도다.”
“……!”
역시…!
나는 긴장감을 바짝 곤두세웠다.
‘추색의 지도’로 찾아온 대상이 우리라면, 오늘 처음으로 이 여인을 만난 나는, 당연히 제외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남는 대상은 세레나거나 그일 뿐이니, 이런 대답이 돌아올 것은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단순히 짐작을 하고 있던 것과 실제로 확인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흐음. 다행히 아까처럼 잘못 찾아온 건 아닌가 보군.”
…이런.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실수를 깨달았다.
원래라면 진작 유도신문인 걸 눈치챘을 텐데, 이 여인의 워낙 엉망진창인 행동에, 냉정함을 잃고 흥분했던 것이 문제였다. 나는 우선 침착하게 마음을 가라앉혔다.
우왕좌왕하면 더 큰 실수를 저지르기 마련, 이럴 때일수록 오히려 더 침착해야 한다.
“아까 전에는 웬 다리가 부러진 빈민의 집에 잘못 찾아가는 바람에 큰 고생을 했단 말이야. 정말이지 라바일 경도 어딜 이렇게 돌아다니는 건지, 참으로 그 남 도와주길 좋아하는 성격은 어쩔 수 없군.”
진정하자. 진정하자.
여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나는 머릿속으로 겨우겨우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아직 이런저런 불만을 늘어놓고 있는 여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당신은 누구지? 그리고 세레나를 찾아온 이유는 뭐야?”
나는 굳이 살기를 숨기지 않았다. 그녀를 압박하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대답 여하에 따라서는 그녀를 죽일 생각이었다. 내가 가족에게 손을 대는 자는, 그 누구라 할지라도 용서할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나의 의도는, 그야말로 깨끗하게 무산되고야 말았다.
“흐음, 참으로 살벌한 소년이로고.”
…이 여잔 대체 뭐야?
전쟁터에서 갈고닦은 내 살기는 강렬해, 심신이 약한 사람이라면 혼절할 정도다.
그런 내 살기를 정면으로 맞고도 살짝 미간을 찌푸릴 뿐인 그녀의 모습에 나는 의문과 긴장감을 더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들은 직후, 나는 기껏 찾은 냉정함을 고스란히 날려 버릴 수밖에 없었다.
“언니가 동생을 찾는데, 굳이 이유가 필요한가?”
…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