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s not a hero, he's a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109)
109화 – 잠입.
용사들의 힘은 세대를 거듭할수록 약해지고 있었다.
물론, 가끔가다 예이츠와 같은 예외가 나오기는 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예외일 뿐이었다.
‘용사의 스승이 될 법한 이들을 제거하고 경험을 쌓을 만한 전장을 줄여나갔지.’
당연하게도, 그 모든 것은 벨제뷔트의 계략이었다.
첫 번째 용사를 뛰어넘는 용사가 나오지 않게끔 하기 위해 펼친 혼신의 견제.
용사들은 세대를 거듭할수록 약해졌고, 종래에는 그랜드 마스터에조차 오르지 못한 이가 생겨날 정도였다.
용사가 마왕을 쓰러트리기는커녕 사천왕조차 이기지 못하고 쓰러지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바꿔 말하자면, 초창기의 용사일수록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거지.’
그래도 첫 번째 용사를 되살린 게 아니라는 점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걸까.
하긴, 클라리스 아르나드가 부활했다면 굳이 아르카나에 집착할 필요가 없었을 거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벨제뷔트를 쓰러트릴 수 있을 테니까.
비록 과거의 승자는 벨제뷔트였지만 그건 클라리스가 혼자였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가버렸군.”
란은 어느새 모습을 감추고 사라졌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사라지는 것을 감지하지 못했다.
새삼 지금의 나로서는 란 하나조차 상대하기 힘들 거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다.
“니콜라스와 상담을 해봐야겠군.”
하기야 전략도 전략이지만 뭐든 간에 우선은 지그문트를 만나는 게 우선이긴 했다.
최소한 무기의 격이라도 맞춰놔야 승산이 있을 테니까.
물론, 그런다고 해서 정말로 이길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어쩌면 만약을 대비해 둬야 할지도 모르겠다.
“..벨.”
“그래, 데이브.”
“만약에 내가 잘못된다면.. 악. 야!”
벨이 내 입을 주먹으로 때렸다.
붉어진 눈으로 나를 노려보는 벨.
“너답지 않게 약한 소리 할래?”
“..약한 소리가 아니라 만약을 대비해 두자는 거잖아.”
“그런 소리 할 시간이 있으면 조금이라도 더 나은 방법을 생각해! 기세등등하게 내 용사들을 모두 쓰러트렸던 마왕은 대체 어디로 간 거야?”
나는 할 말을 잃고 침묵했다.
벨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으니까.
‘하긴, 생각해 보면 용사들은 모두 다 나에게 한 번씩 죽었던 놈들이지.’
아무래도 최근 정체된 경지 때문에 마음이 약해져 있었던 모양이다.
일종의 심마라고 해야 할까.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한계를 규정짓고 있었던 거다.
“..그래, 네 말이 옳아.”
몸을 일으켜 세운다. 허리춤에 묶인 세 자루의 검이 짤각인다.
상대의 무기와 비교하면 부족하기 짝이 없는 검.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는 검 한 자루 없었던 순간에서조차 포기한 적이 없었다.
예이츠와의 싸움이 그랬고, 파라켈수스와의 조우에서도 그랬다.
그런 나에게 지금은 무려 세 자루의 검이 있는 거다.
“무기의 차이 따위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지.”
모르긴 몰라도 지그문트가 만든 무기는 대단한 물건일 거다.
대장장이 종족이 더없이 희귀한 재료를 두드려 만들어 낸 걸작이니 오죽할까.
심지어 그런 물건이 그랜드 마스터의 손에 들어갔으니 상대의 힘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한다고 봐야겠지.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내 힘으로는 그들을 이기기 힘들 거다.
“..고맙다.”
그런데 그게 내가 포기할 이유가 되던가?
나는 벨에게 감사를 표했다.
“..별말을 다 하네. 어디 아파?”
내가 벨에게 품은 악감정은 차치하고서라도, 이번 일은 내가 빚을 진 거겠지.
나는 그 사실을 가슴에 품은 채 걸음을 옮겼다.
* * *
지그문트의 망치가 모루를 두드린다.
터엉!
내리치자마자 튕겨 나가는 망치.
지그문트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이 방법은 안 될 것 같구나.”
“그럼 어떻게 하죠? 그냥 솔직히 말할까요?”
“그랬다가는 우리를 죽이려고 들지 않을까? 그래도 다섯 개 중 세 개를 만들어줬으니 한동안 재촉은 하지 않을 거다. 만약 뭐라고 하면 산의 정수를 녹일 불꽃은 언제 줄 거냐고 따져 물으면 되겠지.”
“하긴, 그동안 열심히 하셨으니 좀 쉬실 때도 됐죠. 그놈들도 더 이상 뭐라고 하지는 않을 거예요.”
지그문트의 수제자 드모어는 고개를 끄덕이며 모루 위의 물건을 조심스레 집어 들었다.
아름다운 빛을 흩뿌리는 날개가 손 위에서 반짝인다.
요정 여왕의 날개. 지금까지 이 날개 하나를 제련하고자 얼마나 많은 시도를 해왔던가.
그러나 그 모든 고생이 무색하게도, 빛의 정수를 제련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죽하면 이 얇은 날개에 대고 망치질까지 시도했겠는가. 그마저도 실패로 돌아가 버렸지만.
“그나저나 이 날개. 요정의 날개라기엔 너무 큰 거 아닌가요? 제 몸보다 큰 거 같은데..”
“여왕의 날개니 그럴 만도 하지. 듣자 하니 요정들의 여왕은 인간과 비슷한 크기였다고 하더구나. 요정들이 멸망하게 된 계기도 요정 여왕이 한 인간과 사랑에 빠진 것이 시작이었다는 것 같으니까.”
“사랑이요?”
너무 뜻밖의 대답이 돌아와서일까.
드모어는 제 귀를 의심하듯 지그문트에게 되물었다.
“정말로 사랑 한 번에 요정들이 멸망했단 말이에요? 도대체 왜요?”
“인간의 삶은 짧고 젊음은 한순간이니까. 듣자 하니 그 인간은 요정 여왕의 날개가 불로불사를 준다는 헛소문에 속아 넘어간 것 같더구나. 젊음을 얻고 싶다는 마음에 여왕을 배신한 거지.”
드모어는 지그문트의 대답에 할 말을 잃어버린 듯 제자리에 멈춰 섰다.
종잇장보다 가벼웠던 한 쌍의 날개가 새삼 무겁게 느껴진다.
고작 그런 것을 위해 연인을 배신하고 날개를 잘라냈단 말인가.
“남자는 후회했을까요? 그런다고 해서 젊음을 얻지는 못했을 텐데.”
“글쎄. 오히려 젊음을 손에 넣지 못했다는 사실에 화를 내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고서야 여왕의 날개가 여기에 있을 리 없을 테니.”
“..저는 스승님을 배신하지 않을 거예요.”
“그건 두고 봐야 아는 일이란다.”
드모어가 서운하다는 듯 지그문트를 바라봤지만 지그문트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무엇을 생각하는 것일까.
까닭 모를 서글픔이 어려 있는 그의 눈은 짐작하기 어려운 과거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그런데 아까부터 이상한 소리가 들리지 않니?”
“음. 그러고 보니 환기구 쪽에서 좀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긴 하네요.”
“쥐라도 있는 건가? 하긴, 이런 지하에 굴을 파놨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어가려는 두 사람.
그러나 그런 두 사람의 태도가 바뀌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콰앙!
이윽고 완전히 박살이 나버린 환기구.
그것을 통해 인영 하나가 떨어져 내린다.
“뭐, 뭐야!”
“치, 침입자예요. 스승님! 어서 경비병을..!”
두 사람은 생각지도 못한 침입자의 등장에 기겁하며 물러섰다.
드모어는 통신구를 사용해 상황을 알리려는 듯 황급히 뒤돌아서 달렸다.
“헉.”
그러나 드모어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침입자가 어느새 그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냐.”
지그문트가 애써 침착하게 물었다.
그런 지그문트를 바라보던 침입자는 말없이 검을 뽑아 그에게 다가갔다.
드모어는 그런 침입자를 막아서고 싶었으나 안타깝게도 몸이 뜻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새삼 자신의 나약한 마음이 원망스러워지는 순간이다.
스승을 배신하지 않겠다고 말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러고 있단 말인가.
“스, 스승님께 손대지 마!”
“하르트를 알고 있나?”
다행히 드모어가 생각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침입자, 데이브가 하르트의 이름을 꺼내며 지그문트에게 검을 건넸다.
얼떨결에 검을 받아 든 지그문트.
본능적으로 그 검을 살피던 눈이 별안간 세차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검에서 익숙한 흔적이 보여서다.
“이 검.. 누가 만든 거지? 설마 내가 아는 하르트인가?”
“그래, 당신의 제자. 하르트. 그가 만든 검이지. 당신에게 보여달라고 하더군.”
“..그 아이가 아직 살아 있던가?”
지그문트는 그 말에 다시 한번 하르트의 검을 살폈다.
하르트는 미리 만들어 둔 검에 불과하다고 말했던 것들.
그러나 지그문트의 눈에는 다른 것이 보이고 있었다.
미처 끝맺지 못한 미련과 엇나가고만 것에 대한 사죄.
비록 엇나간 길일지언정 끝까지 관철해 낸 결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걸작.
떠나간 제자가 보낸 편지는 검의 형태가 되어 그에게 안부를 묻고 있었다.
“..많이 컸구나.”
“당신을 그리워하더군. 말로는 하지 못했지만.”
“혹시 같이 온 건가?”
“아니, 하지만 위치를 알려줄 수는 있지.”
지그문트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으나 하르트의 위치를 묻지는 않았다.
아직 그에게는 할 일이 남아 있었으니까.
지그문트가 데이브를 바라본다.
“날 찾아온 게 그것 때문만은 아니겠지?”
“그래, 하지만 그 전에 우선 이걸 돌려주지.”
“..그건.”
데이브가 품속에서 계약서와 미스틸테인을 꺼내 지그문트에게 건넸다.
그것을 받아든 지그문트의 눈이 경악으로 치떠진다.
하기야 골렘까지 만들어 숨겨두었던 물건들이 눈앞에 있다면 누구인들 놀라지 않겠냐마는.
“이걸 어떻게..”
“너에게 그걸 녹일 불꽃을 제공해 주겠다. 대신 그 무기를 나에게 줄 수 있나?”
“뭐라고? 정말로 그런 불꽃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거냐?”
“그래, 보여줄까?”
데이브는 지그문트와 드모어를 물러서게 한 후, 손 위에 불꽃을 피워 보였다.
심상치 않은 열기가 느껴지는 불꽃.
그것은 이미 화염의 정령인 드라키아의 힘을 넘어서고 있었다.
지그문트와 드모어는 홀린 듯 불꽃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저, 정말이었군. 설마 인간의 몸으로 그 정도의 불꽃을 피워낼 줄이야.”
“내 말이 진짜라는 건 충분히 이해한 것 같군. 그럼 내 제안을 받아들이겠나?”
데이브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한번 지그문트의 의사를 물었다.
그러나 지그문트는 쉽게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미안하군. 산의 정수로 만든 무기가 내게는 꼭 필요한 상황이라서.”
한참의 침묵 끝에 나온 것은 거절이었다.
“이유가 뭐지?”
“..대부분의 드워프가 그렇듯 나 역시 한때는 드워프 마을에 속한 장인이었지.”
“과거 이야기는 좀 짧게 해주면 좋겠는데.”
“..젊은 날의 치기였을까. 나는 그만 장로의 망치에 손을 대고 말았다네. 그것만 있으면 더 좋은 무기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데이브는 대충 사정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규칙을 어긴 드워프가 어떻게 될지는 뻔한 이야기였으니까.
“마을에서 추방당한 거군.”
“그래. 그리고 속죄의 대가로서 부여받은 임무가 바로 이거였지. 산의 정수로 만든 신검을 바칠 것. 나는 그 임무를 위해 200년의 세월을 떠돌았다네.”
“그렇기에 가짜 계약서를 쓴 건가?”
“그것도 알아본 건가? 대단하군.”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지그문트.
그런 그를 보며 데이브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없다. 나는 그냥 내 불꽃을 견딜 정도의 검만 있으면 되니까. 신검은 잠깐만 빌리면 된다. 지금 닥친 문제만 해결하면 된다는 거지.”
“문제? 무슨 문제를 말하는 거지?”
데이브는 지그문트에게 지금까지의 일들을 최대한 간추려 설명했다.
지금 지그문트가 협력하고 있는 이들은 사실 이 세계를 멸망으로 몰고 가고 있는 세력이라는 것.
지그문트가 만든 무기들은 지금 그 세력이 부활시킨 옛 용사들의 손에 들려있다는 사실을.
“..보통 놈들이 아니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그런 내막이 있을 줄이야.”
“전성기의 힘을 되찾은 용사들은 쉽게 쓰러트릴 수 없다. 네가 만든 무기를 들고 있다면 더 그렇겠지.”
“그래, 그렇겠지. 허투루 만든 무기를 건네주진 않았으니까.”
“그들의 힘은 내가 생각했던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 보통의 검으로는 견뎌내기 힘들겠지.”
데이브는 그렇게 말하며 미스틸테인을 가리켰다.
“하지만 신검이 있다면, 그들을 이길 수 있을 거다.”
지그문트는 그 말에 데이브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강한 의지가 느껴지는 눈이다.
한 치의 흔들림도 존재하지 않는 강한 눈동자.
“자네에게 그만한 역량이 있다는 건가? 되살아난 용사들과 싸워서 이길 만큼?”
“불가능하다 해도 해내야지. 그걸 위해 이 자리에 선 거니까.”
검사가 저렇게까지 이야기하는데 대장장이가 불가능을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
지그문트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검을 만들도록 하지. 하지만 아무리 내가 드워프라 하더라도 이렇게 단기간에 검을 만들어 낼 수는 없어.”
“뭐가 필요하지?”
“하르트가 만든 검. 그중 한 자루를 주게. 그리한다면 내가 그 검을 신검으로 바꿔 넘겨주도록 하지.”
“..그런 게 정말로 가능한 일인가?”
그런데 이미 완성된 검에 무언가를 더한다는 게 가능하긴 한 걸까.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묻는 데이브의 말.
그러나 지그문트는 빙긋 웃어 보일 뿐이었다.
“불가능하다 해도 해내야지. 그게 장인의 숙명이니까.”
자기가 했던 말을 되돌려받은 데이브가 멋쩍게 웃었다.
그렇게 스승과 제자의 협업이 시작되었다.
수십 년의 세월을 건너 비로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