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s not a hero, he's a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117)
117화 – 밤의 귀족(3)
파라켈수스가 문을 열고 나간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붉은빛으로 물든 복도다.
요란하게 울리는 경종이 고막을 때려온다.
분주하게 뛰어가는 연금술사들의 모습이 보인다.
“..이봐.”
“바, 바빠 죽겠는데 누가..! 헉!”
그러던 중 파라켈수스가 달려가던 연금술사 하나를 붙잡았다.
강제로 돌아 세워진 연금술사.
당혹에 물든 그의 시선이 파라켈수스를 바라본다.
“무슨 일이냐.”
“수, 수장님?”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파라켈수스의 싸늘한 눈빛이 연금술사의 당혹을 잠재운다.
이어지는 것은 공포다.
연금술사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소리쳤다.
“지, 지금 침입자가 연구소의 중심부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뭐라고?”
기껏해야 기계의 오작동 정도를 생각했던 파라켈수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어떻게 일이 이렇게 될 때까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수가 있단 말인가.
용사의 후손이라는 놈들이 언제부터 이렇게 태만해진 거지?
파라켈수스의 얼굴이 분노로 물들기 시작했다.
‘아니, 잠깐만..’
그러나 분노는 찰나에 불과했다.
그 순간 파라켈수스의 뇌리를 스치는 얼굴이 있었기 때문이다.
“설마..”
그와 동시에 싸늘하게 식는 머리.
마치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만 같은 기분이다.
파라켈수스의 눈이 위로, 상층으로 향한다.
평소라면 그곳에 기거하는 연금술사들로 인해 들려왔을 소음들.
그런데 어째서일까. 오늘따라 상층이 조용했다.
마치 그곳의 모든 것들이 사라져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스승님. 또 당신이십니까?”
그래, 현실을 외면하는 건 여기까지만 하자.
이쯤 되면, 파라켈수스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곳에 그녀가 와 있다는 사실을.
지난 수천 년간 끊임없이 자신들의 계획을 방해해 왔던.
그들, 연금술사들의 비원을 수없이 좌절시켜 왔던 절대자가 저곳에 있다는 사실을.
“앞으로 조금이면 되는데.. 역시 가장 큰 문제는 당신이로군요.”
“수, 수장님?”
파라켈수스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그에게 붙잡혀 있던 연금술사의 얼굴이 공포로 물든다.
파라켈수스는 그런 연금술사를 내던졌다. 벽에 처박히며 터져버리는 몸.
콰광!
천장이 무너져 내린 것은 그 순간의 일이었다.
눈부신 섬광이 그의 망막을 물들인다.
“쯧.”
이어지는 것은 거대한 폭발이다.
‘물결빛’의 초식이 이곳의 모든 것을 지워버리는 것이다.
“..여전히 대단하시군요.”
파라켈수스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모든 것이 늦어 있었다.
그의 주위에는 그 무엇도 남아있지 않았다.
수십 년에 걸쳐 완성한 실험실도, 그곳을 지키고 있던 연금술사들 역시도.
침입자는 고작 한 번의 검격으로 이곳의 모든 것들이 부숴버린 것이다.
실로 경악할 수밖에 없는 위력이다.
“스승님.”
파라켈수스가 제자리에 선 채 눈앞의 존재를 바라보았다.
연구소의 중심부에서 서 있는 금발의 기사.
클라리스 아르나드가 파라켈수스를 바라본다.
보리스의 심장을 꿰뚫은 그 검을 뽑아 겨누면서.
“보리스의 영혼을 쫓아 여기까지 찾아오신 겁니까?”
“그런 질문이 지금 무슨 의미가 있지? 자세를 잡아라. 파라켈수스.”
감히 누구의 안전이라고 따르지 않을까. 파라켈수스는 순순히 명령을 따랐다.
파라켈수스의 검이 겨눠진다.
세간에서는 검성이라 일컬어지는 최강의 검이다.
콰직!
그러나 최초의 용사를 감당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검이기도 했다.
단숨에 박살 나 버리는 검. 꺾여버린 양 팔과 튀어나온 뼈.
파라켈수스의 눈이 파르르 떨린다.
클라리스의 검은 어느새 그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여전히, 닿지 않는구나.”
그러나 끝내 내질러지지 않는 검.
검날은 파라켈수스의 목에 닿은 채 나아가지 않고 있었다.
“그렇겠죠. 그 육신은 제가 만든 거니까요.”
클라리스의 육신이 파라켈수스를 공격하는 걸 금지하는 것이다.
그의 말처럼, 그 육신의 창조주는 어디까지나 파라켈수스였으니까.
결국, 그녀의 검은 다시금 거둬질 수밖에 없었다.
“다시 오겠다.”
클라리스가 돌아선다.
갑작스러웠던 습격에 비하면 싱거울 정도의 결말이었다.
“스승님..”
뒤돌아서는 그녀를 모습에 파라켈수스의 입이 달싹인다.
입안에서 맴도는 말.
아마 파라켈수스는 클라리스에게 데이브 클락에 대한 정보를 흘릴 수도 있었을 거다.
클라리스에게 진실을 알릴 수도 있었을 거다.
그렇게 그가 마왕의 화신임을 밝히고, 두 사람이 싸우도록 만들 수 있었겠지.
“..살펴 가십시오.”
그러나 파라켈수스는 그러지 않았다.
그저 복잡한 얼굴로 떠나가는 클라리스를 배웅할 뿐.
아무래도 그녀를 향한 파라켈수스의 마음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설령 수천 년의 시간이 흘렀다 하더라도 말이다.
* * *
란과 두 명의 대장장이가 떠나간다.
이제 슬슬 우리도 떠나야겠지.
“데이브!”
그런데 그 순간, 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클로드 슈나이더. 데이브의 연인이 나를 찾아온 것이다.
“떠나려는 거야?”
얼어붙은 파도를 밟으며 다가오는 그녀.
그녀가 나를 향해 묻는다.
“그래, 용건도 끝났으니 이만 가봐야지.”
“..언제쯤 돌아올 수 있는 건데?”
걱정과 조급함으로 가득한 눈빛이 나를 바라본다.
하지만 글쎄. 확답하기는 어려운 문제다.
물론 이전 회차처럼 라나가 열일곱 살이 될 때까지 시간을 끌려는 건 아니다.
그러나 사람 일이란 게 모르는 거 아니겠는가.
이번처럼 예기치 못한 적이 나타날 수도 있고, 예기치 못한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까.
“글쎄.”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저어야만 했다.
이건 내 개인적인 바람만으로 이뤄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무사히 돌아올 거지?”
그러나 이 질문만큼은 이야기가 다르겠지.
최후의 그 순간이 올 때까지, 나는 살아가기로 마음먹었으니까.
“그래. 데이브는 네 곁으로 돌아갈 거다.”
나는 그대로 솔레이를 불러 그 위에 올라탔다.
솔레이가 가볍게 투레질하며 나를 반긴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클로드의 표정이 묘하다.
“왜 남 일처럼 말하는 거야?”
“그야 남 일이니까.”
“너도 무사히 돌아와야지.”
“나는 왜?”
“그때가 되면, 너는 세계를 구한 영웅이 되는 거잖아.”
그 말을 듣는 순간 토트 팔레아스의 말이 떠오른 것은 어째서일까.
달싹이는 입. 그러나 나는 끝내 대답하지 못하고 돌아섰다.
솔레이가 달리기 시작한다.
클로드는 그런 나를 향해 소리쳤다.
“나랑 아버지도 너희를 도울게! 그러니 꼭 돌아와야 해! 약속이야!”
“..현실과 동화는 구분해라.”
참지 못하고 내뱉은 모진 말. 그런데 어째 데이브의 반응이 조용하다.
분명 이번에도 클로드를 싸고돌 줄 알았는데.
“꼭 그렇게 말해야 했냐? 그냥 돌아오겠다고 하면 되는 거잖아?”
데이브를 대신해 나를 질책한 것은 니콜라스였다.
“지키지 못할 약속은 안 하는 편이라서.”
나는 가볍게 대답하며 솔레이를 몰았다.
“..지나치게 솔직하구나.”
그런데 어째 니콜라스의 대답도 평소와는 다른 것 같다.
“..그 표정은 뭐야?”
뒤를 돌아보면, 니콜라스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까닭 모를 슬픔이 어려 있는 눈빛이 보인다.
“보리스에게선 별다른 정보를 뽑아내지 못했어.”
그러나 니콜라스는 끝내 가슴 속에 있는 말을 털어놓지 않았다.
저어지는 고개.
그를 대신하여 뱉어지는 것은 조금 전의 사건에 대해서다.
“그렇겠지. 시간이 없었으니까.”
“그래도 한 가지. 얻어낸 정보가 있어.”
천둥마가 내달린다. 그 뒤를 따라 그레고리오가 따라붙는다.
나는 솔레이를 달리며 니콜라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연금술사들이 본격적으로 마족들과 손을 잡기 시작한 모양이야.”
“그건 원래도 배신자를 통해서.. 아니, 그런 뜻이 아니구나.”
“그래, 아무래도 마족 전체가 연금술사와 손을 잡은 것 같아.”
“젠장.”
절로 욕설이 튀어나오고 마는 순간이다.
하기야 어떻게 욕을 하지 않고 배기겠는가.
결국, 벨제뷔트마저 연금술사의 꼬드김에 넘어가 버렸다는 뜻인데.
“왜 그런 짓을 한 거지? 아니, 뻔하군. 내가 원인이겠어.”
“지난 회차에는 이런 일이 없었던 거야?”
“그래, 지금 시점에서 4년 후까지도 마족과 연금술사 간에는 별다른 접점이 없었어. 마법소녀가 본격적인 활동을 하고 나서야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을 정도였으니까.”
내 대답에 라나가 움찔한다.
지금에 와서는 새삼스러운 반응이었다.
“지금의 너와는 관계없는 이야기다. 안심해라.”
“..정말로 그럴까요?”
“그래, 아르카나도 그날 이후로 잠잠하지 않냐.”
나는 풀이 죽은 라나를 최대한 달래려 노력했다.
이런 일이 익숙하진 않았지만 언제까지고 벨에게만 맡기고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이, 이봐.. 데이브?”
그러던 중, 프로키온이 나를 불러세웠다.
참고로 말하자면 프로키온은 기절한 마리아와 함께 갈색의 암말을 타고 있었다.
아레스에게서 얻은 말이었다.
“이, 이 여자가 깨어나려고 하는데?”
“엉?”
“우, 움직이고 있다고!”
겁을 먹은 프로키온의 말에 고개를 돌려보면, 확실히 마리아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보아하니 곧 깨어나려는 모양이다.
이번에는 란에게 당한 만큼 쉽게 회복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이런 부분을 보면 확실히 소드 마스터이긴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후려쳐서 재워.”
“그, 그럴까? 그럼..”
“이미 일어났어.”
“으아악!”
그런데 결국 깨어버린 건가?
나는 나직한 한숨과 함께 잠시 라나의 눈치를 살폈다.
눈에 띄게 굳어버린 얼굴과 꽉 쥐어진 주먹.
“..날 왜 살려둔 거지?”
그 와중에 저런 눈치 없는 발언이라니. 마족만도 못한 녀석이군.
나는 절로 한숨이 나오는 것을 느끼며 답했다.
“내가 아니라 라나에게 물어라. 나는 라나의 부탁이 없었다면 최소한 네 오러홀 정도는 부숴버릴 작정이었으니까.”
“라나가..? 왜지? 나는 너를 배신했는데.”
마리아의 눈이 라나에게로 향한다.
차라리 라나 쪽이 더 덤덤해 보일 정도로 처참한 몰골이다.
“..마리아도 그러고 싶진 않았던 거잖아요.”
라나는 대답하면서도 끝까지 마리아를 바라보지 않았다.
말이야 그렇게 했지만 차마 그녀를 용서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하기야 누군가에게 마음을 준다는 일부터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한 번 배신당하기까지 했다면 오죽하겠는가.
나 같았으면 진작에 목을 날려 버렸을 거다.
“..그래, 그랬지.”
마리아의 얼굴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인간의 감정에 서툰 나조차도 그녀가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챌 정도다.
물론, 그래봤자 그녀가 라나를 배신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겠지만.
뭐든 간에 이런 상황에서까지 계속 손을 잡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
“이제 그만 가라. 이제 와서 너와 같이 다니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까.”
“그건..”
“아니면 뭐냐. 아직도 네 동생을 찾겠다는 마음으로 우리에게 붙을 생각이냐? 정작 그 마음이 우리에게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데도?”
마리아는 잠시 입을 다물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지금의 내가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군.”
마리아가 말 위에서 뛰어내렸다.
우리는 잠시 멈춰선 채 그녀를 뒤돌아보았다.
“그래도 언젠가는, 내 도움이 필요해질 날이 올 거다. 그때가 되면..”
“글쎄. 과연 그런 날이 올까?”
“..그래, 올 거다. 파라켈수스는 위험한 남자니까.”
마리아는 그렇게 말하며 뒤돌아섰다.
“그때가 되면,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너희를 돕겠다고 약속하마.”
“퍽이나 그렇겠군.”
“..믿지 않아도 상관없어.”
마리아가 떠나간다.
우리는 다시 말을 몰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이 대륙 최대의 국가였다.
마법과 황금의 제국. 발할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