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s not a hero, he's a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120)
120화 – 로드와 퀸(2)
은빛 머리칼의 여성이 나를 바라본다.
겉모습만 떼어놓고 보면 정말로 인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모습.
“그 꼴은 뭐냐? 왜 너답지 않게 인간 흉내를 내는 거지?”
그러나 아무리 정교한 변신이라 해도 내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나의 친구이자 용들의 군주. 조르디네스.
파우스트를 통해 호출했던 그녀가 이곳에 찾아온 것이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벨제뷔트. 너야말로 어쩌다 인간이 된 거지? 마왕성 밖으로는 어떻게 나온 거야?”
“추측해 봐.”
나는 길게 설명하지 않고 답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조르디네스라면 그걸로 충분할 테니까.
“뭐, 그러지.”
대답과 동시에 나는 그녀의 눈이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마왕의 눈에 필적한다고 알려진 신의 권능.
신룡의 눈이 단숨에 진실을 파헤치는 것이다.
“어디 보자. 내 생각에는 저기 있는 페어리와 관련이 있을 것 같은데, 맞나?”
투명한 금색의 눈동자가 호선을 그린다.
나는 그 웃음기 어린 목소리를 향하여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번에는 내가 묻고 싶군. 너는 왜 이놈을 살리려는 거지?”
나는 내 검을 막고 있는 그녀의 손을 바라보며 물었다.
설마 나에게 인사나 하겠다고 이러고 있는 건 아닐 테니까.
“드라쿨리아의 혈통은 지금 멸종 위기종으로 지정되어 우리의 보호를 받고 있다. 죽이도록 둘 수는 없어.”
“..거지 같은 이야기군.”
나는 혀를 차며 검을 집어넣었다.
아무래도 이놈을 죽이는 건 포기해야 할 것 같다.
용들이 누군가를 보호하기로 했다면 그 의지를 꺾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들의 약속은 어떤 의미에서는 목숨보다도 무거웠다.
“인간이 되니까 성격이 죽은 거 같은데? 아주 보기 좋아.”
“..그런 건 됐고. 부탁할 게 있다.”
“미안하지만 지금은 좀 곤란해. 이래 봬도 엄청 바쁘거든.”
“로드씩이나 되는 사람이 바쁠 일이 뭐가 있다는 거냐. 그냥 부하한테 맡겨버리면 될 텐데.”
조르디네스는 내 반문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 부하들에게 문제가 생겨서 온 거야.”
“대체 무슨 문제이길래?”
“레드 드래곤의 해츨링이 사라졌어. 납치당했지.”
“뭐라고?”
나는 자신도 모르게 호흡이 멈추는 것을 느꼈다.
도대체 그 누가 드래곤의 해츨링에게 손을 댈 수 있단 말인가.
정말 어지간히 미치지 않고서야..
“..납치라고?”
그런데 왜 마음속에 짚이는 것이 있는 걸까.
단순히 의심이 가는 수준을 넘어 유력한 용의자의 얼굴이 떠오르는 이유는 뭐지?
“연금술사로군.”
나는 모종의 확신을 품은 채 범인을 단정 지었다.
감히 드래곤의 새끼에게 손을 댈만한 미친놈이 이 세상에 그리 많을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심지어 드래곤 로드씩이나 되는 사람이 고작 뱀파이어 하나를 쫓겠다고 여기까지 오지 않았는가.
노드릭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본다면, 사실상 모든 정황이 단 하나의 답을 증거하고 있다는 거다.
“저 녀석을 보호하고 있었다는 건 너희 역시 연금술사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거냐?”
“..그래, 맞아.”
이쯤 되면 마족만 진실을 모르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는데.
과연 이것도 내 착각인 걸까?
“우리는 동맹 아니었나? 아무리 상호불가침에 불과한 조약이라 하더라도 경고 정도는 해줄 수 있었을 거 같은데.”
나는 미약한 배신감을 품은 채 조르디네스를 바라보았다.
다른 건 둘째치더라도 너와 나는 친구가 아니던가.
오죽하면 내가 파우스트를 보자마자 조르디네스를 떠올렸겠냐는 말이다.
“..나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약속이었으니까.”
“뭐라고?”
“..그러고 보니 지금의 너는 마족이 아니군. 그렇다고 인간이라고 부르기엔 조금 미묘한 것 같은데.”
“하프 데몬이다. 인간과 마족의 혼혈이지.”
엄밀히 말하면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나는 우선 스스로를 그렇게 소개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영혼과 육신의 괴리를 설명할 방법이 없었으니까.
“하프 데몬이라.. 귀에 익은 이름이군.”
조르디네스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하긴, 그녀는 이 대륙에서 나보다 나이가 많은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다.
이 세상에 남아있는 사람 중에서 하프 데몬과 실제로 만나본 적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라는 거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아무래도 이 점에 대해서는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해야겠군.”
“지금 말고 나중에 하겠다는 거지?”
“그래, 말했다시피 지금은 바쁘니까.”
“그럼 우선 협력해 주지. 이쪽에는 헬 하운드와 케르베로스도 있으니까.”
내 대답에 조르디네스가 눈을 빛내며 나를 바라본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조르디네스 님!”
그런데 그 순간 노드릭이 목소리를 높였다.
조금 전까지의 오만한 태도는 어디로 간 건지 극진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다.
설마 나와 조르디네스의 모습을 보고 위기감이라도 느낀 건가?
“해츨링이라니요! 설마..!”
아니, 아무래도 다른 이유였던 모양이다.
걱정으로 가득한 눈빛이 조르디네스를 바라본다.
아무래도 이 녀석, 그 해츨링과 아는 사이인 것 같다.
“그래, 루카르 그 아이가 사라졌다.”
조르디네스가 가라앉은 눈으로 노드릭을 바라본다.
그녀답지 않은 착잡한 얼굴이다.
“부,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해도 무사했던 것 같은데 도대체 언제..”
“네가 출발한 것과 거의 동시였을 거다. 보아하니 널 쫓아 나간 것 같더군. 확실히 네가 그 아이에게 잘해주긴 한 모양이야.”
“아..”
절망하는 노드릭의 얼굴.
그걸 보면서도 동정심이 들지 않는 건 아직 저놈에 대한 악감정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니콜라스. 어서 쫓아가 보죠.”
“..그래, 라나.”
그런데 아무래도 저 두 명의 용사는 조금 다른 모양이다.
두 사람의 심각해진 얼굴이 엿보인다.
‘하여간, 착해 빠져서는.’
나는 혀를 차면서도 순순히 솔레이의 등 위에 올라탔다.
그와 동시에 모습을 드러내는 무수한 마수의 무리.
니콜라스의 명령에 마수들이 헤츨링의 흔적을 쫓기 시작했다.
“못 본 사이 꽤 변한 모양이구나? 용사와 손을 잡다니.”
솔레이의 뒤에 조르디네스가 올라탄다.
나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솔레이를 달리기 시작했다.
그 뒤를 따라 움직이는 니콜라스의 천둥마와 그레고리오.
“이봐, 나는?”
덩그러니 남겨진 프로키온의 목소리가 덧없이 맴돈다.
* * *
솔레이의 질주에 바람이 밀려난다.
귓가에 몰아치는 바람.
조르디네스는 그런 바람의 틈 사이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아무래도 내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눈치챈 기색이다.
“저 아이를 너무 미워하진 마. 가엾은 아이니까.”
나는 그녀의 속삭임을 모른 척 넘기려 했다.
이미 노드릭을 살려주기로 한 이상, 이제는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였으니까.
“노드릭은 그저 가족을 되찾고 싶은 거뿐이야. 너라면 그 마음을 알잖아. 안 그래?”
그런데 조르디네스도 참 잔인하다.
차라리 모르고 있었다면 마음 편히 미워하고 있을 걸 괜히 사람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가.
나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되물었다.
“가족이라니?”
“연금술사들이 노드릭의 아내를 데려갔어.”
“뱀파이어 퀸을 데려갔다라.. 말하지 않아도 뭘 하려고 했는지 알겠군.”
“..너도 봤구나. 그 실패작들을.”
“그뿐일까. 성공작도 봤지.”
나는 보리스에 의해 되살아났던 용사들을 떠올렸다.
란을 비롯한 용사들의 몸이 뱀파이어와 섞여 있었던 걸 생각해 보면, 파편들의 정체가 무엇일지는 뻔한 노릇이었다.
“그럼 이것도 알고 있어? 뱀파이어들을 멸망시킨 게 파라켈수스였다는 사실 말이야.”
“..예상에서 벗어난 이야기는 아니네. 용사들을 부활시키려고 별짓을 다 한 거겠지.”
“아니, 용사는 어디까지나 부산물에 불과해.”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은 채 입을 다물었다.
부산물이라니? 설마 용사들의 부활조차 준비 단계에 불과했단 말인가?
“연금술사들의 진정한 목적은 따로 있거든.”
조르디네스의 말에 우리의 옆으로 따라붙는 이가 있었다.
새하얀 페가수스를 탄 채 달려오는 라나.
“아르카나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라나의 눈이 조르디네스에게로 향한다.
조르디네스는 말없이 그 시선을 마주했다.
나는 문득 그녀의 눈에는 라나가 어떻게 비칠지가 궁금해졌다.
“..맞아. 태양신을 부활시키기 위해선 그 힘이 꼭 필요하다더라고.”
“세 마리의 제물과 계약자만으로는 부족한 건가?”
“턱없이 부족하지.”
그 말을 듣고서야 나는 파라켈수스가 왜 그렇게 라나에게 집착하는 건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과거의 마법소녀가 어째서 그렇게 강했는지에 대해서도.
‘신을 부활시키기 위한 마지막 열쇠라. 그야 강할 만도 하군.’
그러나 한편으로는 의아함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대체 아르카나와 뱀파이어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파라켈수스는 뱀파이어들의 여왕을, 라일라를 이용해 아르카나의 그릇을 만들려 했어. 라일라가 가진 음의 기운이라면 태양의 힘을 충분히 견딜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거지.”
조르디네스는 그런 나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그 라일라라는 뱀파이어는 라나 이전의, 최초의 실험체였다고.
“그리고 성공했지.”
“성공..했다고? 그건 말이 안 되잖아? 그럼 왜 그 이후로도 실험을 계속한 건데?”
“성공은 성공이지만 반쪽짜리였거든. 너도 알잖아? 뱀파이어들에게 태양의 힘이 어떤 존재인지.”
나는 그 말에 조금 전 노드릭이 보였던 모습을 떠올렸다.
고작해야 태양 빛에 닿는 것만으로도 이성을 잃어버리던 그 모습.
“아르카나는 태양의 결정과도 같아. 영웅의 힘을 가진 별이지.”
“힘을 받아들이면 위험해진다는 건가?”
“위험한 정도가 아니야. 잠깐은 그 힘을 사용할 수 있겠지만, 얼마 안 가 터져버릴 테니까.”
나는 그 말에 무심코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죽음이 예정되어 있다는 거군.”
“그래, 노드릭은 그 운명을 바꾸려고 하고 있지.”
나는 그 말에 태양 아래를 달려가는 노드릭의 모습을 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태양이 뜨겁다며 울부짖던 녀석이 어째 지금은 조용하기만 하다.
묵묵한 걸음.
떠오르는 것은 란의 말이다.
분명, 용사들의 삶은 이천 년 전에 시작되었다고 했었지.
“내가 왜 가엾다고 말하는지 알겠지?”
그렇다는 건 노드릭의 기약 없는 추격 역시 최소한 이천 년의 세월을 거쳤다는 말이 된다.
“..그래.”
나는 저 멀리 달려가는 노드릭의 모습에 과거의 내가 겹쳐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만약, 벨제고트가 살아 있었다면, 누군가의 손에 잡혀 있었다면..
“..파라켈수스는 왜 라일라를 놓아주지 않는 거지? 네 말대로라면 사실상 실패한 거나 다름없잖아?”
그러나 한편으로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왜 파라켈수스는 구태여 라일라를 붙잡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노드릭에게는 잔인한 말이겠지만, 파라켈수스의 입장에서는 그녀를 데리고 있어봤자 쓸모도 없지 않은가.
“일종의 보험이겠지.”
“실패를 대비한 준비물이라는 거군.”
“그래, 맞아. 사실, 나는 라일라를 찾지 못한 게 다행이라고 생각해.”
“노드릭이 가엾다고 할 때는 언제고?”
“라일라가 보이지 않는다는 건 파라켈수스가 아직 그 아이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거니까. 귀중한 물건일수록 안 보이는 곳에 숨겨두는 법이잖아, 안 그래?”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의미로 그런 말을 한 건지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
‘바꿔 말하면 라일라가 등장하는 건 파라켈수스에게 버려졌을 때라는 건가..’
정말로 그토록 오랜 시간을 공들여 왔다면, 버릴 때도 그냥 버리지는 않겠지.
나는 또다시 떠오르는 불길한 예지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나에게 이런 걸 알려줘도 되는 건가? 비밀을 지키기로 약속했다면서?”
불길한 생각을 지우려 질문을 던진다.
조르디네스는 그런 나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너는 하프 데몬이잖아. 마족도, 인간도, 하물며 엘프도 아니지.”
그런 거였군.
아무래도 내가 연금술사의 존재를 알지 못했던 건 배신자의 존재 때문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새삼 파라켈수스의 치밀함에 혀를 내두르게 되는 순간이다.
대체 언제부터 이런 계획을 세웠던 걸까.
“..데이브. 마수들이 멈췄어. 아무래도 도착한 모양인데?”
“..정말로 여기라고?”
그 순간, 마수들의 움직임이 멈췄다.
제자리에서 맴돌며 우왕좌왕하는 마수들의 모습이 보인다.
아마도 이 근처에서 냄새가 끊겨버린 모양이다.
하기야 연금술사가 상대라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사실, 그런 것보다는 이곳의 위치가 문제겠지.
“..이거 놀랍군. 설마 인간들이 드래곤에게 선전포고라도 하려는 건가? 설마 해츨링의 납치에 협력하다니.”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리는 없겠지. 괜히 들켰다간 마족에게만 좋은 일이 될 테니까. 아마 이놈들도 모르고 있을 걸?”
평소답지 않게 흥분한 조르디네스를 진정시키려는 것도 잠시.
나는 나직한 한숨과 함께 눈앞의 성벽을 바라보았다.
“발할라 제국이라..”
아무래도 이번 사건 역시 쉽게 끝나지는 않을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