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s not a hero, he's a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126)
126화 – 결함품(2)
아무래도 여유를 부리고 있을 때가 아닌 모양이다.
나는 조금 전과는 달리 전력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파도처럼 밀려가는 빛의 물결.
쏟아지는 빛의 칼날에 정령이 비명을 내지른다.
“그어어어!”
유독 매끈한 단면이 눈에 들어온다. 역시 금속의 정령이 맞는 건가?
하긴, 정체가 뭐건 간에 우선은 공격이다. 힘차게 내지른 검격.
발두르로 인해 훨씬 더 강력해진 물결빛이 정령의 몸을 쓸어낸다.
“쳇.”
그러나 정령을 죽이기엔 여전히 부족하다.
아무리 강력한 공격을 남발해봤자, 정령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불사의 존재였으니까.
결국, 이 꼬마를 쓰러트리지 않는 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거다.
“거참 부탁 한 번 들어주기 힘드네.”
“그게 무슨 소리지?”
“네가 알 필요 없는 이야기!”
오러의 위로 마기를 덧칠한다.
개와 늑대의 시간. 자색으로 물든 검이 날뛰기 시작한다.
평소였다면 조금은 가감했을 위력의 기술이다.
그러나 정령이 상대라면 나에게도 방심할 여유는 없었다.
“그 검은 대체 뭐지? 아까부터 색이 변하는군.”
“쟤가 알 필요 없다잖아!”
그 순간 엘리아가 바람을 타고 모습을 드러낸다.
드라키아의 화염으로 타오르는 화살이 정령의 몸에 꽂혀 든다.
비명을 내지르는 금속의 정령.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눈을 빛냈다.
아무래도 같은 정령의 힘이라면 효과가 있는 모양이다.
“엘리아! 온 김에 정령부터 처리해!”
“누구한테 명령이야!”
“그럼 니콜라스한테만 맡겨두려고?”
“..쳇.”
결국 수긍한 듯 움직이기 시작하는 엘리아.
강의 거인과 화염의 정령이 힘을 합치는 순간이다.
나는 그대로 소녀를 향해 쇄도했다.
그런데 아까부터 뭘 하고 있는 거지?
“젠장!”
다음 순간, 바닥에서부터 솟구친 무수한 말뚝들이 눈앞을 스친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공격.
솔직히 조금만 반응하는 게 늦었어도 그대로 꼬챙이가 될 뻔했다.
“뭔 놈의 마법에 철심이 박혀있는 거야?”
딱 봐도 조금 전과는 차원이 다르게 상승한 위력이다.
설마 저 정령의 힘을 이용하고 있는 건가?
“너 뱀파이어 아니었냐? 어떻게 인공 정령과 계약한 거지?”
“내가 뱀파이어라고? 그게 무슨 뜻이지?”
누가 봐도 뱀파이어처럼 싸우고 있으면서 저건 또 무슨 소리야? 설마 기억이 없는 건가?
염제의 눈에 아무런 정보도 비치지 않으니 뭔가를 알기가 힘들었다.
‘그래, 우선은 잡고 보자.’
발끝에 힘을 주어 공중을 박찬다.
날아가는 몸. 물 흐르듯 내질러진 검이 정령의 몸을 두드린다.
데엥!
마치 거대한 종을 두드리는 것만 같은 소리가 울려 퍼진다.
확실히 금속의 정령답게 단단한 몸체다.
부디 저 번개를 쓰는 꼬마가 일어나기 전에 끝을 내야 할 텐데..
“조르디네스. 그놈 잘 잡고 있어!”
“..그래!”
일단 저 꼬마는 조르디네스에게 맡기자.
눈앞의 상대에게 집중하는 거다.
“흡!”
날아드는 말뚝을 피해 파고든다. 새벽의 걸음.
안개와도 같은 움직임으로 파고들어 공격을 이어 나간다.
무수히 번져나가는 공격.
“..이렇게 하는 건가?”
“이런 미친..”
그런데 저 꼬마가 어떻게 새벽을 쓰는 거지?
라나조차도 저렇게 금방 따라 하지는 못했는데.
“데이브! 정령을 상대로 오래 버티기는 힘들어!”
니콜라스와 엘리아의 움직임이 다급해졌다.
아무래도 저 두 사람에게는 아직 정령을 상대하게 하는 게 힘든 모양이다.
“알았으니까 조금만 버텨!”
어쩔 수 없지. 조금 더 힘을 내보는 수밖에.
“어스름.”
열 가닥의 검격이 꼬마의 몸을 휘감는다.
그 순간 눈앞을 막아서는 강철의 성벽.
나는 발두르를 쥔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어 검을 휘둘렀다.
터져 나오는 섬광이 시야를 물들인다.
“..허.”
그러나 이번에도 저 꼬마는 새벽을 이용해 내 공격을 피해내고 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저 모습이 익숙한 걸까.
꼬마의 모습 위로 낯익은 모습이 겹쳐진다.
나에게서 검을 배우던, 재능있는 꼬마의 모습이.
“..그래, 너 역시 아르카나의 그릇이라는 거구나.”
“아르카나?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에 드는 이름이군. 꼭 손에 넣고 싶어.”
“글쎄. 과연 그게 뭔지 알면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상대에 대한 인식을 바꿔야만 할 것 같다.
이 꼬마를 일반적인 천재와 같은 반열에 두어선 안 된다는 거다.
굳이 따지자면 그랜드 마스터에 오른 라나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군.’
설마 여명검도 따라 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 아무리 천재라 해도 그건 힘들겠지.
애초에 뱀파이어가 태양의 힘을 담은 검을 쓸 수 있을 리가..
“어스름..이라고 했던가?”
“..허.”
그래, 여명검은 몰라도 황혼검은 가능하다는 거냐?
열 줄기의 손톱이 나를 향해 날아든다.
나는 그에 맞서듯 어스름을 펼쳐 날아드는 참격을 요격했다.
확실히, 기술의 완성도에 있어서는 아직 나를 따라오진 못하는 모양이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그러나 이 잠깐의 우위가 썩 기쁘지만은 않았다.
적어도 개와 늑대의 시간을 사용하고 있는 한, 나에게 있어 승리는 당연한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진짜 어떻게 황혼검을 펼치고 있는 거지?
황혼검은 기본적으로 전혀 다른 종류의 힘을 융합해야 가능한 검술인데.
혹시 금속의 정령과 계약한 것과 관련이 있는 건가?
“너.. 인간과 뱀파이어의 혼혈인가? 아니, 다르군.”
“그 눈에는 뭔가 다른 게 비치는 모양이지?”
“인간의 몸에 뱀파이어의 심장을 이식한 거냐? 아니, 어쩌면 몸의 전부가..”
“나에 대해 뭘 알고 있는 거냐.”
글쎄. 조금 전까지는 너에 대해 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착각이었던 것 같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파라켈수스.
“데이브. 저 아이.. 왜곡점이야.”
“그렇겠지.”
“..저 아이를 죽여야 해.”
“…”
뭐든 간에 저 꼬마가 이 세계의 해악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정작 꼬마 자신은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조차 모르고 있는 것 같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실이 변하는 건 아니니까.
저 아이는 그 자체로 살아 숨 쉬는 멸망이나 다를 바 없는 존재였다.
‘..파라켈수스. 설마 그 사실을 알고 우리에게 보낸 건가?’
그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것은 하나의 가정이었다.
혹시 파라켈수스는 우리가 저 아이를 죽이게끔 하려고 보낸 건가?
“이건 이렇게 하는 건가?”
“허..”
그런데 생각할 틈조차 주지 않겠다는 거냐?
꼬마의 손에 깃든 마력이 형태를 바꾸기 시작했다.
흰색도 검은색도 아닌 회색의 힘.
비록 그 색은 나의 것과는 달랐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명백했다.
“..개와 늑대의 시간이군.”
“그런 이름이었군.”
회색의 검이 날아든다.
* * *
두근.
심장의 움직임이 격렬하다. 아득해지는 정신.
라나는 머리를 움켜쥔 채 두 사람의 움직임을 쫓았다.
끊임없이 부딪히는 자색과 회색의 빛.
라나의 주먹이 절로 움켜쥐어지는 순간이다.
“푸르릉.”
그런 라나의 이상을 깨달은 듯 그레고리오가 머리를 비벼왔다.
그러나 라나는 그런 그레고리오의 움직임을 깨닫지 못했다.
그녀의 눈앞에는 푸른 세계가 펼쳐지고 있었다.
꽃으로 뒤덮인 호수와 그 가운데서 미소 짓는 소년.
“또 만났구나? 트윙클 다이아. 이번에야말로 울면서 빌려고 온 건가?”
가빠지는 호흡을 삼킨 채 고개를 들어 올린다.
라나는 이를 악문 채 말을 이어갔다.
“..내가 오고 싶어서 온 게 아니야.”
“..뭐라고?”
라나의 말을 들은 아르카나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오고 싶어서 온 게 아니라고? 그렇다면 대체 누가 그녀를 이곳으로 보낼 수 있단 말인가.
그의 눈이 호수로 향한다.
정확히 말하면 그 아래에 존재하는 바깥세상을 바라본다.
“..그 녀석이군.”
이브를 바라보는 아르카나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이어지는 것은 경멸에 가까운 시선이다.
“..아르카나?”
“그래, 이번에는 내가 좀 착각한 모양이야. 이번에야말로 내 도움을 청하러 온 줄 알았는데 설마 저 실패작이 원인이었을 줄이야.”
“..실패작?”
“그래, 실패작이지. 나를 담는 순간 깨져버릴 결함품.”
라나는 그 말을 듣고 조르디네스가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뱀파이어 퀸, 라이라에 대한 이야기를..
그렇다면 저 아이가..
‘아니, 평범한 뱀파이어가 제물과 계약을 할 수 있을 리 없어.’
채 지워내지 못한 혼란이 꿈틀대는 가운데, 상황은 점차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데이브가 밀리기 시작한 것이다.
자색의 빛이 사그라들고, 붉은 검기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대로 가면 데이브의 패배는 자명하다고 봐야겠지.
“곤란한데..”
그런데 왜 아르카나가 혀를 차고 있는 걸까.
데이브를 미워하는 만큼, 그라면 오히려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순간에서까지 원래의 실력을 감출 생각인 건가?”
“그게 무슨 뜻이야? 아저씨가 실력을 감추고 있다고?”
“그래, 제법 잘 꾸미고 있긴 하지만 내 눈은 못 속이지. 솔직히 마음만 먹었으면 저런 것쯤 금방 해결했을걸?”
글쎄. 데이브 클락에 대해 아는 사람이라면 그런 말을 하진 못할 것 같은데.
‘하지만 아르카나가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잖아. 설마 아저씨한테 숨겨진 힘이 있다는 건가?’
라나의 의문이 쌓여가는 가운데, 아르카나가 몸을 일으켜 라나에게 다가간다.
“아무튼 간에 이대로는 안 되겠네. 아무리 네가 미워도 저런 결함품에게 가고 싶진 않으니까.”
푸르게 빛나는 손과 입가에 걸린 조소.
아르카나의 손이 라나의 이마를 향해 뻗어진다.
“..뭘 하려는 거야?”
“감사하도록 해. 트윙클 다이아. 아니, 지금은 라나 클락이라고 했던가?”
라나는 그 손을 피하려고 했지만 어째선지 몸이 잘 움직이질 않았다.
라나의 이마를 두드리는 손가락.
“음. 지금은 이 정도의 힘밖에 못 주는 건가? 역시 당대의 용사가 걸림돌이겠어.”
“나, 나한테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야?”
“힘을 준 거지. 일시적이긴 하지만..”
라나의 몸이 호수로 잠겨 들기 시작했다.
아르카나는 그런 라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부디 이번 경험이 좋은 결과로 이어지길 바라. 알고 있지? 다음에는 이렇게 쉽게 힘을 빌려주진 않을 거라는 거.”
“잠깐..!”
라나가 아르카나를 향해 손을 뻗는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에게 무언가를 물어볼 틈은 없었다.
물결치는 호수가 라나의 얼굴을 뒤덮는다.
그리고 라나가 눈을 떴을 때.
“히히이잉!”
라나는 이전과 전혀 다른 기운을 흘리고 있었다. 냉막한 시선.
그 모습을 본 그레고리오가 기겁하며 물러선다.
어쩐지 라나의 모습이 이전과는 달라진 것 같았다.
피부를 뚫고 새어 나오는 푸른 빛.
물론, 이변을 느낀 것은 그레고리오만이 아니었다.
“..꼬마야. 괜찮은 거냐?”
조르디네스의 눈이 라나를 바라본다.
그 부름을 따라 움직이는 시선.
라나의 눈이 조르디네스를 바라본다.
조르디네스가 비명을 내지른 것은 그와 동시였다.
“으윽..”
조르디네스는 제 눈에서 느껴지는 끔찍한 통증에 몸부림쳤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드래곤 로드인 그녀가 고작 눈을 마주친 것만으로 이렇게 된다고?
‘신룡님?’
아니, 이 통증의 원인은 저 꼬마가 아니다.
이윽고 조르디네스는 제 눈의 주인이, 신룡이 라나를 보며 환희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도대체 저 푸른빛이 무엇이기에 신룡이 반응한단 말인가.
애초에 신이라는 존재가 지금껏 필멸자에게 이토록 격렬한 반응을 보인 적이 있던가?
“자, 잠깐!”
그런데 지나치게 당황한 탓일까.
조르디네스의 행동이 한 박자 늦고 말았다.
뒤늦게라도 라나를 막아서려 해보지만 그녀의 손은 맥없이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서서히 공중으로 부유하는 라나의 몸.
그리고 그런 그녀의 몸을 뒤덮는 푸른 광채.
“리리컬 블래스트.”
라나의 손이 이브를 가리킨다.
이어지는 것은 천지를 양단하는 듯한 푸른 광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