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s not a hero, he's a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145)
145화 – 조별 과제는 사람이 할 짓이 못 된다(4)
대양의 세계가 무너지고 거대한 도시가 모습을 드러낸다.
지면에 꽂혀 있는 무수한 작살들과 그 끝에 꿰어진 백골들.
그리고 코끝을 찌르는 피 냄새.
“저, 저기.. 레, 레니 슈나이더?”
일순 도시의 모습에 압도된 학생들이 라나에게로 다가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뒤돌아서는 라나의 모습에 학생들이 제자리에 멈춰 선다.
냉정한 것을 넘어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눈빛이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사실 그들이 도움을 청할만한 입장은 아니긴 했다.
원래 계획대로였다면 저 학생들은 유찬 교수의 말처럼 두 사람을 함정에 빠트렸을 터.
그런 주제에 무슨 염치로 도와달라는 말을 하겠는가.
‘대체 이 빌어먹을 세계는 뭐야?’
그러나 이 지옥 같은 세계에서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어지간한 익스퍼트도 살아남기 힘든 장소에서 그 수준도 못 되는 학생들이 뭘 하겠는가.
이렇게 된 이상, 그들은 얼굴에 철판을 깔기로 했다.
애초에 그들이 두 사람을 공격하려 한 건 어디까지나 ‘계획’에 불과하지 않던가.
실제로 그들을 공격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는 거다.
“슈, 슈나이더. 그게 말이야..”
“우리를 죽이는 건 그만두기로 한 거야?”
물론, 그걸 가만히 두고 볼 엘레나가 아니다. 뾰족한 목소리.
학생들의 얼굴에 당혹으로 물든다.
하기야 이제 와서 발뺌할 수는 없을 거다.
양심의 문제를 떠나서 지금까지 그들이 보였던 태도가 있었으니까.
“레니 슈나이더가 아니야. 라나 클락. 레니라고 부르면 반응이 늦으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그러나 정작 라나의 태도는 덤덤하다. 짧게 대답하는 그녀.
학생들은 그런 라나의 대답에 안도하면서도 이내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이름을 숨기고 있었던 거야? 왜?”
“그럴 이유가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건 왜 묻는데?”
“아, 아니. 나는 그냥 네가 슈나이더 상단과 관련이 있는 줄 알고..”
슈나이더 상단? 익숙한 이름에 라나의 표정이 일변한다.
“혹시 그 상단의 주인 이름이 아레스야?”
“아, 아니. 클로드라고 들었는데? 웬 젊은 여자라고 하더라고.”
아무래도 확실한 것 같다. 하기야, 원래부터 상재가 있던 그들이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이 짧은 시간에 그렇게 거대한 상단을 만든 건지는 모르겠지만.
“따라와. 뒤처지면 지켜줄 수 없어.”
“자, 잠깐. 여기는 대체 어디야? 너는 뭔가를 알고 있는 거지? 그렇지?”
“알면 뭐가 바뀌는데?”
“그, 그건..”
할 말을 잃어버린 학생들을 뒤로한 채 라나가 걸음을 옮겼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그들을 지켜주고 싶지 않았다.
도대체 제 목숨을 노리던 이들을 왜 구해줘야 한단 말인가.
라나는 더 이상 선량함과 멍청함을 구분하지 못하는 철부지가 아니었다.
‘마리아 같은 경우를 또 겪고 싶진 않아.’
물론, 라나 역시 이 모든 일의 원흉이 연금술사일 거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저들과 유찬은 그저 이용당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 역시도.
‘하지만 그 사실이 저들의 악의를 설명해주지는 않지.’
“우, 우리는..”
“알겠으니까 엘레나나 잘 지켜. 너희 목숨 건지겠다고 엘레나를 버리면, 그 순간 너희는 끝이야.”
라나는 평소와 달리 강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그 모습에서 얼핏 데이브의 얼굴이 보이는 건 아마 착각은 아니겠지.
좋게든 나쁘게든, 라나는 성장하고 있었다.
“..찾았다.”
그러던 중 라나의 검 끝이 어딘가에 멈춰 섰다.
그 순간 모습을 드러내는 퀘스트 창.
띠링!
[퀘스트가 도착하였습니다. 십검들을 일행에 합류시킬 것. 난이도 B.]“십검..?”
이미 짐작했겠지만 라나가 퀘스트를 받을 수 있게 된 것 역시 성검의 덕이었다.
성검이 가진 힘이 일시적으로나마 용사 시스템을 부여한 것이다.
하기야 이 혼잡한 세계에서는 용사 시스템만큼 유용한 힘은 또 없을 거다.
벨이 괜히 성검을 준 건 아니라는 거겠지.
‘..움직이고 있어.’
거대한 화살표가 길을 가리킨다.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 화살표의 모습.
보아하니 꽤 격렬한 싸움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빨리 합류해야겠어.’
라나는 곧바로 화살표가 있는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언제 릴리스가 힘을 되찾을지 모르는 만큼 서두르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이 불안한 거지?’
라나의 걸음이 멈추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보면, 두 무리로 나뉜 괴물들이 서로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들 무리 사이에서 정처 없이 흔들리는 화살표.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분명 십검의 위치를 가리켜야 할 화살표이건만.
“..화살표가 왜 괴물들을 가리키고 있는 거지?”
화살표는 마치 장난이라도 치는 것처럼 두 무리의 괴물들을 번갈아 가며 가리키고 있었다.
혹시 고장이라도 난 걸까?
말없이 화살표를 보고 있으면 점차 흔들림이 강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뒤를 잇는 것은 회전이었다. 맹렬한 기세로 회전하는 화살표.
“..아.”
이윽고 화살표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고개를 들어보면, 괴물들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 * *
눈앞이 까맣다. 여기는 대체 어디지?
허리춤을 뒤져봐도 발두르의 감촉이 느껴지지 않는다.
혹시 떨어트린 건가?
‘..여긴 현실이 아니군. 아무래도 꿈속의 세계에 갇힌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갑작스레 나타난 릴리스와 싸웠었지.
그러면 여기는 릴리스의 꿈속인 건가?
“어스름.”
나는 곧바로 황혼검을 펼쳤다. 심검이 있는 만큼 발두르의 존재 여부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었다.
허공을 스치는 불꽃. 순식간이었지만 밝아진 세계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오래 가지는 못했다. 다시 찾아드는 어둠.
그래도 이곳이 어디인지를 깨닫기엔 충분했다.
“..여기는.”
하기야 어떻게 잊겠는가. 꿈에서도 잊지 못할 이 장소를.
“..후.”
눈을 감으면 선연히 떠오르는 방의 구조.
나는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아마 지금의 내 보폭으로는 다섯 걸음 정도일 거다.
단단한 바닥의 감촉. 나는 한숨과 함께 걸음을 멈췄다.
“..벨제고트.”
손을 뻗으면 익숙한 요람의 감촉이 느껴진다.
아마 지금도 비어 있을 아들의 요람.
나는 말없이 요람을 흔들었다.
“..이게 네가 배신한 이유냐? 릴리스.”
분명 텅 빈 요람일 텐데도 그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 * *
괴물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진득한 살기.
라나의 뺨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사실, 이쯤 되면 시스템의 이상이 문제가 아니었다.
‘어떻게 하지..?’
정체불명의 괴물들이 가진 힘은 라나의 상상을 넘어서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그랜드 마스터 정도는 될 테지.
‘아르카나를 쓸 틈이 없어..!’
물론, 상대의 힘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아르카나만 쓸 수 있다면 라나의 승리이긴 하다.
그러나 정작 검을 휘두를 틈이 없다면 제아무리 아르카나라 한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아마 라나가 수상한 낌새를 보이는 즉시 괴물들의 공격이 이어질 게 뻔한데.
“..라나, 이제 어쩌지?”
엘레나의 질문에 라나가 손을 들어 그녀를 제지했다. 저들을 자극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괜히 나섰다간 순식간에..
“으아악! 도, 도망쳐!”
그 순간, 학생 중 하나가 비명을 지르며 내달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괴물들의 살기를 버티지 못하고 공황에 빠진 것 같았다.
“멈춰!”
“너 같으면 멈추겠냐!”
라나가 그들을 막아보려 했을 땐 이미 모든 것이 늦어있었다. 공포는 전염되고야 마는 까닭이다.
들불처럼 번져 나간 공포. 하나가 도망치기 시작하니 다른 학생들도 그 뒤를 쫓았다.
제자리에 남은 것은 오직 라나와 엘레나뿐이었다.
“머리 숙여!”
라나가 엘레나의 몸을 끌어당긴 것은 그야말로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그와 동시에 머리 위를 스치는 거대한 무언가.
라나는 엘레나가 뒤돌아보지 않도록 그녀를 억눌렀다.
그 직후 울리는 파육음. 뒤이어 끔찍한 정적이 이어진다.
‘침착하자.’
요동치는 심장과 거친 호흡.
라나는 냉정함을 되찾으려 애썼다. 나이에 걸맞지 않은 성숙함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마음가짐만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견디기 힘든 막막함이 라나의 눈 앞을 가린다.
“..라나?”
“걱정 마. 내가 어떻게든..”
“그게 아니라. 저기에 누가 있어.”
그런데 그 순간, 엘레나의 말에 따라 고개를 돌려보면 반쯤 무너진 건물의 잔해 사이로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설마 다른 학생들인가? 그게 아니면 교수?
‘저건..’
뭐든 간에 머뭇거리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자세를 잡는 라나.
그런데 어째 상황이 묘하게 흘러간다.
‘..사이가 나쁜 건가?’
괴물들이 라나를 방치한 채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라나와 엘레나 정도는 이미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솔직히 조금 자존심이 상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이만큼 좋은 일도 없었다.
“달려!”
라나가 엘레나를 데리고 달리기 시작했다.
머리 위로 스치는 발톱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격돌한다.
흩날리는 머리카락. 충돌의 여파가 두 사람을 덮쳐든다.
어쩌면 저 여파만으로도 목숨을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상황.
‘아르카나를 사용할까? 아니, 그냥 달리자!’
반사적으로 뽑아내려던 검을 도로 집어넣는다.
어설프게 자극했다간 오히려 위험해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녀 자신이라면 모를까 엘레나라면 확실하게 목숨을 잃어버릴 거다.
라나는 엘레나를 끌어안은 채 새벽의 걸음을 펼쳤다.
“크르?”
라나를 놓치고 당황하는 괴물.
그런 괴물에게로 또 다른 괴물이 덮쳐든다.
“라, 라나? 괜찮아?”
“..견딜 만해.”
라나의 입술을 타고 피가 흘러내렸다.
무리한 움직임으로 인해 내상을 입고 만 것이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을 데리고 새벽을 쓰는 건 힘들 것 같은데.’
이번에는 어떻게 위기를 넘겼지만 다음은 힘들 거다.
지금만 해도 당장 쓰러질 것 같은 것을 억지로 참아내고 있는 판국이 아닌가.
심지어 라나에게는 데이브와는 다르게 재생의 권능조차 없는 상황이다.
“..어쩔 수 없지.”
결국 라나가 검을 뽑아 든다.
이렇게 된 이상, 다소의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아르카나를 써볼 작정이었다.
“크르르..”
그런데 그런 행동이 저들을 자극하기라도 한 것일까.
괴물 중 몇몇이 라나의 검에 이끌려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와 동시에 순식간에 쇄도하는 몸.
라나의 눈으로는 감히 쫓아갈 수조차 없을 정도로 빠른 움직임이 이어진다.
터엉!
라나가 공격을 막아낸 것은 그야말로 천운이었다.
속절없이 밀려나기 시작하는 몸. 고작 한 번의 공격을 막아냈을 뿐이건만 관절이 삐걱이는 기분이다.
“리리컬 블래스트!”
라나의 검에서 푸른 광선이 뿜어져 나왔다.
세계를 가로지르는 섬광. 검의 궤적을 따라 쏟아져 내리는 막대한 힘.
제대로 들어가기만 한다면 괴물이 아니라 마왕이라 한들 견뎌낼 도리가 없을 터다.
“크르라아!”
그러나 괴물들은 노련했다.
언제 싸웠냐는 듯 힘을 합치는 여섯 괴물.
사방에서 휘둘러진 발톱들이 아르카나의 방향을 비튼다.
“..이런.”
기껏 쏘아 낸 아르카나가 맥없이 허공을 가른다.
좌우로 산개했던 괴물들이 순식간에 열을 맞춘다.
이어지는 공격의 파도.
“엘레나!”
라나가 엘레나의 앞을 막아선다. 물론 뾰족한 방법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그저 이대로 엘레나를 죽게 둘 수는 없다고 생각했을 뿐.
라나는 눈앞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간절한 마음.
‘어쩌지?’
그러나 마음과는 달리 움직임이 느리다. 느릿한 검속과 삐걱이는 관절.
아르카나의 힘을 다시 사용하기엔 시간이 부족하다.
“크라아!”
반면, 괴물들의 움직임은 쾌속하기 이를 데 없었다.
두 사람을 향해 덮쳐드는 발톱들.
“케엑!”
그런데 왜 괴물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는 걸까.
불현듯 머리 위에서 떨어져 내린 바위가 괴물들을 덮치고 있었다.
라나는 아연한 얼굴로 그 모든 광경을 바라 보았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올라와라. 라나 클락.”
의아해하는 순간, 라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소리를 따라 건물의 위를 바라본다. 익숙한 얼굴의 남자가 그녀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티타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