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s not a hero, he's a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169)
169화 – 화염의 용과 검은 태양.
무수한 목소리가 낯선 이름을 부르짖는다. 굉굉한 울림이다.
“부디..”
산발적으로 울리는 외침 사이로 솔리아와 바알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출 것만 같은 절실함이다.
‘..저건 나에게 하는 말이 아니야.’
그러나 착각해선 안 된다.
이것은 과거의 목소리. 현재의 나에게는 들릴 리 없는 목소리니까.
그래, 이 모든 것은 단순한 환청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혹시나 했는데 정말 여기에 있었구나? 신룡 그 녀석. 진짜 멀리도 끌고 왔다.”
그런 환청을 지워준 것은 또 다른 목소리였다.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어째선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는 벨.
“벨..아니, 지금은 아리벨인가?”
“그래, 힘이 조금 돌아왔거든.”
“힘이 돌아왔다고? 어째서?”
“..내가 치러야 할 대가가 줄었으니까. 너도 알고 있잖아? 내가 치른 기적은 어디까지나 마왕 벨제뷔트를 위한 거였다는 걸.”
그 말은 내가 벨제뷔트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건가?
짐작은 했지만 막상 직접 듣게 되니 복잡한 기분이다.
왜 아리벨까지 복잡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왜 그런 표정이야?”
“내가 뭐?”
“되게 얼떨떨해 보이는데?”
“..솔직히 조금 그래. 이런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거든. 사실..포기하고 있었지.”
“앞뒤 다 잘라먹고 말하기야? 뭘 포기한 건지는 알려줘야지?”
“말할 수 없어. 신룡도 너에게 모든 걸 말하지는 못했잖아? 무엇보다..너는 이미 내가 뭘 말하려는 건지 알고 있잖아.”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나는 그저 확신을 얻고 싶었던 것뿐이니까.
“날 데리러 온 거야?”
“그래, 보아하니 이번에도 네 힘으로는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았거든. 네가 너무 빠르게 강해진 게 문제가 된 거야. 아마 돌아가더라도 오래 버티지는 못하겠지. 길어봤자 몇 개월 정도일까?”
“상관없어. 어차피 곧 끝날 테니까.”
“넌 정말 그걸로 된 거야?”
“그러는 너야말로 뭘 모르고 있는 거 같은데?”
“모르다니?”
“난 원래 해피 엔딩을 좋아하거든.”
내 대답에 아리벨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뭐든 간에 이제 여기서 나가야지. 라나가 기다리겠어.”
“..그것 말인데.”
“왜 그런 얼굴이야? 설마 라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야?”
“..라나는 무사해. 단지..”
말끝을 흐리는 아리벨의 모습에 나는 기묘한 불안감을 느꼈다.
“..설명해.”
“진정하고 들어. 니콜라스와 아르카나에 문제가 생겼어.”
상정했던 최악의 상황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당황하지 않으려 부단히 애를 써야 했다.
“문제가 생겼다니? 무슨 문제가 생겼다는 거야?”
“우선..니콜라스가 죽었어.”
그러나 평정심은 오래가지 못했다.
* * *
데이브는 숲 한복판에서 눈을 떴다.
이미 절반 정도가 무너져 내린 숲속에는 그의 숙적들이 서 있었다.
경계심 가득한 얼굴로 그를 노려보는 아담과 이브.
그리고 쓰러져 있는 파라켈수스와, 그 위를 덮듯이 무릎 꿇고 있는 손휘.
“데이브..클락!”
손휘가 으르렁거리듯 데이브를 부르짖는다.
그런데 그 모습이 어째 기괴하다.
아마도 니콜라스가 벌인 최후의 마법이 원인인 거겠지.
고열에 일그러지고 뒤틀려 버린 몸.
한쪽 눈을 잃은 채 남은 눈 하나로 죽일 듯 데이브를 쏘아보는 얼굴.
“후..”
데이브가 심호흡하며 감각을 확장했다.
찾아 헤매는 것은 니콜라스의 기척이었다.
“..진짜였구나. 진짜 죽은 거였어.”
그러나 드러나는 것은 부정할 여지조차 남지 않은 진실이었다.
데이브의 손안에서 떠도는 사념이 그에게 작별을 전하고 있었다.
눈 돌릴 수 없는 현실이 데이브의 마음을 죄어든다.
“너.”
이어지는 것은 분노다. 새빨간 눈동자가 손휘를, 그 품속의 파라켈수스를 바라본다.
마주하는 것은 당황으로 얼룩진 손휘의 눈이다.
“너..아버지께 무슨 짓을 한 거냐. 어떻게 거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거지?”
“..아버지라.”
고저 없는 목소리로 읊조리는 데이브.
그와 동시에 쥐어졌던 손이 펼쳐진다.
그대로 흘러가는 니콜라스의 사념. 데이브는 그런 사념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엘리아에게 가. 하고 싶은 말이 있잖아.”
나누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더 이상 쥐고 있을 수는 없었다.
물론 작별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건 슬픈 일이었지만..어쩔 수 없는 일이다.
비록 희미해지고는 있다지만 그는 아직 마왕에 가까운 존재였고.
그의 존재가 용사의 사념에게 좋은 영향을 주지는 않을 테니까.
무엇보다도, 그는 언젠가 떠나야 할 사람이었다.
되도록이면 남아있을 사람에게 기회를 양보하는 것이 좋겠지.
“후우..”
애초에 그가 이야기하고 싶은 상대는 따로 있기도 했다.
사라지지 않는 분노. 매듭지어지지 못한 감정과 들끓어 오르는 피.
이윽고 떠오르는 것은 붉은 눈동자다.
타오르는 태양과도 같은 눈.
숲이 머금고 있던 모든 물기를 순식간에 증발시키고 있는 눈동자.
그것을 본 손휘의 눈이 떨리기 시작했다.
뻣뻣했던 적대감이 순식간에 사그라든다.
남은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를 목도한 것에 대한 공포다.
작열하는 태양. 그래, 태양이다.
그는 지금 태양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미친..”
“뭘 그리 놀라는 거지?”
데이브가 앞으로 나아간다. 새카맣게 타들어 간 숲이 고개를 숙인다.
말라비틀어진 대기와 녹아내리는 지면.
부글거리며 끓어오르는 땅이 손휘의 몸을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아, 아버지!”
손휘는 그대로 파라켈수스를 업고 달리기 시작했다.
싸운다는 선택지는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가진 권능으로 대적할 상대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저 힘 자체가 이질적이기도 했다.
“카이란! 길을 열어라!”
“아, 알겠습니..헉!”
손휘의 명령에 따라 뒤돌아선 카이란.
그런데 어째서일까. 아담과 이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아니, 그것만이 아니라..
“제, 젠장. 아르카나가..!”
저 멀리 아담과 이브가 아르카나를 가지고 도망치는 것이 보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아르카나를 가지고 가는 것은 이브뿐이었고, 아담은 그저 도망치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 와서 겁이라도 먹은 걸까?
뭐든 간에 이래서야 승산이 없다. 이제부터라도 도망쳐야..
“머리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는군. 하지만 도망칠 생각은 하지 마라.”
“커헉..!”
그러나 카이란이 배신할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기라도 했던 것일까?
손휘의 손이 카이란의 심장을 관통한다.
그 안에 심어내는 것은 한때 사이클롭스를 조종했던 장치를 보다 진보시킨 장치였다.
마수는 물론이고, 설령 인간이라 하더라도 어렵지 않게 조종해 낼 수 있는 장치.
“크아아아아악!”
카이란의 몸이 심상치 않은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흔들리는 지면. 그와 동시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카이란의 역작 아틀라스다.
순식간에 변화를 마치며 일어서는 거대한 로봇.
카이란은 그런 로봇의 핵이 되어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준비는 끝난 거냐?”
그런데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데이브는 그들의 준비가 끝나기만을 마냥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그들이 무슨 짓을 하건 간에 소용없다는 듯한 태도다.
그와 동시에 모습을 드러내는 신검 발두르.
“그럼 내 차례군.”
흘러내리는 피눈물이 맹렬한 열기에 불타 증발한다.
춤추는 불꽃과 밀려 나가는 대기의 파도.
이윽고 데이브의 검이 환영처럼 흩날렸다.
* * *
엘리아의 부름이 공허하게 번져 나간다.
귓가에 닿는 것은 익숙한 목소리다.
어쩌면 환청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목소리.
너무도 그립고 보고 싶었던, 그러나 이 순간만큼은 차라리 환청이길 바라고 싶은 목소리.
“..끝까지 이러기야?”
니콜라스의 목소리가 전한 것은 이별이나 사죄가 아니었다.
그저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그렇기에 더더욱 환청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던 목소리.
“가지 마. 니콜라스.”
니콜라스는 그 말을 끝으로 사라져 버렸다.
신기하게도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어쩌면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스스로도 알지 못할 복잡한 감정.
엘리아는 빛 한 줄기 비치지 않는 독방 속에서 숨을 죽인 채 몸을 떨었다.
깜빡임 하나 없는 눈동자가 어둠 속을 노려본다.
말로는 전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 속에 응어리진 채 쌓여가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터져나갈 것 같지만, 끝내 터지지 않는 불길.
적막함이 감도는 가운데, 혈관 속을 흐르는 드라칸의 피만이 거친 맥박을 울려대고 있었다.
‘내가 뭘 할 수 있지?’
치밀어 오르는 무력감 속에서 엘리아는 생각했다.
지금까지도 계속해 온 일. 그러나 방법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바람의 결정은 빼앗겨 버렸고, 오러는 봉인되어 버렸다.
심지어 믿고 있던 드라키아조차 진작에 끌려가 버린 지 오래다.
그래, 지금의 그녀는 무력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아니, 그래야만 했었다.
“이 순간만큼은..감사해야겠네. 내 안에 흐르는 이 피를..”
엘프의 마을에서 나고 자란 그녀에게 있어 드라칸의 피는 낙인과도 같았다.
엘프들에게 있어 순혈이 아니라는 말은 더럽다는 말과 일맥상통해 있었고, 그녀는 그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한 채 200년의 시간을 견뎌야만 했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거다. 그녀가 니콜라스를 사랑했던 것은.
종족의 구분을 떠나 그녀를 유일하게 바로 보아주었던 그를 사랑한 것은.
화르륵!
격해지는 감정과 함께 불길이 치솟는다.
분명 드라키아와 계약한 이후로는 이런 적이 없었을 거다.
그녀는 화염의 정령사가 되었고, 고작해야 반쪽짜리 용의 심장을 다뤄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아버지는 지금 없어..”
그러나 지금 이곳에는 드라키아가 없었다.
줄곧 그녀의 안의 용을 억누르고 있던 족쇄가 풀려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불꽃은 그 누구도 막지 못해.”
참 아이러니한 일이 아닌가. 어릴 적에는 저주 같다고만 생각했던 힘.
그런데 그 힘이 지금에 와서는 그녀를 구원하고 있다니..
일렁이는 불꽃. 엘리아의 입에서부터 휘몰아치는 불꽃이 터져 나온다.
격해지는 감정의 격류를 이겨내지 못한 것이다.
용이라는 짐승은 결국, 길들일 수 없는 종족인 까닭이다.
“크으아아아아악!”
그러나 그 불꽃을 통제하지 못하는 건 엘리아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결과는 파멸이었다. 쏟아지는 불꽃이 그녀의 전신을 불태우기 시작한 것이다.
몸 위로 아로새겨지는 흉터.
화염의 낙인이 그녀의 몸을 가로지른다.
끔찍한 냄새와 비명이 감옥 안을 가득 메워간다.
뚝..뚝..
다행히 불타고 있는 것은 몸만이 아니었다.
그녀를 묶고 있던 강철의 사슬.
점차 흐물거리기 시작하는 사슬이 끝내 완전히 녹아내렸다.
“..죽여버리겠어.”
이윽고 구속에서 완전히 풀려난 엘리아가 몸을 일으켰다.
작열하는 화염으로 인해 더 이상의 어둠은 존재하지 않는다.
뚜벅뚜벅 걸어가는 엘리아. 열기에 일그러진 창살이 휘어진다.
“파라켈수스..”
창살 밖으로 나온 그녀의 모습에서는 더 이상 예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전신을 파먹듯이 생겨난 화상의 흉터.
그 사이로 번쩍이는 황금빛의 눈동자.
용족의 눈을 빛내며 엘리아는 걸었다.
가장 먼저 찾아야 할 것은 무기였다.
그녀 안에서 타오르고 있는 이 열망과 분노를 쏟아내 줄 무기.
마음껏 휘둘러도 부러지지 않을, 화살이 없어도 쓸 수 있을 무기.
“찾았다.”
다행히 그녀의 감각은 어렵지 않게 무기를 찾아냈다.
익숙한 형상이었다.
본래라면 이 자리에서 탄생할 마법소녀를 위해 준비된 완드.
겉모습이 쓸데없이 화려하긴 했지만 엘리아는 개의치 않았다.
콰직!
무엇보다 그 완드는 분노로 인해 오러의 봉인이 부서진 엘리아의 힘에도 충분히 견딜 만큼 단단하기도 했다.
엘리아가 완드를 휘둘렀다.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는 벽.
“파라켈수스!”
엘리아가 태양을 향해 포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