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s not a hero, he's a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179)
179화 – 진실(1)
마왕성의 가장 깊은 곳으로 불청객들이 찾아든다.
하나같이 이 장소와는 어울리지 않는 면면들.
허나 그 사이에 단탈리안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아무래도 마족들이 받을 충격을 염려해 모습을 숨긴 것 같다.
“왜 그리 가만히 서 있는 거야? 가자.”
“그, 그래..”
그렇기에 가장 선두에 선 것은 데이브 클락이었다.
적진임에도 불구하고 거침없이 나아가는 그의 모습.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 있던 마족들이 그런 데이브를 따라 들어섰다.
마족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그들을 따라 움직였다.
누군가는 그 모습에 두려움을 느꼈고, 누군가는 적대감을, 누군가는 까닭 모를 친근함을 느끼기도 했다.
“..이래도 되는 거 맞아? 한꺼번에 살해당하는 건 아니겠지?”
“쉿. 우선 걷자고.”
잔뜩 몸을 웅크린 그들.
당장에라도 속을 게워 낼 것만 같은 압박감이 엄습해 온다.
하지만 그래도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용기가 있어서라기보단 혼자 뒤처진 채 마족들 틈새에 남는 것이 두려워서다.
“오랜만이군. 그동안 잘 지냈나. 벨제뷔트?”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가장 선두에 선 것이 데이브라는 점이었다.
조금 전부터 벨제뷔트가 데이브를 노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의 곁에는 클라리스 아르나드가 서 있다.
“..우리가 언제부터 안부 인사나 할 사이였지?”
“그랬지. 그럼 전에 하던 걸 마저 해볼까?”
“설마 내 분신을 이긴 정도로 자만하는 거냐?”
“그거야 두고 볼 일이지.”
그런데 어째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도대체 벨제뷔트와 대화하겠다던 놈은 어디로 가버린 걸까.
올가의 얼굴이 분노로 새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적진의 한복판에서 선전포고를 외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열불이 터질 지경이다.
‘저 미친놈이..!’
하지만 데이브라고 해서 아무런 생각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는 그 나름대로 온건하게 대처하려 노력하는 중이었다는 거다.
하기야, 애초에 지금 두 사람의 관계를 생각해 보라.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로에게 검을 겨누던 사이가 아니던가.
심지어 벨제뷔트의 경우엔 극도의 인간 불신을 겪고 있기까지 하다.
아마도 데이브의 실력이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낮았다면, 이 자리에 클라리스가 없었다면.
벨제뷔트는 대화의 여지를 두기는커녕 그의 목을 베어버렸을 거다.
데이브가 괜히 지금까지 마왕성에 찾아오지 않은 게 아니라는 뜻이다.
“마왕님!”
그러나 언제까지고 이렇게 대립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데이브는 기왕 이렇게 된 거, 이 자리에서 서로 간에 존재하는 불신을 깨부수기로 작정했다.
물론 그런 생각을 남들이 알 리는 만무했다. 마족들이 데이브의 앞을 막아선다.
“오지 마라.”
그러나 벨제뷔트는 그들의 도움을 거절했다.
애초에 그들의 힘으로 도울만한 수준의 싸움이 아니었다.
콰앙!
순식간에 교차하는 두 개의 검.
붉은 눈동자가 서로를 마주한다.
보는 것만으로도 영혼이 녹아내릴 듯한 화염과 질척이는 늪을 연상시키는 마기다.
그런데 한편, 데이브의 검에서는 이전과는 다르게 마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너..어떻게 내 검을 알고 있는 거지?”
어째서일까. 기묘하게도 그런 두 사람의 검은 무척이나 닮은 꼴을 하고 있었다.
“네 검이라고? 틀렸어.”
미소 짓는 데이브의 검은 지독히도 패도적이었다.
여명검도 황혼검도 아닌 마왕 벨제뷔트로서의 검.
본래라면 똑같이 따라 하기는커녕 시도조차 하지 못했어야 할 마왕의 세월검이다.
“그래봤자 잘 만든 가짜일 뿐이지.”
그런데 왜 데이브의 검에서 익숙함이 느껴지는 것일까.
그것을 본 벨제뷔트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존재하지도 않는 심장이 꿈틀거리는 듯한 기묘한 감각.
벨제뷔트는 이 순간, 스스로가 눈앞의 남자와 공명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검술이 같기 때문일까? 아니, 그렇지 않다.
“너..”
공명하고 있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영혼이다.
전혀 다른 삶을 살았으되, 그럼에도 여전히 찬란한 왕의 영혼.
그 순간 벨제뷔트의 머릿속으로 한 가지 의문이 스친다.
이어지는 것은 부정할 길이 없는 진실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벨제뷔트 본인의 눈으로 확인해 버린 진실.
“..설명해라.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그래, 그래야지. 하지만 아직 이야기를 이어가기엔 사람이 부족하군.”
“..부족하다니?이제는 숫자까지 맞춰줘야 하는 거냐?”
“들어야 할 사람들이 더 있다는 거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했던 말을 또 하는 걸 싫어하지.”
벨제뷔트의 대답에 데이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니 다행이군.”
“..누굴 원하지?”
“릴리스와 바알.”
흔들리던 시선이 멎는다.
그래, 모른다면 그저 확인하면 될 일이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겠지.
“두 사람을 불러와라.”
그렇게 왕의 명령이 떨어졌다.
* * *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바알은 쉽사리 진정되지 않는 마음을 애써 가라앉혔다.
허나 그럼에도 여전히 흔들리는 눈빛.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연속하고 있었다.
사실, 간수들이 그를 데리러 왔을 때만 해도 그는 여유로움을 잃지 않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그때만 해도 자신의 계획이 무사히 이행된 것 같다며 웃음을 터트릴 정도였다.
‘왜 저들이 같이 있는 거지? 하프 데몬들은 왜 여기에 있는 거고?’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이 자리에 도착한 이후의 일이었다.
벨제뷔트. 데이브 클락. 클라리스 아르나드. 마족과 하프 데몬.
절대 함께 있을 수 없는 존재들이 한 곳에 모여 있다는 사실이 그를 혼란스럽게 한 것이다.
“리, 릴리스 님.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혹시 뭔가를 알고 계시는 겁니까?”
“앞이나 봐. 어차피 곧 모든 게 끝날 테니까.”
허나 그런 바알과는 달리 릴리스는 뭔가를 짐작하고 있는 듯한 기색이다.
당연하게도 별 의미가 있는 발견은 아니었다.
그녀는 어딘지 모르게 서늘한 눈빛으로 정면을 응시할 뿐 바알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기묘한 살의가 느껴지는 순간이다.
“..네 말대로 모두가 모였다. 이제 설명해 줄 텐가?”
“그래, 순서대로 설명하지.”
준비가 끝나고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데이브는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이들과 차례차례 눈을 마주했다.
마족들은 묘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했다. 어째선지 그 눈빛이 지독히도 익숙했던 까닭이다.
“그 전에 한 명을 더 소개할까? 너희에겐 익숙한 얼굴일지도 모르겠군. 페어리 벨. 아니, 여신 아리벨의 화신이다.”
“..뭐라고?”
불현듯 고개를 든 의문.
그러나 본디 의혹이라는 건 더 큰 의혹으로 부서지기 마련이었다.
마족들의 얼굴에 의혹이 스친다.
지금 저 남자가 뭐라고 한 거지?
“그리고 나는 벨제뷔트다. 아니, 벨제뷔트였던 남자라고 해야 할까.”
그러나 놀라기엔 아직 이르다.
지금껏 데이브가 겪어온 사건들은 겨우 이 정도가 아니었으니까.
“나는 지금으로부터 4년 후의 미래에서 왔다. 아니, 이제는 3년인가?”
“..상황을 설명한다고 하지 않았나? 왜 네 이야기를 들을수록 혼란스러워지는 것 같지?”
“우선은 들어봐라. 질문은 그 이후에 받을 테니.”
벨제뷔트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데이브는 설명을 이어 나갔다.
지금은 오지 않은 미래. 사라져 버린 시간선.
마왕 벨제뷔트의 죽음과 회귀. 그리고 세계의 멸망을 막기 위한 그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들.
“비현실적인 이야기군.”
처음엔 그 누구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당연한 이야기다.
시간을 되감는 기적이라니, 아무리 여신의 힘이 있더라도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닌가.
애초에 시간 여행이 불가능하다는 건 지난 세월 무수한 마법사들에 의해 증명된 바였다.
그 과정들을 모두 생략한 채 결론만을 말하자면, 과거로 돌아가 미래를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거다.
그러니까 저 남자의 말 역시도 본래라면 터무니없는 거짓이어야 옳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그리고 처절해.”
그러나 이 순간, 데이브의 말을 거짓이라 매도하는 이는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무런 감정 없이 내뱉어진 무미건조한 이야기들.
그런데 어째서일까. 그 이야기에서부터 감히 부정하기 힘든 슬픔과 분노가 느껴지는 것은.
차라리 거짓이길 바랐던 이야기가 너무나도 현실감 있게 들려오는 까닭은.
“하지만..안타깝게도 증거가 없군. 심증이야 있다지만 그것만으로는 너를..”
물론 벨제뷔트 개인의 입장과는 별개로, 마왕의 결단에는 증거가 필요했다.
단순히 믿을만하다는 생각만으로는 전쟁을 일으킬 수 없다는 거다.
“그자의 말은 사실이에요.”
“리, 릴리스 님?”
그러나 이 순간, 그런 데이브의 말에 신빙성을 더하는 사람이 있었다.
불현듯 이어진 릴리스의 대답. 그 모습에 바알의 눈빛이 흔들린다.
“지금 제정신이십니까? 그 발언은 마족을 배신했다는 것이나 다름없는..”
“절 반역자라 불러도 상관없어요. 어차피 제 목적은 처음부터 하나뿐이었으니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릴리스.”
“벨제고트를 죽인 자를 찾아 벌하는 것. 제 목적은 단 한 순간도 바뀐 적이 없죠.”
벨제뷔트의 물음에 릴리스의 시선이 바알에게로 향한다.
차갑기 그지없는 눈빛이다.
“지금 절 의심하시는 겁니까?”
“의심? 아니야. 확신하고 있지. 참 신기한 일이지 않아? 평생 인간 놈들을 원망하며 살아왔는데 정작 범인은 따로 있었다는 게.”
“저는..!”
“그만.”
격해지려는 두 사람을 막아선 것은 벨제뷔트였다.
물론 그라고 해서 감정의 동요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벨제고트. 그의 하나뿐인 아들.
왕이라는 직책에 얽매여 드러내지 않았을 뿐, 그에게도 아들의 죽음은 씻을 수 없는 상처였다.
“..설명해라. 바알. 왜 그런 짓을 한 거냐.”
그럼에도 의혹을 내뱉지 않았던 건, 그만큼 바알을 믿었기 때문이다.
비록 지금에야 한풀 꺾여버린 신뢰라고는 하나, 바알은 한때 그가 누구보다도 신뢰했던 사람이었으니까.
무엇보다도 벨제뷔트의 눈에 비친 바알의 충성심은 진짜였을 터다.
“아니면 그저 내가 널 잘못 본 것뿐이더냐?”
“..그 눈을 어지간히도 신뢰하시는군요. 하기야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지만요.”
“..뭐라고?”
“오히려 그 눈을 가지고도 고작 그 정도밖에 못 본다는 사실이 안타깝군요. 고작 그게 전부입니까? 마왕 벨제뷔트.”
“..정녕 저들의 말이 사실이었단 말이냐?”
그러나 바알의 숨겨왔던 본심이 드러나는 순간, 벨제뷔트 역시 진실을 외면하진 못했다.
붉어지는 눈빛과 뽑혀 나오는 칼날. 참을 수 없는 배신감이 치밀어 오른다.
그답지 않게 감정적인 행동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 누구도 그를 탓하지 못할 테지.
아버지의 분노란 본디 그런 것이었다.
벨제뷔트는 그대로 분을 이기지 못한 채 바알을 향해 걸어갔다.
바알은 다가오는 그를 보며 눈을 감았다.
아무래도 그의 오랜 야망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 것 같다.
아쉬운 점이 없다면 그야 거짓이겠지만 공허함이 없는 것은 어째서일까.
바알은 까닭 모를 후련함 속에서 눈을 감았다.
그래, 어쩌면 처음부터 그 모든 것에 의미 따위는 없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는 이미 이 기약 없는 기다림에 지쳐버린 것이다.
“..그쯤 해라. 벨제뷔트.”
“..뭐라고?”
그런데 그 순간, 벨제뷔트를 멈춰 세우는 목소리가 있었다.
뒤돌아선 벨제뷔트가 데이브를 노려본다.
그 모습에서는 당장에라도 폭발해 버릴 듯한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설마 바알을 살려두라고 말할 작정이냐?”
“그럴 리가 있나. 하지만 그 녀석이 배신한 이유 정도는 알고 죽여야 하지 않겠어? 무엇보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해 협력받아야 할 것도 있고.”
“협력이라고? 배신자의 협력을 받아 뭘 하겠다는 거냐!”
“지금은 말해봤자 이해 못할 거야. 그러니까 그 전에 이유부터 듣는 게 어때?”
“이유야 뻔하지. 바알 이 녀석은 그저 내 자리를 탐낸 것뿐이다!”
“과연 그럴까?”
그 의미심장한 물음에 바알의 눈이 데이브를 바라본다.
묘하게 가슴이 간질거리는 것만 같은 기분이다.
그러고 보면 저 남자가 바로 벨제뷔트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 했던가?
‘그런 것치고는 눈빛이 다른데?’
바알은 무언가에 홀린 듯 그 눈을 마주했다.
마왕의 눈과는 어딘가가 다른, 어딘지 모르게 그리운 마음이 드는 눈빛을.
“벨제뷔트. 만약 바알이 너에게 마왕의 자리를 넘겨달라고 했다면, 너는 어떻게 대답할 작정이었지?”
“..지금 그게 중요한가?”
“물론 중요하지.”
“..아마 넘겨줬을 테지. 나는 이 자리에 그리 큰 미련이 없으니까.”
“그렇지?”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데이브의 대답.
그 모습에 벨제뷔트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설마 나한테 이렇게 말하고 싶은 거냐? 바알의 진짜 목적은 마왕이 되는 게 아니라고?”
“그게 이상한가?”
“이상하고말고. 애초에 바알 저 녀석이 내가 마왕의 자리에 미련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안다는 거냐?”
“아니, 바알은 이미 알고 있었을 거다. 네가 어떻게 대답할지도, 네 본심에 대해서도.”
“어떻게 그리 확신하지?”
벨제뷔트의 물음에 데이브는 말없이 앞으로 나섰다.
바알을 내려다보는 그. 바알은 자신의 눈빛이 점차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이제는 존재하지도 않는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만 같은 감각.
“왜냐면 이 녀석이 그러고 싶었다면, 언제든지 그럴 수 있었을 테니까.”
바알은 그 눈을 보는 순간 생각했다.
그 눈은 어딘가 태양을 닮아 있는 것 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