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s not a hero, he's a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19)
19화 – 아니 그거 오해입니다(3)
타닥. 탁.
라나는 장작이 타들어 가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담요를 끌어안았다.
그와 동시에 따스한 온기가 전신을 덥힌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잠을 청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냄새.’
그러나 잠을 자기엔 환경이 영 좋지 않았다.
마른 나무 대신 나무를 닮은 마수를 태우고 있어서인지 묘한 악취가 코끝을 찌르고 있기도 했고, 바닥은 딱딱하다 못해 울퉁불퉁했으니까.
가만히 누워 있는 것만으로도 몸이 저려올 지경이다.
사실 가만히 누워있기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냥 누워있자.’
그러나 라나는 개의치 않기로 했다.
사실, 그런 것을 일일이 신경 쓸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이 여유롭지도 않았으니까.
‘오러 호흡법은 또 언제 익히지?’
오늘따라 하루가 지나치게 길다.
문제는 이런 하루가 내일도 반복될 거라는 점이겠지.
당장에야 일들이 일단락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내일이 되면 마주해야만 할 것이다.
식량이라던가 생존이라던가 하는 각박한 문제들과..
‘내일은.. 아니지. 지금은 잊어버리자.’
라나는 한숨과 함께 눈을 감으려 애썼다.
분명 피곤해서 죽을 것 같은 기분인데도 좀처럼 잠이 오질 않았다.
‘..잠이 안 와.’
아무래도 긴장이 풀리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하기야 아무래 안전지대라 해도 던전은 던전 아닌가.
당장만 해도 저 멀리서부터 정체 모를 마수의 그르렁거림이 들리고 있다.
이런 곳에서 잠이 올 리가 있겠는가.
‘..그래도 슬라임 스튜가 아니었던 건 다행이었어.’
편히 마음을 먹으려 해보지만 자꾸만 불안한 생각이 든다.
심장이 묘하게 두근거리고 머릿속은 그냥 새하얗다.
‘괜찮을 거야..’
라나는 그래도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애썼다.
그래, 생각해 보면 그 지옥 같았던 연구소보다는 훨씬 나은 환경이 아닌가.
오늘 일정이 힘들었던 것은 맞지만 따지고 보면 최악은 아니었다는 거다.
미리 챙겨두었던 육포 조각이 있어 수프 비슷한 것을 만들어 먹을 수 있었던 것도 다행이라면 다행이었고.
물론, 이제는 그마저도 없어서 내일이 되면 정말로 슬라임을 끓여 먹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내일은 여기서 나갈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서..’
마음속으로 그리운 고향의 풍경을 그려본다.
쌀쌀맞지만 나름 정이 든 부모와 이웃들의 모습.
차마 버리지 못한 희망이 그려진다.
아마 아직도 자기가 평범한 소녀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한 탓이겠지.
라나는 지금도 이 모든 것이 한순간의 악몽에 불과하다고, 곧 본래의 일상을 찾을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분수에 맞지 않는 생각.
그러나 라나의 입장에서 보면 그게 당연했다.
그녀가 집을 떠나있던 시간은 고작 2개월에 불과했고, 그녀는 아직 열 살짜리 꼬마에 불과했으니까.
희망을 버리고 살아가기엔 라나는 너무나도 어리고 무지하다는 거다.
하기야 자기를 연구소로 보낸 것이 제 부모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있을 정도니 오죽하겠냐마는.
“슬슬 알려 주지 그래. 벨.”
그 순간, 라나의 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와 동시에 의식의 너머에서 가물거리고 있었던 졸음이 완전히 떠나갔다.
허나 그 사실에 짜증이 나거나 하지는 않았다.
솔직히 그녀도 반쯤은 포기하고 있었으니까.
라나는 순순히 수면을 포기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뭘 말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줄곧 내 말에 귀를 닫고 있었던 건 너 아니었어?”
“정작 중요한 이야기는 하지 않고 쓸데없는 이야기나 하고 있으니까 그러지.”
그런데 저 두 사람. 또 싸우려는 모양이다.
라나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웅크렸다.
그녀가 아직 집에 있었을 적, 그녀의 부모가 싸울 때마다 무심코 했던 행동이었다.
“쓸데없는 말이라니? 세상에 중요하지 않은 말은 없어. 너는 조금 더 내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해.”
“중요하지 않은 약속도 없지. 잊었나? 나는 지금 마법소녀를 지켜야 하는 상황이라는 거.”
“…”
그런데 마법소녀라니? 심각한 분위기치고는 꽤 느닷없는 단어였다.
이야기만 들어보면 마치 동화책이라도 읽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익숙한 단어야. 아르카나와 마법소녀.’
그러나 라나는 곧 저들이 말하는 마법소녀가 자신을 지칭하는 걸 깨달았다.
그도 그럴 게 연구소에서 만난 사람들이 자신을 볼 때면 매일같이 늘어놓던 이야기였으니까.
나를 보고 뭐라고 했더라? 인류의 희망?
‘..저 사람. 나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구나.’
아무리 그래도 마법소녀라니. 모래알보다 삭막한 호칭이 아닌가.
왜 멀쩡한 이름을 두고 그런 호칭으로 부르는 거지?
‘마법소녀.’
그 순간 라나는 데이브가 지금까지 제 이름을 부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그 사실에 새삼 가슴 한구석이 시려오는 것은.
참 이상한 일이었다.
저 사람이 자신을 미워한다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는데.
그녀 자신 역시도 저 사람을 거부하고 있었을 텐데..
“..뭘 물어보려는 거야?”
“왜곡점. 그 연구소에서 만난 안드로이드와 키메라에 관해 묻고 싶다. 시스템은 그것들을 두고 왜곡점이라고 말했었지. 그리고 너는 그 왜곡점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건..”
“미리 말해두지만, 모르는 일이라고는 하지 마라. 네 입에서 그 말이 나오는 순간 나는 인과율에 문제가 생기건 말건 너를 두고 떠날 거니까.”
분위기가 묘하다. 라나가 이해하기엔 어려운 말들이 연달아 쏟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본능적으로 이 대화가 무척이나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벨에게나 데이브에게나.
어쩌면 라나 자신에게도.
“순순히 털어놔라. 벨. 어차피 계속 숨길 수 없는 일이라는 건 너도 알고 있을 거 아니냐.”
“휴.. 그때 말실수를 하는 게 아니었는데.”
“너는 분명 연구소 놈들이 왜곡점을 만들어 낸 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놈들에게 성검의 파편을 전해준 게 너 자신인데도 말이야.”
“그건..”
“여기서부터는 추측이다. 과거의 나는 네가 마법소녀를 만드는 것에 직접적으로 개입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마 아니겠지. 네가 흑막이라면 애초에 나를 회귀시킬 이유가 없으니까. 그러면 여기서 문제다. 너는 왜 그들에게 성검의 파편을 준 것일까.”
“…”
“너. 혹시 그 왜곡점이라는 것을 지워내기 위해 연구소에 성검의 파편을 전해준 거냐?”
저게 대체 무슨 말이지?
라나는 저 내용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애초에 용사니 성검이니 하는 말들이 왜 여기서 나오고 있단 말인가.
그리고 벨이 뭘 했다고?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다른 이유일 수도 있잖아?”
“간단한 이야기지. 시스템은 왜곡점을 쓰러트린 나에게 보상을 줬다. 그 말은 왜곡점을 지우는 것이 용사의 목적에 합치된다는 뜻이기도 하지. 그리고 그 시스템의 최고 관리자는 바로 너 자신이다. 벨.. 아니, 여신 아리벨.”
‘..지금 저 아저씨가 뭐라고 한 거지?’
라나는 이어지는 말에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키고 말았다.
‘소리가 들리면 안 돼!’
그리고 반사적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런데 지금 뭐라고 했지? 여신 아리벨이라고?
인류를 지키는 여신이 왜 요정이 되어 있단 말인가.
아니, 애초에 왜 여기에 있단 말인가.
혹시 지금 자신을 속이려고 연기하고 있는 건가?
‘아니, 생각해 보면 평소에도..’
그 순간 떠오른 것은 데이브와 벨이 평소 나누던 대화들이었다.
당사자가 눈앞에 있는데도 대놓고 내뱉어지던 세계의 비밀들..
그런데 만약 정말로 벨이 여신 아리벨이라면 데이브의 정체는 어떻게 되는 거지?
설마 정말로 마왕이라도 된단 말인가?
아니, 진짜 이걸 믿어도 되는 건가?
“그 과정에서 추측할 수 있는 건 하나다. 이 모든 일이 왜곡점을 지워내겠다는 생각에서 시작되었다는 것.”
“..그래. 이렇게 되면 숨기기도 힘들겠네. 네 말이 맞아.”
“설마 우리 마족들을 탄압했던 것도 그것 때문이었나? 우리 역시 왜곡점이었던 거냐?”
“그건 아니야. 마왕 벨제뷔트가 등장하기 전까지 존재했던 모든 용사는 사람들이 알고 있던 것처럼 인류를 위해 싸웠어. 딱히 너희를 미워한다거나 무언가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었지. 용사는 일종의 구심점이었던 거야. 틈만 나면 서로 싸우기 시작하는 인류를 집결시키고, 다른 종족들에 비해 떨어지는 무력을 채우기 위한 존재였지.”
인류의 모든 가능성.
벨은 용사를 두고 그렇게 평가하였다.
다른 종족과의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개인의 힘으로 메울 수 있는 절대적인 존재.
인류의 별이자 희망이라고.
“하지만 네가 등장하고 나서는 이야기가 달라졌어. 마왕 벨제뷔트.”
“내가 뭘 했다고 그러는 거지?”
“나도 잘은 몰라. 하지만 네가 나타남과 동시에 세상에는 왜곡점이 생겨나기 시작했어. 처음 시작은 네가 그토록 증오하는 그 사건이었지. 네가 지금도 나를 원망하게끔 만든 그 사건 말이야.”
“..설마 그것도 세상을 위한 행동이었다고 말하고 싶은 거냐?”
“그래, 맞아. 아니, 그랬다고 생각했었지. 그 연구소에서 또 다른 왜곡점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말이야.”
데이브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라나는 그가 분노를 참아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침묵이 이어진다.
어렵사리 내뱉은 말에는 미처 털어내지 못한 감정의 찌꺼기가 묻어나오고 있었다.
“애초에 왜곡점이라는 게 뭐지? 대체 뭐길래 네가 그토록 경계하고 있는 거냐.”
“굳이 분류하자면.. 지금은 너 자신도 왜곡점이라고 할 수 있어. 왜곡점은 세계를 붕괴시킬 위험을 내포한 존재를 일컫는 말이니까. 전에도 말했잖아. 내가 네 인과를 조정하는 걸 그만두거나 네가 나와 떨어지게 된다면 인과의 흐름이 망가지고 말 거라고. 왜곡점이라는 건 그런 존재를 일컫는 하나의 호칭인 거야.”
“..그 기계들이 그 정도의 힘을 가진 것 같진 않았는데?”
“무력적인 면만을 따져보면 그렇겠지. 하지만 너도 봤잖아. 너는 그게 이 시대에 어울리는 기술이라고 생각해?”
라나는 그 말을 듣고 떠올렸다.
그녀가 처음으로 연구소에 발을 들였을 무렵의 이야기를.
‘그땐 내가 죽은 줄로만 알았었는데..’
손을 대지 않아도 열리는 문부터 시작해 움직이는 통로와 계단까지.
연구소 내의 모든 물건과 장소들은 라나가 지금껏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기술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곳을 처음 마주한 라나가 자신도 모르게 천국이나 지옥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정도로.
“그건 이 세계에 있어선 안 될 기술들이야. 탄생할 가능성은커녕 우연을 빌려서라도 발명될 가능성은 없었지.”
“그렇게 만들기 어려운 물건인가?”
“구조가 간단한 물건들도 있기는 해. 하지만 나는 의도적으로 그것들이 발명되는 걸 저지하고 있었어. 가능성 자체를 지워버린 거지.”
“..왜 그렇게까지 한 거지?”
“그쪽 방면의 기술이 지나치게 발전한 나머지 스스로 멸망에 이르고 만 세계를, 나는 알고 있었으니까.”
“그건 여기가 아니라 다른 세계의 이야기인가?”
“그건 알려줄 수 없어. 하지만 그 기계들이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건 알고 있지. 이 세계에서는 더 이상 그런 걸 만드는 건 불가능하니까. 그걸 어떻게 가져온 건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기가 찬다는 듯한 웃음이 들려온다.
혀를 차는 소리. 그리고 한숨을 내쉬는 소리다.
“가관이군. 이유야 어떻건 간에 결국 너와 인간 놈들이 이 세계를 멸망에 빠트리고 있다는 거 아니냐. 같은 인간에게 인체 실험까지 해가면서 얻은 결론이 고작 그거냐?”
‘인체 실험이라고?’
그제야 라나는 왜 이토록 이 말이 마음에 걸렸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바람과는 다르게, 어쩌면 집으로 돌아가는 게 힘들지도 모르겠다는 사실 역시도.
“그건..”
“쉿. 누군가 오고 있다. 마법소녀. 듣고 있는 거 아니까 슬슬 일어나라.”
그런데 대체 언제부터 눈치채고 있던 거지?
라나는 머쓱한 표정으로 주섬주섬 몸을 일으켰다.
그런 그녀를 보는 벨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든다.
“라, 라나? 설마 전부 듣고 있었던.. 너! 벨제뷔트! 그걸 알면서 가만히 놔둔 거야?”
“그래,”
머리끝까지 열이 뻗친 벨.
그러나 데이브의 태도는 여전히 태연하기만 했다.
“오히려 그렇게 중요한 일을 당사자가 모른다는 게 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지 않나?”
“저 애는 아직 열 살이야! 벌써 그런 사실을 알기엔 너무..”
“그럼 칠 년 후는 조금 낫나? 상황이 바뀌나?”
“그건..”
하긴, 언제까지고 비밀로 할 수는 없겠지.
그도 그럴 게 본래의 운명에서 마법소녀가 최후를 맞게 되는 것은 고작 칠 년 후의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죽음이 턱밑까지 차오른 그 순간까지도 마법소녀는 열일곱에 불과했다.
늦냐 빠르냐만을 따지고 있다가는 언제까지고 타인의 손에 휘둘리고만 있을 수밖에 없다는 거다.
그렇기에 데이브는 벙쪄버린 벨을 뒤로한 채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곧장 검을 뽑아 들고는 라나를 뒤로한 채 경계 태세에 들어갔다.
“..제가 들은 게 전부 사실인가요?”
“그래, 거지 같은 일이지?”
“…”
“혼란스러운 건 안다. 하지만 너도 알아야 할 건 알아야겠지. 하는 행동을 보니 너도 마냥 어린 것 같지는 않으니까.”
라나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그 나이 또래의 아이가 보일 반응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그녀가 연구소에서 얻은 상처가 아무는 데에는 꽤 시간이 걸릴 것 같다.
“..너는.”
“차, 찾았다!”
그리고 그 순간, 불청객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들 모두에게 있어 익숙한 얼굴이었다.
“텅 티르로군.”
“탕이야! 이름 좀 외워라!”
블랙 타이거 용병단의 후계자이자 용병대의 대장.
탕 티르와의 뜻하지 않은 재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