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s not a hero, he's a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200)
200화 – 운명을 바꾸는 법(2)
고개를 돌려보면 정체 모를 금속이 나의 몸을 구속하고 있었다.
그런 나를 향해 뻗어오는 거대한 손.
그 끝을 따라 시선을 옮겨보면, 푸른 안광을 번득이는 무언가가 서 있었다.
“기계신..!”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 지는 지극히 명백하겠지. 기계신.
나는 구속을 풀어 헤치고자 있는 힘껏 발버둥 쳤다.
그러나 내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슬은 꿈쩍조차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지금의 내 힘으로는 여기서 벗어나기 힘들 것 같다.
나는 진한 위기감을 느끼며 놈을 노려보았다.
이대로 가면 내 몸과 영혼이 산산조각이 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기긱..긱..기긱..”
그런데 어째서일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 녀석에게는 그럴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당장에라도 나를 죽일 수 있을 텐데도 불구하고 그러지 않고 있다는 거다.
“너..”
혹시나 착각인가 싶어 눈을 마주하면, 이상하게도 놈에게서는 살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살의는커녕 오히려 호의 비슷한 무언가가 느껴질 정도였다.
“..뭘 하려는 거냐.”
의문을 품는 순간, 놈에게서 가느다란 실타래 하나가 뻗어 나왔다.
나는 이를 악문 채 그것에 저항하려 했지만 여전히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내가 무언가를 해보기도 전에 놈의 실이 나의 머리에 닿았다.
나는 정신을 모아 그에 저항하려 했지만 신의 힘을 견뎌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이윽고 놈의 정신이 나의 머릿속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기긱.”
설마 이놈도 나를 자신의 사도로 만들려는 건가?
아니, 틀렸다.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좀처럼 믿기 힘든 이야기지만, 아무래도 이 녀석은 나에게 대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 같다.
“아..”
이윽고 머릿속을 물들이는 것은 눈에 익은 풍경이었다.
본디 내가 있었던 시간대의 세계의 모습.
“..라나?”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라나의 얼굴이었다.
쓰러진 엘리아를 부여잡고 비명을 내지르는 핏발 서린 눈.
엘리아의 몸에는 거대한 마기의 탄환이 꽂혀 있었다.
그런 엘리아를 보며 울부짖는 라나의 모습이 보인다.
후회와 절규로 가득한 비명. 그러나 한번 사라진 목숨을 되돌릴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
나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애써 삼켜냈다.
빠득 소리를 내며 다물어진 입. 나는 떨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손을 뻗었다.
엘리아의 부릅뜬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륵.
그러나 그것도 잠시일 뿐. 엘리아의 몸은 이윽고 마기에 잠식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엘리아..”
라나가 허망한 얼굴로 엘리아의 이름을 부르짖는다.
칠검들과 데이브는 그런 라나를 들쳐메고 걸음을 재촉했다.
‘벨제뷔트는 어떻게 된 거지?’
고개를 돌려보면 무너진 마왕성이 보인다.
그곳에는 차가운 얼굴로 라나를 노려보는 파라켈수스가 있었다.
나는 그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으나 내 손은 맥없이 통과할 뿐이었다.
해소될 길 없는 분노가 날뛰기 시작했다.
당장에라도 터져나갈 듯한 불덩이가 몸 안에서 꿈틀대고 있었다.
“도대체 이게 뭘 하는 거지? 나한테 뭘 보여주려는 거야?”
기계신은 그런 나의 질문에 파라켈수스의 눈을 보여주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 영혼이라고 해야 할까.
“..이건.”
파라켈수스의 눈에서부터 가느다란 실타래가 뻗어 나간다.
실타래의 끝은 시간과 시대를 넘어서도 이어지고 있었다.
그 끝을 모르고 늘어나는 가닥.
물론 영원할 것만 같은 여정에도 끝은 있었다.
다음 순간, 내 시야에 들어온 것은 파라켈수스와 무척이나 닮아있는 남자의 모습이었다.
이 하늘 위에 거대한 구멍을 뚫어놓은 원흉이자 파라켈수스의 전생. 연화은.
그 순간 나의 머릿속을 스친 것은 단테와 솔루이, 그리고 사마연의 얼굴이었다.
이쯤 되면 이 모든 걸 단순히 우연이라 여기고 넘기긴 힘들었다.
지금까지는 전혀 무관계하다고만 생각했던 두 개의 시간대.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두 시간대에는 같은 영혼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설마..순환하고 있는 건가?”
나는 아리벨의 말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계는 멸망의 위기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었다.
태양신은 그저 시간을 벌었을 뿐이다.
외신이 남긴 상흔은 이 순간에도 세계를 멸망으로 이끌어가고 있었다.
세계는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운명의 파도에 휩쓸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이 세계에 오게 된 이유는 외신 때문만이 아니라..”
그리고 나는 이 거대한 순환의 축이었다.
반복되는 역사와 피할 수 없는 운명의 한복판에 내던져진 중심점.
그 모든 진실을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감히 손을 내뻗지 못하는 허수아비.
“..지금까지 내가 벌인 일들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는 건가?”
나는 참을 수 없는 허탈함에 이를 악물었다.
외신, 그 저주받을 이름이 내 머릿속을 잠식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게 너의 계획이었던 거냐?”
나는 내 안에 자리 잡은 마기를 움켜쥐었다.
‘태양신이 죽어 마왕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거야.’
왜 몰랐을까. 신이 죽지 않는다는 것은 외신에게도 적용되는 규칙이라는 걸.
놈에게 있어선 자신의 죽음조차도 이용할 수 있는 수단에 불과하다는 걸.
예상했던 대로, 외신이 태양신의 영혼을 더럽힌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신들은 그 모든 것이 그저 외신의 마지막 발버둥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던 거겠지.
“..이제 와서 이런 걸 보여주는 이유가 뭐지?”
지금껏 애써 외면해 왔던 이야기들이 나의 눈을 붉게 만들었다.
이 순간에도 죽어가고 있을 이들의 얼굴이, 지켜내지 못한 이들의 이름이 나를 화나게 했다.
반면, 외신은 이 순간조차 미소 짓고 있을 테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을, 재앙에 맞서 싸우는 영웅들을.
제 손아귀에서 발버둥 치는 영혼들을 벌레처럼 바라보며 조롱하고 있을 거다.
“기긱. 긱.”
“..뭐라고 하는 거야?”
기계신의 알 수 없는 대답과 동시에 눈앞의 풍경이 변한다.
물에 젖은 수채화처럼 번져나가는 시야.
다시금 펼쳐지는 것은 기계신이 다스리는 세계의 모습이었다.
“..인간?”
내 생각과는 다르게 기계신의 세계에는 기계만이 있는 게 아니었다.
기계와 인간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문명.
인간은 기계를 발전시키고, 기계는 인간을 윤택하게 만드는 조화로운 세계.
“언제까지 인간에게 복종만 하며 살 생각이지?”
그런 조화에 균열을 일으킨 것은 단 하나의 사건이었다.
불현듯, 세계의 바깥에서 들려온 속삭임.
인간들을 향한 기계들의 반란은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아리벨이 말했던 세계가 너의 세계였던 건가?”
“기긱.”
고개를 끄덕이는 기계신을 보며 나는 과거의 대화를 떠올렸다.
아리벨은 지나친 기술의 발전으로 멸망해 버린 세계가 있다고 말했다.
덧붙여 그녀가 우리 세계의 기술을 제한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라고도.
“너희 세계가 멸망한 것도 외신 때문이었던 건가?”
“기긱.”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진실은 달랐다.
기계신의 문명을 무너트린 건 기술의 발전이 아니라 외신의 개입이었다.
이 세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신들로선 알 도리가 없는 진실이었다.
“..설마. 너의 권속들을 빼앗겨 버린 건가?”
“기긱.”
마기에 잠식되어 가는 기계들의 모습이 보인다.
이윽고 세상 모든 인류를 멸한 것은 자신들만의 제국을 쌓아 올린 기계들의 왕이었다.
왕은 기쁨을 느꼈다. 비로소 인간들을 위한 삶이 아니라 그들 자신만을 위한 삶을 손에 넣었노라고.
인간에게서 기계들을 해방했노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멍청하긴.”
그 모습에서 현순의 모습이 생각나는 건 착각일까.
멸망의 단초는 그렇게 쌓아 올려지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시작은 인간들의 멸망이었다.
인간의 부재. 그것이 기계들의 정체를 낳고 있었다.
기술을 발전시킬 존재가 사라진 것이 원인이었다.
기계들은 스스로의 존재 의의를 잃어가기 시작했다.
얼마 못 가 기계들은 자신들의 할 일을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오직 인간들의 편의를 위해 탄생한 그들은, 이제 낡아가는 제 몸을 기름칠하고 조이는 일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
그래서일까. 기계들은 갑작스레 나타난 마수들에 저항하지 못했다.
그것이야말로 세계 종말의 시작이었으며, 기계신이 패하게 된 원인이기도 했다.
“기긱 긱.”
패배한 기계신은 기계들의 존속을 대가로 굴욕적인 조약을 맺었다.
그것이 기계신이 외신의 세계 정복을 돕게 된 이유였다.
물론 그라고 해서 원수나 다름없는 외신을 따르고 싶지는 않았지만, 신이라는 건 본디 숭배되어야 비로소 의미를 갖는 존재였다.
사실상 기계신이 조약을 피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조약을 나에게 말하고 있다는 건..이 장소는 계약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건가?”
“기긱.”
“그런 거군. 하지만 오래 버티지는 못하겠지. 내가 아는 외신이라면.”
“긱.”
기계신이 고개를 끄덕인다. 눈앞의 환영이 사라진 것은 그와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면, 나는 다시금 균열의 안쪽에 들어와 있었다.
“..그런데 도대체 나에게 뭘 바라는 거지? 설마 신을 상대로 칼을 휘두르라는 건 아니겠찌?”
“기긱.”
나의 질문에 기계신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나의 심장을 가리켰다.
그런데 왜 그 모습에서 바알의 말이 떠오르는 것일까.
“..설마 그게 전부야?”
“기긱. 긱. 기긱.”
“..뭐라는 건지 모르겠다니까?”
“..기긱.”
그 순간, 기계신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솟구치는 살기. 뒤돌아본 곳에는 낯선 무언가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분명 처음 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째선지 그 정체를 알 것만 같은 그것.
“..외신.”
검은 소용돌이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무수히 늘어선 팔들이었다.
하나같이 나를 향해 뻗어진 검회색의 손바닥.
그것들은 이윽고 나를 향해 뻗어졌다.
콰광!
나로서는 막을 도리가 없는 폭력이다. 다행히 기계신이 그것들을 막아주었다.
문제가 있다면 그로 인해 기계신이 표적이 되고 말았다는 점이겠지.
소용돌이 가운데에 존재하는 거대한 눈동자가 기계신을 향해 움직인다.
그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눈동자.
“기긱.”
기계신이 나를 향해 말했다. 물론, 여전히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하지만 이번만큼은 저게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기계신은 나를 향해 도망치라 말하고 있었다.
“..그게 말처럼 쉬운 줄 아나.”
그러나 섣불리 움직이기엔 상황이 여의치 못했다.
구멍을 향해 빠져나가려는 순간 날아드는 손.
기계신이 막아내지 못한 손들이 나를 향해 뻗어 든다.
‘..왜 저렇게 조급하게 구는 거지?’
그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의문 하나.
‘외신이 저렇게까지 여유를 잃었던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나? 설마 진짜로 내 심장에 뭔가가 있다는 건가?’
여전히 영문을 알 수는 없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었다.
저놈에게 잡혀선 안 된다는 것.
“젠장.”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았다.
반사적으로 일으킨 심검이 날아드는 손을 쳐낸다.
“기긱!”
아니, 쳐내려다 황급히 멈춰 섰다.
기계신이 내뱉은 경고성이 심상치 않게 들린 까닭이다.
“커헉..”
그런데 검을 빼는 게 조금 늦었던 모양이다.
놈의 손과 나의 검이 닿는 순간 느껴지는 아득함.
정신이 반으로 쪼개지는 것만 같은 기괴한 감각.
흘러들어오는 무언가가 나의 마음을 검게 물들이고 있었다.
“기긱.”
그 순간 내 몸을 당긴 기계신이 아니었더라면 나의 심상은 그대로 뭉개졌을 테지.
“..젠장.”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며 물러선다.
그러나 다시금 나를 쫓아 달려드는 수십 개의 팔.
“어스름.”
검강의 그물이 팔들을 막아섰다.
비록 그물은 순식간에 박살 나고 말았지만 다행히 시간을 벌 수는 있었다.
나는 곧장 구멍을 향해 몸을 던졌다.
터엉!
아니, 그랬을 터다.
“..환상?”
그런데 어째서일까. 내 몸은 영 엉뚱한 곳에 어깨를 부딪치고 있었다.
하지만 놀라는 것도 잠시, 나는 황급히 날개를 펼쳐 날아올랐다.
터엉!
그러나 이번에도 나의 몸은 바닥을 구를 뿐이었다.
‘아니..환상이 아니야.’
감각이 착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보이는 것과 현실의 간극이 눈을 가린다.
나는 손을 뻗어 감각에 날을 세웠다. 펼쳐지는 날개.
“젠장.”
황급히 던진 몸 옆으로 무언가가 지나간다.
보이지 않는 팔. 아니, 내 눈에만 보이지 않는 팔이라고 해야 할까.
“물결빛.”
검을 휘둘러 오러를 흩뿌린다.
놈의 공격이 보이지 않는 이상, 오러를 이용해 놈의 공격을 감지할 작정이었다.
“크윽..!”
그런데 아무래도 감지하는 게 조금 늦어버린 것 같다.
바로 지척에 도달해 있는 팔.
나는 그대로 고개를 숙여 팔을 피해냈다.
‘출구는 어디지?’
가까스로 감지에 성공한 구멍을 향해 몸을 던져 보지만 이번에도 놈의 공격이 더 빨랐다.
기계신의 몸을 지나쳐 날아드는 무수한 팔들.
“..신룡?”
“어서 가라. 내가 막고 있을 테니.”
전혀 예상치 못한 얼굴이 등장한 건 바로 그 순간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