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s not a hero, he's a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209)
209화 – 사신장.
거대한 폭발이 평원을 가로지른다.
불어오는 바람. 희뿌연 연기가 바람에 밀려 사라진다.
드러나는 것은 지독한 참상이었다.
순식간에 튕겨 나가버린 사신장과 그들이 지켜내지 못한 소녀.
호루스족은 그렇게 눈앞에서 마지막 남은 성녀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지독히도 허망한 결말이었다.
“누구 마음대로?”
그러나 루멘은 보았다.
이 순간, 그 모든 진실이 한낱 ‘지워진 과거’가 되어 사라져 가는 것을.
콰아앙!
원인은 당연하게도, 저 남자가 휘두른 칼날이었다.
루멘은 부릅뜬 눈으로 그 모든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저 멀리서부터 거대한 폭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본래라면 솔리아와 병사들을 덮쳤을 터인 폭발이다.
그래서일까. 루멘은 좀처럼 이 상황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본디 이곳을 덮쳤을 터인 용사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활을 쏘던 다크 엘프의 모습도 사라져 버렸다.
모든 것이 원래대로 되돌아간 것이다.
“럭스. 너는 봤어?”
“아니, 나도 뭐가 뭔지 잘..”
스스로의 기억을 의심하게 되는 순간이다.
분명 죽었을 터인 솔리아는 그들의 곁에 살아 있었고, 눈앞에서 일어났을 폭발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 병사들은 조금 전의 일에 대해 조금도 기억하지 못하는 눈치가 아닌가.
“루멘 님! 동쪽에서 정체불명의 폭발이 일어났습니다!”
“..정체불명이라고?”
루멘은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만 같은 기분이 되고 말았다.
루멘이 홀린 듯 병사들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그놈들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지?”
“..네? 누굴 말씀하시는 겁니까?”
“조금 전의 호루스족 말이다!”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루멘의 다그침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은 좀처럼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사실, 그 병사만이 아니었다.
주위의 모든 병사들을 비롯해 심지어 솔리아에 이르기까지.
주위를 둘러보면, 사신장을 제외한 그 누구도 조금 전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평화로운 광경이다.
“왜 모르는 거냐!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여기에..!”
“루멘?”
“..내가 지금 왜 화를 내고 있는 거지?”
하지만 답답함도 잠시. 루멘은 뒤이어 그 자신조차 차츰 위화감을 잊어가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기억이 지워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모든 것이 사라지고, 어렴풋한 기시감만이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루멘 님! 왜 그러세요?”
“..솔리아. 너, 괜찮은 거니?”
이윽고 루멘과 사신장들은 조금 전 벌어진 일들의 대부분을 잊어버리기에 이르렀다.
아마도 단테와는 다르게 온전한 가호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겠지.
사실상, 지금 사신장들의 머릿속에는 저 남자가 솔리아를 구했다는 정보만이 남아 있게 되었다.
“너는.. 아니, 당신은 도대체 누굽니까?”
결국 혼란을 견뎌내지 못한 루멘이 남자를 향해 소리쳤다.
한때는 호루스족의 새로운 용사라고만 생각했던 그.
그와 동시에 심마에 빠졌던 사신장들을 앞세워 인간들의 나라를 습격했던 용서하지 못할 존재.
그래서일까. 루멘은 조금 전 괴물이 되어 돌아온 남자를 보며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비록 용사라는 것이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저 남자보다는 단테가 훨씬 낫다고 생각해서다.
루멘의 시선에 비치는 남자의 모습은 그야말로 괴물과도 같았다.
제아무리 호루스족의 탈을 쓰고 있다 한들, 근본적인 부분에서의 이질감은 지워지지 않았다.
아마 그를 용사로서 고른 존재가 태양신이 아니었다면, 그는 결코 눈앞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못했을 테지.
‘죽었다고 들었을 땐 차라리 다행이라 여겼는데…’
아마도 그래서였을 거다.
저 남자가 기계신의 화신과 함께 사라진 날. 사신장들이 까닭 모를 안도감에 한숨을 내쉬었던 것은.
“도대체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죠?”
“..그래도 사신장은 사신장이라는 건가? 설마 기억이 남을 줄은 몰랐는데.”
“대답해 주십쇼. 도대체 어떻게..”
남자를 향해 쏘아붙이던 루멘의 말이 멈췄다.
자신도 모르게 나온 공격적인 어조였다.
그런데 자신에게 저 남자를 탓할 자격이 있었던가?
‘아니. 아니야.’
루멘은 남자를 향한 혐오감을 애써 억눌렀다.
당연한 이야기다. 과정이야 어떻건 간에 저 남자는 솔리아를 구했으니까.
설령 기억이 희미해졌다 하더라도 루멘은 그 사실을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개인적으로 마음에 걸리는 바도 있었다.
‘..어쩌면.’
그 순간 루멘의 머릿속을 스치는 건 과거의 기억이었다.
불현듯 그들에게서 갑자기 사라져 버린 심마에 대한 기억.
당시에는 여유가 없어 그 이유를 알지 못했지만..
“..우리를 구해줬던 것도 당신이었던 겁니까?”
까닭 모를 확신이 루멘의 안에서 샘솟기 시작했다.
스스로의 치졸함에 대해 자괴감이 드는 순간이다.
그토록 경멸하고 미워했던 사람이, 사실은 그를 구한 은인이었다는 사실이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그런 건 되었으니 준비나 해. 다시 올 거다.”
하지만 남자는 그런 루멘을 무시했다.
애초에 지금은 한가하게 그런 이야기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콰앙!
아니나 다를까. 그 순간 하늘에서부터 떨어져 내리는 것은 거대한 팔이 있었다.
남자에게 있어선 이제 익숙하기까지 한 외신의 팔… 아니, 외신의 팔’들’.
그것을 본 사신장들의 얼굴이 삽시간에 사색으로 물들었다.
그랜드 마스터에 오른 그들로서도 감히 손을 뻗을 수 없는 아득한 존재가 눈앞에 있었다.
“너희는 당장 솔리아를 데리고 도망.. 아니, 안 되겠군.”
남자는 곧바로 솔리아를 대피시키려 했지만 뒤이어 외신의 팔들이 연합군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그 숫자만 해도 무려 수백에 이르는 상황.
이래서야 무사히 도망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냥 여기 가만히 있어라. 차라리 그게 낫겠군.”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솔리아의 물음에 남자는 고민했다.
이런 상황에서 연합군을 지키며 싸운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남자의 생각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아저씨..”
“걱정하지 마. 지금 방법을 생각하는 중이니까.”
“그게 아니라.. 저 팔들이..”
그러나 사태는 남자의 예상보다 긴박했다.
솔리아의 말에 고개를 들어보면, 서서히 움켜쥐어지는 팔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와 동시에 떠오르는 칠흑 같은 구체들이 그들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남자의 눈이 바쁘게 움직였다.
‘피할 곳은.. 없군.’
하지만 아무리 눈을 굴려봐도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완벽한 포위망이었다.
쿠웅!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검은 구체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실로 검은 유성우와도 같았다.
지상 위의 것들은 물론이고 반경 수십 킬로미터를 소각시키는 절대적인 권능.
콰아아앙!
한발 늦은 폭음이 지상 위를 내달린다.
이어지는 것은 정적.
연기가 가라앉은 지상 위에는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았다.
* * *
가쁜 호흡을 고르며 제자리에 눕는다.
하늘은 쓸데없이 푸르고 맑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그러나 그것을 아름답다고 하기엔 저 거대한 구멍이 시야에 밟힌다.
“..여기가 어디죠?”
솔리아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지만 나로서는 답할 길이 없었다.
지쳐 있기도 했지만 사실 나도 잘 몰랐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여긴 현국의 수도가 있던 장소 같군요. 원래라면 일주일 정도는 걸어야 도착할 수 있는 곳인데..”
다행히 나를 대신해 단테가 이곳이 어딘지를 알려주었다.
경악과 경이로움에 물든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눈을 감아도 느껴지는 단테의 시선을 애써 무시했다.
지금은 모든 것이 피곤했다.
“역시 대단하시군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단숨에 옮기시다니. 심지어 물자까지도 챙겨 오셨군요. 설마 도시 전체를 이동시키신 겁니까?”
“지금 말 걸지 마. 힘들어서 죽을 것 같으니까.”
“..그래 보이는군요.”
단테는 그제야 분위기를 읽은 듯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는 정적을 되찾을 수 없었다.
이 상황에 놀란 것은 단테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병사들과 생존자들 사이에서 일어난 웅성거림이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이래서야 회복하기는 힘들 것 같다. 아무래도 자리를 옮겨야겠다.
“역시 당신이셨군요.”
그런데 그 순간 현순과 사마연이 모습을 드러냈다.
도대체 지금 내 모습을 어떻게 알아보고 나타난 걸까.
나는 반짝이는 사마연의 눈빛을 애써 무시하며 다시 눈을 감았다.
“지금 쉬고 있으니까 말 걸지 마라.”
“제가 도와드릴게요.”
“뭘 어쩌겠다는 거지?”
“당신을 꿈속의 세계로 초대하는 거죠. 잠드신다면 조금 더 잘 쉴 수 있지 않겠어요?”
“됐으니까 저리 가. 애초에 나는 지금 몸이 지친 게 아니라고.”
단호하기 그지없는 거절에 사마연은 아쉽다는 듯 물러섰다.
‘몸과는 관련이 없지. 이건 영육의 문제니까..’
육체가 없어서일까. 지금의 내 몸은 지극히 불안정했다.
자칫하다간 이대로 윤회의 고리에 빨려 들어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평소였다면 별문제가 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지금처럼 큰 힘을 사용한 경우라면 상황이 달려졌다.
지금의 내 몸은 깨진 물잔 속의 물과도 같았다.
당장에야 어떻게든 몸을 얼어붙게 해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지만, 조금이라도 방심한다면 그 형태가 무너지고 말 거라는 거다.
“젠장.”
그런데 아무래도 외신의 노림수는 이것이었나 보다.
그 순간 모습을 드러내는 또 다른 팔.
“내 힘을 고갈시키는 게 목적이었던 건가?”
나는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딱히 원망이나 분노가 들지는 않았다.
다만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만이 있었을 뿐.
“..용사님.”
“난 용사가 아니라니까.”
“..제가 당신을 들고 도망치겠습니다.”
고개를 들어보면, 결연한 얼굴의 단테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용사 주제에 사람들을 버리겠노라 말한 것치고는 흔들림 없는 눈빛이 인상적이다.
“도망칠 거면 내가 아니라 솔리아를 데려갔어야지.”
“아뇨, 당신입니다. 당신은 저희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이니까요.”
“희망이라고?”
그런데 확실히 용사라는 것이 아무나 하는 직업은 아닌 모양이다.
설마 이런 상황에서도 희망을 찾고 있을 줄이야.
“여기서 모두가 죽으면 희망 같은 게 무슨 상관인데?”
“하지만 당신의 검이 있다면, 그 죽음은 없었던 일이 되겠죠.”
“내 검은 만능이 아니야. 전지하지도, 전능하지도 않다고. 당장 솔루이도 구해내지 못한 거 보면 모르겠어?”
단테는 내 말에 가볍게 웃어 보였다.
“처음 만났을 적의 당신이었다면, 조금 전 저희를 구해내지도 못하셨을 테죠.”
“..나에게 너무 큰 기대를 하는 것 같은데.”
“부담스러우신가요?”
“솔직히 그래.”
“다행이군요. 부담을 드리는 게 목적이었거든요.”
단테는 그렇게 말하며 내 몸을 들어 올렸다.
나는 거부하려 했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의 내게는 그럴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저희가 돕겠습니다.”
사신장들이 그런 단테의 옆에 따라붙었다.
아무래도 진짜로 나를 데리고 도망치려는 모양이다.
하지만 글쎄.. 아무래도 그게 쉽지는 않을 것 같다.
“단테.”
“이제 와서 뭐라 하시건 듣지 않겠습니다.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도망쳐라.”
“..네?”
다음 순간,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단테의 몸을 밀어냈다.
그와 동시에 날아드는 칼날.
부릅뜬 눈으로 앞을 바라보면, 사신장 럭스가 나를 향해 검을 내찌르는 것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