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s not a hero, he's a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219)
219화 – 순환과 역순환(6)
수십 수백 수천 수만.
헤아리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
나는 무너지는 세계의 한복판에 있었다.
세계는 붕괴하고 있었다.
하기야 주인 없는 세계가 이만큼 오랜 시간을 버틴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다.
‘그런데 이 세계의 주인이 누구였지?’
나는 혼잡한 머릿속을 부여잡았다.
이 세계에 너무 오래 있었던 탓인지 날이 갈수록 기억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릴리스. 사마연.”
희미해져 가는 이름을 되새기며 텅 빈 손을 휘두른다.
더 이상 시공검을 그리지 않게 된 것은 도대체 언제부터였던가.
여명과 황혼. 세월. 시공.
그 모든 구분이 덧없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종래에는 내가 정말로 검을 휘두르는 것인지조차 모호했다.
“..그럼 검은 필요 없잖아?”
문득 떠오른 생각에 검을 버리고 싸우기 시작했다.
그러고도 수백 년을 더 버텨왔던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나의 검은 외신에게 닿지 않았다.
나는 문득, 이런 행동이 정말로 의미가 있긴 한 건가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포기해야 하나?”
마음이 약해지고 있었다. 수만 년이라는 시간은 나에게도 버거운 시간이었다는 거겠지.
이래서야 외신과 싸우기도 전부터 마음이 꺾여버릴 것만 같다.
애초에 내가 왜 외신과 싸우고자 했던 건지조차 생각이 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역순환.”
그러나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명제 하나가 나를 붙들고 있었다.
나는 그 말의 의미를 가만히 곱씹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지금에 와서는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다.
“사라져라.”
나는 한숨과 함께 외신을 지워버렸다. 어차피 곧 이 세계는 무너진다.
이런 상황에서 몇 번 정도를 더 싸워본들 의미는 없겠지.
“..내가 왜 이러고 있었던 거지?”
나는 무너져 가는 세상 속 그루터기 하나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그 위에 앉아 흘러가는 모든 삶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시작은 태양신의 죽음이었다.
‘아니, 정말로 이게 시작이었나?’
그런데 어째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진다.
분명 나의 삶인데도 불구하고 좀처럼 와닿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반대로 보자.”
역순환. 어쩌면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가 남긴 그 말은 이걸 의미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세계가 되감기기 시작했다.
“..라나 클락.”
떠오르는 것은 어딘가 익숙한 이름이었다.
되살아나는 기억. 아니, 머릿속에 새겨지는 기억.
나는 스스로가 잠에서 깨어나고 있음을 느꼈다.
“폴 뷔마.. 팔레아스. 엘리아. 니콜라스..”
나는 그루터기에서 일어나 누군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의 숙적.
“..파라켈수스.”
그리고 나의 전생 벨제뷔트.
벨제뷔트의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놈의 기억이 나에게로 흘러들어온다. 교차하는 시선.
“무슨 짓이라니? 나는 그냥 네가 원하는 걸 들어주려는 거야. 그도 그럴 게 나는 인류의 여신이잖아?”
그 너머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파라켈수스를 균열의 안쪽으로 보내버리려는 아리벨의 모습이.
아마도 그녀로서는 파라켈수스를 영원히 봉인하려는 작정이었겠지.
“틀렸어. 아리벨.”
그러나 안 될 말이다. 그래서야 외신의 뜻대로 놀아날 뿐이니까.
나는 이 모든 것이 외신의 계획임을 알고 있었다.
아마도 파라켈수스가 균열의 안쪽으로 들어오는 순간, 그는 외신의 시신을 취하고 신격을 얻게 되겠지.
물론, 한낱 인간에 불과한 파라켈수스의 정신으로는 외신의 의지를 감당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파라켈수스의 자아는 어느 순간 재가 되어 사라지고 부활한 외신은 시간선 너머의 본체와 손을 잡겠지.
그렇게 세상 모든 것을 제물로 하여 새롭게 절대악으로서 거듭날 터다.
“사라져.”
나는 파라켈수스를 밖으로 밀어냈다.
그런데 이런 게 의미가 있긴 한 건가?
여기는 꿈속의 세계에 불과한데.
“..아, 그런 거였군.”
고개를 들어보면, 세계가 되감기고 있었다.
죽은 자가 되살아나고, 시간은 거꾸로 흐르며, 공간은 붕괴해 버리고 말았다.
나는 상념 속에서 눈을 감았다.
* * *
다음 순간, 나는 꿈에서 깨어나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잠들었던 사이 하늘에 난 구멍은 어느새 하나로 합쳐져 있었다.
“상황이 썩 좋진 않은가 보네.”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그 순간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호루스족의 용사 단테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이전과는 다르게 제법 초췌하다.
나는 세월의 흐름을 실감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로부터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거지?”
“조만간 세계가 멸망할 것 같다는 것만큼은 알려드릴 수 있겠군요.”
나는 단테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꿈속에서의 수만 년이라는 시간은 현실에서도 꽤 긴 시간이었던 모양이다.
“사신장은?”
“죽었습니다. 그래도 마지막 순간에는 당신을 지키려 하더군요.”
“팔은 어쩌다 잘린 거지?”
나는 텅 비어버린 단테의 팔을 바라보았다.
그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모르시는 게 속 편할 겁니다.”
나는 그가 의도적으로 이 화제를 피한다고 생각했다.
딱히 이 상황에 좌절한 것 같지는 않고, 나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인 것 같았다.
나는 애써 모른 척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단테는 단테였다.
“그래, 그런데 쌍둥이가 각성했나 보군.”
“네, 느껴지시는 모양이군요.”
“사실, 나는 잘 몰라.”
“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조금 달라졌거든.”
단테의 눈에 의아함이 서렸다. 나는 그런 단테에게 가볍게 웃어 보였다.
저 멀리서부터 빛과 뇌전의 무리가 춤추고 있었다.
아무래도 못 본 사이 제법 많은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제 그만 가야 할 것 같아.”
“가신다고요? 하지만.. 솔리아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니, 그 애가 기다리는 건 내가 아니야.”
나는 단테의 말에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나는 태양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길고 긴 윤회를 통틀어, 단 한 번도 나는 그들의 신이었던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당연하게도 이 순간, 솔리아를 맞이해야 하는 것은 내가 아니었다.
태양신이 되기를 거부한 나는, 그들을 만날 자격이 없었다.
“걱정 마라. 그 아이들은 곧 태양신을 만날 수 있을 테니까.”
“아뇨.”
단테는 가만히 고개를 저으며 나와 눈을 마주했다.
초췌하게 그지없는 얼굴이 보인다. 그러나 그 눈빛만큼은 여전히 찬란하게 불타고 있다.
“제가 모시는 건 태양신이 아니라 당신입니다.”
“..태양신이 들었다면 통곡했겠군.”
“저뿐만이 아니라 누구라도 당신의 삶을 안다면 그리 말할 겁니다.”
나로서는 무어라 말하기 힘든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래.. 그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까지의 내 삶이 아무런 의미가 없지는 않다는 거겠지.
“솔리아가 당신을 보고 싶어 하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아무래도 과거를 기억해 낸 것 같더군요.”
“솔루이는 울었겠군.”
“죽었을 때의 기억이 있어서 그런가 조금 무서워하긴 하더군요. 하지만 그들이 당신께 감사하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그래.”
나는 실소를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까부터 단테가 하는 말을 듣자 하니 어쩐지 그의 기분을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다.
아무래도 단테는 지금의 내 상태가 불안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기야 꿈을 꾸기 전과 지금의 내 모습은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다르다.
그야 걱정할 만도 하겠지.
“너무 걱정하지 마라. 딱히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니까.”
“..정말인가요?”
나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펼쳐낸 날개의 색은 검었다. 그러나 이전과는 달리 새카만 색은 아니었다.
어슴푸레한 빛을 품은 밤의 색.
나는 푸른 하늘에 밤을 드리우며 날아올랐다.
그것은 한때 내가 보았던 꿈의 한 장면을 떠오르게 하는 모습이었다.
당시에는 태양신과 외신 간의 싸움이라고만 여겼던 그것.
그런데 만약 그 순간이 지금의 광경이었다면..
‘내가 본 것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의 풍경이었던 건가?’
그렇다는 건 아직, 나는 운명을 비틀지 못했다는 말이 된다.
“또 보자. 단테.”
“..네, 반드시요.”
나는 다시금 하늘로 솟구쳤다. 틈새의 안쪽은 새카맣게 물들어 있었다.
나의 날개가 어둠보다 빛처럼 느껴질 정도의 암흑이었다.
“그래, 해답은 얻었나?”
사태는 절망적이었다.
신룡은 쓰러졌고 기계신의 몸체는 처참할 정도로 박살이 난 채 흩어져 있었다.
반면, 저 거대한 소용돌이의 기세는 무한히 뻗어나가는 상황이다.
“아니, 보다시피 실패했어.”
“하긴, 고작 수만 년 정도로 이길 녀석은 아니지.”
저 멀리 소용돌이치는 폭풍의 한복판에 거대한 눈 하나가 떠 있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그 눈빛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면 내가 꿈의 세계에 다녀온 것조차 알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지.
어쩌면 내 계획 따위는 진작에 발각되어 버린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방법이 있다고?”
그러나 태양신은 이런 상황에서조차 무언가 대책이 있는 듯한 기색이었다.
그의 눈이 나를 바라본다.
“이전에 신룡이 너에게 했던 제안을 기억하나?”
“제안? 나에게 힘을 주겠다고 했던 그거? 그거라면 분명 거절했을 텐데?”
“만약 네가 신룡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너는 그대로 새로운 태양신이 될 수 있었을 거다. 당연히 외신의 계획은 좌절했겠지.”
“..신이라는 게 그리 쉽게 될 수 있는 거였나?”
“쉬울 리가 있나. 하지만 다른 신의 신격을 삼킨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뭐라고?”
그런데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그 당시, 신룡은 너에게 자신의 신격을 넘기려고 했다는 거다. 스스로를 제물로 삼는 한이 있더라도 제 잘못을 되돌리려 한 거지.”
쉽게는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내가 아는 신룡은 그렇게 헌신적인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럴 마음이 있었다면 왜 조르디네스를 버렸단 말인가.
왜 신들을 배신하고 파라켈수스를 선택했으며, 하프 데몬들을 죽음으로 이끈 거지?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라. 이 세계가 부서지는 것과 외신을 죽이는 것. 어느 쪽이건 상관없었던 것뿐이니까.”
“..신룡.”
고개를 돌려보면, 신룡은 어느덧 나의 앞에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달뜬 호흡과 충혈된 눈.
그는 부릅뜬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외신을 죽이는 쪽이 더 끌리긴 하네.”
“진심이야?”
“오히려 잘된 일이지. 이놈의 신이라는 거. 전부터 때려치고 싶었거든.”
그의 말에 눈살을 찌푸리는 것도 잠시 신룡의 입에서부터 무언가가 쏟아져 나왔다.
두근.
새빨간 보석을 닮은 그것은 마치 맥박이 뛰는 것처럼 점멸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드래곤 하트.. 이게 없으면 너는.”
“뭘 그리 복잡하게 생각해? 그걸 삼켜. 그리고 신이 되는 거야.”
신룡은 별거 아니라는 듯 말하고 있었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이 심장이 정녕 태양신의 것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면..
“..너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지?”
“자유로워지겠지. 내가 바랐던 대로.”
신룡의 기운이 눈에 띄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아니, 더 이상 그를 신룡이라 부를 수는 없을 거다.
기껏해야 반신. 어쩌면 그보다도 못할 존재감.
놈의 새카만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기 시작했다.
“그래도 좀 피곤하긴 하네.”
그대로 말없이 고개를 떨구는 신룡.
나는 그의 드래곤 하트를 주워 들었다.
“그렇게 둘 것 같으냐!”
그 순간, 외신의 외침이 들려왔다.
뻗어지는 손과 쏟아지는 마탄. 또다시 시공의 흐름이 꼬여간다.
지난 수만 년의 시간 동안 지긋지긋하게 보았던 흐름이었다.
와그작.
나는 가볍게 손을 휘둘러 놈의 공격을 상쇄했다.
이제 와서 이런 공격에 당할 내가 아니었다.
“..미안하다고는 하지 않으마.”
나는 그대로 신룡의 심장을 씹어 삼켰다. 죄악감은 없었다.
“자유가 그리 좋으면 사라져 버려.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
나는 그대로 신룡의 몸을 세계의 바깥으로 밀어냈다.
아마 다시는 이 세계에 돌아오지 못하겠지.
물론, 신룡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결말일 거다.
“..후.”
신룡이 사라진 자리에는 신좌 하나가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형태도, 형체도 없지만 인과의 흐름을 따라 움직이는 그 무언가.
내가 저것을 취한다면, 나는 그대로 신이 될 수 있을 테지.
“..돌아갈 시간이야. 라나.”
하지만 그런 건 내가 바라는 결말이 아니었다.
“기긱. 긱.”
무너져 내리는 기계신이 나를 지나쳐 날아갔다.
기계신은 그대로 구멍의 위를 덮듯이 쓰러졌다.
아무래도 우리를 대신해 하계를 지켜주려는 모양이다.
“..고맙다.”
나는 눈을 감았다 떴다.
그것만으로도 내 안의 마왕이 사라지고 있었다.
희미했던 연결고리가 끊어지고, 또 다른 순환이 내 안에서 피어나고 있었다.
역순환. 거꾸로 회전하는 거대한 고리가 새겨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