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s not a hero, he's a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34)
34화 – 망나니 갱생시키기(3)
나는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들었다.
다리를 잃어버린 남작과 그런 남작의 직위를 계승하는 장남.
장남의 마음에 들지 않는 망나니와 그런 망나니에 대한 험담을 흩뿌리고 다니는 종자 출신의 충신.
‘뭔가가 마음에 걸려.’
묘하게 익숙한 상황이다.
과거 내가 보고 받았던 계획 중에 이것과 유사한 상황이 있었던 것 같다고 해야 할까.
마치 흐릿한 기억 속, 서류 너머의 풍경이 점차 현실이 되어 드러나고 있는 것 같다.
‘뭐, 그래봤자 확신이 있는 건 아니야. 인간이 된 이래로 마기를 감지하는 게 힘들어졌으니까.’
그러나 무작정 마족의 개입을 단정 짓기엔 근거가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지금의 나는 마기를 다루는 것에는 익숙해졌을지 몰라도 마기를 느끼고 교감하는 능력은 아직 미숙했으니까.
마기를 전혀 느끼지 못한다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작정하고 몸을 숨긴 마족을 찾아낼 정도는 아니라는 거다.
‘그나마 흑마법사가 상대라면 얼굴을 기억할 수도 있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좀 곤란해지겠어.’
“오늘도 일찍 일어나셨네요?”
나는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졸린 눈을 비비며 밖으로 나서는 마법소녀의 모습.
그 모습에 불현듯 떠오른 것은 마법소녀가 가진 아르카나였다.
마기를 잘 느끼다 못해 과민하게 반응하는 그 체질이라면 혹시..
“사냥 가자던 놈은 어디 가고 왜 네가 나온 거냐. 톰은 어디 갔지?”
“톰이 아니라 토미에요. 음. 일어날 기미가 안 보이던데요?”
“혹시나 해서 기다렸는데. 역시나였군.”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킨다.
그래도 약속을 한 만큼 조금은 기다려 줄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무리였던 모양이다.
“토미 대신 제가 따라가도 될까요?”
“..그래, 상관없겠지.”
그런데 어째선지 마법소녀가 대신 따라오겠다고 나선다.
의아함이 드는 한편,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걷는 속도를 늦춘다.
평소처럼 걸었다가는 마법소녀가 금세 지쳐버릴 것 같았으니까.
“혹시 이 영지 내에서 이상한 기운을 느낀 적은 없었나?”
무엇보다 천천히 걷는 편이 대화를 나누기엔 적당하기도 했다.
나는 마법소녀에게, 정확히는 마법소녀가 가진 감각에 대해 질문했다.
“음.. 저는 계속 쥴리의 집에 있었으니까요. 마을에서 벌어지는 일은 잘 모르겠네요.”
“그렇군.”
안타깝게도 별 소득은 없었다.
하긴, 집에서 나간 적이 없으니 당연하겠지만.
“제가 한 번 나가서 확인해 보는 게 좋을까요?”
“아니, 그러지 마라. 그러다가 네 정체가 발각당한다면 안 하는 만 못한 일이 될 테니까.”
그런데 누가 용사의 그릇 아니랄까 봐 오지랖을 부리기 시작한다.
마음만큼은 가상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마법소녀 혼자 나서는 건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게 기본적으로 마족들이 가진 용사에의 집착은 보통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던전에서야 운 좋게 속여넘겼다지만 이번에도 그럴 수 있을 거란 보장은 없다는 거다.
“진짜로 마족이 있다면 섣불리 모습을 드러내선 안 돼. 마족을 상대로는 환영 마법이 통하지 않으니까.”
“그럼 아저씨도 위험한 거 아닌가요?”
“예전이라면 그랬겠지. 하지만 지금이라면 하급 마족 정도는 어떻게든 이길 수 있어.”
단순히 허세를 부리고 있는 건 아니었다.
지금 내 힘은 이전에 비해 비약적으로 증가한 상태였으니까.
오러나 마기의 양에는 큰 변화가 없지만 공격력에 있어선 이미 상급 익스퍼트에 필적하고 있다는 거다.
단련의 효과라고 하기엔 지나칠 정도로 급격한 성장이었다.
아무래도 나 자신이 누구인지를 명확하게 인지한 것이 도움이 된 것 같았다.
굳이 말하자면 성장이라기보다는 적응의 결과인 셈이다.
벨제뷔트가 아닌, 데이브로서의 삶을 시작한 결과.
“그러고 보니 이제 말투는 다 교정하셨나 보네요.”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토트 팔레아스 그놈 덕이겠지. 그놈은 이상할 정도로 남의 말에 집착하니까.”
“관심을 가진다기보다는.. 두려워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두려워한다고? 어째서?”
마법소녀는 내 말에 답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확신이 있는 것 같진 않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허튼소리를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나는 가만히 이 마법소녀의 말을 곱씹어보았다.
“..그래, 네 말이 옳을지도 모르지. 애초에 제 형과 자신을 비교한다는 것부터가 타인의 말과 평가에 지나칠 정도로 신경을 쓴다는 말이니까.”
“…”
“그림을 그리지 않게 된 것도 화방 주인의 말 때문이라고 했었지? 생각해 보니 묘한 일이긴 하군. 귀족의 아들씩이나 되는 녀석이 그렇게 남의 말에 휘둘리고 살았다는 것부터가 말이야.”
제아무리 우수한 형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놈의 신분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팔레아스란 이름은 사실상 자작 승작이 결정된 이름이 아니던가.
사실, 오테 팔레아스가 멀쩡하기만 했어도 백작 작위에 올랐을지도 모르는 이름이라는 거다.
그런데 그런 귀족의 차남이 고작 형이랑 비교된다는 이유만으로 어려서부터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살았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토트 팔레아스. 팔레아스라..”
나는 가만히 그 이름을 곱씹었다.
사실 익숙한 이름은 아니었다.
인간의 이름은 잘 외우지 못하기도 하고, 기본적으로 지나치게 많은 이름을 알고 있는 탓에 혼란스럽기도 했던 탓이다.
오래 살아온 것에 대한 일종의 부작용이었다.
“..그래, 거기서였군.”
다행히 혼란은 오래가지 않았다.
시간의 흐름을 따져가며 생각을 이어가다 보니 과거 읽었던 서류 중에 비슷한 이름을 본 적이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래, 토트 팔레아스.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그 이름일 것이다.
하급 마족 세이르와 계약하여 제 가족들을 몰살시킨 희대의 패륜아.
그리고 던전 브레이크를 일으켜 티그리스 왕국에 막대한 피해를 주었던 인류의 배신자가 가진 이름.
‘그놈에게 그런 깡이 있을 리는 없지.’
그러나 내가 아는 토트 팔레아스는 좋게든 나쁘게든 무능한 놈이었다.
그놈이라면 설령 나쁜 마음을 먹었다 하더라도 그런 짓을 하지는 못했을 테지.
아마도 무언가 숨겨진 진실이 있을 것이다.
그런 얼간이에게 당할 정도로 오테 팔레아스나 이 나라가 무능할 것 같지도 않았고.
‘그러고 보니 과거에 토트 팔레아스를 쓰러트렸던 것은 분명..’
그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는 기억의 파도.
나는 걸음을 멈췄다. 머릿속을 스치는 것은 진실의 파편이다.
“무슨 일 있나요?”
“그래, 이만 가봐야겠다. 확인해 볼 게 있다.”
“저도 같이 가요.”
마법소녀의 안전을 위해 한 말이건만 소용이 없다.
돌아오는 대답은 단호하기 이를 데 없다.
그래, 따라오게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후드를 써라. 남이 묻거든 햇볕에 타는 것이 싫다고 답하면 될 거다.”
마법소녀가 날 쫓아온다면 십중팔구 성가신 일이 생길 거다.
굳이 이번 사건 때문이 아니더라도 기본적으로 우리는 수배된 입장이었으니까.
그러나 언제까지고 도망치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
“그래도 각오해 둬라. 내 생각이 틀리지 않는다면, 아마 이번에도 마족과 만나게 될 가능성이 크니까.”
그러나 가능하다면 문제가 생기는 건 피하고 싶었다.
나는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충고해 두는 것을 잊지 않았다.
* * *
예이츠와 탕 티르의 팔레아스 령 출입은 어렵지 않게 이뤄졌다.
하긴, 두 사람 다 이 나라 출신이기도 했고 신분 역시 확실했으니 막아설 이유가 없긴 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자신의 이름을 조니가 아니라 예이츠라고 밝혀 경계를 산 것이 문제였다.
다행히 탕 티르가 아버지의 이름을 팔아 무사히 넘기긴 했지만 말이다.
“앞으로는 조심해 주십쇼. 아버지 이름을 너무 팔고 다녔다가는 제 명에 못 산다고요.”
“주의할게. 그런데 묘하군.”
“뭐가 묘한데요? 설마 이제 와서 마족의 냄새가 사라졌다거나 그런 말을 하려는 건 아니죠?”
“아니, 그 반대야. 마족의 냄새는 더 심해졌어. 그런데 이상한 건 그 반대의 냄새도 나고 있다는 거야.”
“..반대의 냄새요?”
무슨 말이냐는 듯 되묻는 탕 티르.
예이츠는 그런 그를 무시한 채 연신 코를 킁킁대며 주위를 살핀다.
꼴사나운 모습이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사람이 개처럼 킁킁대며 돌아다니는 모습이라니.
“크흠.. 여기 빵이 싸네. 얼마에요?”
그의 옆에 있다가 괜히 뻘쭘해진 탕 티르가 모른 척 연기를 해봤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예이츠는 눈치가 없는 건지, 필사적으로 모른 척을 하는 탕 티르에게 계속 말을 걸어오고 있었으니까.
“..어쩌면 이건 용사의 냄새일지도 모르겠어.”
“용사의 냄새? 그런 거라면 예이츠 님이 더 잘 아실 거 아니에요?”
결국 포기를 선언한 탕 티르.
순순히 얼굴에 철판을 깔기로 한 모양이다.
“너는 네 냄새가 어떤지 알고 있냐? 용사는 한 시대에 한 명밖에 없어. 그게 규칙이라고. 내가 다른 용사를 만나본 적이 없는데 무슨 냄새가 나는지 어떻게 알겠어?”
“..그럼 왜 용사의 냄새라고 생각하시는 건데요? 맡아본 적도 없다면서요?”
“그냥 그렇지 않을까 하고 추측하는 거지. 마기와는 정반대의 느낌이 나니까.”
예이츠는 그렇게 말하며 연신 코를 킁킁거렸다.
후각을 이용하면 넓은 범위를 추적할 수 있어 좋았지만, 정확도가 떨어진다는 게 단점이었다.
대략적인 방향이라면 모를까.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거다.
“크흠. 꽤 가까운 모양인데? 냄새가 너무 강해서 코가 삐뚤어질 것 같아. 설마 나한테서도 이런 냄새가 났던 건가?”
“예이츠 님한테는 딱히 냄새가 나는 것 같진 않은데요?”
“진짜 냄새를 말하는 게 아니야. 당연히 네 코로 맡아질 리가 없지.”
예이츠는 그렇게 말하며 미간을 모았다. 그런데 참 지독한 냄새다.
설마 마족의 냄새보다 지독한 냄새가 존재할 줄이야.
이번 대의 용사가 특별한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원래부터 용사란 이런 족속이었던 것일까.
“마치.. 용사라는 개념 자체를 농축시킨 것만 같은 냄새로군.”
“..그런 것도 가능한가요?”
“나야 모르지. 그냥 그런 게 있다면 이런 냄새가 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본 거니까.”
아무리 좋은 냄새라도 농도가 진하면 고통스럽다는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그가 더 이상 용사가 아니게 되었기 때문일까.
예이츠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지독해지는 냄새에 코를 막았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좀 심한 것 같.. 우웩!”
“왜, 왜 그래요?”
“쿨럭. 쿨럭! 이, 이게 대체 뭔…”
그런데 이건 좀 정도가 심한 거 아닌가?
코가 저리다 못해 뇌가 흔들리는 것만 같은 악취가 느껴진다.
머리가 하얗게 물든다.
쿵.
예이츠는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백전노장인 그가 고작 냄새 따위에 굴복하다니?
‘이게 정말 용사의 냄새라고? 사실 내가 뭔가를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이쯤 되면 오히려 마기보다도 질이 나쁠 정도다.
이런 걸 두고 뭐라고 불러야 하는 거지? 고결함?
마치 세상 모든 것을 엄숙히 심판하는 판관과도 같은.
혹은 빈민가를 내려다보는 오만한 왕과도 같은 느낌이 든다.
맑다 못해 투명한.
자기 자신을 정화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세상 모든 것을 깨끗하게 지워버릴 것만 같은 감각이다.
‘그렇다면 이게 마기와 다를 것이 뭐가 있지?’
그 순간, 예이츠는 처음으로 용사의 힘에 대한 의심을 품었다.
그것도 마족이 아닌, 같은 용사라고 추측되는 누군가에 의해.
“아..”
이내 예이츠의 눈이 그 누군가와 마주쳤다.
갈색 머리칼과 눈을 가진 소녀의 모습.
그런데 저건 환영 마법인가? 겉으로 보이는 머리 색과 실제 머리 색이 다르다.
‘저 눈은..!’
그러나 의문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와 소녀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예이츠는 어느덧 그 눈 너머의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알지 못하는 세계다.
그는 호수의 위에 서 있었다.
‘여긴 어디지?’
눈앞에 보이는 것은 푸른빛으로 빛나는 보석이었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예이츠의 근간을 무너트리는 것만 같은.
그의 모든 것을 뽑아내어 흡수할 것만 같은 소용돌이다.
“저건.. 대체 뭐지?”
그 순간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
더없이 투명하면서도 아름다운.
몸서리쳐질 정도로 두렵고 장엄한 목소리가 귀를 두드린다.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걸? 오랜만이야 예이츠.”
소년의 것처럼 무구한 그 목소리는, 그 어떤 악마의 속삭임보다도 달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