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s not a hero, he's a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69)
69화 – 배신자의 최후.
니콜라스는 가만히 입을 다문 채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벅찬 이야기들이다.
태양신과 파라켈수스. 연금술사와 마족, 그리고 아리벨 교단까지.
새삼 자신의 과거가 부끄러워지는 순간이다.
아무것도 모른 채 엘프의 영지에 틀어박혀 복수를 꿈꾸던 나날들.
그러나 세상은 그가 알고 있는 것처럼 단순하지도, 가볍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이 그 연금술사 놈들의 짓이라는 거냐?”
“엄밀히 말하자면 합작품이라고 해야겠지. 교단에도, 마족에도 그놈들과 협력하는 놈들이 있다는 거니까.”
“..솔직히 궁금한 게 많아.”
이쯤 되니 니콜라스는 슬슬 이 두 사람의 정체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물론 그 역시도 눈치는 있었다.
이 두 사람이 보이는 그대로의 가짜 용사나 페어리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는 거다.
“너희가 누군지도 아직 잘 모르겠고.”
다만 그가 알고 싶은 건 그래서 이놈들은 대체 뭐 하는 작자냐는 것이었다.
솔직히 평범한 사람이 알기엔 지나치게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아닌가.
평범한 사칭범을 자칭하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다는 거다.
“하지만 묻지는 않겠어. 사실 이미 머리가 터질 것 같은 기분이기도 하고.”
그러나 니콜라스는 더 이상의 것을 묻지 않았다.
남은 것들은 그가 직접 보고 확인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이제부터 어쩔 거야? 지금 엘프들이 얼마나 화가 났는지는 알고 있는 거지?”
그렇기에 니콜라스는 당장 닥친 일을 우선시하기로 했다.
사실, 상황이 긴박하기도 했다.
엘프들이 당장은 니콜라스의 윽박에 질려 다가오진 않고 있지만 그래봤자 오래가지는 못할 테니까.
순혈파가 가진 혈통에의 집념은 우습게 볼 것이 아니라는 거다.
“그들은 걱정하지 않아도 좋네.”
그 순간, 들려오는 것은 엘리야의 목소리였다.
그녀가 천막의 안쪽에서부터 손녀인 엘리아와 함께 등장했다.
몸 곳곳이 마기에 침식되어 거뭇해진 모습이 보인다.
생각보다 부작용이 심각해 보였다.
“아, 아니 왜 나온..”
니콜라스는 당황한 얼굴로 그들과 눈을 마주했다.
그녀들이 그곳에 숨어 있었다는 걸 몰라서 그런 건 아니었다.
애초에 그녀들을 숨겨준 것이 바로 니콜라스였으니까.
다만 그 과정에서 데이브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끝까지 숨어 있기로 약속을 한 것뿐이다.
앞으로 동료가 될 엘리아를 생각해서 한 배려였다.
이제부터 함께 다녀야 하는데 그녀만 사정을 모른다는 건 가엾다고 여긴 거겠지.
“당황하지 않아도 좋네. 어차피 저놈은 다 알고 있었으니까.”
뭐,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배려였던 것 같지만.
“알면 좀 나와서 들었으면 되잖아? 다 죽어가는 노인네가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기는.”
“흥. 상식적으로 젊은 놈이 먼저 초대해야 하는 거 아니냐?”
“글쎄. 과연 누가 더 젊을까.”
데이브의 아리송한 말에 엘리야의 표정이 굳었다.
아마도 그 말을 듣고 떠오른 것이 있었던 거겠지.
“그래.. 짐작은 했었지만. 역시 그랬군.”
“후회되나? 이런 나에게 네 손녀를 맡긴 것이?”
“그럴지도. 하지만 이런 게 운명인 건지도 모르지.”
이해하기엔 지나치게 단편적인 말들이다.
그렇기에 니콜라스는 가만히 그 이야기를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던 건 아니지만.
“하긴, 뭐가 되었건 저놈들부터 처리해야겠군. 시끄러워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너무 심하게는 하지 말게. 어찌 보면 가엾은 아이들이니까.”
“저놈들이 가해자가 되기 전까지는 그랬을지도 모르지.”
데이브는 그 말을 끝으로 몸을 일으켰다.
사흘 만에 일어난 것임에도 불구하고 몸 상태가 멀쩡했다.
아마도 그가 가진 권능 덕이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데이브가 밖으로 나서는 순간, 순혈파의 엘프들이 기다렸다는 듯 모습을 드러냈다.
화살이 겨눠진다. 보다 못한 엘리아가 그들을 막아서려 했지만 의미는 없었다.
애초에 저들에게 있어선 엘리아 역시도 죽일 대상에 불과했다.
“많이도 몰려왔군.”
“너.. 네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알고 있나?”
“글쎄. 나보다는 네가 더 잘 알 것 같은데?”
데이브가 쿠단과 눈을 마주한다.
전신에 붕대를 감고 있던 그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그래, 그가 어찌 모르겠는가.
연금술사들과 손을 잡고 인간들의 세력을 몰아내려던 것이 바로 그였는데.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그러나 지금 그 사실을 인정할 수는 없었다.
그의 계획이 성공했다면 또 모를까 하나같이 실패로 돌아가 버리지 않았던가.
이렇게 된 이상 그가 저지른 모든 죄는 저 인간이 떠안고 사라져야만 한다는 거다.
“모두 공격해! 저 인간 놈에게 복수하는 거다! 우리의 불탄 고향을..!”
쿠단은 그가 저지른 모든 죄의 증거를 이곳에서 지울 생각이었다.
악에 받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불이라.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러나 되돌아오는 것은 화염이다.
화륵!
데이브가 앞으로 나선다.
뽑혀 나온 검은 더없이 불길한 빛을 뿜어내며 불타고 있었다.
요사스러우면서도 매혹적인 빛이다.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속의 공포를 일으키는 빛.
엘프들은 그 빛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물러서고 말았다. 기묘한 일이었다.
그들은 분명, 죽음마저 각오하고 이 자리에 선 것이었을 텐데.
대정령의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던 것이 그들이었을 텐데.
‘이건 대체 뭐지?’
그런데 왜 이토록 마음이 떨려오는 것일까.
왜 몸이 말을 듣질 않는 것일까.
“그래, 누가 먼저 죽을 거냐?”
차가운 새벽 위로 그늘이 진다. 노을이 물든다.
거뭇한 어스름. 여명의 서광을 지워내며 손톱을 들이미는 것은 불타는 검이었다.
엘프들의 시선이 홀린 듯 검 위로 못 박힌다.
“아..”
그래, 황혼검.
적의 마음을 꺾고 공포를 새겨넣는 검이라 하였던가.
검을 마주한 엘프들의 모습이 실로 그러하였다.
그들은 감히 덤벼들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자리에 못 박혀 있었다.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작정이냐. 오지 않을 건가?”
반면, 데이브의 검은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다가오는 죽음.
연신 벙긋거리던 쿠단의 입이 처음으로 쇳소리를 내었으나, 그게 전부였다.
차마 언어가 되지 못한 말들이 허공에 흩어진다. 이어지는 것은 검광이다.
쐐액!
열 개의 검 줄기를 흩뿌리며 그어지는 검.
그 순간, 그곳의 모든 엘프는 자신들의 죽음을 직감했다.
“멈추게.”
만약, 그 순간 내뱉어진 말이 없었더라면 그들의 목숨은 여기서 끝을 맺었을 테지.
그의 검기가 하늘 위로 솟구친다.
“허억..!”
“지, 지금 뭐가 지나간 거지?”
간발의 차이로 빗겨 나간 죽음.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엘프들이 다리의 떨림을 주체하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그들의 모습에선 더 이상 전과 같은 적의는 조금도 느껴지질 않았다.
남은 것은 그저 살아남은 것에 대한 안도.
그리고 아마 평생토록 지워지지 않을 공포뿐이다.
“내가 사정을 봐달라고 하지 않았나.”
“그래. 그래서 절반만 죽이려고 했잖아.”
“..그런 걸 두고 사정을 봐줬다고 말하는 건 자네밖에 없을 걸세. 정말 하나도 변하질 않았군.”
지금까지의 모든 대화를 들었던 탓일까.
아무래도 엘리야는 데이브의 정체를 확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게 다.. 이게 다 당신 때문이야..!”
“..쿠단.”
비명처럼 소리를 지른 것은 쿠단이었다.
증오로 불타는 두 눈. 그의 눈이 엘리야의 더럽혀진 피를 바라본다.
“당신이, 당신이 저 저주받을 혼혈아를 죽여버렸다면..! 저 인간 놈들을 죽였더라면..!”
“자네.. 아직도 잊지 못한 건가?”
엘리야와 쿠단의 눈이 마주한다.
동정과 연민으로 가득한 눈빛과, 원한과 증오로 점철된 눈.
“자네 동생의 죽음은 안타깝지만..”
“안타깝다고? 그 아이는 아무런 죄도 저지르지 않았어! 그런데 왜 그 아이가 노예가 되어야 했던 거지? 왜 인간의 손에 무참히 살해당해야 했냔 말이다!”
“…”
“그 아이의 아들이 찾아왔을 땐 정말 놀랐지. 비록 하프 엘프라 할지언정 아끼고 반겨주려 했어. 그놈이 우리 엘프의 등에 칼을 꽂고 아이들을 납치하려 들기 전까지는 말이야..!”
쿠단은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어 몸을 일으켰다.
번쩍이는 눈. 지옥의 업화처럼 불타는 그 눈이 엘리야를 바라본다.
“당신 역시 똑같아. 그 더럽혀진 몸을 봐! 그 모습의 어디에 고결함이 남아 있다는 거지? 당신도 언젠가 우리를 배신할 거야. 당신 손녀는 언젠가 우리를 찾아와 우리를 불태우겠지! 그 잘난 불의 정령을 이용해 우리의 긍지를 짓밟을 거야!”
엘리야는 그저 슬픈 눈으로 쿠단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녀의 눈에 비치는 것은 과거의 모습이었다.
여동생과 함께 웃으며 자신을 향해 달려오던 소년 엘프의 모습.
“에휴. 그냥 죽여버리는 게 어때? 저놈을 살려두면 계속 이런 일이 일어날 것 같은데.”
보다 못한 데이브가 입을 열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건 간에, 결과적으로 엘프들을 위험에 빠트린 건 쿠단이 아닌가.
쿠단의 행동이 일견 정당하게 보일지는 몰라도 어디까지나 그뿐.
그 속내는 단순히 분노에 사로잡힌 복수귀에 불과했다.
아마 이대로 가면 또다시 제 복수를 위해 타인을 말려들게 만들겠지.
“그럴 필요 없네. 어차피 엘리아는 떠날 테고, 내 삶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당신들이 여기서 안 살 거라고 끝날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 무엇보다 당신도 몇 년 정도는 더 사는 거 아닌가?”
“…”
“..설마 당신.”
데이브는 그제야 엘리야의 상태가 생각했던 것보다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얼마나 남았지?”
염제의 눈을 통해 시선을 집중해 보면, 마기가 그녀의 영혼을 침식해 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일반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애초에 그녀 같은 대정령사가 제 몸이 저 지경이 될 때까지 방치하고 있었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으니까.
“설마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게 정말로..”
“엘프의 기준인 줄 알았나? 사실 오히려 지나치게 오래 살았지. 남은 미련이 없었더라면 진작 떠났을 거야.”
“…”
“쿠단을 내버려 두게. 상처가 많은 아이니까. 비록 저 아이가 잘못된 길을 걸어오긴 했지만, 시간이 흐르면 깨닫는 바가 있을 테지.”
글쎄. 세월의 힘이라. 데이브만큼 그 말을 믿지 않는 이도 없을 것 같은데..
“정말로 확신해?”
물론 그 역시도 시간이 상처를 치유한다는 말에는 동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설령 억겁의 시간이 흐른다 해도 낫지 않는 상처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여기서 해결하지 않으면 언젠가 저놈은 또다시 인간들을 공격할 거야. 그렇게 되면 정말로 끝장이겠지. 잠깐은 엘프들이 이길 수 있을지 몰라도 인간들의 끈질김과 탐욕은 보통이 아니야. 저놈은 분란의 씨앗밖에 되지 않는다고.”
“의외로 인간들을 높게 평가하는군? 그 반대일 줄 알았는데.”
“하! 어떻게 우습게 볼 수 있겠어? 내가 그동안 얼마나 시달려 왔는데.”
“그래, 그것도 그렇겠군.”
엘리야는 수긍하며 돌아섰다. 자신의 손녀를 바라본다.
엘리아 역시 그녀를 마주했다. 아마도 이것이 마지막 만남이겠지.
“할머니. 저는..”
“나는 이것을 마지막이라 부르지는 않을 거란다.”
그러나 엘리야는 다음을 기약하며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이 엘리아의 머리칼을 쓸어내린다.
“언젠가, 어머니 나무의 품에서 다시 만나기를 기대하마.”
“..네.”
눈물과 함께 꺼내든 작별 인사.
그것은 언젠가 엘프들이 도달한다는 이상향을 약속하는 말이었다.
엘리야는 엘리아 역시 엘프들의 세계의 일원임을 다시 한번 알려준 것이다.
“어머니 나무라고? 끝까지 헛소리를..!”
그러나 쿠단은 그런 엘리야를 바라보며 끝까지 저주의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어?”
그런데 어째서일까. 그 말이 결국 끝을 맺지 못한 까닭은.
파앗!
그 순간, 새벽녘의 하늘을 물들인 것은 엷은 녹색의 줄기였다.
일견 제멋대로 뻗어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거목의 가지.
“세, 세계수 님?”
쿠단의 얼빠진 목소리와 함께 부는 것은 바람이었다.
엘리야의 몸에서부터 시작된 바람.
그녀의 몸은 마치 실타래가 풀리는 것처럼 흩어지며 하늘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세계수의 가지에 열매가 맺혔다.
오직 엘리야만을 위해 마련된 둥지였다.
아마도 언젠가는 엘리아도 저곳에 갈 수 있겠지.
그렇게 약속했으니까.
“다시 만나요. 할머니.”
멀어져가는 바람. 엘리아는 가까스로 송별의 인사를 전했다.
“수, 숲이..!”
그런데 그런 엘리아의 말에 화답이라도 한 것일까.
어디선가 불어온 따스한 바람이 엘프들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그와 동시에 죽어버린 대지가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이, 이게 무슨..”
쿠단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믿을 수 없는, 아니.. 믿고 싶지 않은 광경이다.
“..세계수 님?”
그러나 눈앞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은 진실이었다.
“숲이 되살아나고 있어..!”
불타 사라졌던 나무들이 되살아난다.
황폐해졌던 땅이 비옥해지고 청량한 공기가 대기를 가득 물들인다.
“..이건 꿈이야.”
감히 부정할 수 없는 신의 기적이 눈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쿠단은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더는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