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s not a hero, he's a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73)
73화 – 마족과 검은 말.
다가오는 기척에 숨을 죽인다.
시선에 들어온 모닥불, 타오르는 불꽃에 손을 뻗는다.
성녀가 비명을 지르는 것이 들렸지만 무시했다.
지금 중요한 건 저런 게 아니다.
‘싸우면 내가 이기긴 하겠지만 문제는 저놈들을 살려서 보내야 한다는 거지.’
흔적을 지우고 도주할 준비를 한다.
솔직히 교단 놈들 앞에서 마족을 두고 도망치려니 좀 찔리기는 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그렇다고 다짜고짜 옛 부하들을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인데.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또 모를까. 지금은 그런 것도 아니지 않은가.
‘변명할 내용은 얼마든지 있어. 정 안되면 벨을 핑계로 대면 되겠지.’
성녀를 설득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교단 출신답게 마족만 보면 발작하긴 하겠지만 그래 봤자니까.
까놓고 말해서 자기가 싸울 것도 아닌데 화를 내면 뭘 하겠는가.
‘그런데 마족들이 그렇게 순순히 넘어갈까?’
문제는 마족들의 경우다.
일단 싸우게 된다면 아마 마족들의 목숨은 없다고 봐야겠지.
그나마 차악을 고른다 해도 봉인이다.
용사를 향한 마족들의 집착은 보통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풀어준다고 해서 순순히 돌아가지도 않을 테고 설득은 더더욱 먹히지 않겠지.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공격하면 했지, 물러서지는 않을 거다.
“…어쩔 수 없지.”
“싸우실 건가요?”
“아니, 숨을 거다.”
“..네?”
결론은 간단했다. 싸움 자체가 일어나지 않도록 도망치는 것.
“지, 지금 뭐라고 하셨죠?”
“벨.”
성녀의 얼빠진 반응을 무시한 채 벨을 바라본다.
벨이 고개를 끄덕이며 환영 마법을 펼친다.
본디 마족에게 환영 마법은 통하지 않지만, 이곳은 숲이었다.
페어리의 마법이 가장 강한 힘을 발휘하는 장소라는 거다.
‘그나마도 낮이었다면 통하지 않았겠지만.’
나는 모닥불을 꺼트리고 장작의 잔열과 일대의 모든 온기를 흡수했다.
마족들에게 우리가 이 근처에 머물렀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함이었다.
“..이 숲이 분명해? 아무리 찾아도 없는데?”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이윽고 상급 마족 셋이 모습을 드러낸다.
성녀가 숨을 삼킨다. 눈빛에 드러나는 살기.
나는 성녀의 살기를 오러로 지워내는 한편 함부로 튀어 나가지 못하도록 어깨를 붙잡았다.
‘다 아는 얼굴이군.’
꽤 익숙한 얼굴들이 보인다. 마왕성에도 자주 드나들던 놈들이다.
‘아몬과 바르바토스, 파이몬.’
사천왕 중 하나인 가미긴의 심복들이다.
이른바 삼총사라 불리는 이들.
‘이유가 뭐든 간에 저놈들이 여기 있다는 건 이 근처에 가미긴이 있다는 건가? 내가 정말로 용사였다면 큰일이 났겠군. 섣불리 모습을 드러냈다가는 가미긴의 협공을 받았을 거야.’
나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혹시라도 남아 있을 우리의 냄새를 지워냈다.
그리고 계속 마족들에게 달려들려고 하는 성녀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그대로 자리를 옮겼다.
성녀가 괜한 소리를 하지 못하도록 입을 막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젠장. 연금술사인지 뭔지 우리를 속인 거 아니야?”
“글쎄. 확실한 정보라고 하셨는데.”
‘연금술사라고?’
그러나 곧 걸음을 멈춘다. 생각이 깊어지는 순간이다.
마족들에게서 들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이름이 아닌가.
‘..설마.’
그 말을 듣는 순간 데모닉의 모습이 떠오른 것은 어째서일까.
데모닉의 제작은 분명, 내부의 배신자 없이는 이뤄질 수 없는 일이었을 터.
‘..너냐? 가미긴.’
뒤를 잇는 것은 의심이다. 그리고 자괴감.
‘너를 의심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의심은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마족 중에 배신자가 있다는 사실은 분명했으니까.
“..데이브?”
“가자..”
벨의 재촉에 걸음을 옮긴다.
가슴이 들끓는 것만 같은 기분을 억누른다.
그래, 지금은 참자.
아직 확실한 것은 어디에도 없으니까.
‘..눈?’
그런데 그 순간, 숲의 저편에서 이쪽을 바라보는 무언가의 모습이 보였다.
설마 저것도 마족인가?
‘..유령마가 여기는 웬일이지?’
페가수스와는 정반대의 존재로 여겨지는 영수가 그곳에 서 있었다.
푸른 귀화를 뿜으며 투레질하는 유령마.
놈과 눈이 마주쳤다. 뜨거운 시선이 느껴진다.
‘..넌 또 뭐냐?’
나는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다 이내 걸음을 옮겼다.
* * *
일행들은 밤새 숲속을 걸으며 움직였다.
그렇게 얼마를 전진했을까.
“..여기서 쉬지.”
그들은 이내 곰이 살고 있는 동굴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곰에게는 아닌 밤중에 들이닥친 봉변이었다.
화륵!
곰의 사체를 대충 밀어낸다.
데이브는 화염을 일으켜 동굴의 내부를 정화하기 시작했다.
재의 냄새가 매캐하게 코를 찌른다.
그래도 짐승 냄새보다는 한결 나았다.
“..설명이 필요합니다.”
이어지는 것은 적막이다.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연 것은 이자벨이었다.
하기야 그녀로서는 당연한 일일 것이다.
용사가 마족을 피해 도망친다는 건 그녀의 상식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일 테니까.
애초에 여신의 사도라는 벨은 왜 그 행동에 동조한 거지?
이들이 정말로 용사이긴 한 것일까?
“왜 마족들과 싸우지 않은 겁니까?”
“서, 성녀님..!”
격분하며 소리치는 이자벨.
벤이 그런 이자벨을 제지하고 나섰다.
그녀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여겨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녀가 데이브의 심기를 거스르는 걸 막고 싶었을 뿐.
그로서는 이들을 상대로 이자벨을 지킬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이, 이봐요?”
그러나 그런 벤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데이브의 반응은 고요했다.
아니, 그는 이자벨의 말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있었다.
애초에 그녀가 한 말 자체를 듣지 못한 기색이다.
“아저씨?”
심지어 그는 라나의 질문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아무래도 머릿속이 복잡한 것 같다.
“이것 좀 처리하고 오마.”
그렇게 얼마를 침묵하고 있었을까.
데이브는 불현듯 곰을 짊어진 채 밖으로 나섰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어색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한 라나가 그런 데이브를 따라가려 했지만 거절당했다.
데이브는 말없이 고개를 저을 뿐이다.
“허! 저 사람은 대체 뭐죠?”
이자벨은 이제 어이가 없다는 얼굴이다.
뭐 저런 사람이 있단 말인가?
“음.. 쟤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어.”
니콜라스는 말없이 쓰게 웃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도 없는 상황 아닌가.
‘애초에 나도 잘 모르기도 하고.’
“뭐, 내가 아는 만큼이라면 설명해 줄게.”
하지만 이대로 입을 다물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겠지.
교단과 친해지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그렇다고 교단과 적대하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그전에 확인 하나 해보자고. 내가 알기로는 교단 측에서도 연금술사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다던데?”
“..연구소에 대한 거라면,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 안 들었어? 성녀 당신도 들었잖아. 아까 마족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
니콜라스의 질문에 성녀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마족들의 입에서 나온 연금술사라는 단어다.
“그들이 마족과도 연결되어 있다고 말씀하고 싶으신 건가요?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라는 거죠? 그럼 더더욱 마족들을 잡아서 내막을 알아내야..”
“말 끊어서 미안한데, 내 출신이 어딜 것 같아?”
“네? 그건 갑자기 왜.”
“뭐, 일단 대답해 보라고.”
느닷없는 질문. 그러나 이유를 묻기엔 상대의 태도가 지나치게 진지하다.
그렇기에 이자벨은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이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억양이나 생김새를 보면 남부 왕국 출신 같군요. 사막 왕국 라바이덴이나 섬나라 포레이스 출신이시려나요?”
“오, 맞췄어. 나는 라바이덴 출신이거든.”
“..퀴즈나 풀 기분은 아닌데요?”
“그렇겠지. 그런데 라바이덴에도 연금술사 놈들의 마수가 뻗어 있었다면 어떨까?”
“..뭐라고요?”
니콜라스의 말을 들은 이자벨의 표정이 변했다.
그러나 니콜라스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곳만이 아니야. 여기 이 엘리아도 그 연금술사들에게 아버지를 잃었고, 라나도 그놈들에게 납치되었다가 풀려나기도 했으니까.”
“라나 양에 대해서라면 안토니오 추기경에게 들었지만, 설마 두 분에게까지 그런 일이 있었다니..”
이자벨이 당황한 듯 엘리아와 라나를 바라보았다.
용사의 일행치고는 보기 드문 조합이라 생각하긴 했었지만 설마 그런 사정이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럼 용사님께서 이분들을 구해주신 건가요?”
“내가 아니야. 저놈이지. 성녀 당신이 그토록 싫어하는 데이브 클락.”
“그건.. 무척이나 의외군요.”
“진짜 놀랐다는 얼굴이네. 그 녀석이 성격이 좀 더럽기는 해도 라나에게는 친절한데.”
이자벨의 얼굴에 떠오른 의구심.
그 모습을 본 니콜라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그녀와 데이브는 근본적으로 맞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하기야 마왕과 성녀의 사이가 좋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겠지만.
“그래, 그건 네가 알아서 판단할 일이겠지. 뭐든 간에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야. 이 연금술사 놈들의 세력이 생각보다 넓게 분포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의 목적이 마족의 멸종과 용사의 죽음에 있다는 것.”
“..마족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용사의 죽음이라니요?”
“거기서부터는 내가 설명할게.”
니콜라스의 뒤를 이어 입을 연 것은 벨이었다.
그녀는 이자벨과 엘리아, 그리고 라나를 바라보며 설명을 이어 나갔다.
“한번 정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긴 했었지. 전에 설명했을 땐 라나는 자고 있기도 했으니까.”
벨은 그렇게 말하며 지금까지 일어난 사건들로부터 알아낸 정보와 세계의 진실 일부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연금술사들의 목적은 태양신의 부활이며, 그것을 위해 수많은 왜곡점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 필요한 것들이 마왕의 완전 소멸과 용사의 죽음이라는 것.
“..그렇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나죠?”
“이 세상이 멸망하겠지. 아무래도 그 아이들은 태양신에 대해 뭔가를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으니까.”
“..멸망.”
이자벨은 벨의 말에 신탁의 내용을 떠올리고 있었다.
최후의 순간 그녀가 천사에게 물었던 사도의 이름.
‘그때는 내가 잘못 들은 거라고 생각했지만..’
분명 천사는 이렇게 말했었다.
벨제뷔트.
이자벨은 가만히 그 이름을 곱씹었다.
* * *
곰의 가죽을 벗기고 고기를 도축한다.
칼날을 타고 피가 흘러내린다.
“..후.”
나는 필요 없는 부분들을 대충 태워 정리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못 먹는 부분이 꽤 많았다.
야생 동물이라 그런지 군데군데 기생충이 있었던 탓이다.
화륵.
나는 간이 그릴을 만들어 고기들을 훈연했다.
근처에서 따온 허브들이 냄새를 지워내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연기의 경우는 오러를 이용해 감췄다.
가볍게 방향을 틀어내는 것만으로도 마족의 눈을 속일 수 있겠지.
나는 그렇게 앞으로의 여정의 식량을 비축했다.
“..넌 진짜 뭐냐?”
그런데 그 순간,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녀석이 있었다.
푸른 귀화를 피워내며 콧김을 내뿜는 흑마.
“..자세히 보니 유령마는 아닌 것 같은데.”
그런데 이제 보니 유령마치고는 좀 특이하다.
보통의 유령마가 흘리는 푸른 불꽃은 불이라기보다는 귀화에 가까워 오히려 차가웠는데.
이 녀석의 불꽃에서는 냉기보다는 열기가 느껴졌다.
화르륵!
놈의 등장에 훈연을 위해 피워둔 불꽃이 강하게 타오른다.
아무래도 저 푸른 불꽃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몸 상태가 좋아지는 것 같은데.”
변화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흑마의 등장과 함께, 나는 바닥을 치고 있던 기분이 회복되는 것을 느꼈다.
우울했던 감정이 극적으로 고양되고 오러의 흐름이 눈에 띄게 좋아지고 있었다.
기묘한 감각. 나는 나도 모르게 녀석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너, 나를 따라오려는 거냐?”
녀석과 눈이 마주친다.
흑청색의 눈동자가 나를 바라본다.
“푸르릉.”
짧은 투레질과 함께 녀석이 나를 향해 다가온다.
가볍게 고개를 숙이는 흑마.
나는 조심스레 손을 들어 놈의 머리를 쓰다듬..
콰직!
..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녀석이 내 손을 물어버렸기 때문이다.
미처 손을 뺄 틈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이 망아지 새끼가..!”
“히이이잉!”
그 직후 흑마는 얼굴 가득 조소를 지으며 도망쳤다.
지금까지의 고고했던 모습은 전부 연기였던 것일까?
나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흑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하도 어이가 없다 보니 쫓을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더럽게 빠르네.”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놈에게 물린 손을 보았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고작 그런 장난 따위에 기분이 상할 내가 아닌데도 어쩐지 마음이 좋지 않았다.
‘..전에 만난 적이 있는 건가?’
사라지는 푸른 불꽃.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기묘한 그리움을 느꼈다.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휑해지는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