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s not a hero, he's a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95)
95화 – 되살아난 숙명(1)
가볍게 승리를 거두고 돌아온 라나.
반면, 사라는 여전히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적막이 이어진다.
사태를 지켜보던 벤이 기절한 사라를 그늘 밑으로 옮겼다.
딱히 문제가 될 만큼 큰 상처는 없었지만 깨어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다.
‘생각했던 것보다 싱거운 결말이었네.’
하기야 사라 정도의 실력으로는 백날 덤벼봤자 지금의 라나를 이길 수는 없을 거다.
경지 자체의 차이가 있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몸에 익힌 기술의 수준부터가 차이가 났으니까.
사실, 이 둘의 차이는 승부 자체가 성립이 안 될 정도로 벌어져 있었다.
‘그렇다고 소득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내가 사라의 제안을 받아들인 건 일전에 라나에게 고블린 던전을 돌게 했던 것과 같은 이유에서다.
자신보다 작거나 비슷한 크기의 적과의 전투 경험을 쌓는 것.
지금까지 자신보다 큰 상대와 싸워왔던 라나에게는 딱 맞는 훈련이라고 여긴 것이다.
“앞으로는 귀찮다고 저한테 넘기지 말아주세요.”
다시 말하지만 절대 귀찮아서 떠넘긴 게 아니다. 진짜다.
“뭐, 그러마.”
하지만 여기서 변명해 봤자 믿어주진 않겠지.
나는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니콜라스와 엘리아를 불렀다.
내 부름에 나를 바라보는 두 사람.
나는 그와 동시에 바닥의 돌 하나를 주워 그쪽으로 던졌다.
“우왁!”
니콜라스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움츠렸다.
하기야 눈앞에 돌멩이가 지나가는데 누구인들 그렇지 않겠냐마는.
“가, 갑자기 돌은 왜 던져? 날 죽일 작정이야?”
“널 노린 거 아니야. 그러니까 엘리아 좀 진정시켜. 눈에서 불 나오겠다 야.”
나는 나를 노려보는 엘리아의 옆을 지나치며 걸어 나갔다.
그런데 나도 나름 동료인데 좀 너무한 거 아닌가? 돌을 맞춘 것도 아니고 미리 경고까지 해줬는데.
“이제 그만 나오지?”
그보다 문제인 건 저쪽이다.
나는 두 사람의 뒤쪽에 있는 골목을 향해 소리쳤다.
의아한 표정의 니콜라스. 대체 누구에게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하긴, 지금 니콜라스의 수준으로는 아직 저 정도의 기척을 느끼기는 힘들 거다.
나만 해도 알아채는 데에 시간이 좀 걸렸으니까.
“오, 언제부터 안 거지?”
능청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제는 지긋지긋한 목소리.
이윽고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두 명의 용병이다.
“팔 고치러 온 거냐?”
무형검 예이츠와 텅 티르의 등장.
나는 질문과 동시에 텅 티르의 휑한 오른팔을 보았다.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여기에 성녀가 있긴 한가 보다?”
“그래, 지금은 자리를 비웠지만.”
“오, 역시 제일 시끄러운 곳으로 오길 잘했네.”
“시끄러운 곳?”
“몰랐어? 티그리스 왕국의 용사가 레온하트에 나타났다는 소문이 파다하던데.”
나로서는 처음 듣는 소문이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꽤 위험한 상황이었다.
지금의 나는 마족과 연금술사 양측에게 쫓기고 있는 처지였으니까.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 안 그래도 오는 길에 그 기계 놈들을 정리하고 왔거든.”
“그걸로 빚을 갚겠다는 거냐?”
“그럴 리가. 내가 그렇게 쩨쩨하게 굴 것 같아? 사람을 어떻게 보는 거야?”
그야 나는 모르지. 너와 나는 적이 아니었던 적이 없는 사이인데.
“그리고 웬 마족 하나도 쓰러트렸지. 야. 너무 노려보지 마.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었잖아.”
“그래서 고맙다는 말이라도 하라고?”
“그런 건 바라지도 않지. 그냥 입장을 확실하게 하라는 거야. 정말로 네가 그 아이를 지키고 싶은 거라면.”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불쾌하긴 했어도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유념해 두지.”
“그래. 그나저나 저 아가씨도 꽤 강해졌는데? 그리고 그 검술은 뭐야? 대체 언제부터 그런 걸 숨겨두고 있었어?”
“숨긴 적 없다. 너희 인간들이 잊어버린 것뿐이지.”
“..용사의 기술이었군. 하긴, 무형검도 전승자가 없어 실전되어 버렸으니.”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예이츠 이 녀석. 못 본 사이 실력이 더 늘어난 것 같다.
대충 보니 벌써 그랜드 마스터에 올라간 것 같은데.
싸우면 내가 이기기야 하겠지만, 역시 경지의 성장 속도에 있어서는 내가 밀리는 것 같다.
하긴, 저 녀석으로선 한 번 가본 길을 다시 걷는 것이니 빠를 수밖에 없겠지.
“그럼 대체 몇 번째 용사의 기술이지? 일단 나는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첫 번째.”
“까마득한 선배님이셨군.”
예이츠가 라나와 눈을 마주한다.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지만 미약한 공포가 어린 눈이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라나의 안에 있는 아르카나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고 했었나?
예이츠가 라나에게 묻는다.
“그 친구는 자는 건가?”
“누굴 말씀하시는 거죠?”
“아르카나 말이야.”
“….”
라나가 당황한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그러고 보니 예이츠에 대해 알려 주는 걸 잊어버렸군.
나는 라나에게 예이츠를 짧게 소개했다.
“..누구라고?”
라나와 함께 이야기를 듣던 니콜라스가 당혹해하며 되묻는다.
하긴, 생각지도 못하게 전대 용사와 만나게 되었으니 오죽하겠냐마는.
“…그러니까. 전대 용사님이시라고요?”
“뭐, 그런 셈이지. 지금은 반쯤 좀비나 다름없지만.”
예이츠가 빙긋 웃으며 라나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 손짓에 화들짝 놀라는 라나.
아마도 복합적인 이유에서였을 거다.
사람치고는 차가운 피부와 무형검 특유의 소리 없는 움직임.
무엇 하나 이질적이지 않은 게 없었을 테니까.
“야, 함부로 만지지 마라.”
“어이쿠. 팔불출이 다 되셨군.”
예이츠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손을 뺀다.
하여간 마음에 안 드는 녀석이다.
“성녀는 나중에 올 테니 그때 다시 와라, 네 얼굴 보기 싫으니까.”
“흠. 나도 그러고 싶긴 하지만 용건은 그게 전부가 아니라서.”
“또 다른 용건이 있다고?”
“그래, 그것도 조금 심각한 이야기야. 그런데 쟨 뭐냐?”
이야기를 이어 나가던 중, 예이츠가 턱짓으로 뒤쪽을 가리킨다.
그것을 따라 고개를 돌려보면, 프로키온이 사라에게 무언가 수작을 부리려 하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마력의 파동이 느껴진다.
“니콜라스. 밟아.”
“엉. 그래.”
“끄아아악!”
아무래도 저 녀석. 사라를 세뇌해서 도망치려던 것 같다.
설마 아직도 포기를 하지 않았을 줄이야.
“기왕 이렇게 된 거 여기서 끝을 내보자고.”
나는 이참에 이놈이 가진 서클을 파괴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놈의 심장을 겨누는 검.
“자, 잠깐! 항복할게! 항복!”
“이미 붙잡힌 주제에 무슨 항복.”
“아는 걸 다 말할게! 제발 서클만은 부수지 말아줘!”
“흑마법사가 마족을 배신하겠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나는 놈의 말을 일축하며 그대로 칼끝에 오러를 집중시켰다.
들을 가치가 없는 말이라 생각해서다.
그도 그럴 게 보통 흑마법사의 계약이라는 건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다.
마족이건 흑마법사건 간에 쉽게 파기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다.
그러나 이런 경우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지금처럼 흑마법사 쪽에서 먼저 배신하려 든다면 마족 측에서는 언제든지 흑마법사의 힘을 빼앗아 갈 수 있으니까.
‘무엇보다 이놈으로서는 차라리 서클이 부서지더라도 계약을 유지하는 게 낫겠지. 서클이 부서지더라도 계약만 유지되어 있으면 마족이 이 녀석의 심장을 고쳐줄 수 있으니까. 물론, 도망치는 게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뭐든 간에 이 말을 믿을 수는 없었다.
나는 그대로 검에 힘을 주었다.
“계약은 이미 끊어졌어! 난 더 이상 흑마법사가 아니라고!”
“..뭐?”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소리지?
계약이 끊어져? 대체 어떻게?
“잠깐! 뭐, 뭐 하는 건데!”
“입 다물어.”
나는 그대로 검을 그어 녀석의 상의를 찢었다.
풀어 헤쳐진 상의. 나는 염제의 눈을 통해 녀석의 심장을 들여다보았다.
계약의 증거를 살피려는 것이다.
“..진짜로 끊어졌군.”
“그, 그렇다니까!”
흑마법사. 아니, 이제는 그냥 4서클 마법사가 되어 버린 프로키온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은 채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좀 혼란스러웠다.
마족이 계약자의 목줄을 멋대로 풀어버리다니? 스스로 부담을 자처하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이렇게 되면 프로키온 측에서 정보를 누설해도 제약을 걸 수단이 없을뿐더러 추후 있을 계약에서도 불리해지게 될 거다.
‘계약은 그렇다 치자. 자기 정보가 흘러 나가도 상관없다는 거냐? 아니, 아니군.’
나는 염제의 눈으로 프로키온의 목을 바라보았다.
“너, 저주가 걸려있군.”
“뭐, 뭐라고? 저주라니?”
“아마도 네가 마족에 대해 발설하면 목숨을 잃는 저주겠지.”
“대, 대체 언제 저주를 건 거지? 아니, 넌 그걸 어떻게 알아본 거냐? 당사자인 나조차도 몰랐던 내용인데.”
나는 프로키온의 말을 무시하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실, 저런 종류의 저주에 대처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하나는 이자벨에게 저주를 해주 해달라고 부탁하는 것.
다른 하나는 여기서 프로키온을 죽여버리고 그 사념에서 정보를 뽑아내는 거다.
‘..그런데 일이 그렇게 쉬울까?’
그러나 막상 행동에 나서려니 기묘한 불안감이 든다.
근거는 없지만 그래선 안 될 것 같다는 생각.
나는 가만히 녀석을 지켜보다 라나와 니콜라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죽일까. 말까. 어떻게 하는 게 좋겠냐.”
“..뭐라고?”
니콜라스가 당황을 금치 못한다.
음. 너무 단도직입적이었나?
“죽이면 안 돼요.”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려던 찰나, 라나가 나를 제지했다.
그런데 이건 어느 쪽인 걸까.
용사 특유의 오지랖인가. 아니면 평소 라나가 보였던 예지에 가까운 직감인 걸까.
나는 그 진위를 파악하려 라나와 눈을 마주했다.
“..묘한 예감이 들어요. 여기서 그 사람을 죽이면 진실에서 멀어질 것 같은 기분이요.”
“..그래, 알겠다.”
아무래도 그 배신자 녀석. 쉽게 꼬리를 보이진 않으려는 모양이다.
나는 우선 이자벨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보기로 마음먹었다.
“뭐, 뭘 하려는 거야!”
“쓸모가 없으니 우선 가둬둬야지.”
나는 주술을 이용해 프로키온의 심장에 봉인을 걸었다.
이제부터는 내가 허락하지 않는 한 마법을 쓸 수 없게 되겠지.
프로키온이 허탈한 얼굴로 날 올려다본다.
“들어가 있어.”
나는 프로키온을 내 그림자로 밀어 넣었다. 솔레이가 반항하는 것이 느껴진다.
그러고 보니 마릴 녀석. 지금쯤이면 깨어났을지도 모르겠군.
“자세한 이야기는 저쪽에서 하지.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으니까.”
“뭐, 그러자고.”
나는 예이츠와 일행들을 데리고 자리를 옮겼다.
* * *
벤이 사라를 눕힌다.
아직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녀석.
나는 그대로 두고 가고 싶었지만 라나가 그걸 막았다.
“그래, 할 이야기가 뭐냐.”
잠시 주위를 살펴보다 예이츠에게 묻는다.
뭐가 그리도 비밀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 나름의 성의는 다한 셈이다.
“혹시 모르는 일이니 일단 차음막을 펼쳐두자고.”
그러나 예이츠는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녀석의 오러가 주위를 둘러싼다.
찾아드는 정적. 오러를 다루는 능력이 제법이다.
“보고 배워둬라. 전에 보니까 너. 마기를 다루는 건 몰라도 오러는 형편없더라.”
“쯧.”
누가 그걸 몰라서 안 하는 줄 아나.
“헛소리하지 말고 대답이나 해. 대체 뭐길래 이렇게 요란을 떠는 거야?”
“그래, 본론만 말해보자고.”
예이츠가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용사들이 되살아났다.”
“그거야 늘 있었던 일이잖아.”
“내가 말하는 건 그런 인형 같은 것들이 아니야. 나처럼 자의식을 가진 용사들을 말하는 거지.”
“..뭐라고?”
누가 그랬던가. 한 번 일어났던 일은 두 번 일어날 수도 있다고.
“..너 같은 놈들이 또 있단 말이야?”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받아들이기가 힘든 이야기가 있는 법이다.
무형검 예이츠의 부활만 해도 이미 예외 중의 예외나 다름없는 일.
그런데 그런 용사들이 또 나타났다고?
“그래. 아마 너에게도 익숙한 이름일 거다.”
“당연한 소리 아니냐? 내가 모르는 용사는 없으니까.”
“아니, 그런 말이 아니야.”
묘한 얼굴로 고개를 젓는 예이츠.
녀석이 나와 눈을 마주하며 말을 이어간다.
“천둥의 용사 티타르. 낙화검 에나. 바위 거인 돌레스. 낚시꾼 초이. 마지막으로 하늘검 비앙카까지..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지 않나?”
“..내가 팔레아스 령에서 싸웠던 놈들이군.”
나는 그 말에 혼란을 느꼈다.
하나같이 나와 싸웠던 용사들만 되살아나다니.. 이걸 우연이라고 볼 수 있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