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ding a House in the Apocalypse RAW novel - Chapter (208)
아포칼립스에 집을 숨김-208화(208/466)
93. 제주에서 온 남자 (1)
인터넷은 인터넷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나는 인터넷과 현실을 엄격히 구분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 세상엔 인터넷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과몰입하는 사람이 꽤 많다.
개인식별번호 : DARAM2
김다람도 그런 인간 중 하나로 보인다.
“어. 다람아. 무슨 일이냐?”
태연하게 연락을 받자 떨리는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다.
“선배.”
떨리는 목소리.
무서워서 떠는 게 아니라 화가 나서 떠는 거다.
“······선배 인터넷 한다고 했지?”
“어. 비바! 아포칼립스!라면 하지.”
“블라인더. 알지?”
“블라인더? 그 창문에 커튼 대신 다는 거?”
“아니, 인터넷 사이트.”
“블라인더? 글쎄. 금시초문인데. 나는 비바! 아포칼립스!만 하거든. 자랑은 아니지만 거기 네임드야.”
“선배 지금 어디야?”
내 감이 맞는다면 김다람은 내 방공호 주변에 있을 것이다.
“지금? 밖에 있어.”
천연덕스럽게 답했다.
“밖? 어디?”
“응. 파주.”
“잠깐만.”
김다람이 타임을 요청했다.
속내는 뻔하다.
아마 무전기에 부착된 거리 추정 기능으로 내 거리를 가늠해보려 하는 것이겠지.
“진짜 파주야?”
“내가 왜 있는 곳을 속이겠어?”
“파주는 왜?”
“아, 내 나름대로 연구 중인 게 있어서 말이야. 몬스터에 관한.”
“······이상하네.”
“뭐가 이상해?”
“동탄맘은 알아? 걔도 그 위성 인터넷 한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동탄맘······?”
일부러 잠시 뜸을 들였다.
마치 생각을 하는 것처럼.
눈앞에 김다람은 없지만 메소드 연기를 하는 양 마치 김다람이 눈앞에 있는 것처럼 주먹을 손바닥에 내려치며 단호하게 말했다.
“아. 알 것 같아.”
“누구야?”
“백승현이다.”
“백승현?”
“12기. 전장에 있다 전역 후 다시 복귀해서 프리랜서 헌터를 하던 놈이야. 너도 잘 알지 않나? 네가 나에게 같이 일하라고 보냈는데.”
“아. 그 백승현? 아직도 안 죽었어?”
“지금 중국에 있어. 중국에서 갖가지 분탕질을 하고 있지. 내가 그때 그 녀석을 어떻게 했어야 했는데······.”
“파주 어디야? 검문소 통과했어?”
김다람은 피지컬은 훌륭하지만 상대적으로 지능은 떨어지는 편이다.
해서 그녀가 생각하는 게 나에겐 손바닥 들여보는 것처럼 빤히 보인다.
무전기를 보니 내가 멀리는 있는 거 같으니 파주에 있는 걸 단정할 수 없기에 인근에 배치된 군인을 통해 내 위치를 알고 싶었던 모양이지.
그런데 나는 이미 파주로 출발한 상태다.
“아직.”
“그럼 검문소에서 내 이름 대줄래?”
“왜?”
“그 사람들이 편의를 제공해줄 거야. 요즘. 거기 삼엄하거든.”
“응. 고마워.”
“뭘.”
교신을 끊는 와중 김다람의 중얼거림이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비틱 아줌마? 어떤 새끼야······.”
“······.”
교신 종료.
내가 한 일이지만 스스로 무서울 정도의 위기관리 능력이다.
이 정도 감과 판단력이 있었으니 황금양털을 받을 수 있었겠지.
김다람에게 교신이 온 시점에 나는 이미 파주 인근에 도착한 상태였다.
파주는 예전에 카일도스 건으로 간 적이 있다.
그 이후에 정부에서 관리를 한 모양인지 도로에 수북이 널려 있던 폐차를 싹 치우고 여기저기 부서진 도로도 보수된 상태였다.
도로에 남은 오래된 타이어 자국은 이 도로를 통해 대형 화물차가 빈번하게 오갔음을 시사하고 있었다.
검문소는 잘 정리된 도로 끝단 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명색이 검문소라지만 컨테이너 하나에 태양열 전지판 소수, 기껏해야 4명 정도의 병사가 근무하는 작은 초소였다.
유독 돈을 들여서 지은 감시탑이 이 검문소의 진짜 목적이 뭔지 짐작게 했다.
아마 사람보다는 몬스터의 접근을 감시하려고 지은 것이겠지.
몬스터의 위험성이야 전선에 있었던 군인들이 누구보다 잘 알 테니 말이다.
컨테이너 옆 반짝이는 차량도 내 짐작에 힘을 실어다 주었다.
작정하면 멀리 돌아가면 그만이지만 김다람 건도 있겠다 초소로 곧장 다가갔다.
“정지. 정지.”
가까이 가자 병사 두 명이 나타났다.
모두 하사 계급장.
잠시 후 상사 계급장을 단 병사 하나가 더 나타났다.
블랙코미디적인 이야기지만 군단파의 군대 안엔 “병” 계급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제일 말단 계급이 하사라는 이야기다.
간단하게 신분과 목적을 밝혔다.
상사 계급을 단 사내가 내 말을 메모지에 옮겨 적으며 날 빤히 보았다.
“샘플 확보요?”
“네. 침식지대의 변형된 식물 샘플을 구하러 갑니다.”
대한민국에서 인정 받으려면 사짜 소리 듣는 사람들 흉내 내는 게 편하다는 건 직접 경험한 사실이다.
병사들이 의아해하자 김다람의 이름을 댔다.
김다람은 군단파 안에서도 꽤나 유명한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들이 날 통과시킨 건 김다람의 이름값이라기보다는 그들의 임무다.
“뭐, 가신다면 막진 않겠습니다.”
내 예상대로 이 병사들의 유일한 임무는 몬스터에 대한 감시다.
사람이 드나드는 건 그들의 관심사도 아니고 책임도 아니다.
“······그래도 조심하는 건 좋겠죠. 이 너머는 아시다시피 완전 침식지대니까요. 몬스터, 뮤테이션 뿐만 아니라 정신 나간 미친놈들도 간혹 눈에 띕니다.”
“그렇군요. 몬스터 같은 것도 넘어오나요?”
“가끔 오긴 하는데 그리 많진 않습니다.”
“그래요?”
의외다.
이 정도 거리라면 중형종 같은 건 발에 챌 정도로 많이 볼 텐데 말이다.
킬존으로 버티던 시절이라면 모를까 지금 같은 시기라면 더더욱 말이다.
병사들과 헤어지고 도로 안쪽으로 갔다.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도로 상태가 급격하게 나빠지며 풍경이 회백색으로 물들어갔다.
아마 카일도스의 방공호가 이 주변에 있지 않았을까?
예전에 이미 침식됐다고는 하지만 이 정도로 상태가 나쁘진 않았다.
땅을 태운 흔적과 포격의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내가 모르는 동안 이 주변에서 전투가 벌어졌는지도 모르겠다.
우민희에게 들은 대로 버려진 군기지로 향했다.
과거 균열 앞에 킬존을 형성한 정예부대의 주둔지였는데 그곳도 멸망 앞에서는 풀이 자라고 곳곳이 부서진 콘크리트 묘지로 전락했다.
그 콘크리트 묘지 위로 깃발 하나가 나부낀다.
하얀 깃발. 백기다.
몬스터에게 항복이라도 하려 했던 것일까.
반쯤 꺾인 채 덧없이 펄럭이는 해진 깃발을 지나치자 컨테이너 여럿이 모여 있는 은신처가 모습을 드러냈다.
높은 바위 위에 은은한 안광을 발하는 남성이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교신기에 대고 뭐라고 말하자 컨테이너 안에서 다수의 사람들이 출현했다.
총기를 든 사람은 한 명 뿐이지만 거의 모든 사람의 눈동자에 은은한 안광이 서려 있었다.
즉시 무전기에 대고 우민희를 호출했다.
가장 높은 곳에 고고히 서 있던 저택의 문이 열렸다.
“선배~!”
의수와 의족, 하얀 가운을 입은 내 후배가 날 내려다보며 양팔을 크게 흔들었다.
*
국위원 소속 제551 관측기지.
통칭 회색 골짜기.
그곳이 우민희와 그녀의 부하들이 모여 있는 마지막 피난처였다.
캠프의 인원은 20명에서 30명 정도로 보였는데 사람들의 건강과 청결 상태는 양호했고 분위기도 내가 생각한 것만큼 나쁘지 않았다.
우민희는 군부대 관사 쪽에 살고 있었다.
그녀는 응접실로 날 안내했다.
어웨이큰으로 보이는 낯선 여성이 차를 내왔다.
우민희는 보란 듯이 의수로 찻잔을 들어 내 앞에서 차를 음미했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 이렇게 서둘러 온 거야?”
“그냥. 어쩌다 보니. 안 그래도 너에게 받은 것도 많은데 갚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가진 짐을 꺼내 그녀에게 보였다.
식량과 의약품, 설탕 같은 기호품이다.
특히 식량 중엔 내가 직접 재배해서 만든 말린 나물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름 많이 준비했지만 30명이나 되는 집단에겐 쥐꼬리만 한 양이겠지.
그래도 이곳에 온 용건은 확실하게 전달했다.
“며칠 좀 머물러도 될까? 개인적으로 조사하고 싶은 게 있어서 말이야.”
김다람의 별명 중 하나는 붕어다.
그만큼 기억력이 좋지 않다.
정확하게는 필요한 것만 기억하고 불필요한 건 빨리 잊는 스타일이지만.
상당히 좋은 특성이다.
특히 우리처럼 전장에서 못 볼 꼴을 수도 없이 봐야 하는 사람들에겐 말이다.
아마 3일 정도 지나면 화가 풀리지 않을까?
전장이 아무리 위험하다고 해도 비틱 아줌마 소리 들은 김다람보다는 덜 위험할 것이다.
“며칠 정도?”
“사흘? 아니 이틀 정도.”
우민희가 야릇한 눈으로 날 빤히 쳐다보았다.
“혹시 사고 친 건 아니지?”
“알잖아? 나 모범생인거?”
“흐음~.”
뭔가 이야기를 꺼내려는 우민희를 애써 무시하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뭐랄까, 상상했던 이미지와 많이 다르다.
내가 생각한 건 당장이라도 몬스터의 공격 앞에 무너질 것 같던 격렬한 전장의 풍경이었다.
하지만 생각과 달리 주변엔 별다른 전투의 흔적도 없고 우민희를 포함한 어웨이큰들에게도 전장 스트레스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어웨이큰이 몬스터를 우리보다 쉽게, 위험부담 없이 잡는다지만 균열 지대다.
소형종 한두 마리 상대하는 게 아니라 수백 마리에 달하는 중형종 무리를 상대하는 곳이다.
심지어 이제는 어웨이큰을 저격하는 몬스터까지 등장했다.
아무리 우민희가 있다고 해도 이런 평안함은 전장에 오래 발을 담갔던 나로서는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얼마 지나지 않아 총성이 울려 퍼졌다.
창밖을 돌아보자 우민희가 웃으며 말했다.
“무시해. 별거 아니니까.”
“별거 아니라니.”
“북한 애들이야. 우리 기지 주변에 뭐 훔쳐갈 거, 먹을 거 없나 염탐하러 온 거지.”
우민희가 창밖에 나란히 섰다.
“저기.”
그녀가 갈고리 같은 손가락을 펴 회백색으로 물든 숲을 가리켰다.
과연 거기에 퀭한 눈빛의, 해골처럼 마른 사람이 이쪽을 멀리서 노려보고 있었다.
탕!
누군가 쏜 탄환이 바로 옆 나무를 뚫고 들어가도 그 중년 여자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이쪽을 주시하다 돌아섰다.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사람 같지 않은 그 모습은 오랫동안 잊고 있던 오싹함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너희들은 괜찮냐?”
침식지대에 있는 사람은 정신이 이상해진다.
통설은 이를 부정하고 있지만 현장에 있는 우리들은 이를 확고한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아, 괜찮아. 여기가 상태는 좀 그래도 확실하게 방역을 하고 있으니까. 검진도 꾸준히 하고 있고. 식수도 안전한 방식으로 확보하고 있어.”
우민희가 나를 저택 바깥으로 데리고 갔다.
깎아지른 산정 위에 허여멀건 한 벽 같은 것이 산정을 타고 오르는 흐릿한 안개 속에 겹겹이 서 있었다.
그녀가 그 벽으로 날 안내했다.
가까이서 보니 벽이 아니다.
벽이라기보다는 길게 늘어뜨린 그물을 끝없이 늘어선 형태.
나는 이 도구가 뭐지 알고 있다.
“이건? 안개포집기?”
“어? 잘 아네?”
우민희가 의외라는 눈으로 보았지만 나 같은 비바! 아포칼립스! 고참 유저들이라면 다 아는 것이다.
지하수를 구하기 어려운 아프리카 산악지방에서 안개가 함유한 물을 성긴 섬유조직 같은 그물을 펼쳐 확보, 연결된 관을 타고 흐르게 하여 다량의 생활용수를 확보하는 시설이다.
장비 특성상 경사가 있는 넓은 지역을 필요로 하기에 나 같은 개인 생존주의자보다는 집단생존주의자에 어울리는 아이템이지만 당시엔 핵공격이 대한민국 모든 지하수를 오염시킬 거라는 낭설이 돌아 나도 한때 구입을 고려했던 도구라 잘 안다.
“침식지대의 지하수가 특히 위험하다고 하더라고. 침식으로 변형된 나무에서 흘러내리는 진액 같은 게 정신에 해로운가 아닌가, 하는 가설을 우리 연구소에서 발표했었지.”
“그렇군.”
설명을 들으면서 주변을 살폈다.
역시 전투의 흔적은 없다.
“선배. 무슨 생각해?”
우민희는 날카롭다.
즉시 생각하는 바를 말했다.
“몬스터는 어디서 막는 거지?”
나의 질문에 우민희가 야릇한 미소를 머금었다.
곧 그녀가 저택 쪽으로 먼저 내려가며 말했다.
“안 막아.”
“뭐?”
이해가 가지 않는다.
송유진이 말했다.
우민희는 몬스터를 막기 위해 전선에 갔다고.
실제로 몬스터를 막고 있다고 생각했다.
왜, 그렇게 많은 몬스터가 나타났다는데 당연히 서울 쪽에서도 중형종 이상을 볼 수 있었겠지.
그랬다면 김병철이 원했던 국회의사당 수복 같은 건 꿈도 못 꿨을 것이고.
“아.”
우민희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은 채 날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제는 말해줘도 되겠네. 이렇게 된 마당에 굳이 숨길 필요도 없어 보이고.”
뭔가 꿍꿍이라도 있는 건가.
그녀의 느릿한 발걸음을 따라가며 우민희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막을 필요가 없거든. 생각을 해 봐. 과거에 우리가 왜 몬스터를 막았겠어? 몬스터가 나타나면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 타격이 오니까 그렇게 피와 돈을 들여가며 싸운 거 아니겠어?”
“그건 그렇지.”
“인도 – 파키스탄의 경우는? 서로 안 막았잖아. 국경 지대니 복불복이라고. 열린 균열 지켜보고 있다가 자기 쪽에 오는 몬스터만 사냥했고 나머지는 무시했지.”
그런 일도 있었지.
“어차피 몬스터는 일부 타입을 제외하면 자체 소멸해. 막을 대상이 없다면 굳이 몬스터를 잡을 필요가 조금도 없다는 거지. 지금처럼 물자가 부족한 세상은 더더욱.”
“그럼 어떻게 한다는 거지?”
이미 내 머리는 한 가지 가능성을 예측하고 있었다.
즉, 유도다.
몬스터를 다른 곳으로 끌어들여 소멸을 기다리는 것.
우민희의 말마따나 피를 흘리지 않아도 되는 가장 현명한 해결책이다.
“유인하는 거지.”
그렇다면 한 가지 문제가 남는다.
어떻게 몬스터라는, 지성도 없고 본능도 없이 오로지 정해진 대로 움직이는 무기질에 가까운 괴물들을 유도한단 말인가?
내가 알기로 그러한 방법은 없고 연구된 적도 없었다.
하지만 우민희는 뭔가 발견한 것처럼 보인다.
“몬스터의 편향성을 발견했어.”
“편향성?”
“응. 균열에서 나온 몬스터가 어디로 가는 지.”
우민희의 저택 안쪽엔 대기업 빌딩 상황실을 방불케 할 정도로 많은 화면이 있는 방이 있었다.
그 수많은 화면은 어떤 시설의 각기 다른 방을 비추고 있었다.
그곳은 감옥처럼 보였다.
수감자의 모습을 보기 전까지는.
“?”
아이들이다.
십 대 초반에서 중반까지.
그러한 아이들이 100여 개에 다하는 화면 하나하나를 채우고 있었다.
“이건 뭐지?”
내 날선 물음에 우민희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화면을 보며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편향성.”
“······이해가 안 가는데.”
“균열에서 나온 몬스터 무리는 침투형 소형종이 장악한 거점을 향해 나아가는 습성이 있어. 우린 그걸 편향성이라 부르기로 했어.”
“그렇다면 저 아이들은?”
내 물음에 우민희는 날 돌아보며 미소지었다.
“저 아이들 덕에 우리가 살 수 있는 거야.”
“······.”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것이 옳지 않다는 일이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침묵했다.
나는 위선자도 아니고 감당 안 되는 정의감을 가진 사람도 아니니까.
그러한 공허한 울림보다 저 아이들 때문에 우리가 살아간다는 말이 내 안에서 더 큰 설득력을 갖는 걸 보면 말이다.
“우민희 소장님!”
갑자기 스피커에서 젊은 남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민희가 키보드 하나를 두드리자 수백 개의 화면 중 하나가 확대됐다.
화면 안엔 하얀 피부에 곱상하게 생긴 남성이 상기된 표정으로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디서 본 듯한 얼굴.
하지만 잘 아는 사람은 아니다.
그 사내가 질책과 다급함을 담아 우리를 노려보며 말했다.
“식량과 의약품은 언제 옵니까? 네? 지금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잖아요.”
우민희가 그를 보며 나긋나긋하게 답했다.
“미안해요. 위원님. 제주에서 아직 약속했던 보급품이 오지 않아서요. 급한 대로 있는 양만큼 보내도록 할게요~.”
“말로만 하지 말고 오늘 안에 전달해주세요!”
교신이 끊겼다.
우민희를 보며 물었다.
“누구야?”
이에 우민희는 코웃음을 치며 빈정거리듯이 말했다.
“제주에서 온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