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ding a House in the Apocalypse RAW novel - Chapter (211)
아포칼립스에 집을 숨김-211화(211/466)
93. 제주에서 온 남자 (4)
때는 밤이었고 보름달이 떴다.
만월은 도시 주변에 서린 회백색 색채에 음울한 빛을 더했다.
그 모습은 마치 이 세상이 병든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인간의 오염 같은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느낌.
우리가 아는 세상 전체를 해체하려는 듯한 저 너머의 악의가 느껴졌다.
벌집구조 형태의 건물은 일견 벽처럼 보이지만 내가 입수한 구조도에 의하면 벌집의 육각형을 이루는 벽은 다수의 사람이 살 수 있는 공동 주택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 구조는 창만 없다뿐이지 아파트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는데 프라이버시에 대한 존중이 없는 나라답게 화장실과 세탁실, 주방 같은 생활 필수 시설을 공동으로 쓰게 되어 있었다.
한 층의 식당은 50명 정도의 사람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데 그 위치는 내가 사는 혁명동과 정호경이 사는 모란동과 동일했다.
따라서 식당을 찾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공용 식당 안에서는 달그락거리는 식기 소리가 들려왔다.
식사 중이다.
그대로 식당 안으로 돌입했다.
좌우로 긴 일자 테이블 옆에 수십 명의 학생이 나란히 앉아 스텐레스 식판 위에 담긴 음식을 두고 식사를 하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일부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는 가운데 학생들의 식판을 확인했다.
“······.”
밀가루 덩어리다.
혁명동의 아이들이 먹는 것과 똑같은.
홍종범이 한 이야기가 사실이었나.
생각한 것과는 너무 다른 결과에 잠시 굳은 채 멈춰 있었다.
시야 언저리에 움직임이 있다.
누군가가 손을 흔들고 있다.
정호경이다.
“오. 박규씨!”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잠시 경직됐던 나는 움직일 수 있는 동력을 얻는 듯한 감각을 느끼며 빠르게 고개를 돌려 그의 식판을 게걸스럽게 눈으로 훑었다.
“······.”
패착이라는 두 글자가 뇌리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인터넷이라면 모를까 현실에서는 좀처럼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다.
홍종범의 식판 위엔 아이들의 것과 같은, 어떤 의미로 실패작으로까지 보이는 뒤틀린 밀가루 덩어리가 아무런 조미료 없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정호경은 끊임없이 그걸 우걱거리며 나를 향해 손짓을 계속했다.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정호경도 아이들과 같은 식사를 한다.
이 박규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악한 식사를 말이다.
“식사하셨어요?”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나에게 다른 곳으로 가자는 제스츄어를 보냈다.
둘이서 계단을 올라 옥상으로 올라갔다.
만월이 빛나는 밤하늘 아래 음울한 항구의 풍경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가 담배를 입에 물고 내게도 한 개비를 건넸다.
손사래를 치고 넌지시 물었다.
“우리가 식량을 가지고 왔는데 그건 어떻게 됐나요?”
내가 기억하는 것만 조잡한 과자와 다수의 통조림, 여러 대의 쌀포대가 있었다.
밀가루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밀가루만 먹을 정도로 부실한 식사를 제공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건 특식용입니다.”
정호경이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특식요?”
“네. 등불을 밝히고 난 다음 날에 배급하죠.”
“등불을 밝힌다는 게······.”
“네. 몬스터를 유인하는 겁니다. 박규씨가 있을 동안 그럴 일이 생길지 모르겠지만 장관이죠.”
이에 정호경은 코로 하얀 연기를 뿜어내며 씨익 웃었다.
그는 마치 취한 사람 같은 게슴츠레 뜬 눈으로 저 너머에 보이는 수많은 별빛과 달빛을 머금은 바다를 응시했다.
한동안 바다를 감상하던 정호경이 다시 입을 열었다.
“박규씨도 여기가 유배지라고 생각하나요?”
갑작스러운 질문.
“이 등대가 버려진 아이들이 시간이나 끌려고 죽는 인신공양소로 보이세요?”
갑작스러운 질문도 질문이지만 주제가 내가 생각한 이 사내의 이미지와 다르게 무겁기 짝이 없어 아무 말 하지 않고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정호경이 은은한 미소를 머금으며 저 아래 펼쳐진, 회백색의 항구를 내려다보았다.
“절대 아닙니다. 절대 아닐 겁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서 미래라는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앞으로 영원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역사의 현장에 있다고요.”
그가 뭘 하려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내가 알 방법은 없다.
한 가지는 알 수 있다.
“이건 우리끼리의 비밀인데요. 저는 지금까지 살면서 실패를 경험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정호경은 자신이 성공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것이 무엇에 대한 성공을 말하는지는 묻지 않았다.
어차피 물어봐야 이 친구가 내게 그 사실을 이야기해주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
개성 등대에 온 지도 3일이 지났다.
K-워키토키에서 모르는 식별번호로 연락이 왔다.
개인식별번호 : LAB-0072
연락을 받고 보니 라이트닝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잘 계시죠?”
“네. 잘 있습니다.”
“어떤가요? 거기는?”
“인터넷 못하는 거 빼고는 살만하네요.”
“제주에서 보내기로 한 보급품이 도착하지 않아서요. 좀 기다려야 할 것 같아요.”
“제주도에서 보급이 와요?”
“네.”
우민희에게 듣던 것과 다른데.
짐짓 모른 척 하고 말을 이었다.
“공항도 없던데.”
“하늘 위에서 낙하산 매달아 투하해요. 찾는 사람은 힘들긴 하지만.”
“군단파가 그냥 두나요?”
“그 사람들도 몬스터가 내려오는 걸 원하진 않겠죠.”
“알겠습니다.”
“저기.”
교신을 끊으려고 하자 라이트닝이 갑자기 말했다.
“거기에 혹시 종혁이라는 애 보셨어요? 리종혁. 나이는 열일곱 살이고 평양 려명거리 신도시 출신이에요.”
가족인가.
아니면 지인일까.
누구든 간에 소중한 인연이겠지.
나 같은 잘 모르는 사람에게까지 부탁을 하는 걸 보면.
“한 번 찾아볼게요.”
“고마워요.”
무전기 상이지만 라이트닝은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생명력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침으로는 감자 몇 알과 탈지분유를 뜨거운 물에 타 정체불명의 곡식 가루와 섞은 스프가 나왔다.
아이들과의 관계는 여전히 서먹서먹하다.
이쪽에서 거리를 유지하려는 것도 있지만 저쪽에서 좀처럼 다가오려 들지 않는다.
식당 한구석을 차지하는 걸 인정받은 것도 최근의 일이다.
그래도 며칠 지내다 보니 혁명동과 모란동의 차이를 알 것 같다.
이곳 혁명동은 북한 출신이 수용된 곳이고 모란동은 남한 쪽 아이들이 있는 곳이다.
같은 민족이고 같은 언어를 쓴다지만 이역만리 떨어진 외국보다 더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야 했던 사정이 있기에 아이들을 분리한 것으로 보였다.
잔혹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이들은 아주 작은 차이만으로 다른 아이들을 괴롭히는 속성이 있으니까.
같은 동네 살아도 임대 아파트니 뭐니 하고 거지라고 부르는데 나라 자체가 다르면 오죽 할까.
실제로 여기 아이들은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내가 휴대폰을 꺼내 뭔가를 하고 있으면 벌떼처럼 모여들었다.
“그거. 미제 폰이에요?”
단 한 번도 내게 말을 걸지 않았던 아이가 말을 걸어올 정도였다.
“어. 미제는 미제지. 중국에서 만들긴 했지만.”
“한 번 만져봐도 될까요?”
“좋아.”
휴대폰을 던져주고 노는 아이들을 보며 아침에 있었던 교신을 떠올리고 아이들에게 물었다.
“여기. 리종혁이라는 애 아는 사람 있냐? 17살이고 려명거리 출신이라고 하는데.”
“리종혁요?”
아이들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다들 처음 듣는다는 눈치.
그나마 나이가 있는 여자아이가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리종혁요?”
그런데 표정이 썩 우호적이지 않다.
“리관주 아들 말하는 거 같은데. 그 간나새끼 자식이 여기 있으면 살아남지 못할 겁니다.”
“죄라도 지었나?”
“아비가 지었죠. 남한으로 도망가는 사람들에 대고 까스 던지고 기관포 쏴서 못해도 수천 명은 황천에 갔어요. 내 오라바이도 그때 죽었지요.”
식사가 끝난 후 다시 작업에 들어갔다.
아침 식사 자리에 보이지 않던 홍종범이 어떻게 알고 작업장을 찾아오더니 내게 뭔가를 내밀었다.
뭔가 했더니 통조림이다.
그런데 이 통조림.
애견용이다.
“······.”
“안 먹어요?”
“이런 걸 어떻게 먹냐.”
“안 먹으면 나 줘요.”
모처럼 호의가 거절당하자 실망한 눈치다.
서먹서먹한 분위기도 좋지 않을뿐더러, 슬슬 나도 여기서 주는 끔찍한 식사에 질릴 대로 질린지라 숨겨두었던 초코바를 꺼내 보였다.
“이, 이건?!”
반으로 잘라 반을 홍종범에게 주었다.
“이, 이런 게 아직도 남아 있어요?!”
“준비된 사람은 모든 것이 풍족한 법이지.”
“대단해요! 박선생은!”
박선생이라니.
당치도 않은 별명이군.
그래도 아저씨보다는 낫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홍종범에게 물었다.
“리종혁이라는 애 아냐?”
“리종혁?”
“17살이고 려명거리 출신이라던데.”
“글쎄요. 제가 아는 아이들 중엔 없네요.”
홍종범은 대수롭지 않다는 식으로 이야기했다.
“그래?”
“그런데 리종혁은 왜 찾나요?”
“아는 사람이 안부를 전해달라고 하더라고.”
홍종범이 초코바를 씹었다.
“와. 이거! 진짜 맛있어요!”
그는 감동을 온 몸으로 표현하며 초코바를 음미했다.
그 정도인가?
와그작
뭐, 먹을 만 하긴 한데 오래된 맛이 나는 건 어쩔 수가 없겠지.
그래도 여기서 먹던 밍숭맹숭한 식사와 개사료용 통조림보다는 낫지 않을까?
그런데 이 빌어먹을 시설에도 목축은 하고 있다.
“저기요. 저기가 방목지에요.”
홍종범이 벽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벌집 하나를 가리켰다.
몇 차례 지나가면서 본 목초지다.
과연 거기엔 젖소 한 무리가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다만 소의 상태는 썩 좋지 않다.
대부분 갈비뼈가 드러났고 한 마리는 아예 폐사해서 뒤로 몸을 뒤집은 채 풍선처럼 몸을 부풀리고 있다.
한정된 공간에서 풀을 뜯는 것만으로는 영양분을 채울 수 없다는 이야기겠지.
하지만 왜 저 방목지가 버려졌는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저건 비틀 타입인가.”
방목지 안에 몬스터가 있다.
비틀 타입. 소형종이다.
이른바 초기형 몬스터 중 하나로 최근 전선에서 보기 힘든 귀하신 몸이다.
초기형답게 전투력은 동급 다른 몬스터에 비해 명백히 부족하지만 이 녀석이 있는 곳 주변에 높은 확률로 캡슐이 나타난다는 제보가 있다.
아니나 다를까, 캡슐도 있다.
숫자는 다섯 개 정도.
구형의 회백색 물질은 마치 종양처럼 목초지 일부를 역겨운 형태로 장악하고 있었다.
홍종범이 몬스터를 내려다보며 우울한 어조로 말했다.
“······저것이 나타난 이후로 정호경이 출입을 금지했죠.”
그래서 정호경이 라이트닝에게 징징댄 건가.
식량 구역에 몬스터가 있으니 도와달라고.
그런데 본인이 치우면 안 될까?
비틀 타입은 반사역장을 치는 걸 제외하면 이계생물종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열등한 종인데.
설령 댄서 타입이나 중형종 같은 강한 전투형이 있다고 해도 여기 있는 아이들이 다 파동을 일으킬 수 있는 어웨이큰이라면 힘으로 찍어 누르고도 남을 터인데.
개사료 통조림을 특식이라고 내오는 이곳의 열악한 사정을 보건대 귀중한 우유를 공급할 수 있는 젖소의 확보는 매우 시급해 보인다.
*
“안 됩니다.”
정호경이 정색했다.
그에게 쓴소리를 말한 것도 아니고 불만을 말한 것도 아니다.
내가 그에게 한 말은 목초지를 탈환하자는 말이 전부였다.
“여기 있는 아이들 한 명 한 명이 얼마나 소중한 줄 아십니까? 한 명이라도 줄어들면 이 등대가 역할을 못하게 될 수도 있어요. 정확하게 몇 명 분의 어웨이큰이 있어야 등대 기능을 하는지는 아직 제대로 연구된 바가 없으니까요.”
“이대로 밀가루 먹어가며 정신병 걸리는 것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급식이 보기엔 부실해도 다 영양 밸런스를 챙겨서 나오고 있습니다. 게다가 기념일엔 특식도 확실하게 챙겨요. 마음은 고맙지만 이곳의 운영은 박규씨가 걱정할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돕겠습니다.”
이 박규가 자진해서 서비스를 베푸는 건 매우 드문 일이다.
홍종범과 아이들과의 인연도 있고 서울을 지켜주는, 희생 당하는 사람들에게 약간이라도 좋은 형편을 마련해주고 싶은 마음도 있다.
거기다 우민희에게 듣기로 정호경은 오버 5레벨 어웨이큰이다.
전투 경험은 부족하지만 그래도 학교 출신이긴 하니 기본적인 실전 요령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가 돕는다면 솔직하게 이 벌집 안에 있는 몬스터는 전부 정리하고도 남는다.
그러니까 잔업까지 생각하고 손을 내민 것이다.
그런데 막상 내민 그 손을.
“안 됩니다.”
정호경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뿌리친다.
말없이 그를 노려보자 그가 마주 노려보았다.
“과거에 그쪽이 중국에 계셨던 거 알고 있고 몬스터와 수차례 전투를 벌인 것도 압니다.”
이제야 아는 척이라도 해주는 건가.
“하지만 저희들과 학계는 그걸 몬스터 사냥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인명과 몬스터를 맞바꾸는 인신공양이죠.”
“······우리 시대를 부정하는 겁니까?”
“세계의 스탠다드가 그렇다는 겁니다. 개편 된 학교에서 그렇게 교육받은 저는 그렇게 말씀드릴 수밖에 없고요.”
“그럼 혼자서라도 치우겠습니다.”
몬스터 하나에 캡슐 다섯 개.
조금 귀찮은 일이긴 하지만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렇게 말하며 돌아서려 할 때였다.
“안 됩니다!”
정호경이 단호하게 소리쳤다.
“왜요?”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화를 내거나 흥분한 모습을 보이진 않았다.
다만, 과거 시절의 내 모습이 살짝 현재의 나와 겹쳤을 것이다.
“······.”
그러한 감정을 느꼈다.
인간과 몬스터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끼던 시절의.
“그게.”
정호경이 시선을 피했다.
어금니를 꽉 깨무는 게 어째서인지 그도 분노를 느낀 것 같지만 표출하진 않았다.
대신 시선을 피한 채 그는 궁색한 변명을 쏟아냈다.
“박규씨는 등대의 손님입니다. 손님한테 위험한 일을 시키는 건 관리자인 저로서는 용납이 안 되는 일입니다. 게다가 혹 박규씨 신변에 약간의 문제라도 생기면 우소장님 얼굴을 어떻게 봅니까?”
“······.”
“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저도 우소장님 두렵습니다······.”
뭐, 우민희가 두렵다는 건 진짜처럼 보인다.
우민희를 말할 때 몸 전체를 파르르 떠는 걸 보면 말이다.
아무 말 하지 않고 방을 나섰다.
복도를 걷던 중 주먹으로 벽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아······ 으······.”
아프겠지.
합판도 아니고 콘크리트 덩어리던데.
이 친구가 왜 나에게 화를 내는 지 모르겠지만 어렴풋이 알 것 같은 기분도 든다.
아마, 열등감이 아닐까?
살면서 단 한 번도 실패를 경험한 적이 없다는, 제주에서 온 고위 간부가 나 같은 멸망주의자에게 열등감을 느낀다는 말에 어폐가 있긴 하지만 난 그렇게 받아들였다.
그건 그렇고.
“종범아.”
“네. 박선생님.”
“목초지 문 좀 열어줄 수 있냐?”
나는 고집이 강한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