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ding a House in the Apocalypse RAW novel - Chapter (255)
아포칼립스에 집을 숨김-255화(255/466)
104. 안개 너머 (5)
몬스터와 나의 간격은 30m 안이다.
반사역장이 의미를 잃어가는 거리다.
하지만 모든 몬스터의 반사역장 최소 사거리가 동일한 건 아니다.
5레벨 어웨이큰이 펼치는 반사역장만 해도 5m 거리 밖에서 펼칠 수 있다.
어웨이큰과 몬스터 사이에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가설을 신뢰한다면 최소 반사역장 사거리는 개체마다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전에 해야 할 일은 관찰이다.
몬스터의 행동은 인간과 전혀 다르다.
일부 예외가 있긴 하지만 몬스터는 바로 옆에 인간이 있다고 해서 바로 공격을 해오지 않는다.
몬스터는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에 서 있는, 마치 프로그램처럼 입력된 알고리즘에 따라 행동하는 기계장치 같은 무언가니까.
그리고 순전히 나만의 생각이지만, 몬스터는 살기를 읽는다.
자신을 죽이겠다고 생각하는 인간들의 마음을 읽고 그러한 사람은 먼저 공격하는 습성이 있다고 본다.
이건 보고서 작성을 좋아하는 나조차 올리지 않은 의견이다.
내가 봐도 지나칠 정도로 주관적이기 때문이고 또 여느 몬스터에 관한 이론이 그렇듯이 증명할 방법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장에 있었던 헌터들, 특히 수많은 몬스터를 상대해 본 베테랑들은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당장 저 사이비종교를 만들어낸 마원갑이라는 자만해도 몬스터가 바로 옆을 지나가도 공격하지 않는다는 걸 보고 정신병적인 망상을 품지 않았던가.
아마 당시 마원갑은 몬스터에 대한 살의는커녕 자기 한 몸 추스르지 못할 정도의 패닉에 빠져 있었을 것이다.
몬스터는 그런 인간을 건드리지 않는다.
몬스터는 1차적으로 자신에게 공격을 해오는 개체에게 반격하고 아주 드물게, 자신에게 살의를 품은 자를 선제적으로 공격할 뿐이다.
이 입증되지 않은 이론에 운명을 맡기며 전망대 밖으로 보이는 회백색 물체를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신장은 약 3.5미터 가량.
전체적인 형상은 인간을 모사한 네크로맨서 타입보다 더 인간적이다.
특히 무성의하게 마름모꼴의 두상을 길게 늘어놓은 듯한 네크로맨서 타입과 다르게 이쪽은 보다 인간적인 두상을 갖고 있다.
눈이나 코, 입과 귀 같은 감각기관까진 표현하지 않았지만 움푹 들어간 볼이나 계란형의 형상은 이계의 균열이 악의적으로 인간의 모습을 모방한 것 같은 섬뜩함을 느끼게 해주기 충분했다.
하지만 동상마냥 굳어버린,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선 어딘가에 자리 잡은 정적인 모습은 내가 아는 여느 몬스터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그보다 신경 쓰이는 건 장갑차의 엔진음이다.
바로 앞까지 다가와 탐조등을 비추던 장갑차가 멀어지고 있다.
하긴, 자기들도 상대하기 곤란한 괴물이 풀려났으니 알아서 자리를 피하는 것이겠지.
쿠구궁!
또 한 번의 천둥 번개가 내리쳤다.
이번엔 가깝다.
낙뢰가 이름 모를 나무 하나에 떨어지며 산등성이에 붉은빛을 피어 올렸다.
그리고 꽤 먼 거리에서 확성기의 소리가 비바람에 섞여 들려왔다.
“소문은 진짜였나 보네.”
그의 말에 대답할 방법은 없다.
힘껏 소리칠 수도 있겠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 소통할 필요는 느끼지 못한다.
“구식 헌터들이 중국에서 몬스터보다 중국 놈들 더 많이 때려잡았다는 이야기가 말이야.”
뭐, 부정하진 않겠다.
몬스터보다 사람의 숫자가 훨씬 많고 또 집단적으로 공격을 해왔으니까.
내 뒤로 갈수록 그러한 현상은 심화됐고.
“아주 인간 백정이라든데. 응? 그래서 우리의 미래를 책임질 어린아이들을 저렇게 잘 죽이는구나. 응? 아주 놀랐어. 진짜. 나름 평양에서 백정질한 놈들도 거기 앉혀 놨는데 네 놈처럼 기깔나게 우리 생도들을 죽인 놈은 없었지. 칭찬해주지. 프로페서. 몬스터 사냥꾼이 아닌, 인간백정으로서 말이야.”
잠자코 듣고 있자니 조금은 놀랐다.
운 좋은 저레벨 어웨이큰들. 그러니까 지금 제주 정부를 쥐락펴락하는 인간들이 우리 올드스쿨 헌터에게 가진 열등감이 이렇게도 컸었나?
개성에 있는 친구도 그렇고 저 박승수도 그렇게 대체 왜 그렇게까지 우리들을 시기하는 걸까?
우리는 그들에게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는데.
올드스쿨 헌터와 고레벨 어웨이큰 사이에 낀, 이도 저도 아닌 무자격자들의 자격지심일까?
아니면 그 무자격자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공범의식이 원인일까?
이유는 알 수 없다.
놈들이 우리, 특히 나에게 가진 증오는 내가 몬스터에 대해 가진 증오만큼이나 뿌리 깊은 것으로 보인다.
뭐, 거기엔 나라는 특수성도 기여해다 봐야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 박규, 구시대의 헌터를 대표하는 사람이었다.
“댄서 타입을 풀어놓을까 싶었는데 안타깝게도 현재 안정치에 있는 캡슐 중엔 댄서 타입이 없어서 말이야. 댄서 타입보다 한 단계 강한 녀석을 가지고 왔어. 혹시나 싶었는데 이걸 쓰게 될 줄이야.”
박승수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울려 퍼진다.
“우리 프로페서. 그 황금양털의 보유자가 그렇게 몬스터를 잘 잡는다고 들었는데 직접 한번 보자고. 신으로부터 권능 한 조각 받지 않은 무능력자가 익스큐셔너 타입 상대로 얼마로 해줄지.”
익스큐셔너 타입?
사형집행인을 말하는 건가.
내가 모르는 유형. 즉, 신형이다.
게다가 댄서타입보다 위험하다니.
절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쿠궁!
번개가 쳤다.
능선 위엔 아무도 없다.
다만 삼각대 위에 세운 휴대폰 한 대만이 먼 곳에서 이쪽을 비추고 있을 따름이었다.
저쪽도 관측 장비로 휴대폰을 쓰는 모양이다.
더 좋은 장비도 있겠지만 제주도도 그렇게 넉넉한 섬은 아니라는 이야기.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며 초소 밖으로 나가 초소 너머에 정지해버린 것처럼 멈춰버린 몬스터를 지그시 응시했다.
특히, 내 심장 위에 단단히 고정한 휴대폰 카메라가 녀석을 잘 담을 수 있는 구도를 만들어주었다.
부족한 빛은.
쿠구궁!
대자연이 보충해준다.
그 빛에 몬스터가 반응한 것일까.
영원히 움직일 것 같지 않던 놈이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놈이 인간을 닮은 두상을 움직여 내쪽을 본다.
눈동자 따윈 없지만 지그시 정면으로 얼굴을 향하며 나를 내려다보는 모습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인간이 하는 짓과 닮아있다.
“······.”
과거에 세운 가설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어쩌면 몬스터는 우리 인간을 흉내 내고 궁극적으로 우리 인간을 대체하려는 게 아닐까 하는.
몬스터가 움직였다.
쿵!
공포보다 병적인 호기심이 꿈틀거린다.
과연 이 놈은 어떠한 능력으로 우리 인간을 멸하려 하는 걸까.
인간을 닮았다고 하지만 몸에서 뻗어나온 가지 같은 구조물로 하늘에 둥둥 떠 있는 듯한 효과를 보여주는 네크로맨서와 다르게 이 녀석은 인간처럼 두 다리를 써서 움직인다.
그러나 그 움직임은 몬스터의 큰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느릿하고 경직됐다.
초소 뒤에서 녀석이 다가오는 걸 지켜보고 있자니 박승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익스큐셔너 타입이 네 시대에 나왔다면 너는 아무것도 못 했을 거야. 이놈이야말로 댄서 타입을 넘어선 유치한 말장난으로 으쓱거리는 구식 헌터에 대한 사형 선고거든. 그러니까 프로페서. 넌 고작 시대를 잘 타고난 운 좋은 놈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야.”
누가 누구한테 하는 소린지.
진짜 시대를 잘 타고 나온 건 그 잘난 어웨이큰 1, 2기 아니던가.
아무튼, 몬스터는 이제 초소 앞에 이르렀다.
행동을 보니 날 인식하고 날 찾는 모양.
댄서 타입보다 확연히 느릿한 움직임을 보아하니 근접전에 장기가 있는 것 같진 않은데.
아무튼 몬스터가 앞에 있다는 건 적어도 총격의 위험이 없다는 걸 뜻한다.
사선 상에 몬스터가 떡 버티고 있는 이상 박승수의 병사들이 총격을 가하는 어리석은 짓은 못할 테니.
“······.”
한 손엔 총, 한 손엔 도끼를 들고 몬스터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몬스터는 얼굴 없는 두상으로 날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팔 하나를 들어 올렸다.
뭘 하자는 거지.
이해가 가지 않는 패턴.
하지만 몬스터를 상대하는 자들의 유념해야 해야 하는 것이 있다.
생명체라기보다는 알고리즘의 현현화(顯現化)에 불과한 몬스터의 행동 중에 의미 없는 건 단 하나도 없다.
특히 전투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나의 눈이 내게 뻗친 회백색의 팔 끄트머리를 강렬하게 응시했다.
“?!”
본능적으로 벽면으로 모습을 숨겼다.
다음 순간.
콰쾅!
총성과는 이질적인 파열음이 바로 앞에서 터져나왔고 그리고.
툭! 투투툭!
회백색 파편들이 벽이 보호해주지 못한 바닥에 무자비하게 꽂히는 게 보인다.
“······.”
내 예상이 틀리지 않는다면 이건 샷건.
산탄총의 공격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쾅! 쾅! 쾅!
틀림없다.
이 몬스터가 모방하고자 하는 건, 다름 아닌 그들의 동포를 향해 샷건을 갈겨대는 우리 구 시대의 헌터다.
쿵!
놈이 모퉁이 너머로 돌아오는 게 느껴진다.
급히 초소 안으로 들어갔다.
쿵!
벽면이 후들거린다.
놈이 벽을 후려치고 있다.
쿵! 쿵! 쿵!
느릿하지만 확실하게 충격을 주는 공격.
초소 전체가 지진이 일어난 것마냥 흔들리고 있다.
“보라고! 저 프로페서가 쥐새끼처럼 도망치는 모습을!”
탕!
옥상으로 올라가 총격을 가했다.
거리와 풍향, 흔들림 때문인가.
빗나갔다.
탕! 탕! 탕! 탕! 탕!
다섯 발을 더 쏜 끝에 우리를 촬영하던 휴대폰을 파괴했다.
더는 그 더러운 입을 놀리지 못하겠지.
여기까지 올 용기가 있다면 모를까.
옥상에서 몬스터가 다시 이쪽으로 돌아오는 게 느껴진다.
“······.”
어떻게 해야 하나.
놈은 나를 인지하고 나를 말살하려 한다.
여기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여기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놈을 죽여야만 한다.
철컥-
일전에 노획한 산탄총을 들었다.
샷건엔 샷건이겠지.
단발의 펀치력만 보면 소총보다는 군용샷건 쪽이 월등하니까.
2층으로 내려가 이미 탄환을 맞고 걸레짝처럼 금이 간 방탄 유리를 발로 걷아찼다.
마치 껌이 붙은 것마냥 달라붙은 유리조각이 초소 아래로 늘어지는 걸 보며 창밖으로 몸을 내밀어 샷건을 겨누었다.
놈의 몸 일부가 보인다.
거리는 3m.
반사역장은 어떤 형태로든지 칠 수가 없다.
확신을 품고 총격을 가했다.
탕!
강렬한 총성과 함께 산탄이 놈의 몸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런데, 탄환이 몸에 박히기 직전 불길한 일렁거림이 놈의 몸앞에 어른거렸다.
“!?”
반사역장?
순간 내가 생각한 죽음이다.
찰나의 시간이 경과한 후 나는 내가 살아 있다는 걸 인지했다.
반사역장이 아니다.
나는 부릅 뜬 눈으로 일렁거리는 몬스터의 표면을 보았다.
탄환이 무형의 막에 막히고 있다.
“방어역장?”
방어역장.
반사역장과 다르게 운동성을 가진 공격체만을 무형의 힘으로 막아내는 일종의 방어막이다.
대형종 일부에서나 관측된다는 보고가 알려졌으나 실제로 증명된 건 없다.
관측한 당사자인 인도 정부가 멸망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현상이 바로 내 눈앞에서 일어났다.
“······.”
쿵!
몬스터가 나를 눈치채고 이쪽으로 돌아온다.
즉시 몸을 숨겼다.
쿵!
놈이 초소 바로 앞에 섰다.
얼굴 없는 두상의 시선이 느껴진다.
“······.”
이것이 익스큐셔너인가.
탄환도 통하지 않고 오히려 저쪽에서 탄환을 발사한다.
이런 놈을 대체 어떻게 처리해야한단 말인가.
정녕 이 괴물은 우리 올드스쿨 헌터에 대한 사형집행인이란 말인가.
잠시 망각했던 쏟아지는 빗소리를 느끼며 내 가슴팍을 데우고 있는 휴대폰의 존재를 의식했다.
그래, 촬영 중이었지.
라이브! 아포칼립스!에 절찬리에 이 스켈톤의 활약을 유감없이 펼치고 있었었지.
무슨 댓글이 달리고 있을까.
또 멜론 마스크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모두가 재미 있어 할까.
그들이 원하는 게 뭔지는 안다.
해피 엔딩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해피 엔딩을 바란다.
해피 엔딩을 싫어하는 사람도 자신에 대해서는 해피 엔딩을 바란다.
나도 이 싸움을 희망으로 끝맺고 싶다.
하지만 어떻게.
“······.”
그래.
나다운 방식으로 싸우자.
툭.
총기를 버리고 두 자루의 도끼를 들었다.
초근접전.
이 박규가 가장 선호하는 전투의 형태다.
놈이 유사 총기를 쏘면 또 어떠하리.
내 죽음의 춤사위 속에서 살아 남은 놈은 없다.
쿠구궁!
천둥이 친다.
동시에 아직 잔해가 남은 유리창을 뛰어 넘어 그대로 놈에게 날아들었다.
도끼를 휘둘렀다.
일렁거리는 게 보인다.
무시하고 두 자루 도끼를 온 몸의 반동을 이용해 찍어 넣었다.
아무런 느낌도 없이 도끼가 멈췄다.
무형의 막에 가로 막힌 것이다.
그대로 추락하는 걸 느끼며 도끼날을 팔목 쪽으로 수납하며 지면에 안착했다.
놈의 가랑이 사이에 있다.
등이 곱추처럼 굽은 놈이 발을 움직인다.
당장이라도 나를 짓밟을 것 같은 움직임 속에서 신속하게 도끼를 박아넣었다.
무형이 막이 또 다시 도끼를 가로막는다.
포기하지 않겠다.
무시하고 다른 다리, 인간으로치면 허벅지 안쪽을 신속하게 공격했다.
푹!
“?!”
공격이 먹혔다.
아주 얕은, 타격이라고 할 수 없는 상처를 남긴 것에 불과하지만 나의 공격은 놈의 몸에 상처를 냈다.
그 사실은 하나를 의미한다.
상처를 낼 수 있다는 건 곧 죽일 수 있다는 뜻이다.
억지로 버텼던 투지와 증오의 불꽃이 피어오르는 걸 느끼며 나는 무아지경에 들어갔다.
제주라는, 나를 환영하지 않는 땅에서 천둥과 번개를 벗삼아 죽음의 춤사위를 펼쳤다.
관객은 부족함이 없다.
전 세계의 모든 이들이 이 춤사위를 지켜보고 있을 터이니.
“후우!”
들리는 건 타격음과 나의 절제된 숨소리.
그 안에서 천천히 무너지는 놈의 모습이 느껴진다.
쩍!
몬스터의 다리가 꺾였다.
동시에 놈의 몸이 마치 불에 타는 것처럼 빛의 입자로 화하기 시작했다.
“······.”
최고의 춤사위였다.
충만한 감정이 내 가슴을 채우는 걸 느끼며 나는 조용히 숨을 가다듬었다.
능선 위에서 확성기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런. 빌어먹을.”
능선 위에 사람의 그림자가 보인다.
드디어 온 건가.
관계없다.
적어도 오늘 나는 최고의 춤사위를 펼쳤으니.
도끼를 든 채 능선 위를 점령한 자들을 보았고 그들을 향해 씨익 조금은 힘빠진 미소를 머금어 보였다.
“······.”
그들이 총기를 든다.
일부가 주저하는 모습이 보이는 건 나에게 소소한 만족감을 주었다.
박승수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치는 가운데 나는 두 눈을 감았다.
나쁘지 않은 삶이었다.
마지막 인류가 되는 건 실패했지만 이렇게까지 멋진 최후라면 뭐, 그리 나쁜 인생은 아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쿵!
충격파가 느껴졌다.
평범한 충격파가 아니다.
순간 이 세상이 멈춰버릴 것 같은 고동이 내 주변의 세계를 뒤흔들었다.
이 고동은, 내가 아는 고동이다.
눈을 뜨고 뒤를 보았다.
내가 아는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어둠을 몰아내는 광휘를 머금은 여성.
그녀의 이름은 나혜인이다.
“박규.”
그녀가 나를 불렀다.
그 순간 나는 그녀의 별명을 떠올리며 나도 모르게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래, 구원자였지.
비가 그쳤다.
빠르게 구름이 흘러가며 우리도 모르는 사이 동녘을 장식하던 어슴푸레가 세상을 비추었다.
그 어슴푸레 속에서 나는 보았다.
내 영역 아래를 지긋지긋할 정도로 가리던 안개가 어느새 소리 없이 걷혀버렸다는 걸.
그 너머에 자리 잡은 건 덧없이 아름다운 들판과 평원, 그리고 그 위로 일렁거리고 있는 세상의 균열이다.
그렇다.
저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눈에서 뗀다고 해서, 무언가에 가린다고 해서 그 운명이 사라지는 건 아니리라.
단순한 이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