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ding a House in the Apocalypse RAW novel - Chapter (287)
아포칼립스에 집을 숨김-287화(287/466)
116. 목표 (1)
사람이 늘어나면 편한 점은 할 일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이제 방공호를 배정하고 새 정착민을 지도하는 건 다른 사람의 몫이다.
“저기가 화장실. 저기가 우물이야. 전기는 당장은 이쪽에 있는 걸 써. 곧 공사를 할 테니.”
마음의 짐을 덜어서인지 움직임이 한결 가벼워진 천영재가 오리엔테이션을 도맡았다.
그가 완벽하게 내 영역에 뜻을 둔 지 아닌 지는 모르겠지만 서로에 대한 신뢰가 상승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겠지.
방공호 안에서 할 일이 부쩍 줄어들긴 했지만 그렇다고 일의 총량이 준 건 조금도 아니다.
내겐 또 다른, 보다 중요한 사명이 있다.
“스켈톤님. 드디어입니다.”
발렌타인이 키보드 자판을 경쾌하게 두드렸다.
[ 레드 아카이브 게시판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드디어 비바! 아포칼립스! – 제주 인트라넷 사이의 백도어가 완성됐다.
이제 우리는 자유자재로 두 사이트를 오갈 수 있다.
“보안이 취약한 컴퓨터를 좀비 PC로 감염시켜 돌파구를 확장했고 그 과정에서 다른 위성 시스템과 연결된 PC를 몇 개 발견했죠. 비바! 아포칼립스!와 규격이 다르긴 하지만 원리상 딱히 다른 점도 없는 지라 어렵지 않게 활용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주 자택에 있으시다는 근원 PC의 전원이 꺼져도 아무 문제 없습니다.”
이제 제주는 우리를 막을 수 없다.
“뭐, 최후의 수단으로 인트라넷 전체를 폐쇄하는 방법을 쓸 순 있을 겁니다. 그런데 거기는 전쟁 전처럼 거의 모든 행정 처리를 인트라넷을 통해서 하는데 그게 될까요? 설령 인트라넷 전체를 폐쇄해서 전수조사를 해도 관계 없습니다. 모든 PC를 포맷하지 않는 한 이미 심어 둔 프로토콜이 빠르게 우리 통로를 원상복구 할 테니까요.”
발렌타인의 설명을 들으며 이마에 주루룩 흐른 땀을 닦아내고 레드 아카이브 게시판에 본격적으로 접속했다.
[ 닉네임을 입력해주세요. ]전과 같은 인터페이스.
“······.”
타닥타닥
[ 무과금뉴비 ]“어?”
옆에서 보던 발렌타인이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늘 쓰던 닉네임, 안 쓰시네요?”
“네. 일단은 정찰차 활동하는 거라.”
“그건 그렇고 뭐라고 해야 되나. 뭔가 저 게시판 분위기에 잘 맞는 닉네임 같네요. 무과금이라든가. 우리 게시판에서는 잘 안 쓰는 단어 아닌가요?”
“그렇죠.”
자랑은 아니지만 이 박규, 레드 아카이브 게시판에서 준 네임드까지 어렵지 않게 오른 사람이다.
경계 시간을 제외하면 죄다 게시판만 했으니 누구보다 게시판의 생태를 잘 알 수밖에.
그런데.
타닥타닥.
“······.”
손가락이 멈췄다.
고로 입력창은 아래와 같은 모습으로 되어 있다.
무과금뉴비 : 스켈톤이 낳냐? 양자함폭이 낳냐?
아직 엔터키를 치지 않은, 그렇기에 미완으로 남은 입력창을 보며 발렌타인이 날 향해 고개를 돌렸다.
“······스켈톤님?”
타다다다닥
백스페이스키를 연타해 메시지를 지웠다.
“스켈톤님?!”
한숨을 내쉬며 발렌타인의 의문에 답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네?”
“그러니까 이제 우리 게시판과 제주 인트라넷 사이에 길이 열린 건 맞지만 말입니다.”
“네.”
“여기 글 올라오는 속도 보세요. 리젠률이 뭐, 엄청나지 않습니까?”
“액티브만 3천 명은 훌쩍 넘어보이네요.”
“우리 게시판 액티브가 얼마 정도일까요?”
“피크 때가 120명 언저리긴 한데, 뭐 적을 땐 10명도 안 되는 때도 심심찮게 있죠.”
바로 그거다.
통로를 만들면 뭐하나.
쪽수가 딸리는데.
게다가 나의 목적인 레드 아카이브 게시판의 구성원이 팔팔한 10대 20대 초반 또래인 반면, 우리 게시판은 이미 게시판이 처음 돌아갈 때부터 평균 나이 40대의 이른바 “아재” 게시판이다.
시계를 돌려 우리 게시판 르네상스 시대나 페일넷 유입기로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야 승산이 있지만 지금은 우리 게시판 친구들을 보면 다 늙고 힘이 빠졌다.
기력이 쇠했다는 이야기다.
이 한 줌도 안 되는 중늙은이들 가지고 레드 아카이브 게시판을 침공한들 과연 상대가 될까?
내 의도와 다르게 우리 게시판이 역으로 레드 아카이브 게시판의 팔팔한 친구들에게 먹혀버리는 건 아닐까?
뭐, 그런 식으로든지 우리 게시판에 유입이 생기는 건 좋은 일이지만 이번 백도어의 목적은 이 박규의 복수다.
이 스켈톤을 조리돌림하고 쫓아낸 참새 놈을 역으로 조리돌림하고 역관광을 보내는 것이 이 박규가 죽음을 무릅쓰고 발렌타인을 모셔온 진정한 이유다.
“이대로 우리가 저 게시판 먹을 수 있겠습니까?”
솔직하게 물었다.
페일넷이라는 전쟁 후 유일무이한 거대 커뮤니티 사이트의 운영자 발렌타인은 별 고민없이 내 질문에 답했다.
“택도 없습니다.”
“······.”
“뭐, 매크로 24시간 돌리고 혐짤 테러로 짜증은 유발할 수 있겠지만 그런 수작질을 한다고 해서 게시판을 먹었다고 할 순 없죠. 결국 커뮤니티도 사람이 하는 일 아니겠습니까?”
즉, 사람이 필요하다.
그것도 매우 많은 사람들이.
순간 내 눈앞을 스쳐 지나간 것이 내 롤모델이었다는 건, 도도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도 변치 않는 거목을 떠올리게 했다.
운명적인 두근거림, 혹은 접신에 가까운 사명감을 인지하며 발렌타인을 보았다.
“발렌타인님.”
“네. 스켈톤님.”
“우리.”
그에게 말했다.
“제2의 페일넷을 만들어 보는 건 어떻습니까?”
*
존내논의 영묘 안엔 여전히 그의 마지막 유산인 페일넷이 최후의 숨을 내쉬며 돌아가고 있다.
하지만 돌아가고 있을 뿐이다.
“서버는 이미 예전부터 관리가 불가능한 상태라 제가 최후에 점검했을 땐 스토리지 75% 이상이 먹통이었습니다. 사실상 자연사죠. 페일넷의 직접적인 사망 원인은 통신 장비의 침묵이지만 통신 장비를 복구한다고 해서 좋은 결과가 나올 것 같진 않습니다.”
페일넷은 죽었다.
살릴 수 없다.
쉽고 익숙한 방법에 의존하는 건 내가 생각해도 지나치게 사안을 편의대로 하려는 게으름과 타성이 느껴진다.
결국은 치열한 탐구다.
치열한 탐구 속에 길이 있다.
페일넷의 원상회복 불가라는 비보를 접하고 내가 시선을 옮긴 것은 우리 게시판의 고향이자, 인터넷이라는 인류의 선물의 발상지이기도 한 북미 대륙이다.
거기는 우리보다 수십 배나 큰 비바! 아포칼립스! 게시판이 돌아가고 있는 건 물론이고 존내논의 페일넷처럼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조잡하지만 어디서든 접속할 수 있는 새로운 커뮤니티 또한 만들어냈다.
바로 네크로폴리스다.
발렌타인과 함께 네크로폴리스에 접속해보았다.
방식은 꽤나 복잡했다.
오벨리스크의 위성 신호를 일반 위성 송수신 장치와 유사한 방식으로 변경한 후 북미 쪽 전파를 찾아 네크로폴리스 커렌트라 불리는 데이터 흐름을 찾은 후 거기에 접속했다.
접속에 성공하자 여러 개의 텍스트가 시간 차를 두고 출력됐다.
[ F.소이어, M.오코너, 그리고 사랑스러웠던 붉은 것을 위하여. ] [ 소란스러운 죽음의 도시에 온 걸 환영한다. ]– 망자라면 엔터 키를 누르라 –
접속 툴은 기존 비바! 아포칼립스! 게시판을 그대로 사용했기에 번역 툴 또한 게시판의 것을 쓸 수 있어 언어 소통에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날이 무척 무더웠다.
선풍기를 하나 더 가져와 더위를 달래면서 좁은 방공호 안에서 컴퓨터와 전자장비가 쏟아내는 열기를 고스란히 감당하며 발렌타인과 함께 화면을 보았다.
망자57351(MD) : 비행기의 굉음이 들렸다. 도시 위에 치솟는 불길이 보인다.
망자19231(NY) : 탄약을 구한다. 할머니가 직접 만든 소독약과 두통약이 있다.
망자3413(FL) : 나른한 오후군.
망자83219(IN) : 또 흑인을 죽였다. 어제는 히스패닉. 내일은 어떤 놈을 죽이게 될까?
망자4214(NY) : 19231에게. 위치. 탄종. 수량. 확인 바람.
망자5321(MT) : 어젠 엘크 뮤테이션을 봤어. 뮤테이션이 너무 많아. 점점 늘어나고 점점 가까이 오고 있어.
…
…
아무런 장식도 꾸밈도 없는 텍스트로만 이루어진 세계.
그 모습은 과거 폭스게임이 만든 게임을 연상케 했다.
겉보기엔 단순해 보인다.
만드는데 그리 큰 기술을 요구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렌타인의 생각은 나와 달랐다.
그는 몇 차례 메시지를 입력하고 다른 메시지를 살피는 건 물론이고 내가 알지 못하는 툴을 열어 사이트를 확인했다.
곧 발렌타인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창을 닫았다.
“쉽지 않겠네요. 이건.”
“그래요?”
“이건 제가 만들 수 없는 겁니다.”
“네? 이런 걸요?”
“외관이 조잡해 보여도 거의 북미에서도 탑급. 천재라 불릴만 한 사람이 개발한 겁니다. 알고리즘, 발상, 작동 방식. 어느 것 하나 제가 흉내 낼 수 없는 거네요.”
그 오만한 멜론 마스크마저도 긴장하게 했다는 네크로폴리스는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높은 기술로 만들어졌단다.
일견 P2P 방식이라는 유저 간의 직접적인 연결을 무한대로 확장하는 – 발렌타인의 입을 빌리자면 토렌트 같은 – 방식인데 세부적으로 보면 하나로 특징지을 수 없는 잡다한 기술이 들어갔다고.
“그러니까 실물 서버가 없는데도 서버가 있는 것처럼 거대한 데이터의 흐름을 돌아가게 하는 것이 네크로폴리스의 핵심 기술입니다. 과거 그리드 컴퓨팅의 모사품 같은데 그것과 비교하는 것도 실례예요. 네크로폴리스는 인류의 네트워크 기술을 몇 단계나 발전시켰어요!”
발렌타인이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내 눈엔 폭스게임 수준인데 그에 눈에 비친 네크로폴리스는 그 정도로 대단한 물건인 모양이다.
“멜론 마스크의 비바! 아포칼립스!와 비교하면 어떻나요?”
내 물음에 발렌타인은 크게 웃으며 답했다.
“기술력과 놓고 보면 중세와 현대입니다. 비바! 아포칼립스!가 중세고 네크로폴리스가 현대죠. 그 정도의 격차가 있어요. 다만 비바! 아포칼립스!는 강력한 메인 서버가 살아 있고 또 다수의 인공위성으로 그 자체로 강력한 네트워크망을 구성할 수 있기에 네크로폴리스보다 훨씬 더 많은 걸 구현할 수 있을 뿐이죠.”
“흠······. 그 정도입니까?”
“단적으로 비바! 아포칼립스!의 서버. 그 플로리단지 텍사슨지 있다는 본사가 공격당해서 서버를 잃어버린다면? 그리고 한 해에 5%씩 추락한다는 소형 위성들을 전부 잃는다면? 그건 비바! 아포칼립스!의 종말입니다. 하지만 네크로폴리스는 끝나지 않아요. 우리 인간들이 모두 죽어 사라져도 영원히 지구 자기장을 따라 망자들의 목소리를 실어나를 겁니다.”
발렌타인은 단언했다.
“제가 남의 속을 들여다보는 재주는 없지만 멜론 마스크 그 사람. 네크로폴리스를 보고 정말로 크게 상처 입었을 겁니다. 이건 장담할 수 있어요!”
그렇게 네크로폴리스 방문은 발렌타인의 감탄과 절망, 그리고 흉내낼 수 없다는 어두운 결론으로 끝맺었다.
하지만 네크로폴리스를 흉내낼 수 없다고 해도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제가 네크로폴리스는 흉내낼 수 없어도······.”
잠깐 주눅이 든 발렌타인은 그의 닉네임의 유래가 된 술병에 담긴 물을 마시며 씨익 웃었다.
“비바! 아포칼립스! 침입만큼은 자신이 있습니다.”
발렌타인의 새로운 계획은 단순했다.
“오벨리스크가 아닌, 다른 범용 위성장비로 비바! 아포칼립스!에 접속하게 하는 것이지요.”
단순하게 반드시 쉬운 건 아니다.
비바! 아포칼립스! 네트워크 자체는 존내논 같은 사람이 몇 년만 고생하면 뚫을 수 있을 정도로 허술하지만 위성장비 자체의 하드웨어 보안과 암호화는 갖가지 첨단 장비로 무장한 정부 기관조차 뚫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다.
자신만만했던 발렌타인도 곧 자신의 생각에 오류가 있다는 걸 인정했다.
“아, 이거 쉽지 않네요. 확실히 하드웨어 자체에 걸린 락은 대단히 강도가 높습니다.”
발상은 좋았지만 현실 가능성은 없다는 이야기다.
쓴 맛을 맛 본 발렌타인은 자신이 가장 잘하고 또 해본 적이 있는 방법을 들고 나왔다.
“역시, 제2의 페일넷을 만드는 수밖에 없을까요?”
제2의 페일넷도 공짜로 얻어진 건 아니다.
존내논이 강력한 원자력 전지로 구동되는 대형 서버를 돌린 건 사실이지만 그의 서버의 데이터는 기존의 통신 체계라는 잘 깔린 레일을 통해 일반인에게 공급됐다.
당장 우리가 서버 장비를 주섬주섬 모아서 유사 페일넷 서버를 구축한다고 해도 우리의 메시지를 다른 사람에게 보내고 또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다.
“······죄송합니다. 쉽지가 않을 거 같네요. 이것도.”
“아닙니다. 이미 제주 인트라넷에 길을 파셨잖아요. 다만 제 욕심으로 더 많은 사람이 있었으면 하는 게 제 마음이기도 하고요.”
게시판에 사람이 많이 줄어든 건 예전부터 나온 이야기지만 페일넷의 침묵과 군단파의 붕괴라는 두 가지 사건을 겪은 후 안 그래도 없던 게시판의 인구는 더욱 줄어들었다.
우리의 마스코트 엠구도 최근엔 집이 흔들린다는 이야기만 하고 글을 잘 올리지 않고 내 선배 백승현도 고철 섬에 도착한 이후부터는 영 소식이 없다.
보이는 건 폭스게임의 끝없는 사과문과 점점 질 낮아지는 사용자들의 사이버 테러.
분위기가 점점 이상해지니 늘 보이던 오랜 유저들도 한국어 게시판을 떠나 영어 게시판 쪽에서 활동하는 경우가 잦다.
중심을 잡아줘야 할 네임드 유저인 나만 해도 최근 게시판 활동을 소홀히 하고 있으니 할 말은 없지만.
어느 순간 게시판에 흥미를 잃었다고는 하지 않겠다.
나마저 게시판을 떠난다면 그때는 우리 비바! 아포칼립스! 한국어 게시판은 글자 그대로 멸망한 세계가 되어버릴지도 모르니까.
탕!
총성과 함께 방재혁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잡았어! 개 같은 고양이 새끼!”
개 같은 고양이가 내가 생각하는 개 같은 고양이와는 다른 감이 들지만 영역의 문제 한 건이 줄어든 건 사실이다.
뭐, 그건 방재혁을 데리고 오면서 다 예견된 일이다.
내 걱정은 좀 더 먼 곳, 더 고차원적인 영역에 맞닿아 있다.
능선 아래 땅거미가 진 대지, 그 광활한 평원 곳곳에 희미하게 보이는 불빛들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
내가 존내논처럼 게시판에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을까?
그 불멸의 의지를 갖춘 사내처럼 불가능에 가까운 과업을 수행할 수 있을까?
쉽진 않을 것이다.
정말로 쉽진 않을 것이다.
우울한 마음을 안은 채 이제는 포근하게 느껴지는 암흑에 잠긴 내 방공호 안으로 돌아왔다.
중앙 변기에 앉아 다리를 꼬고 생각을 해보았지만 생각도 똥도 나오지 않는다.
한숨을 내쉬고 간만에 노트북 앞에 앉아 화면을 보았다.
“음?”
공지가 떠 있다.
자유로운 게시판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이벤트다.
공지를 열어보았다.
VIVA_BOT014 : 긴급 사태에 관한 알림
비바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