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ding a House in the Apocalypse RAW novel - Chapter (294)
아포칼립스에 집을 숨김-294화(294/466)
119. 도구 (1)
꿈의 내용은 방재혁의 이야기만큼이나 괴이했다.
어디인지 모를 거리를 내가 정장을 입고 걷고 있었고 누군가 나의 그림자를 밟으면서 따라오고 있었다.
뒤따라 오던 사람은 다름 아닌 장기영이었다.
그는 한 치수는 커 보이는, 후줄근한 정장을 입고 내 뒤를 따라오고 있었는데 어째서인지 그는 바지를 입은 채로 오줌으로 추정되는 액체를 흘리고 있었다.
장소는 느닷없이 바뀌어 도서관 같기도 하고 찜질방 같기도 한, 아무튼 공적인 풍경으로 내 앞에 펼쳐졌다.
나는 정장을 입은 채 바닥에 정자세로 누워 있었는데 아무 연유 없이 고개를 돌렸다.
장기영이 나란히 누워 있었다.
내가 그를 보자 그도 고개를 돌려 날 보았는데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기다렸다.
인내라기보다는 제자로서의 오랜 습관이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장기영은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불현듯 나는 장기영이 이미 죽었거나 죽음에 준하는 상황에 처한 걸 기억해냈고 그에게 여기서 뭐하냐고 물었다.
그 순간 내가 있던 시설의 불이 꺼졌고 모든 것이 암흑으로 잠겼다.
그 암흑 속에서 나는 내가 꿈을 꾸고 있다는 걸 깨달았지만 꿈은 좀처럼 나를 놔주지 않았다.
침대에서 일어났을 때 내 몸은 흥건한 땀으로 젖어 있었다.
“······.”
꿈에 휘둘릴 정도로 나약한 성격은 아니다.
하지만 방금 꾼 꿈은 꽤나 기억에 남을 정도의 강렬함을 갖고 있었다.
내가 우민희에게 오랜만에 연락을 취한 건 비단 꿈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그 꿈이 상당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건 부정하지 않겠다.
*
“오랜만이야. 선배. 갑자기 연락도 다 오고. 무슨 바람이 분 거야?”
우민희는 내가 교신을 요청한 지 1시간이 지난 이후에야 연락을 해왔다.
여전히 간드러지고 꿈을 꾸는 듯한 몽환적인 목소리.
“잘 사나 싶어서.”
“어머. 선배가 내 걱정도 다 해주고. 오래 살고 볼 일이네.”
“그쪽은 어때?”
“여기?”
“응.”
궁금한 게 하나 있다.
김다람에 관한 것이다.
높은 확률로 김다람은 우민희 쪽에 붙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질문은 너무나 민감한 주제다.
김다람에게나 나에게나.
오직 우민희만이 그 주제를 가볍게 다룰 수 있겠지만 그녀가 손에 쥔 건 항상 부러지고 망가진다.
아예 그녀가 떠올리지도 못하게 하는 게 현명한 선택이겠지.
“뭐, 여긴. 제주도하고 그럭저럭 연락이 되니까. 가뭄에 콩 나듯 항공 보급도 오고.”
“등대 쪽은 소식이 있어?”
“아니, 없어.”
“그렇군.”
“안 그래도 거기에 탐사대를 보낼 생각이었는데, 우리, 마음이 통했는지 마침 선배가 먼저 연락을 해주네.”
우민희가 쿡쿡 소리 내어 웃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고 싶지도 않고 갈 이유도 없다.
게다가 지금은 굳이 우민희에게 의지할 필요도 없다.
지금 나는 집단을 이뤘으니까.
우리보다 더 크고 강한 집단을 만나서 부러질 확률은 현저히 늘어났지만 어지간한 위험은 자체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
“선배, 가기 싫은 모양이네?”
“······솔직하게 말하면 그래. 두렵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하고 또 거기에 간다고 해서 내가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고.”
“도움이 될 거야!”
우민희의 호흡이 살짝 거칠어졌다.
“선배도 알고 있겠지만 균열은 안티 어웨이큰 개체를 생성하고 있거든. 그런 걸 일반 개체와 섞어서 내보내. 우리만으로는 점점 어려워진다는 이야기지.”
아무래도 우민희에겐 내가 필요한 모양이다.
개인적인 인연보다는 전술적인 필요에 의해서 말이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우민희가 김다람을 받아들인 것도 앞뒤가 맞는다.
“그렇군.”
“그래서 선배는 어떻게 할 거야?”
“당분간은 지원이 어려워.”
“왜?”
우민희가 숨소리가 고스란히 들릴 정도로 마이크를 가까이 댄 모양이다.
기분이 나쁘다는 소리겠지.
나도 기분이 나쁘긴 매한가지지만 그렇다고 이 정신이 불안정한 주제에 무식하게 강한 괴물 여자의 심기를 긁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최근 나도 집단을 만들었거든.”
“어머. 진짜?”
“그래. 아는 녀석들하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 모아서 소규모 그룹을 만들었지. 너도 알고 있겠지만 군단파가 붕괴하면서 학원 헌터 일부가 나를 노리고 있거든.”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우민희의 숨소리가 사라졌고 동시에 멀게 느껴지는 우민희의 음성이 간접적인 형태로 스피커로 전달됐다.
“진짜야?”
방에 또 다른 누군가가 있다.
그 사람에게 묻고 있다.
내 예감이 틀리지 않는다면.
“아. 김다람도 그렇다고 하네?”
역시. 김다람이 옆에 있었던 건가.
알고 있었지만 놀란 척은 해줘야겠지.
“김다람? 김다람이 거기에 있나?”
“응. 어쩌다 보니. 그런데 김다람은 왜 선배 놔두고 나한테 온 걸까. 아~. 알겠다.”
들으라는 식으로 간드러지게 말하는 저 말본새.
역시 우민희의 본성은 죽을 때까지 바뀌지 않을 것 같다.
“뭐, 알겠어. 그쪽이 어렵다면 우리끼리 팀을 꾸려서 탐사를 하는 수밖에. 안 그래도 선배를 부르기가 뭐한 게 선행 정찰팀에서 안 좋은 소식을 들었거든.”
“안 좋은 소식?”
“응.”
우민희가 잠시 뜸을 들였다.
적당한 시간이 흐른 후 그녀가 말했다.
“프로페서의 악몽이 나타났다고.”
“······.”
프로페서의 악몽.
소수만이 쓰는 관용적 표현이 가리키는 대상은 내 운명을 결정적으로 비틀어놓은 몬스터의 타입을 말한다.
장군 타입.
내가 최초로 발견한, 그리고 나의 힘으로 죽일 수 없다는 걸 처음으로 인정한 몬스터.
내가 은퇴를 결심하게 된 표면적인 이유는 어웨이큰의 등장이겠지만 마지막 미련을 끊어버린 건 장군 타입이다.
녀석이 내게 펼친 무형의 주박 속에서 나는 어떤 수단으로도 저 몬스터에게 대항할 방법이 없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다.
“······난 여전히 올드스쿨이다. 민희야.”
우민희와 여러 차례 교신을 했지만 지금만큼 진심을 담아 말한 적은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그런데 진심과 진심은 통한다고 했던가.
전혀 생각지도 않은 따뜻한 목소리가 교신기를 통해 흘러나왔다.
“하지만 선배만큼 강한 사람은 없잖아? 안 그래? 트웰브스퀘어?”
“······.”
알고 있었군.
피식 웃음이 나오는 걸 억지로 참았다.
“아무튼 다른 소식이 있으면 연락 줄게.”
“아, 잠깐.”
“?”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다.”
하마터면 본론을 놓칠 뻔했다.
“아? 장기영?”
역시 우민희는 장기영에 관해 알고 있었다.
“선배, 그 사람 별로 안 좋아한 거 아니었어?”
나와 장기영의 사제 관계는 헌터 사회에서 유명했다.
나의 신상 자체가 기밀이기에 박규라는 개인에 대해 아는 사람은 적었지만 프로페서라는 콜사인을 쓰는 정식 헌터는 세계적인 명성을 누렸고 장기영은 그 프로페서를 키워 낸 스승으로 내 명성에 편승했다.
“프로페서는 전적으로 나의 작품이지. 그는 나의 이상을 완벽하게 실현해내는 그 뭐냐. 그러니까. 그래. 페르소나. 페르소나였어.”
우리 관계를 좀 더 깊이 아는 사람들은 나와 장기영의 관계를 “도구”라는 짧은 단어로 축약했다.
장기영은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를 필요로 했고 그 완벽한 도구로 선택된 것이 이 박규라고.
타인의 의견이지만 나도 그 의견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장기영은 시대착오적이고 현실에 맞지도 않고 때로는 기묘한 자신의 이상을 우리에게 강요하려 들었다.
그의 수첩에 그려진, 빽빽한 선으로 음영을 표현했던 “로켓 도끼”는 장기영이 어떤 사람인지 단적으로 알려주는 예시라 할 것이다.
실전을 거듭할수록 나는 그가 내게 전수한 지식이 망상의 산물이라는 걸 거듭해서 밝혀냈다.
이미 학생 시절부터 장기영이 매스컴과 자기 PR이 만들어 낸 신기루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현실로 펼쳐진 장기영의 민낯은 내가 그에 대해 가지고 있던 마지막 존경심까지 날려 버렸다.
그래서 우민희 같은 나와 그다지 친밀하지 않았던 후배들도 알고 있는 것이다.
장기영의 도구 프로페서는 정작 장기영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래도 선배가 알고 싶다면 이야기 해줘야겠지.”
우민희는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장기영의 마지막을 이야기했다.
“연구소에 놔두고 왔어. 폐기 처분은 안 한 걸로 기억해. 연구소를 떠나면서 연구소를 폭파했거든. 운이 좋다면 살아 남을 수도 있겠지. 그런데 그게 의미가 있을까? 기껏해야 좀비잖아?”
그녀는 최근 장기영에 관한 소식도 알고 있었다.
“듣자 하니 그 사람에 관해 이상한 소문이 도는 것 같은데 헛소문이야. 장기영은 생물학적으로 사망 상태야. 균열이 죽은 그의 육체를 억지로 움직이고 있을 뿐이지. 게다가 그는 좀비로서의 활동도 거의 끊기기 일보 직전이었어. 아무리 자극을 줘도 꿈쩍도 하지 않더라고. 부패만 하지 않았을 뿐이지 그 사람은 사실 예전에 죽어버린 시체에 지나지 않아.”
장기영은 살아 있다.
적어도 장기영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던 좀비는 살아서 움직이고 있다.
*
장기영이 살아 있다는 걸 알고 난 이후부터 내 관심은 어째서인지 장기영에게 쏠렸다.
기이한 일이다.
나는 장기영을 좋게 평가한 적이 거의 없고 내심 그를 경멸하고 있었다.
그가 좀비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나는 별다른 슬픔을 느끼지 않았다.
그 정도 관계였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계속해서 내 이목을 인천의 부둣가 쪽으로 향하게 했다.
어쩌면 나의 집단이 안정화되면서 생긴 마음의 여유가 그런 부질없는 관심을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처음 내가 장기영으로 추정되는 좀비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장소는 다름 아닌 우리 게시판이다.
수시로 “프로페서”라는 말을 중얼거리는 그 좀비는 특별한 이름이나 별명 없이 “스케빈징을 하는 좀비”로 불렸다.
첫 이야기의 출처는 익명458이다.
익명458 : 인천 부둣가에서 뭔 좀비가 스케빈징을 한다지 뭐야.
익명458은 내가 인정하는 순혈 올드비 중 하나다.
그는 한때 게시판에서 작지만 선망받던 그룹인 카일도스 패밀리의 일원이었다.
지금에야 카일도스도, 또 다른 인터넷 친구였던 익명848도 멸망의 저편으로 사라졌지만 익명458만큼은 꿋꿋하게 예전의 적당히 농담하고 적당히 정색하는 평범한 게시판 유저로서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평범함이라는 가치가 진귀해진 지금 시대에 익명458이 보이는 일관적인 모습은 이제는 다른 잣대 위에서 평가해볼 만하다.
익명458이 우리가 상상하는 것만큼 평범하지 않다는, 그러니까 그가 사실은 매우 강한 정신의 소유자거나 그 평범함을 지킬 정도로 좋은 환경에 있거나 하는.
아무튼, 그 익명458이 스케빈징을 하는 좀비에 대해 이야기를 꺼낸 건 사실이다.
모처럼 그에게 메시지를 보내 보았다.
SKELTON : (스켈톤 질문) 새삼스럽지만 스케빈징 하는 좀비에 대해 뭐 아는 거 있냐?
메시지는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유저 간, 폐쇄적으로 의사를 전달하는 도구인데 여기엔 사용자가 고려하지 않은 또 다른 숨겨진 기능이 있다.
바로 메시지를 보내는 시간과 답장을 보내는 시간 등으로 상대방의 일과 패턴을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익명458에게 메시지를 보낸 건 오전 9시경.
여간한 사람은 예전에 일어나서 오전 작업을 하고 있을 때다.
익명458은 오후 4시 50분 경에 답장을 보냈다.
일과를 끝내고 신변을 정리한 후 노트북이나 컴퓨터 앞에 돌아와 내 메시지를 보고 확인한 시간이다.
추측에 불과하지만 익명458도 우리처럼 해가 뜨면 일을 하고 해가 지면 들어가 쉬는 생활 패턴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그 익명458의 답장을 확인해보기로 하자.
익명458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아, 그 좀비? 글쎄. 나도 남들이 본 걸 전해 들은 게 전부라서. 그래서 충분히 흥미로운 이야기지. 아니, 좀비가 말이야. 리어카 끌고 다니며 뒤에 잡다한 잡동사니 싣고 다닌다는 게 웃기지 않냐?
나는 그가 잘못 봤을 가능성을 지적했다.
이에 익명458는 – 아마 정색하며 – 즉답했다.
익명458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잘못 본 건 아닐 거야. 한두 명 입에서 나온 게 아니거든. 옛 피난선단이 출발하던 부둣가 쪽에 이상한 좀비 하나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물건을 긁어모은다는 이야기는 부두 쪽에 수집하러 간 친구들이 높은 빈도로 전하는 소식이지.
SKELTON : 인천 쪽에 있는 모양이지?
익명458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그 근방이지.
SKELTON : (스켈톤 덕담) 그렇군. 오래 봤으면 좋겠군.
익명458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너야말로.
예나 지금이나 괜찮은 인터넷 동료와 대화를 나누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느낌이다.
우리 영역의 동료들이 든든함을 주긴 하지만 그건 게시판 친구들이 주는 것과는 성질이 조금 다른 물건이다.
“······.”
의자에 앉아 장기영이 내게 전해준 낡은 수첩을 오랫동안 뒤적였다.
전에도 느꼈지만 그 수첩 안에서 내게 도움이 되는 내용은 거의 없다.
하지만 도움이 되고 안 되고를 떠나 그 수첩의 주인이 글자 하나하나에 강한 의지를 담아 썼다는 건 알 수 있다.
내 시선이 가장 오래 머문 곳은 역시나 그 문제의 로켓 도끼다.
로켓 추진형 타격력 강화 부착물이라는 장황한 이름을 가진 그 병기의 그림은 내 책상에 붙어 있다.
생긴 걸 보면 도끼에 추진체를 달아 이 스켈톤을 무슨 슈퍼히어로마냥 하늘을 날게 해 몬스터를 도륙 내려는 모양인데, 이건 아무리 나라고 해도 쉽지 않은 물건이다.
“······교관님.”
쓴웃음을 머금으며 과할 정도로 정성을 들인 로켓 도끼의 음영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음영 한 곳에 도려낸 듯한 여백이 있다.
과거 장기영이 자신의 어웨이큰 검사 시트지를 숨긴 장소다.
이제는 더 봐야 아무것도 찾을 수 없겠지만 나는 장기영이 적어도 천 번 이상은 펜을 왕복했을 음영 쪽을 아무 생각 없이 응시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그가 그린 선들이 쓸데없이 올곧고 굴곡이 적다는 걸 생각했을 뿐이다.
그런데.
“?”
음영 아래 글자 같은 게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먼저 글자를 썼고 그것을 음영으로 가려놓은 모양새다.
그림을 눈 가까이 갖다 대어 그 글자를 확인하려 했다.
장기영의 필체다.
원래부터가 휘갈겨 썼는 데다 음영이 교차하는 부분이 너무 짙어 해독하기 어려웠지만 곧 나는 아래의 문구를 발견할 수 있었다.
– 對(대) 장군 타입 결전 병기 아이디어
내 愛弟子(애제자) PROFESSOR를 위하여!
“······.”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음이 움직였다.
그러므로 지금 가야만 한다.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내 은사를 볼 기회를 놓쳐버릴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