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ding a House in the Apocalypse RAW novel - Chapter (320)
아포칼립스에 집을 숨김-320화(320/466)
320화 128. 탑 (6)
이 세상에 가치 있는 죽음은 없다지만 기록은 남는다.
뭘 기록하는가, 무엇을 기록하는가는 기록하는 자의 마음에 달린 일이지만 그 어떤 기록도 아무것도 기록되지 않은 것보다 가치가 있다.
중국 시절, 나를 유명하게 만든 건 내가 행한 일련의 업적이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프로페서는 평가하는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다.
남들보다 세심하고 체계적인 보고서를 한번도 빠짐없이 제출했기 때문이다.
설령 전장에서 죽더라도 우리가 느끼고 본 것, 행동과 그 결과는 반드시 후대에 전해져야 한다고 생각했고 남들보다 공을 들여 기록을 전하는데 신경을 썼다.
은퇴 후에도 당시의 가락은 남아 있었다.
특히, 중요한 작업을 할 때 그 기록을 스크린샷으로 저장하곤 했다.
한때 페일넷 전체를 뒤흔든 엄창이 사건도 마찬가지.
나는 이 당시의 기록을 일일이 스크린샷으로 찍어 별도의 폴더에 보관했다.
준비과정, 우민희에 대한 도발, 문제의 일 대 일 채팅, 그리고 우민희의 격노.
이 모든 기록은 내 폴더에 “인터넷 일인칭 시점”으로 저장되어 있다.
roxanneGIRL : (아임 스켈톤) 스우! 부탁이 있어!
내가 이 기록을 쓸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내가 엄창이라는 건 무덤까지 들고 가야 할 비밀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수단과 방법을 가려서는 아니 되겠지.
스우에게 부탁해 내 방공호에 들어가 내 컴퓨터에 숨겨진 비밀스러운 폴더에 든 기록을 나에게 전송할 것을 요청했다.
roxanneGIRL : (아임 스켈톤) 비망록 – TS – UC 폴더 안에 있는 거 전부 여기로 전송해줘.
roxanneGIRL : 아, 그 옆에 있는 남미 폴더는 절대 들어가지 말고!
레베카에게 맡길 수도 있지만 스우가 더 똘똘하고 입이 무겁기에 스우에게 특별히 부탁했다.
COOKIEMONSTER18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오케이! 곧 전송할게. 그런데 스켈톤. 남미 폴더는 왜 들어가지 말라는 거야?
roxanneGIRL : 프라이버시.
COOKIEMONSTER18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스우 실망) 스켈톤은 이런 여자 취향이구나······.
roxanneGIRL : (스켈톤 순진무구) ?
COOKIEMONSTER18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자료 보낼게~
“······.”
불필요한 사항은 생각하지 말자.
잡념을 털어버리고 스우가 전송한 스크린샷을 정리했다.
역시, 그대로 있군.
과거 페일넷에서 우민희라는 괴물과 한판 붙었던 역사의 한 페이지가.
이제 이 기록을 올린다.
스켈톤이 아닌 록산느걸의 이름으로.
roxanneGIRL : 페일넷 망한 지 1년 지난 기념으로 양심 고백 하나 한다.
준비물은 과거에 저장한 인터넷 일인칭 시점의 인증자료.
그리고 간단하지만 힘 있는 고백이다.
-내가 사실 엄창이다.
“······.”
다음은 추천 노예 동원.
roxanneGIRL : 스우! 현 계정과 내 방공호 안 부계정 전체를 동원해서 추천 좀 찍어줘!
디펜더 남매의 계정도 동원하고 싶지만 그들의 폴더엔 내 컴퓨터 안에 든 것과 비할 바 없이 끔찍하고 기괴한 것들이 있을 가능성이 높기에 스우의 교육을 위해서라도 참는 편이 낫겠지.
잠시 후, 댓글이 달렸다.
익명458 : 이건 또 뭐냐?
익명458인가.
내가 인정하는 순혈 올드비답게 재빠른 반응이군.
그러나 반응의 온도는 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내가 원하는 반응을 보여준 건 올드비라기보다는 유입에 가까운 새로운 친구들이다.
익명1702 : 뭐야? ㅋㅋㅋㅋ 엄창이?! ㅋㅋㅋㅋㅋ 진짜 엄창이냐?
익명1844 : 와 ㅇㅇ 보니까 진짜 옛날 생각나네! 페일넷이 이 비루먹은 게시판보다 천만 배 재밌었는데 ㅋ
익명2033 : 딱 페일넷 전성기 시절이네 ㅋㅋ 진짜 세상은 망했지만 인터넷은 어느 때보다 꿀잼이던 시절 ㅋ
역시 페일넷 종자들이었군.
몸에 안 맞는 옷 입고 정상 유저 코스프레 한다고 고생이 많다.
아무튼 그들에게 “엄창이”라는 인터넷 인물이 향수를 자극한 건 분명하다.
점점 더 많은, 아마 대부분이 살인자일 유입들의 글이 내 글에 달리기 시작했고 추천 수 또한 댓글에 비례하여 높아졌다.
그리고 나의 인증글은 인기글에 올랐다.
사소한 포인트긴 하지만 여기서 스우는 자신이 엄마보다 뛰어나고 지혜로운 여성이라는 걸 다시 한번 증명했다.
SKELTON : 뭐지? 엄창이? 그게 뭐야······? 무서워······
시키지도 않은 알리바이를 만들어주다니.
쥬시- 한 녀석을 많이 준비해줘야겠다.
아무튼 이 뜨거운 열풍 속에서 오늘의 주역이 모습을 드러낸다.
띠링~
메시지가 도착했다.
gijayangban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안녕? ^^
우민희다.
“발렌타인님. 시작합시다.”
그런데 발렌타인의 표정이 좋지 않다.
“지금······ 말입니까?”
예상했지만, 여기서 드러내진 않았던 반응이다.
이번 일은 오로지 내 욕심에 의한 것이다.
특히 발렌타인의 기분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은연중에 그가 비전투원이고 객관적으로 생존이라는 테마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 가벼이 여기고 있었던 감이 없잖아 있다.
실제로 발렌타인은 이번 임무에 부담을 느끼고 있다.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내 무리한 계획에 또 다른 무리한 계획을 덧칠하자 결국 그도 불편하고 불안한 심경을 밖으로 드러낸 것이다.
“하아. 하라면 해야겠죠. 어쩔 수가 없죠.”
하긴 저 시커먼 창고 안에서 3일이나 홀로 보내면서 독박으로 갖가지 작업을 해야 하니까.
그것도 언제 우민희가 올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고서 말이다.
“······하아. 자꾸 구시렁거려서 죄송한데 생각보다 빡셀 거 같네요.”
그에겐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하지만 이번 일은 해야만 하는 일이다.
옵션이 아니다.
반드시 지금 해야만 하는 일이다.
나는 이 일에 목숨도 걸 수 있다.
“저도 함께 하겠습니다. 마지막까지 여기를 지켜드리죠.”
그 감정이 제대로 전해졌는지는 의문이지만 적어도 발렌타인은 내 기분에 약간이라도 보조를 맞추는 행보를 보여줬다.
“······스켈톤님이 그렇게 말씀해주신다면야.”
발렌타인이 쓴웃음을 머금은 채 품속에서 빛바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음? 이건?”
존내논의 사진이다.
방사능을 맞기 전 건강하던, 과할 정도의 근육으로 무장했던 전성기의 모습이 발렌타인과 이제는 사라진 옛 부하들과 함께 추억과 함께 담겨 있었다.
“아, 이 사진 말인가요? 페일넷 초안 작업을 할 때 멤버 모임입니다.”
“꽤 많네요?”
다섯, 아니 여섯 명이나 된다.
뒤편에 서 있는, 아마 주요 크루는 아닌 것처럼 보이는 여성을 포함해서.
“네. 그때만 해도 존내논님도 괜찮았고 서울에도 여유가 있었던 시절이니까요. 무엇보다 세상이 예전처럼 돌아올 거라는 희망이 남아 있던 시대였죠. 페일넷은 전쟁 피폐기와 회복기를 잇는 가교가 될 거라고 생각했고요.”
한 사람마다 하나의 견해가 있다.
생각지도 못한 발상을 뜻하지 않은 곳에서 들었다.
전쟁의 황폐기와 전후 회복기를 잇는 가교로서의 페일넷이라니.
나 같은 멸망에 찌든 사람은 할 수 없는 생각.
오로지 세상을 희망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발상일 것이다.
발렌타인이 그 사진을 바라보며 쓸쓸히 말했다.
“세상에 내세라는 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가 파괴된 잔해가 너부러진 영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거기서 우리 구형님이랑 술 한잔하면서 제가 한 일에 관해 평가받고 싶네요.”
그에게 건넬 위로의 말이 없다는 건 뼈아픈 일이다.
억지로 만난 인연이고 내가 필요 의해서 형성된 관계다.
여기서 내가 들이밀 수 있는 비장의 문구 같은 건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의 기분에 맞춰주는 것이다.
“······언젠가 저도 그곳에 가면 저도 끼워주시겠습니까?”
“스켈톤님도요?”
“네. 저세상에서 야매 생고기 같은 가게가 있었으면 하네요.”
발렌타인이 살짝 놀란 얼굴로 나를 보았다.
아마 어떻게 그 가게 이름을 알았냐고 묻는 듯한 표정이었다.
말없이 주먹을 들어 보였다.
발렌타인 또한 주먹을 들어 화답한 후 홀로 어두운 영역으로 걸어 들어갔다.
“발렌타인 입장.”
교신기 너머로 홍다정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저 비스듬히 열린 문 너머엔 모든 출입을 인지하는 마법의 눈이 있다.
발렌타인이 그 영역에 들어선 순간 그는 침입자라는 형태로 전신 부호화 되어 파주에 있을 우민희의 통신장비에 전달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를 잡아두겠다.
“······.”
타닥타닥
roxanneGIRL : ㅎㅇ~
이것이 프로페서이자 한 명의 인터넷 유저 스켈톤이 할 수 있는 일이다.
gijayangban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너. 누구야? 응? 사실대로 말해~ 너 내가 누군지 알지? ^^
roxanneGIRL : ?
잠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동양적인 각성에 별 다른 환상을 가지진 않았지만 여기서는 나 자신을 잊어야 한다.
나를 잊고, 부처도 잊고, 세상도 잊는다.
남은 건 엄창이라는 또 다른, 나와 별개의 유리된 자아.
그 인물을 연기한다.
“······.”
타닥타닥
roxanneGIRL : 누구신데여?
roxanneGIRL : 혹시, 이모?
gijayangban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이모 ㅇㅈㄹ ㅋㅋ…. 나이도 나보다 많은 게 ㅋㅋ…
roxanneGIRL : 엥? 갑자기 왜 화를 내세요? 저 아세요?
gijayangban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너 박규지?
“······.”
우민희 단단히 꼭지가 돈 모양이군.
하늘 같은 선배 이름을 선배라는 경칭조차 붙이지 않고 부르다니.
그녀에게 당할 폭력을 생각하면 간담이 서늘하지만 이 서늘한 간담이야말로 일이 잘 풀린다는 신호다.
roxanneGIRL : ㅇㅇ 내가 박규임. 님은 뭐임? 미니? 미니미니?
roxanneGIRL : 열 살이나 나이 낮춘 미니~
roxanneGIRL : 마음이 미니~
gijayangban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한마디만 더하면 죽는다 ^^
roxanneGIRL : ㄱㅅ
gijayangban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
roxanneGIRL : 감사
gijayangban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지금 IP 추적 중이야 ㅋㅋ…
roxanneGIRL : 엄창이도 IQ 추적 중!
숨 막히는 일진일퇴의 공방이 계속되던 중 교신기에서 그리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도착요.”
발렌타인이다.
그가 무사하게 창고 안에 진입, 문제의 차량에 올라탔다.
“지금부터 장비를 가동 해보겠습니다. 와이파이 끊지 마세요. 저도 이 장비는 매뉴얼 보고 운용해야 하니까요.”
작전은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간다.
창고 안에 발렌타인이 꼼짝 않고 차량에서 장비를 운용하는 동안 나는 인터넷에 또 다른 떡밥을 뿌린다.
roxanneGIRL : 페일넷이 잠든 곳.jpg
두 번째 떡밥은 어떤 의미로 잃어버린 한 시대를 추억한다.
나는 나의 롤모델 존내논이 잠든 오래된 아파트 건물과 그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납으로 봉인된 철문과 빛으로 가득 찼던 서버실의 간략한 사진을 가지고 있다.
존내논을 못 찍은 건 두고두고 후회가 되지만 현재의 모습을 찍히고 싶지 않다는 그의 마음 또한 이해하기에 크게 미련을 두진 않는다.
중요한 건 페일넷이라는 돌아오지 않을 한 시대의 조각이다.
Gruman_B : 여기가 페일넷 본사였나? 개구리잖아.
익명2033 : 이런 데서 그 큰 서버를 돌렸다고?
익명1702 : 망할 만 했네. 망할 만 했어. 그래도 고마웠다.
SergentKP : 이건 신박하네.
…
…
내가 잘 모르는 유저들이 추억에 빠져든다.
익명458 : 와. 저기 였나?
Dies_irae69 : 존내논. 난 놈은 난 놈이네.
keystone : 존내논 새끼. 마음에 안 드는 놈이긴 한데 뭐라도 하고 뒤진 했네.
Rkkara : 쩝. 존내논. 미안했다!
SKELTON : 홀리몰리
…
…
내가 잘 아는 유저들도 떠나간 유저를 추억한다.
이 모임엔 물론 인터넷의 고질병인 인터넷 정신병자도 존재하고 있다.
MORUS : 존내논 가죽은 어떤 질감일까?
익명1941 : 저 인간도 여자 강간하고 죽였겠지? 난 했다고 본다 ㅎ
KIM_DONG_HUNG : 꽃미남 감동~! ! ! !
…
…
오랜만에 느꼈다.
인터넷이란 곳은 모든 이가 존재할 수 있다는 걸.
그 인터넷의 폐해는 지금 논할 주제는 아니다.
있는 그대로 보자.
인터넷 또한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이다.
문제 없는 세상이란 건 공상의 산물이다.
어쩌면 몬스터에게 모든 인류가 멸망한 이후 세상을 묘사하는 문구일지도 모르겠지.
중요한 건 연결이다.
“네. 지금 통신 온라인입니다. 데드맨워킹에게 빨리 메시지를 전해주세요.”
사람과 사람을 잇는 것.
존내논이 최초에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결국 그의 목숨과 맞바꿨던 가치.
존내논의 유지를 잇는 자로서 나는 그라는 거인이 남긴 발자국을 좇는다.
“······.”
타닥타닥
roxanneGIRL : 약속대로 한국에 대규모 방송 송수신 장치를 가동했다.
이제 기다린다.
망자의 목소리를 전하는 자의 답변을.
“······.”
이후 우민희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이 약간은 신경 쓰인다.
설마, 바로 여기로 직행하는 건 아니겠지?
설마 처음부터 엄창이가 박규라고 결론을 정해 놓은 상태에서 화만 키운 건 아니겠지?
“······.”
이미 일어난 일이다.
이후에 일어날 결과만을 보자.
우민희.
아무리 우민희가 히스테리가 심하다고 하지만 설마 날 죽이진 않겠지······?
자랑은 아니지만 손발을 싹싹 비는 것도 꽤 잘하는 편이다.
살얼음 같은 시간이 흘러가는 가운데 메시지가 도착했다.
Deadman_working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확인했다. 그럼 바로 망자의 목소리라는 물줄기를 그곳에 흘려보내지.
이 친구, 잠이 없는 건가.
아무래도 좋다.
빠르면 빠를 수록 좋은 거겠지.
솔직히 난 우민희 여기서 만나기 싫다.
“스켈톤님! 옵니다! 와요! 대량의 전파가 수신되고 있어요!”
Deadman_working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네크로폴리스 매뉴얼을 보내주지. 이 방법대로 하면 특별한 어플 설치 없이도 누구나 망자의 목소리를 휴대폰을 통해 듣고 말할 수 있어.
Deadman_working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그런데 그런 거 없어도 다들 잘 할 거야. 망자의 목소리가 미치는 곳에서는 안테나가 뜨거든.
Deadman_working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찾는다.
roxanneGIRL : 3일간 가동하면 되는 건가?
Deadman_working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생각보다 상태가 좋아서 이틀. 이틀이면 되겠어.
흐름은 좋다.
아주 좋다.
그런데.
Deadman_working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전에 지엽적인 문제가 있다고 했었지?
지엽적인 문제?
메시지함을 확인했다.
했다.
이런 말을 했었다.
Deadman_working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망자의 목소리는 몬스터를 자극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