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ding a House in the Apocalypse RAW novel - Chapter (372)
아포칼립스에 집을 숨김-378화(372/466)
아포칼립스에 집을 숨김 378화
153. 종이배 (1)
바야흐로 연말이 왔다.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제부터 본격적인 혹한의 시작이라고 예상했다.
일기예보라는 게 늘 그렇듯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쓸데없이 쨍한 태양이 떠오른 가운데 한낮 기온은 22도까지 치솟았다.
눈이 녹으면서 도로는 엉망이 되었고 반쯤 녹은 얼음이 흙먼지와 뒤섞이면서 애당초 내세울 것 없던 도시의 미관을 더욱 나쁘게 만들었다.
하지만 진정으로 나빠진 건 새로운 서울의 공기다.
“책임자가 누구야? 김병철이야? 우민희야? 이번에는 그냥 안 넘어간다.”
“책임자의 이름을 밝혀라! 위원회니 대책본부니 이딴 건 지긋지긋해! 누가 여기 대장이야! 시원하게 밝히라고!”
거리에선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이전부터 정부 청사 앞에서는 작은 시위대가 늘 상주하며 시위를 벌였지만 숫자도 소수였고 앰프 같은 문명의 이기도 없이 목청만으로 소리를 지르는 게 고작이라 크게 눈에 띄지 않았다.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사람들이 늘었다.
대부분은 아마 구경꾼이겠지만 시위대의 언변이 뛰어난 지, 아니면 평소 쌓인 불만이 많았는지 시위대 쪽으로 가서 붙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있었다.
“대한민국 고질병이죠.”
지금 나는 장갑차에 타고 있다.
행선지는 나의 방공호다.
지금 내가 새로운 서울에서 중요한 일을 맡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내 집이 불타게 생겼다.
하태훈 말로는 위협만 받는 상황이라고 하는데 어떤 상황인지는 직접 두 눈으로 보는 쪽이 낫겠지.
방공호로 향하기 전에 디펜더 남매와 잠시 만나서 차를 한잔했는데 디펜더는 별말이 없었지만 홍다정은 냉소를 머금으며 특유의 시니컬한 말투로 상황을 추측했다.
“별일 없을 거야.”
그녀에게 물었다.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스켈톤 네가 정한 곳이잖아? 진짜 개 뻘짓만 안 하면 눈에 안 띄는 곳이잖아. 그런 곳에 군벌이 나타나서 어쩌고저쩌고~ 블라블라~”
홍다정이 피식 웃고는 만면에 웃음을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새빨간~ 거짓말이야.”
홍다정이 디펜더 쪽을 보았다.
“브라더는 어떻게 생각해?”
디펜더는 한숨을 내쉬고는 한 템포 늦게 대답했다.
“굳이 군단파 잔당이 공격할 장소는 아니지. 기껏해야 감제고지로 쓸 명분을 찾을 수 있겠지만 주변에 더 높고 험한 산이 더 많은데. 그렇다고 주변에 전략적 의미를 가진 장소가 있는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공항이 있긴 한데, 지금 세상에 공항이란 장소가 전략적 의미를 가질까?”
디펜더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덧붙였다.
“군단파 잔당은 주변부터 훑어. 훑을 게 없으면 사람 있는 곳을 찾아가고. 아무 이유도 없이 주변에 아무도 안 사는 그런 장소로 갈 정도로 걔들도 대책 없는 애들은 아니야.”
중간중간 홍다정과 눈이 마주치는 것으로 보아 따로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곧 홍다정이 남매의 일치된 생각을 이야기했다.
“이건, 내 억측일지도 모르겠는데 말이야.”
홍다정이 썩소를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남은 사람끼리 다툼이 있었던 게 아닐까?”
“그래?”
“거기 모인 사람. 다 스켈톤 때문에 모였지, 스켈톤이라는 접착제가 없으면 다 남이잖아. 굳이 우리 이야기 꺼내지 않아도, 사실 인천 헌터 끼리도 사이가 안 좋아.”
“뭐?”
금시초문이다.
방재혁, 하태훈, 천영재의 사이가 좋지 않다니.
뭐, 살가운 사이는 아니다.
그래도 데면데면하게 적당히 서로를 의지하는, 최소한 등을 맡길 수 있는 사이로 보였다.
무엇보다 그들 사이에도 구심점이 있지 않았나.
“하태훈 선배도 있잖아.”
하태훈 말이다.
눈에 띄는 카리스마도 없고 본인도 그런 주목받는 자리를 꺼리지만 최소한 그는 제대로 생각이 틀어 박힌 사람이다.
날 만나기 전, 개성 강한 방재혁과 천영재가 함께 할 수 있었던 건 그의 모나지 않은 인성 덕분이겠지.
그런데 내 말을 듣자 홍다정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인간이?”
홍다정만이 아니다.
디펜더의 입가에도 야릇한 미소가 감돌고 있다.
“······.”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건가.
홍다정이 컴퓨터를 향해 의자를 돌렸다.
“그건 스켈톤이 판단해. 아무튼, 나는 말 아낄래. 내 이미지도 생각해야 하니까. 남 험담하는 여자, 인기 없잖아?”
디펜더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디펜더 남매의 의견은 흥미롭긴 하지만 의견은 의견일 뿐이다.
홍다정의 예측대로 내 영역에 인적 관계로 갈등이 일어났다면 필경 레베카 모녀와 나머지 헌터 사이의 갈등이겠지.
틈틈이 연락을 줬어야 했는데 상상 이상으로 새로운 서울의 일에 푹 빠져버려 연락을 하지 못했다.
어쩌면, 관심이 없었는지도 모르겠지.
학교 시절부터 나는 오로지 내가 하는 일에만 관심을 보이고 집중하던 성격이었으니.
조금 유해졌다고 해도 사람의 천성이 바뀔 리가.
그래도 나름 나랏밥을 먹고 공적도 세우다 보니 전용 장갑차에 무장 병력까지 거느리고 방공호로 돌아갈 수 있다.
금의환향이라고 할까.
실용성도 대단히 뛰어나다.
탕! 탕! 탕! 탕!
누군가 장갑차에 총격을 가했다.
총성이 기괴한 걸 보니 제대로 된 총이 아니거나, 엉터리 탄약을 쓰는 거 같은데 그럼에도 한 발이 장갑차의 장갑판을 맞고 튕겨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팅!
“호로새끼들!”
운전수가 시원하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동석한 군인이 피식 웃으며 내게 말했다.
“사람이 모여들면서 치안이 안 좋아졌죠. 아까 시위질하던 놈들은 차라리 양반입니다. 도시에서의 견실한 삶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시 주변에 머물면서 약탈자로 돌아간 놈도 적지 않거든요?”
장갑차는 딱히 응사하진 않았다.
큰 위협도 아니고 굳이 저런 하루살이 상대로 쓸 총알도 아깝다는 식으로 이야기했지만 서울의 사정을 아는 나에겐 진실이 보였다.
군인도 이제 쓸 탄약이 부족하다.
여러 번의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비축분 정도는 있겠지만 이쪽도 다음이 없다.
정부 자산 창고에서 보관하던 공작 기계가 부족한 탄약을 만들고 있지만 새로운 탄약은 제대로 된 공작 기계로 찍어낸 것이라고 해도 질이 좋지 않은 모양.
광신도 소탕전을 벌이는 군인들 사이에는 이대로 가다간 우리도 판사킬러를 써야 하는 게 아니냐는 농담 아닌 농담이 떠돌고 있다고 한다.
해프닝과 같은 총격 이후엔 별다른 사건은 없었다.
익숙한 길을 따라 익숙한 곳으로 향했다.
도로 상태와 늦은 출발 시간, 여러 가지 사건이 겹쳐서 저물녘쯤에 내 영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다.”
무전기를 통해 교신을 보내자 장벽의 문이 열렸다.
뭔가 이상하다.
내 영역에 포탄이 떨어지거나 겨울 하우스가 불에 타거나 한 사건이 일어난 건 아니다.
문 너머에 있어야 할 사람의 숫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박규!”
내 영역 안엔 오직 한 명만이 남아 날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하태훈이다.
노을이 드리운 그늘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얼굴은 내가 기억하던 얼굴보다 더 늙고 지쳐 보였다.
*
겨울 하우스 옆엔 번듯하게 지은 새집이 막바지 공사를 앞두고 있었다.
하태훈의 집이다.
한국인은 철근 콘크리트조에서 살아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그가 내가 있었던 시절부터 조금씩 짬을 내서 만들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 영역에 있던 사람 중 사망자는 한 명도 없다.
모두 멀쩡하다.
다만 저마다의 이유로 내 영역을 떠났을 뿐이다.
“거짓말을 해서 미안해. 사실은 군단파 잔당 같은 건 없었어.”
병사들이 보는 가운데 하태훈이 내게 황송할 정도로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다. 박규. 정말 미안해. 혼자서는 여기를 지킬 수 없을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우소장을 통해 너에게 연락해 버렸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이유는 얼추 알고 있다.
사람 문제겠지.
그런데 내가 자리를 비운지 석 달이 조금 안 되는 시점에 이렇게까지 조직이 갈라질 수 있다는 건 꽤나 충격적인 일이다.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해도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용인하는 분위기까지는 만들지 않았었나.
나는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그 믿음이 이렇게 쉽게 부서진다는 건 조금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다.
역시나.
내가 모르는 사정이 있었다.
“······여자를 하나 받았어.”
그 여자를 발견한 건 스우였다.
정확히는 남녀였다.
둘 다 두터운 방한복을 입고 허리춤에 밧줄을 묶어 썰매와 연결, 갖가지 살림을 썰매 위에 실은 채 설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고 한다.
얕게 덮인 눈밭 위를 가로지르는 남녀가 향하는 곳은 아마도 세종으로 추정됐다.
늘 보던 피난민 행렬의 축소판이지만 이번에는 약간의 변주가 있었다.
“이마까지 문신 새긴 꼬락서니를 보니 약탈자일 거 같았는데 역시 약탈자더군. 그건 나중에 논하기로 하고 그 약탈자가 여자를 데리고 가는 모양새가 좋지 않았지. 여자는 가기 싫어하는데 툭 하면 주먹을 들고 고함을 지르면서 윽박지르면서 데리고 갔지. 여자는 질질 짜고.”
듣는 것만으로 일련의 이야기가 재구성된다.
아마 약탈자들의 아지트에서 성노예로 감금한 여성 중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었고 그 여자를 몰래 빼내 함께 세종으로 도망치려고 한 모양이다.
그런 모험은 그러나, 대체로 끝이 좋지 않다.
“그냥 제 갈 길 가면 좋았겠는데 여자가 더는 못 가겠다고 주저앉고 남자도 약을 해서 머리가 망가졌는지 갑자기 꼭지가 돌아 여자를 개 패듯이 두들겨 팼지. 보다 못한 그 미국 꼬맹이가 우리에게 그 사실을 알렸고 방재혁이 총을 쐈지.”
하태훈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불알을 맞췄어. 그 남자는 낭심을 붙잡고 고꾸라졌고 소처럼 울면서 하얀 눈밭 위에 피를 흘리며 죽어갔지. 천영재랑 내가 그 여자를 데리고 왔어.”
하태훈이 축 늘어진 채 어깨를 씰룩였다.
“그런데 말이야. 문제가 뭔지 알아?”
하태훈의 씁쓸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이유가 뭔지 알 것 같다.
“여자 얼굴이 꽤 귀여웠어.”
역시 내가 생각한 그대로다.
“미인이었지.”
여기서 미인이라는 건 여자만을 말하지 않는다.
타인에게 외모적으로 성적인 매력을 어필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주변을 변화시킨다.
발달 된 사회에서는 긍정적인 변화로 이어지겠지만 지금처럼 모든 것이 쇠락한 사회에서는 분란의 싹이 된다.
디에스이라에가 괜히 미인을 자신의 조직에 안 받아들이는 게 아니다.
내가 예전에 다니던 가족 같은 회사에서도 미인 경리가 있었는데,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괜한 것들이 다툰다고 사장의 애인인 경리를 두고 되지도 않은 하급 직원 둘이서 술자리에서 주먹다짐을 한 것을 본 적이 있다.
비슷한 사례가 내 영역에 일어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다.
“천영재가 먼저 움직였지.”
“영재가?”
하태훈이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걔는 예전부터 좀. 정에 굶주렸어. 그렇게 당하고 상처 입고도 끝도 없이, 쯧.”
싸늘하게 혀를 차며, 하태훈의 미소가 싹 걷혔다.
“발정 난 개새끼처럼 말이야.”
아무래도 이번 사태에서 하태훈과 천영재의 신뢰는 깨진 것으로 보인다.
“천영재가 먼저 여자에게 손을 내밀었어. 여자한테는 안 된 일이지만 그런 집단에서 몸으로 목숨을 부지한 여자답게 여자는 쉽게 천영재에게 몸을 허락했지.”
“······다음 이야기가 있었나?”
하태훈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 여자가 진짜 마음에 들어 한 건 방재혁이었지.”
“방재혁을?”
“재혁이가 인기가 많아. 영재하고는 비할 바가 아니지. 솔직히 우리 헌터 중에서 걔가 제일 여자한테 인기 많을 걸?”
“솔직히 내가 더 잘생기지 않았나?”
“특유의 분위기라고 해야 하나. 여자가 딱 좋아하는. 그런 판타지 같은 걸 품은 놈이지. 다리를 다치기 전에도 인기가 많았지만 다리를 다친 후에도 여자가 꼬였어.”
“그래?”
“놀랍게도 사실이야.”
“내 분위기는 어떻지?”
하태훈이 날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이내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프로페서야. 프로페서지.”
“?”
“아무튼,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그 여자가 방재혁한테 꼬리를 쳤어. 평소 방재혁이라면 눈길 하나 안 줬겠지만 녀석도 몰랐는데 외로움을 느꼈나 봐. 덥썩 여자를 품어버린 거지. 그 이후의 일은 상상에 맡기지.”
하태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일도 있고 해서, 나도 이젠 여기를 떠나려고.”
“나머지는 어디에 있지?”
“방재혁은 저 산동네 너머 독채 아파트 쪽으로 갔고 천영재는 자기가 살던 집구석에 처박혀 있어. 미군 모녀는 천영재 옆 동네로 갔고.”
“그 여자는?”
그 물음에 하태훈은 어째서인지 순간 내 시선을 피했다.
찰나의 시간에 불과했지만 명백한 이상 징후 속에서 내 선배는 다시 날 평소의 표정으로 보며 말을 이었다.
“죽었어.”
순간 생각했다.
그 죽음엔 필경 사정이 있을 것이라고.
아니나 다를까.
“살아 있어.”
교신기를 통해 레베카가 대답했다.
“살아 있어. 그 여자. 방 따라갔어.”
레베카가 알려준 진실은 아래와 같다.
하태훈이 그 여자에게 음욕을 품었고, 결국 둘만이 남았을 때 덮쳤으나 때마침 천영재에게 발견되어 미수로 그쳤다고.
하지만 스우는 다른 진실을 이야기한다.
“그때 그 여자 실실 웃고 있던데?”
우민희가 내게 준 시간은 48시간.
충분히 긴 시간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마음이 바뀌었다.
그 시간을 전부 다 써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