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ding a House in the Apocalypse RAW novel - Chapter (452)
아포칼립스에 집을 숨김-452화(452/466)
452 180. 율도국 (1)
개점 휴업상태인 스켈톤 계정에 오랜만에 메시지가 하나 도착했다.
강한민이었으면 좋겠지만 어떤 의미로는 각오를 한 인물이기도 했다.
dongtanmom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네가 박규였다며? 술이나 한잔하자. 할 이야기가 많다.
바로 동탄맘, 백승현이다.
“······.”
타닥타닥
[ dongtanmom님을 차단하시겠습니까? ]아주 잠깐 그를 차단하고 싶은 유혹에 시달린 것도 사실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인터넷 상에서 그와 내 사이는 좋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
하지만 역시 만나는 게 좋겠지.
동탄맘은 동탄맘이면서 동시에 백승현이기도 하니까.
물론 그 양반에게 이로운 일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단호한 마음으로 동탄맘을 만나기로 했지만 한 가지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그건 백승현이 여행자라는 것이다.
그는 바다를 떠돌아다녔다.
바다 위를 항해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늘 많은 이야기를 안고 있는 법이다.
물론 그 이야기가 허구인지 진실인지는 받아들이는 사람이 판단해야겠지만 말이다.
*
인천 부두.
여러 척의 선박이 정박한 부두에서 백승현과 만났다.
“이게 누구야. 전설의 헌터 스켈톤 아니신가~?”
백승현의 스타일은 여전했다.
짧게 친 상고머리에 가죽 재킷, 적당한 품새의 청바지.
흉부 쪽에 찬 권총집이 고스란히 보이게 한 건 아마 의도된 세팅이겠지.
“오랜만이야. 박규.”
그 옆엔 그의 아내가 서 있었는데 내 시선은 좀 더 아래를 향했다.
어느새 두 발로 선 아이가 날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아빠보다는 엄마를 닮았다.
백승현이 아이로 하여금 나에게 인사하게 했다.
“현수야. 인사해. 박규 아저씨란다.”
“······.”
“왜 그래? 박규?”
“아저씨라고 불릴 나이는 아닌 거 같아서.”
백승현이 코웃음을 쳤다.
“너 우민희한테 맨날 아줌마라고 하지 않냐?”
뒷말은 생략했지만 백승현의 야릇한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자기가 아줌마 거리는 건 괜찮고 정작 자신이 아저씨 소리는 듣기 싫다는 걸 비꼬려는 거겠지.
백승현은 술을 마시자고 했지만 잠깐 차나 한 잔 마시는 걸로 변경했다.
함께 술을 마시기엔 여러 앙금도 있고 또 친한 사이도 아니니.
자리를 바꿨다.
그는 자신이 현재 선거 사무실로 쓰고 있는 부둣가 건물 2층에 자리를 마련했다.
여러 개의 책상이 놓여 있었고 최근까지 사람이 일한 흔적이 있지만 지금은 우리 둘뿐이다.
백승현이 비어 있는 의자에 먼저 앉으며 입을 열었다.
다른 건 몰라도 백승현이 만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얼굴 펴. 부탁 같은 거 할 생각 없으니까.”
그는 내가 은연중에 두르고 있던 경계심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다.
“어차피 엉터리 선거일 게 뻔한데 말이야.”
현재진행 중인 선거의 본질 또한 어렴풋이나마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가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실내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담배를 보았다.
보나마나 정부 창고 비축품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외산 담배다.
그것도 중국제가 아닌 인도제로 보인다.
“아. 이거 말이야?”
백승현이 내 시선의 방향을 읽고는 피식 웃었다.
“한 대 피워보겠어?”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신 물었다.
“어디서 난 겁니까? 이건.”
“아. 이거 말이지.”
백승현이 쓴웃음을 머금으며 중얼거리듯이 답했다.
“바다에서.”
“바다.”
“그래. 게시판에 종종 근황을 올리긴 했었지.”
그랬었다.
한땐 나도 빠짐없이 읽기도 했고.
언제부터인가 그의 게시물을 보지 않기 시작했다.
호기심보다 불쾌감이 앞지른 시점부터였을 것이다.
아무튼 내가 얼핏 본 바로 백승현은 희망호를 타고 여러 바다를 휘젓고 다녔다.
내가 아는 것만 해도 동중국해, 일본 근해, 제주 앞바다 등 동아시아의 잡다한 바다를 누볐다.
아무튼 백승현의 아내가 다과를 내왔다.
힐끔힐끔 쳐다보는 꼴이 할 이야기가 있는 것 같은데 백승현이 신호를 주자 기다렸다는 듯 퉁명스레 묻는다.
“혹시. 진짜 박규 헌터님이 그 스켈톤이라는 사람인가요?”
표정이 묘하게 적대적이다.
“······.”
뭐, 이해한다.
정직하게 말해서 백승현, 동탄맘에겐 진심으로 여러 차례 악담을 퍼부었으니.
그런데 내 잘못만은 아니다.
나 같은 법없이도 사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토록 독기 어린 말을 내뱉을 수밖에 없게 만든 백승현의 추악한 인터넷 에티켓에 진정한 원인이 있을 것이다.
아무튼, 그건 그거고 묻는 말엔 답해야겠지.
“아. 네. 그런데 혼자 쓰는 건 아닙니다.”
“그래요?”
“네.”
가끔 상상 속의 고양이가 채팅을 치곤 한다.
백승현의 아내가 날 흘겨보고는 자리를 떠났다.
“······.”
잠깐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전쟁 전, 옷 벗고 사회에 있었다는 이야기를 했었지?”
“네.”
내 기억이 맞는다면 백승현은 전장을 떠난 후, 사업을 하다가 한 차례 망하고 그 이후에는 여러 회사를 떠돌아다녔다.
동탄맘 캐릭터의 특징인 냉소적이고 삐뚤어진 심성은 아마 이 시절에 강화된 게 아닐까.
인도제 담배를 입에 문 채 백승현은 과거를 회상하고 있었다.
“그때 내가 다니던 회사 사장 중에 유독 잘 나가던 인간이 하나 있었지. 자기가 얼마 버는지 모를 정도로 돈을 쓸어 담던 인간이었어.”
“무슨 사업을 했는데요?”
“스크린 골프.”
“흠.”
“지방에 아주 크고 화려하게 차렸지. 고만고만한 업소는 많았는데 그렇게 크고 본격적으로 한 곳은 없었거든. 실내 스크린에 그런 돈 들일 바에 차라리 옥외 연습장에 투자하는 게 낫지 않냐는 게 사람들 생각이었는데 그 사장은 귀신이 들렸는지 남들이 안 된다는 사업을 강행했고 성공했지.”
백승현이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꺼낸 건 무엇때문일까.
백승현이 그다지 좋은 인성의 소유자가 아닌 건 알지만 그도 헌터다.
불필요한 이야기나 사족을 붙이는 화법을 구사하진 않는다.
곧 백승현은 길게 늘어뜨린 화두를 자기식으로 수습했다.
“그런데 그렇게 잘 나가던 양반도 망하더라고. 전쟁이 일어나기 반년 전 쯤에 파산 신청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지.”
백승현의 입가에 그답지 않은 아이 같은 해맑은 미소가 떠올랐다.
“좆같은 새끼. 잘 됐다고 생각했지.”
그래, 이게 백승현이지.
“아, 네.”
웃음기를 띤 채 백승현이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사장 이야기를 꺼낸 건 내 미래와 관련이 있어서야.”
잠깐 긴장했다.
이 대목에서 백승현이 나에게 선거 유세 지원을 요청할 수도 있어서다.
몇 번이고 강조했지만 나는 백승현의 선거를 도울 마음은 추호도 없다.
백승현이 내 선배인 것과 별개로 인터넷에서 냠냠 거리는 정신병자가 뭐시기 의원 같은 대의제의 기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소리다.
그런 내 속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백승현은 타들어 가는 담배를 바닥에 툭툭 털어 재를 흩뿌리면서 나지막한 어조로 말했다.
“······조만간 다시 바다로 갈 것 같아.”
“?”
아주 잠깐 혼란이 찾아왔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다.
백승현을 만나기 전, 그 인간이 내게 늘어놓을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검토했지만 이 양반이 내게 저런 소리를 할 거라고는 조금이나마 예상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바다로 간다고요?”
다행스럽게도 오랫동안 단련한, 어쩌면 천성일지도 모르는 무표정을 유지한 채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어조로 물을 수 있었다.
백승현은 얕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미 결론이 났어. 우리 크루 대부분이 날 따라서 떠나기로 했지. 게다가.”
백승현이 휴대폰을 꺼냈다.
액정에 담긴 화면을 보니 녹음 파일 재생기다.
무엇을 녹음한 지는 모르겠지만 액정 안엔 날짜별로 기록한 여러 개의 녹음 파일이 언제든지 재생할 수 있는 형태로 저장되어 있었다.
“······제주 놈들도 좋아하는 눈치야. 우리가 다시 떠나겠다고 하니 기름을 비롯해 여러 물자를 지원해 주겠다고 하더라고.”
백승현은 그러나 그 녹음파일의 내용을 들려주진 않았다.
아마도 약속이 어그러졌을 때 세간에 풀기 위한 보험으로 마련해둔 것이겠지.
“내가 그 사장 이야기를 꺼낸 건 그런 거지.”
처음 이 자리에 올 때만 하더라도 잠깐 얼굴만 보고 떠날 생각이었다.
우리 정도의 관계엔 그게 맞기도 하고.
하지만 오랜만에 다시 만난 백승현은 살짝 세월이 묻은 얼굴만큼이나 앳된 얼굴에서 어엿한 여성의 얼굴을 가진 그의 아내만큼이나, 갓난아기에서 두 발로 아장아장 걷는 아기만큼이나 여러 부분에서 변해 있었다.
“잘 나가다 망하는 놈들을 보면 십중팔구 잘하는 거 놔두고 다른 일 벌이다가 망하더라고. 그 사장도 그랬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경제적 자유 운운하면서 커다란 상가 빌딩을 매입한 거지. 월세로 대대손손 벌어먹고 살겠다는 게 그 사장 계산이었던 거 같은데 문제는 그 건물 지분이 수백 개로 쪼개져 있었다는 거지.”
그를 보며 물었다.
“이번 선거에서 비슷한 걸 봤습니까?”
나는 이번 선거에 관심이 없다.
후보로 나올 생각도 없을뿐더러 늘 선거 유세를 도와달라는 독촉에 시달렸다.
하지만 이번 선거가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나 또한 이번 선거가 제주 정부가 늘 그래왔던, 국민을 속이는 눈가리기라고 파악하고 있다.
백승현은 거기서 하나를 더 보았다.
“······줄 세우기를 하고 있어. 후보 중에서 놈들 말 잘 들을 거 같은 놈들. 이야기가 잘 통할 거 같은 놈들만을 살리고 나머지는 죽여버리는 거지. 선거라는 게 국민의 선택이라지만 말이야. 후보 자체를 개새끼들로만 채워 넣으면 국민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어? 선거라는 행위가 아무 의미가 없어져 버리는 거지.”
“그렇습니까?”
백승현이 한숨을 내쉬며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역시나.
상상한 이상으로 더러운 작태가 다시 반복되고 있다.
하긴, 서울을 그렇게, 더 오래갈 수 있었던 그 위대한 도시와 시민을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몰락하게 만든 게 그 친구들 작업이니.
“나야 뭐, 패거리가 있으니까 그 새끼들이 허투루 보진 못했지.”
백승현은 868명의 크루를 데리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중 2백여 명은 베트남, 태국, 인도네시아, 일본, 심지어 중국인까지 포함되어 있다.
바다를 떠돌면서 만나거나 무인도에 고립된 채 구조 요청을 한 사람들이라고 한다.
백승현이 선거판에 뛰어든 것도 그 사람들을 믿고서다.
아마 제주 정부에서 백승현을 무시하지 못했던 것도 백승현이 거느린 맨파워 덕분이겠지.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백승현과 그 크루의 전투력은 결코 만만치 않을 것이다.
아무리 바다를 끼고 있다고 하나, 침식지대에서 1년 가까이 생존한 사람들이다.
바다에서도 위험은 만만치 않다.
침식의 영향이 덜하기에 오히려 해적이 기승을 부린다.
현재 실시간으로 급속하게 멸망하고 있는 일본에서는 과거 조선이 그랬던 것처럼 섬을 포기하고 본토로 돌아오는 정책을 펼치고 있다고 한다.
실제로 대마도는 해적에 의해 유린당했고 사람이 살 수 없는 섬으로 변했다고 한다.
그 해적이 일본이 아닌 한국 출신이라는 것은 반복되는 역사라는 오랜 테마를 떠올리게 한다.
바다에서 살아남는다는 건 그런 해적들과 싸워서 살아남았다는 걸 의미한다.
우민희의 정보원에 의하면 백승현의 크루 중엔 정규 어웨이큰급도 몇 명이나 있을 것이라고.
그러니까 동탄맘은 어느새 한 무리의 지도자가 되고 만 것이다.
“서울에 올 때만 하더라도 여기서 다시 내 고향에서 새로운 시작을 할 거라는 기대에 부풀었지만, 막상 현실은 여전히 좆같더군. 그 사장 생각이 물씬 나더라고.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지. 그래. 내 주제에 무슨 정치냐. 다시 바다로 가자. 거기서 새로운 희망을 찾아보자.”
백승현은 자신이 잘하려는 걸 하려 한다.
그는 언제부터인가 바다의 남자가 되었다.
“······.”
그에겐 많은 악감정이 있다.
비단 동탄맘 이전에도 백승현은 그다지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을 위해 타인에게 한없이 잔혹해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
여전히 그날, 그가 죽음을 강요한 캣맘의 모습은 기억 한 곳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 얼굴은 뭐, 기억나지 않지만 말이다.
하지만 백승현의 말마따나 “엿같은 세상”이었다.
더 상스러운 표현일지도 모르겠지만 내 기억 속에 새겨진 그의 푸념은 그렇다.
하지만 그도 나도 전쟁 이후 많은 사건을 겪었다.
아마 고점 자체는 내가 더 높겠지만, 평균점은 내 선배가 나보다 높을 것이다.
그가 중국에 버려진 시점부터, 그리고 철없는 어린 아내와 아기를 동시에 감당해야 하는 시점에서 말이다.
그래서일까.
예정에 없던, 아니 상상도 못한 일을 해버리고 말했다.
“선배. 솔직히 우리 사이에 이러쿵저러쿵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만 후배 박규로서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그를 보았다.
그리고 말한다.
“백승현 선배님이 어딜 가나 잘 되길 빌겠습니다.”
나의 진심을.
“하지만 어딜 가든 냠냠거리는 건 좀 참아주셨으면.”
이건 120%의 진심이다.
“!”
백승현의 얼굴에 변화가 찾아왔다.
그 심술궂은 얼굴에 명백한 놀라움이 스치고 지나갔다.
백승현답게 속내를 말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그가 내 태도에 충격을 느낀 건 확실해 보인다.
곧 그의 입가에 유의미한 변화가 나타났다.
미소다.
썩소에 가깝지만 나는 그게 백승현의 진정한 미소라고 믿는다.
“······냠냠.”
“?”
“우리 엄마가 쓰던 거야. 부동산 카페 같은 데서 활동했거든. 별거 아닌 거 같은데 사람들이 참 경기를 일으키는 거야. 욕을 하기도 하고. 그 모습이 웃긴다고 해야 하나. 재밌다고 해야 하나. 청개구리 알지? 그런 근성이 돋더라고.”
“아. 그렇군요.”
백승현이 잠시 침묵한 채 생각에 잠겼다.
창밖의 바다에 시선을 고정한 채 백승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율도국이라고 아나?”
그리 나이를 많이 먹진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통찰력이라는 표현을 쓴다는 건 조금은 건방진 행동이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통찰의 빛이라는 게 내면에서 번득이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전설의 섬이지.”
예정에 없던 이야기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