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ding a Logistics Center in the Apocalypse RAW novel - Chapter (108)
아포칼립스에 물류센터를 숨김-108화(108/240)
108화 팍스 건설(2)
문명화의 필요성을 여실히 체감하고 있던 나.
하지만, 눈앞의 상황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후우!”
이제야 살 것 같다는 듯, 이마의 땀을 훔치는 아발론 청년.
똥 밭에 쭈그려 앉은 채, 서서히 일을 정리하는 그에게 장로 윌그라임이 조심스레 다가갔다.
“험험.”
“아, 장로님.”
청년이 반갑게 윌그라임을 맞았다.
급한 일을 처리할 수 있게 그를 도와주었던 윌그라임이었으니.
“아까는 고함쳐서 미안함세. 자네가 급한 듯하여 나도 목소리가 높아졌구만.”
“아닙니다. 덕분에 저도 편하게 일을 보지 않았습니까?”
엉덩이를 훤히 드러낸 채 빙긋 웃는 청년.
엘븐하임과 마찬가지로, 되살아난 아발론 사람들 또한 구김살이 전혀 없었다.
마찬가지로 웃음을 띤 윌그라임이 그에게 초록색 잎사귀 두 장을 건네주었다.
“이게 뭡니까?”
“세계수 잎일세. 원래라면 꿈도 못 꿀 호사지만······ 정겸 대표 덕분에 세계수가 정말 많아졌거든. 자, 얼른 이걸로 처리하시게.”
“자, 장로님······!”
청년의 얼굴이 감동으로 물들었다.
나중은 생각조차 못 한 채, 후다닥 바지부터 내렸던 그였다.
뒤처리가 고민이었는데, 어찌 고맙지 않으랴?
윌그라임이 내민 것은 손바닥 반만 한 잎사귀 두 장.
하지만 아발론의 검소한 청년은 손사래를 쳤다.
“아이고! 한 장이면 충분합니다! 잘 접으면 열두 번 정도는 거뜬히 닦는다고요!”
“에헤이 이 사람아! 내가 700년 동안 한두 번 닦아본 것도 아니고, 그걸 모르겠나? 여유 좀 부리라 이거야, 여유 좀!”
보기만 해도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이웃 간의 정.
구수한 똥 밭에서 화장지 한 칸의 기적이 벌어지고 있었다.
“······대체 왜 저러는 거야?”
무한히 복사할 수 있는 세계수를 대체 왜 절약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애당초 화장지를 쓰면 될 일이 아닌가?
후두둑.
두둑.
갑작스레 떨어지는 빗줄기.
그들의 찢어질 듯한 검소함은 계속됐다.
“이런! 양동이 내놓아야 하는데!”
아까운 물을 다 놓치게 생겼다며, 발을 동동 구르는 윌그라임.
그런 그를 깔끔하게 뒤처리를 마친 아발론 청년이 다독였다.
“장로님. 그거라면 이렇게 하시면 어떨까요? 자, 보세요.”
청년은 하늘을 향해 입을 벌렸다.
쏴아아 떨어지는 물줄기, 입 한가득 물을 담아 마신 그가 말을 이었다.
“양동이까지는 아니어도······ 이렇게 시원하게 목을 축일 수 있지 않습니까?”
“허허······ 이거 젊은 친구인 줄 알고 방심했는데. 내가 한 방 먹었구먼그래.”
“이래 봬도 80년 동안 죽어있던 몸입니다. 세월이라면 꽤 보냈죠. 흐흐.”
지나온 세월을 뽐내며 겨루는 엘븐하임과 아발론의 흙수저 배틀.
그 빈궁함에 가슴이 웅장해지다 못해 저려올 지경이었다.
“진짜 왜 저러는 거냐고? 물류센터에 쌓인 게 생수인데.”
연이은 나의 의문에, 엘븐하임과 아발론의 행동 패턴을 학습한 팍스가 대답해주었다.
[반복 행동의 결과로 추정됩니다.] [이 모두는 인간들이 ‘절약’이라 부르는 행동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엘븐하임과 아발론 모두 장기간에 걸친 빈곤의 경험으로, 특유의 행동 패턴을 형성한 것으로 보입니다.]식량과 자원을 무한히 내어주었지만, 엘프들의 습성을 고칠 순 없었다.
그들은 물류센터의 자원이 무한하다는 사실을 머릿속으로는 이해하면서도, 정작 몸으로는 실천하지 못하는 인지의 부조화를 겪고 있었으니까.
쏴아아아아······.
빗줄기가 점차 거세졌다.
밭에 쌓인 거름이 우르르 무너졌고, 탁한 빗물이 흙바닥에 이리저리 흩어졌다.
“이런, 결국 이렇게 되네요.”
“아무렴. 한낱 피조물이 거대한 자연의 생태를 이길 수는 없는 법이지. 우리는 거기에 발맞춰 살아갈 뿐이고.”
수십, 수백 년에 걸친 빈곤의 결과다.
그들의 뇌는 이미 안빈낙도의 삶에 절여져 있었다.
‘할 일이 태산이네.’
서울 다음으로 팍스FC의 주요 거점이 된 엘븐하임이다.
그 발전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을 때, 상하수도 시설이 없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
그에 더해 한순간에 집을 잃어버린 아발론 백성들의 새집도 지어줘야만 했다.
대규모 공사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상하수도 시설을 갖춘 멀끔한 집이 들어선다면 이들 또한 더 나은 환경에 적응하게 되지 않을까?
다만, 기반 시설과 거주시설을 세우는 것이니만큼, 나름의 전문적인 체계를 세울 필요가 있었다.
나는 곧장 합참의 유성철에게 연락을 넣었다.
‘재건 프로젝트’와 관련한 것이라면 그를 빠뜨릴 수 없었으니까.
내 이야기를 들은 유성철이 대답했다.
“그렇군요. 기반 시설과 주거시설의 건설이라······ 하지만 엘븐하임을 파헤칠 수준이라면 사람이 보통 많이 필요한 게 아닐 텐데요?”
“그래서 아예 <팍스 건설>이라는 단체를 신설해서, 건설 쪽 인력만 따로 관리할까 합니다. 팍스맨 중에서 새로 모집했으면 하는데······.”
수망교와의 일전 이후, 팍스맨들의 수는 급격히 늘어나고 있었다.
비록, 그중 각성자의 비율은 10%도 채 되지 않았지만······.
“건설에 필요한 기술자들을 선별해주세요. 수도 전문가, 건설기사, 전기공, 열쇠집 아저씨 등등 공사하는 데 필요한 사람은 싹 다.”
꼭 각성자일 필요가 없었다.
멸망한 세계에는 그들이 여전히 필요했으니까.
***
팍스맨들에게 모집 공고를 내린 지 일주일 정도가 지난 시점.
하지만 유성철이 전해준 명단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200명? 이게 다라고요?”
“지원자가 워낙 적어요. 아무래도 구미가 당기질 않았던 모양입니다.”
전투원으로 훈련된 팍스맨들과는 달랐다.
팍스FC의 소속원이 되었을 뿐, 별다른 소속감을 느끼고 있지 않은 일반인들.
팍스FC에게 고마움을 느낄지언정, 충성심이나 의리보다는 생존과 안위를 둘러싼 실리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이었다.
<팍스 건설>의 입사 조건으로 신선한 식재료와 물류센터의 상품들을 내걸었던 참이지만, 아무래도 그들의 호응을 끌어내기엔 부족했던 모양이었다.
유성철이 덧붙였다.
“어차피 식수나 식량은 꾸준히 보급되고 있으니까요.”
“이런······.”
보급품이래 봤자 쌀이나 빵, 라면, 식수와 몇 가지 생필품이 고작이었다.
어차피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자가 제공되고 있는 상황.
그 정도 수준에 만족하겠다는 심산이었다.
‘이번에도 안빈낙도인가.’
엘븐하임이나 아발론과 다를 것이 없었다.
지구의 사람들 또한 지구에 들이닥친 멸망에 적응해가고 있었으니까.
좋게 말하면 유유자적하는 것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빈곤에 길든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유성철이 못마땅하다는 듯, 좀 더 과감한 전략을 제안했지만······.
“아예 물자 보급을 줄여버리는 건 어떨까요? 사람들에게 역할을 강제할 수 있도록요.”
나는 서둘러 그를 진정시켰다.
“사람들을 옥죄는 건 팍스FC의 정신이 아닙니다. 줬다 뺏으면 되레 앙심만 품을 테고요. 차라리 무한한 혜택으로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게 우리 방식이죠.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무료배송.
무료반품.
최저가 보장까지.
나는 팍스를 업계 최고로 만들어줬던, 압도적인 수준의 혜택들을 떠올렸다.
“욕심을 자극하는 겁니다.”
팍스는 소비에 대한 욕망을 살찌웠다.
우리 입장에서 보자면 안빈낙도를 깨뜨리는 것.
팍스맨들에게 충분한 식량과 물자가 보급되고 있기는 했지만, 딱 하나 아직 제공되지 않은 것이 있었다.
“집······ 갖고 싶지 않을까요?”
“집이요?”
물론 한국이든, 해외의 어느 도시든 집은 많았다.
아무리 주택난이라지만, 파괴된 주택 이상으로 죽어 나간 사람이 더 많았으니까.
대다수의 생존자가 니것 내것 할 것 없이 빈집을 점유해 살고 있는 실정이었다.
하지만······.
“그게 멀쩡한 집은 아니잖아요?”
단순히 바람만 막아줄 뿐이었다.
물도, 전기도, 가스도 들어오지 않는 껍데기에 불과했으니.
“하지만 바로 그 집을 지을 인력이 부족한 상황 아닙니까?”
“딱 몇 개만 일단 만들어두는 거죠. 일종의 모델하우스처럼. 대신, 물도, 전기도, 가스도 들어오는 ‘진짜’ 집으로요.”
많이 만들 필요도 없었다.
도시별로 몇 개씩이면 충분했고, 심지어 원래 있던 건물을 보수하는 형태가 될 테니까.
더욱이,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예 거기에 하루씩 머물 수 있게 해주는 거죠. 일종의 관광상품처럼.”
몇 달 만에 되찾게 될 일상의 편의.
그걸 맛보고도 다시 안빈낙도의 삶으로 돌아갈 순 없을 테니까.
우리는 곧장 계획을 실행으로 옮겼다.
강남과 부산, 그 밖의 몇몇 해외 도시들을 선정했고, <팍스 건설>에 자원한 200명을 우선적으로 동원했다.
새로 짓는 것이 아닌, 손상된 건물들을 조금씩 손보는 식의 작업.
건설 능력 각성자들의 능력까지 동원된 덕에, 완성까지는 채 3일이 걸리지 않았다.
천천히 문자 메시지를 적었다.
사람들이 들이닥친 멸망에 그저 주저앉지 않기를 바라며.
***
멸망 전만 해도 전기 기술자로 일했던 팍스맨, 박윤호.
그가 멍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뭐, 특별할 건 없긴 한데······.”
그가 예전에 살던 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깔끔하게 리모델링이 된 27평짜리 쓰리 룸 아파트.
나름 차이가 있다면 창문을 열었을 때 한강이 보인다는 점일까.
옛날이라면 억대급 프리미엄이 붙었겠지만, 세상이 뒤집어진 이후로 그런 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한편······.
“와! 와아!”
거실에 놓은 검은색 가죽 소파.
그 푹신한 질감 위로, 그의 어린 아들이 껑충껑충 뛰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본 박윤호 또한 슬그머니 웃음을 지었다.
‘······그래, 이게 원래 맞는 건데.’
집이라는 안전한 울타리.
그것은 저 시기의 어린아이에게 마땅히 주어져야 할 환경이었다.
하지만 멸망이 모든 것을 망쳐버렸다.
지난 몇 달, 저 어린 것이 얼마나 많은 몹쓸 상황들을 목격했던가?
‘후우······.’
참으로 오래간만에 평화를 만끽한 그였지만······.
불쑥 들어온 아들의 질문이 그 안식을 깨뜨렸다.
“아빠! 여기가 이제 우리 집이야?”
“하하······ 집은 아니야. 오늘만 하루 놀러 온 거야.”
집이 아니라는 말.
그 말에 아들의 얼굴이 금세 그늘에 가려졌다.
“······그럼 우리 내일 나가야 해?”
“······.”
퇴실시간은 내일 오전 11시까지였다.
고작 하루 만에 이 집을 다른 누군가에게 넘겨줘야 한다고 생각하니, 박윤호는 새삼 기분이 착잡해졌다.
괴물이 나타날 걱정도 없다.
물을 틀면 물이 나오고, 스위치를 켜면 불이 켜졌다.
심지어 에어컨까지 달려 있었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일상의 풍경.
그 모두가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돌아오고 있었다.
“여보, 식사해요.”
아내의 부름에 따라 들어간 부엌에는 먹음직스러운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일을 마치고 늦은 저녁에 들어갈 때쯤, 아내가 차려주곤 했던 따뜻한 식사.
팍스FC가 마련해준 아파트에는 밥솥을 비롯한 각종 생활 가전이 빠짐없이 갖춰져 있었고, 커다란 양문형 냉장고 안에도 각종 식자재가 구비되어 있었다.
“이야······.”
잘 구워진 고등어구이를 뜨끈한 쌀밥 위에 얹었다.
입안 가득 풀어지는 밥알을 느끼며, 포근한 미역국을 흘려 넣었다.
한참이고 음식을 삼키던 그는 결심했다는 듯, 서투른 젓가락질을 하는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재형아. 우리 여기서 살까?”
“응? 정말!?”
가능한 일이었다.
<팍스 건설>이 주도한다던 대규모의 건설 사업.
사업에 참여한 인부들에게는 전투원들 다음 순번으로 거주 권한이 주어진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으니까.
한편, 그의 아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안 할 거라고 했었잖아요? 그냥 조용히 묻어가는 편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이 바뀌었어. 사실 조금 더 고생하더라도······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거잖아? 그리고 크게 본다면, 나도 한 손 보태는 셈인 거야. 팍스FC는 모든 걸 옛날로 되돌릴 생각이라고.”
박윤호의 욕망이 자연스럽게 피어났다.
그리고 그 욕망은 팍스FC가 내세운 대의에 고스란히 겹칠 수 있었다.
세계를 복구하려는 팍스FC의 방대한 스케일에서는 그 누구든 자신의 역할을 발견할 수 있었으니까.
“어쩌면······ 정말 옛날처럼 살 수 있을지도 몰라.”
그는 감히 그렇게 꿈 꿀 수 있었다.
***
얼마 뒤, 유성철이 미소를 띤 채 물류센터로 들어왔다.
“됐습니다. 지원자가 몇 배는 늘었어요.”
마침내 매듭이 풀렸다.
사람들이 원하는 집을 내어주고, 또 그들을 동원해 집을 짓는 형태.
덕분에 상하수도 시설을 비롯한 이런저런 토목 사업을 계획할 수 있게 됐다.
조금 시간이 필요하긴 하겠지만 엘븐하임과 아발론의 거주지 문제 또한 해결할 수 있을 터.
시름 하던 고민이 해결된 참이었지만, 유성철이 걱정스럽다는 듯 덧붙였다.
“그런데······ 공사 인력들은 앞으로도 꾸준히 필요한 것 아닙니까?”
“그렇죠?”
“사람들이 집을 받은 뒤에도 일하려 할까요? 너무 쉽게 집을 내어주시는 건 아닌지······.”
그의 말대로였다.
집을 얻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그 이후로는 사람들이 나설 이유가 없어질 테니까.
하지만 괜찮았다. 소유에는 지속적인 비용이 따르는 법이었으니.
“그래 봤자죠. 수도니, 전기니 우리가 공급해줘야 할 텐데.”
그들은 계속해서 일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팍스 에너지 공사로부터 자원을 공급받을 수 있을 테니까.
더욱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이제 사람들은 더 적극적으로 싸움에 임할 겁니다.”
“······어째서요?”
“잃을 게 생겼으니까요. 목숨 하나 부지하려 할 때와는 상황이 달라지겠죠. 가장 좋은 방법은 팍스FC에 힘을 보태는 걸 테고요.”
“아······!”
그 말 그대로였다.
가족들과 함께 머무를, 안락한 집을 얻게 된 팍스맨들.
그 환경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상공회의소의 침략에 더 적극적으로 대응하게 될 터였다.
“이제 뭐든 지어보죠. 일꾼들이 확보된 참이니.”
무너진 콘크리트로 뒤덮인 세상.
이제야 비로소 팍스 건설의 첫 삽을 뗄 차례였다.
팍스 건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