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ding a Logistics Center in the Apocalypse RAW novel - Chapter (117)
아포칼립스에 물류센터를 숨김-117화(117/240)
117화. 지옥불 (2)
푸욱.
촥! 촤악!
한강대로를 중심으로 울려 퍼지는 질서정연한 소리.
포탈을 타고 나온 아발론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도축용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어마어마 하구만.”
자동반사적인, 아니 어쩌면 일종의 트랜스 상태라고 봐도 무방했다.
아발론인들은 뭐라 설명할 겨를도 없이 괴물들의 사체로 달려들었고, 지난 80년간 숙달한 처리 기술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툭.
툭툭.
그 결과, 도로 중앙에는 각종 부산물이 종류별로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종류가 아주 많은 건 아니지만······.”
고블린과 오크의 사체에서 손바닥만 한 뿔을 뽑았고, 트롤들의 관절마다 칼을 찔러넣어 길고 넓적한 푸른색 가죽을 뜯어냈다.
목이 꿰뚫린 채, 뒤로 뻗어있는 오우거에는 수십 명의 아발론 사람들이 달려들어 창을 찔러넣으며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해 철판을 뽑아냈다.
푸욱! 쑥.
뽀옥!
약간의 흐트러짐도 발견할 수 없는 전문적인 기술들.
커다란 이사 박스에 가득 담긴 뿔, 비단처럼 차곡차곡 쌓인 트롤 가죽, 한쪽에 기왓장처럼 쌓여가는 오우거의 강철 비늘을 보고 있자니 절로 혀가 내둘러졌다.
그렇게 한참이고 아발론 사람들의 기예를 바라보고 있을 즈음······.
“대표님. 이리 와 보시겠소?”
“음?”
드워프, 쿠퍼가 나를 데리고 본부 마당으로 데려갔다.
거기에는 올림푸스로부터 얻어낸 방패, ‘아이기스’를 무장한 김솔이 서 있었다.
어쩐지 묘하게 들뜬 표정.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방패가 몰라보게 바뀌어 있었다.
“이건······?”
“비늘 철판을 덧댔소. 원래는 운철이라고 부르는 금속인데······ 아발론 친구들이 깨끗하게 떼어내 준 덕에 고맙게 사용했지.”
상상 이상의 견고함을 자랑하던 강철 오우거였다.
녀석만큼이나 아이기스의 방어력이 한층 더 강화되었다는 뜻.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었지만, 정작 쿠퍼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내가 한 거라곤 비늘 한 장을 가져다 그대로 때려 박은 게 고작이오. 보시면 아시겠소만······ 방패의 중심부밖에 보강하질 못했지.”
어정쩡한 크기의 오우거의 강철 비늘.
그러고 보니 흑색 운철이 덮은 범위는 방패의 60퍼센트 정도에 불과했다.
쿠퍼는 그 나머지를 채우지 못한 이유를 털어놓았다.
“작게 잘라서 이어 붙이는 방법도 떠올렸지만······ 그럴 수는 없었소. 부산물은 과하게 변형하게 되면 원래 부여돼 있던 효과가 날아가 버리거든.”
쿠퍼는 운철 비늘에 방어력과 관련한 ‘의미소’가 들어 있으며, 이를 쪼갤 경우 평범한 금속 조각이 되어버린다고 덧붙였다.
어쩌면 드워프들의 마력 회로와 비슷하다고도 볼 수 있었다.
회로의 각인이 아이템의 효과를 만들어 냈던 것처럼, 이번에는 부산물의 크기나 재질, 형태에 그 효과가 담겨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래서 채취가 어렵다는 거군요.”
“그렇소. 조금만 삐끗해도, 바로 쓰레기가 되어 버리니까. 그래서 저 아발론 사람들이 정말 대단한 거요.”
부산물의 신비와 가공의 어려움에 대해 한껏 늘어놓은 쿠퍼.
내가 그에게 물었다.
“그래서······ 방패는 그냥 저렇게 써야 한다는 거죠? 다른 방법 없이?”
“차라리 그랬으면 아쉽지나 않았겠소. 저런 상태면 이음새를 녹여서 주변으로 다른 파편을 이어 붙이는 게 가장 좋은데······.”
“좋은데요?”
“지구의 불로는 녹일 수가 없소.”
과연 몬스터의 부산물이니만큼, 평범한 물질이 아니었다.
지구에 있는 그 어떤 용광로를 활용하더라도 녹일 수 없다는 소리.
쿠퍼가 천천히 부연했다.
“간단하게 생각하면 되오. 사물이라 한들 사람과 다를 바가 없어요. 오랜 세월을 쌓아온 사람일수록 강고하지만, 또 한편으론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이지. 그런 사람을 변하게 하려면 얼마나 큰 사건과 충격이 필요하겠소? 그러니 단단한 물질을 가공할수록 훨씬 더 뜨거운 열이 필요한 법이지요.”
운철 비늘을 바라보는 쿠퍼의 표정에서 남다른 애정이 묻어났다.
그 또한 이 운철에 새로운 운명을 부여해 주고 싶을 터.
조금이라도 방법을 찾았으면 하는 마음에, 내가 그에게 물었다.
“그럼 어떤 불로 녹여야 하는데요?”
“그야, 지옥불이지요.”
“하하······.”
조금은 절망적인 듯한 그의 농담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을 보며 깨달았다.
전혀 농담이 아니었다는 걸.
“······그딴 게 진짜 있다고요?”
“물론이지요. 일종의 원시적인 생명체 같은 건데······ 드워프들은 ‘게한나의 불’이라고 부릅니다. 이곳 대장간에 그게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소.”
몬스터 웨이브가 계속될수록 새로운 종류의 부산물들이 쌓여 나갈 것이다.
하지만 쿠퍼는 그중 상당수가 지구의 불로는 가공이 불가할 것이라 덧붙였다.
더 나아가······.
“지난번에 만들어드린 성창······ 아직 쓰고 계시지요? 이번 운철만 하더라도, 그 불만 있다면 6강 무기도 만들 수 있을 게요.”
그 불이 있다면 내가 한층 더 강해질 수 있다는 것까지.
솔깃한 이야기였다.
마력회로를 이용한 5강 이상의 아이템.
양질의 재료가 뒷받침된다면, 그 이상으로 한층 더 강력한 아이템을 만들 수 있다는 소리였으니까.
“지구에서 그걸 찾을 수 있을까요? 지옥불인지 뭐시기를?”
“어쩌면 게한나가 이미 지구에 들어와 있을지도 모를 일이지. 번식을 위해서라면 다차원 곳곳에 다 씨앗을 퍼뜨리는 놈들이요. 종국에는 다차원 전체를 불길로 집어삼키는 것이 놈들의 목적이거든.”
이미 개방된 지 꽤나 시간이 흐른 뒤의 지구였다.
자유 개척이 됐든, 입찰 경쟁이 됐든 이미 놈들이 지구에 둥지를 틀었을지도 모를 일.
만약 쿠퍼의 말대로 정말 게한나가 지구에 있다면, 지금이야말로 바로 그 ‘지옥불’을 확보해야 할 시점이었다.
지옥불의 위치를 물색해 보자는 내 말에, 쿠퍼는 몇 가지 단서를 전해주었다.
“첫째로는 주변 지형이 모두 마그마 지대로 바뀌게 될 거요. 지구의 지반이 놈들의 열기를 이겨낼 리가 없을 테니······ 모두 용암처럼 녹아 버리겠지.”
그가 먼저 거론한 것은 마땅히 있음 직한 지구에서의 물리적 변화였다.
그리고 다음은······.
“주변의 대상들이 모두 두 번씩 타오를 거요. 주위 환경이 됐든, 동물이 됐든, 사람이 됐든······.”
물리적인 현상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힘의 결과였다.
“그 정도면 확실히 눈에 띄겠네요.”
“그렇소. 게한나에 대해 아는 사람이라면 몰라볼 수가 없는 특징이지······.”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세계 곳곳에 퍼져 있는 수십 개의 포탈.
그 포탈 주변에 있는 팍스FC 소속들에게 제보를 부탁하면 될 테니까.
나는 곧장 팍스를 불러 메시지 내용을 작성했다.
띠링!
—
[Web 발신]난데없이 마그마가 속출하기 시작한 지역, 그리고 동일한 장소에서 화재가 연달아 발생한 지역은 팍스FC로 제보 바랍니다.
—
산불 제보를 부탁하는 공익적인 메시지.
아니나 다를까, 고작 몇 분 만에 새 소식이 들려왔다.
“······다이치?”
현재 일본의 각성자들을 이끄는 봉인사 다이치.
그가 내 아공간으로의 입장을 요청해 왔으니까.
***
“오랜만이에요. 정겸씨.”
쿠퍼와 함께 아공간으로 들어오자, 쭈뼛쭈뼛 인사를 건네며 다이치가 다가왔다.
불꽃에 휩싸인 거대한 마두귀를 풀어놓던 걸출한 봉인사, 다이치.
유신각성회로 인해 박살 난 일본을 복구하느라 도통 얼굴을 비추지 못했지만, 얼마 전 북한산에 페르메곤의 가고일들이 들이닥쳤을 즈음 나름 일본의 병력을 이끌고 지원을 왔던 그였다.
위치가 하필 북한산이었던 탓에 마두귀를 풀어놓지는 못했었지만.
이러나저러나 지금 중요한 것은 게한나의 소재.
다이치가 자신이 목격한 것을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꽤 규모가 컸는데······ 산불이 두 번 난 장소가 있어요. 민가에도 마그마가 흘려들었고요. 사실 마그마에서 괴물들이 출현하기도 해서, 안 그래도 팍스FC에 지원을 요청드릴까 고민하던 중이었습니다.”
피해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다이치는 게한나의 괴물들을 처리하기 위해 마두귀를 풀어놓았으며, 한창 마그마 위에서 전투를 이어가던 마두귀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불길에 휩싸여 그대로 죽어 버렸다고.
“첫 번째 불길은 아무렇지 않게 견뎌냈는데······ 두 번째로 불길이 일었을 땐 비명을 지르면서 죽어 버리더라구요.”
아끼는 포켓몬을 잃은 트레이너처럼, 다이치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시선을 마주치자, 쿠퍼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들어도 그가 말한 ‘게한나’의 특징과 정확히 일치했으니까.
곧장 다이치에게 물었다.
“거기가 어딥니까?”
“후지산입니다. 마그마 때문에 눈 봉우리가 까맣게 녹아 버렸어요.”
우리에게 익숙한 곳이었다.
일본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후지산.
지옥의 마수들이 잘 쉬고 있는 산을 활화산으로 만들어버렸을 줄이야.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인 쿠퍼가 입을 열었다.
“틀림없소. 화산을 이용하는 건 게한나의 번식 수단 중 하나거든. 머지않아 화산이 폭발하면서 지구 곳곳에 게한나의 마그마가 흩뿌려질 게요.”
“폭발까지 얼마나 걸릴까요?”
“정확한 시점을 알 수 없소. 하지만 불이 두 번이나 붙었다는 걸 보면······ 머지않아 폭발할 게요.”
아직은 후지산에 숨어, 웅크리고 있는 게한나의 지저 악마들.
아무래도 팍스FC의 첫 정복 지역은 바로 저 후지산이 되어야 할 것 같았다.
화산 속이라 하니, 예상하거나 기대했던 영토는 아니지만······ 다름 아닌 ‘게한나의 불’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더욱이, 자칫 화산이 폭발하기라도 한다면 실로 귀찮은 일이 될 게 분명했다.
후지산에서 게한나의 불을 가져오겠다는 내 말에, 쿠퍼가 한 가지 의문을 덧붙였다.
“그나저나 불을 어떻게 가져오실 요량이시오? 게한나의 불은 어디 나뭇가지에 붙여 가져올 수 녀석이 아니오. 다른 물질의 ‘의미소’를 용해할 만큼 고집이 상당한 녀석이거든. 그래서 보통은 아예 게한나의 불이 놓인 곳에 대장간을 지어버리는 게 보통이요. 그 열기를 감당하려면 주변 땅을 모조리 파내야 하지만.”
과연 평범한 불이 아니었다.
원시적인 생명체라는 말답게, 일반적인 불처럼 다룰 수는 없다는 뜻.
더욱이, 대장간을 짓겠답시고 그 높은 후지산을 파 내리는 귀찮을 짓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여건만 된다면 아공간에 게한나의 불을 담는 것이 가장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이미 파리에서 루브르 박물관을 넣은 탓에 레벨업 전까지는 더이상의 수용이 불가했다.
어떻게든 다른 방법이 필요한 시점이었지만······.
“당연히 가져올 수 있죠.”
괜찮았다.
우리에게는 튼튼한 일제 양동이가 있었으니까.
한 번에 하나밖에 담을 수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지만, 공교롭게도 얼마 전 그 양동이가 깨끗하게 비워진 상태였다.
툭툭.
나는 몸을 일으켜, 옆에 선 다이치의 양 어깨를 두드렸다.
순수한, 그의 맑은 울림소리가 텅텅 들려왔다.
“······정겸 씨?”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는 일제 양동이.
나는 팍스FC의 일원에 이 젊은 봉인사가 있음을 감사할 따름이었다.
“바로 갑시다.”
그가 팍스FC의 새로운 봉화, 게한나의 불을 옮겨줄 테니까.
지옥불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