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ding a Logistics Center in the Apocalypse RAW novel - Chapter (194)
아포칼립스에 물류센터를 숨김-194화(194/240)
아포칼립스에 물류센터를 숨김 194화
인재 (1)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다.
성문을 비집고 들어온 적들을 내쫓고, 깨진 틈새를 매워 넣었을 뿐.
하지만 공작령의 지원군이 베레슈티의 방어선을 강화해준 덕에, 끊어진 대화를 마저 이어 나갈 만한 시간은 벌 수 있었다.
알현실로 돌아온 직후.
나는 베로니카 공녀가 비치는 거울 앞에 <추적 거울>을 비춰주었다.
줄곧 앉아있던 그녀는 훌쩍 몸을 세웠고, 이내 화면을 향해 크게 얼굴을 들이밀며 그녀의 붉은 눈동자를 빛냈다.
“그럼, 시작할게요.”
키이이잉!
거울을 통했음에도 <추적 거울>은 성공적으로 작동했다.
공녀의 홍채를 인식한 거울은 이내 새카맣게 물들었고, 한 편의 영화처럼 새로운 장면을 비추기 시작했다.
거울에 담긴 것은 여전히 공녀 자신이었다.
하지만 그곳은 한밤중, 차가운 바람이 흘러 불어오는 궁전의 복도였다.
그녀는 자다가 깬 것인지 순백의 잠옷을 입고 입었으며, 손에는 거울을 들고 있었다.
“······.”
그녀는 놀란 듯 시선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급히 단장이라도 하고 있었다는 듯, 얼굴을 붉히며 등 뒤로 거울을 감추었다.
다행히 시선의 주인은 거울의 정체를 의심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그럴 여유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공녀와 대충 묵례를 주고받고는, 빠른 걸음으로 중정 선착장을 향해 서둘러 내려갔다.
함께 영상을 지켜보고 있던 공녀가 우리에게 말했다.
“장소는 이곳 베레슈티 백작성, 시간은 프랑코 백작이 아버지와 시설의 최종 공정을 시험했던 그날 밤이에요. 갑자기 잡힌 일정이라 저도 서둘러 움직여봤지만······. 결국 아버지는 숨이 끊어진 채로 발견되셨고, 성혈 또한 자취를 감춘 상태였죠.”
공녀가 뿌득 입술을 씹었다.
영상 속 시선의 주인은 다름 아닌 프랑코 백작.
그것도 성혈을 탈취하고 난 직후의 상황이었다.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어째서 이 작은 거울이 성혈의 위치를 알 수 있는 단서가 될 수 있었는지.
영상 속 시선이 사건이 벌어진 직후의 것이라면, 곧 그가 어디에 성혈을 감춘 것인지 확인할 수 있을 터였다.
저벅저벅.
백작의 시선이 발걸음에 따라 규칙적으로 흔들렸다.
머지않아 선착장에 도착한 그는, 자신이 타고 왔던 차원선에 곧장 몸을 실었다.
드드드득!
땅을 울리며 부유하는 차원선.
멀어져 가는 베레슈티 성을 바라보며, 프랑코 백작은 품에서 꺼낸 줄을 길게 늘어뜨렸다.
“······.”
그 끝에 매달린 것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붉은색 보석이었다.
그것이 도둑맞은 베로니카의 성혈이라는 것은 공녀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최대한 빨리 감정을 억눌렀다.
지금 해야 할 일은 원한을 되새기는 일이 아닌, 성혈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이었으니까.
차원선은 다차원에 설치된 포탈을 경유했고, 몇 번의 공간 도약을 거듭하며 항해를 이어 나갔다.
부엔디아가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경로를 쫓는 건 아무 의미가 없겠군. 공간을 도약한 이상 어디로, 얼마나 뛰어넘었는지 알 수가 없으니······. 도착한 장소에 최대한 단서가 있기를 바랄 수밖에.”
후보는 여럿 있었다.
프랑코 가문이 주름잡고 있다던 아케인의 마탑, 무색탑.
프랑코 백작성의 숨은 비고부터, 아케인에 자리한 상공회의소의 특수 설립 본부까지.
하나같이 다차원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경비가 삼엄한 곳들이었으니까.
하지만 마침내 차원선이 당도한 곳은······.
“······어디지 대체?”
평범하게 짝이 없는 회색 건물이었다.
옆으로 긴 직사각형 형태의 4층 건축물.
마탑처럼 신비롭지도, 비고처럼 숨겨져 있지도, 특수 기관처럼 경비가 삼엄하지도 않았다.
드문드문 수 놓인 푸른 조경이 잿빛 건물의 칙칙함을 애써 덜어주고 있었을 뿐.
“혹시 아시는 곳입니까?”
“음······. 모르겠네. 전혀 감도 안 잡히는군.”
베레슈티 백작이 물었지만, 부엔디아마저 고개를 저었다.
베로니카 공녀 또한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은지, 뚫어져라 영상을 바라보며 입술을 뜯는 것이 고작.
그나마 건진 인상이 있다면, 마치 학교 같다는 느낌 정도였다.
좌우 대칭을 이루는 것이, 중고등학교 건물이나 대학 사무동을 연상시키는 구조였으니까.
프랑코 백작이 내려선 선착장에는 몇 대의 또 다른 차원선이 정박되어 있었고, 멍한 표정의 인족, 또는 이종족들이 같은 옷을 입은 채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여전히 아리송할 따름이었지만, 영상의 주인공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프랑코 백작은 놀란 표정의 직원들을 물러 세우며 성큼성큼 건물 로비로 들어섰다.
곧장 중앙 계단을 올라가려던 그는 갑자기 우뚝 자리에 멈춰서더니, 다시 로비 중앙으로 되돌아왔다.
“······.”
그가 마주한 것은 커다란 전신 거울이었다.
화면 한가득 비쳐 보이는, 프랑코 백작의 모습.
얼굴은 흡혈귀 못지않게 창백한 백색이었고, 갈색에 가까운 금발 머리를 뒤로 넘겨 멀끔한 이마를 드러내고 있었다.
고급스러운 흰색 마법복 카라에는 아케인 마법사들의 신분을 나타내는 붉은색 넥타이가 조금 흐트러진 채 매여 있었다.
백작은 가만히 자신의 눈을 주시했다.
그러곤 입으로 무언가 중얼중얼 되뇌기 시작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그 입 모양을 살펴보려 했을 즈음······.
파지직!
돌연, 추적 거울의 화면이 흔들리며 영상이 꺼져버렸다.
.
.
.
키이이잉!
공녀가 몇 번이고 다시 거울을 재생해 봤지만, 다음 장면은 여전히 확인할 수는 없었다.
나름의 확신이었을지, 아니면 습관적인 조심성이었을지, 프랑코 백작의 심리까지는 알 수 없는 노릇.
당장 중요한 것은 영상 속의 장소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아쉽게도 내부까지 추적하지는 못했지만, 베로니카의 성혈이 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해 보였으니.
“그럼······. 다시 틀어볼게요.”
키이이잉!
공녀는 몇 번씩이고 반복해서 거울을 재생했고, 우리는 영상에 담긴 빈곤한 단서들을 끈질기게 두 눈에 담았다.
그러던 중······.
“잠시, 잠시만요.”
나는 차원선 주변으로 길게 널어선 행렬에 주목했다.
하나같이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종족들, 그들의 표정이 어딘가 익숙했으니까.
가만히 그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한 인물을 떠올렸다.
이 멍한 표정을 누구보다도 많이 보았을 사람.
내 짐작이 맞다면, 그가 이 장소의 정체를 확인해 줄 수 있을 것이었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곧장 포탈을 열어 메시지를 전달했고,
지이이이잉!
우리 쪽으로 다시 포탈이 열리며, 익숙한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함께 차원 폭풍에 맞섰던, 그라디바 난민 정착촌의 수장, 제르였다.
“부르셨다고요?”
그는 여전히 정착촌에 머무르고 있었다.
단 이번에는 상공회의소를 돕는 것이 아닌, 우리의 해적질을 암암리에 지원하고 있었다.
“이걸 한번 봐주셨으면 해서요.”
“이건······.”
내가 보여준 것은 갈 길을 잃은 듯한 멍한 표정.
다름 아닌 그라디바의 구직자들에게서 보았던 표정이었다.
그라디바의 풍광을 관조하며, 나름의 경지에 오른 구직자들은 하나같이 저런 표정을 하고 있었으니까.
제르가 본 것은 구직자들의 표정이 아닌, 그 앞에 정박된 차원선이었지만, 어쨌거나 결론은 같았다.
“이건······ 공채 시즌에 나타나는 셔틀입니다. 구직자들을 태우고 사라지는 걸 몇 번 본적이 있습니다.”
“그 말인즉슨······.”
부엔디아가 알겠다는 듯 말을 끌었다.
그제야 우리는 성혈이 숨은 장소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인재개발원이네요. 상공회의소의 직원을 양성하는.”
.
.
.
백작령도, 마탑도 아니었다.
하지만 인재개발원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자마자, 모든 퍼즐이 맞아떨어지기 시작했다.
“소싯적에 우연히 들어본······ 사실인지 소문인지 모를 정보가 하나 있네. 현실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으면서, 상공회의소의 게이트 포탈로만 진입할 수 있는 공간이 딱 두 개가 있다고. 그중 하나는 상공회의소의 <본사>이고······. 다른 하나가 <인재개발원>이었네.”
마르케스를 이끌며 상공회의소를 적대했던 부엔디아.
당연하지만, 그는 우리 중 상공회의소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설명대로라면 인재개발원은 다차원을 통틀어, <본사>를 제외하고 가장 내밀한 장소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장소임에는 틀림이 없구만. 외부 세계와 연결된 공간이 아니니 말일세.”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인재개발원의 셔틀을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무력으로 탈취하거나, 아니면 몰래 따라붙거나.
하지만, 부엔디아는 고개를 저었다.
“셔틀에 문제가 생기는 순간, 공간 도약 포탈을 그대로 닫아버리겠지. 포탈의 이동 좌표가 지정되는 것도 찰나에 불과하니······. 따라 들어가는 것도 불가능해.”
“셔틀 표면에 미리 아공간 포탈 좌표를 찍어두는 건요? 도착하면 그리로 나올 수 있게······.”
“공간 도약만 열 번이 넘네. 안타깝지만, 표면에 달아둔 좌표가 그대로 남아있으리라고는 도무지 생각이 들지 않는군.”
“이런······.”
결국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상공회의소의 직원으로 선발되어, 당당히 인재개발원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
놈들의 까다로운 입맛에 맞는, 쓸모 있는 인재가 되어야 한다는 소리였다.
‘······아포칼립스에서 구직난에 시달릴 줄이야.’
문제는 그 ‘입맛’이었다.
상공회의소가 토익 점수 따위를 요구할 리도 없었으니까.
다행히 그에 관해서는 제르가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귀하디귀한, 취업 정보였다.
“상공회의소는 신분, 계급, 재산 같은 조건을 전혀 따지지 않습니다. 그 어떤 밑바닥 하류 인생도 선발을 노려볼 수 있죠. 직원을 선발하는 기준은 단 하나, 그가 얼마나 ‘텅 빈’ 존재인가 그것뿐입니다.”
“텅 빈 존재······?”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구직자들의 멍한 표정, 그것 하나뿐이었다.
상공회의소의 직원이 되겠다는 목적 하나만을 위해, 그라디바를 관망하며 모든 것을 비워낸 그들.
머릿속을 깔끔히 씻어낸 자들만이 상공회의소의 직원으로 선발될 수 있었다.
그때, 베레슈티 백작이 입을 열었다.
“공녀님, 제가 가겠습니다.”
“백작······?”
“혈주술을 사용하세요. 에센스를 재료로 사용한다면······ 제 기억을 없애고 강력한 암시 하나만 남겨둘 수 있을 겁니다. 불필요한 기억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라면 직원이 될 수 있는 요건으로는 충분할 테니까요.”
공작가의 후계에게 전수되는, 비전 혈주술이라는 게 있다는 것 같았다.
발동 조건이 실로 까다롭고, 주술 대상의 정신이 넝마가 된다는 것이 문제.
상공회의소가 요구하는 조건에 부합될 수 있는 상태였다.
백작은 마음을 단단히 먹은 듯했지만······.
“안 됩니다. 백작! 그걸 말이라고······!”
공녀는 백작의 충성을 대차게 거절했다.
듣기로는 공작이 살해된 뒤로도 공녀의 든든한 후견인이 되어주었다는 모양.
어쩐지 어린 시절부터 알뜰살뜰 챙겨주던 삼촌 같은 이미지였다.
“기억을 지운다고 했습니까? 제게 피로 만든 그네를 태워주셨던 것! 중정에 피로 만든 정글짐을 만들어 주셨던 것! 피로 줄다리기를 했던 것까지······! 그 모두를 지워버리겠다고요?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하지만, 공녀님······!”
“······.”
어린 시절의 좋은 추억치고는 피가 좀 많이 등장하는 것 같았다.
공녀가 이렇게나 정이 많은 성격인 줄은 또 몰랐지만.
백작은 사실상 목숨을 내던지려 하고 있었고, 공녀는 그 희생을 감당하기 어려워하고 있었다.
뚝뚝.
그들의 눈에서 피를 대신한 주황빛 에센스가 방울방울 떨어졌지만······.
‘······분신 쓰면 되는데.’
전혀 무용한 일이었다.
우리에게는 백작보다 훨씬 더 좋은 인재가 남아있었으니까.
해적질을 돕고 있는 분신 외에, 형 성겸의 분신 하나가 아직 남아 있었다.
‘텅 비어있다는 조건에도 맞고.’
분신은 사실상 텅 빈 마네킹에 가까웠다.
부여된 몇 가지 암시에 의존해 움직이는 존재였으니.
상공회의소의 직원이 되기에 완벽한 조건을 갖췄다는 뜻이었다.
그건 그렇고······.
“백작마저 잃으면 나는 어떻게 살라구요!”
“공녀님! 마음 단단히 먹으셔야 합니다. 베로니카 공작가의 유지를······.”
‘저걸 어쩐다.’
두 흡혈귀의 울음은 도무지 그칠 줄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