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ding a Logistics Center in the Apocalypse RAW novel - Chapter (205)
아포칼립스에 물류센터를 숨김-205화(205/240)
아포칼립스에 물류센터를 숨김 205화
진심 (1)
휘오오오오······.
냉랭한 기운이 커다란 방 안을 감싸고 돌았다.
어둑한 밀실에는 푸른색 마력 조명이 은은한 빛을 내뿜었다.
바싹 마를 듯 건조한 바닥은 먼지 한 톨 없을 만큼 청결했다.
좌로도, 우로도 검은 비석들이 줄지어 세워져 있었기에, 방 안의 풍경은 사뭇 흐린 날의 공동묘지를 연상케 했다.
저벅저벅.
그 사이로 누군가 로브 자락을 펄럭였다.
조금은 지친 표정의 프랑코 백작이 검은 비석 사이를 천천히, 천천히 걸었다.
“······.”
백작이 주변을 돌아보았다.
구석구석 빨간 핏줄기가 돋아난 검은 비석들.
베로니카의 성혈을 손에 넣었던 당시, 하나하나 미리 감응시켜두었던 것이었다.
비석에 그려진 문양은 절반만 그려져, 아직 불완전한 그림으로 남아 있을 뿐이었지만.
그러나 오늘부터는 아니었다.
나머지 문양을 채워줄 드라칸의 성혈이 준비된 참이니까.
백작의 등 뒤에는 조금 전 크라고 공작의 심장에서 뽑아온, 드라칸의 성혈이 두둥실 떠오른 채 그를 따라오고 있었다.
츠츠츠츠······.
성혈이 닿는 곳마다, 검은 비석들에 빨간 핏줄기가 돋아났다.
새어 나온 피가 줄기처럼 흐르며 반질반질한 표면에 깊은 골을 남겼다.
비석의 반쪽뿐이었던 문양을 하나둘 완성해나갔다.
지이이이잉!
완성된 비석이 은은한 빛을 발하던 중.
멀찍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그림자들이 웅성거렸다.
-드디어······!
-길었습니다. 길었어요.
-오랜 역사의 숙원이 우리 손에······.
그들도 모르지 않았다.
쳇바퀴와도 같았던 다차원의 역사.
자신들이 그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는 것을.
휘몰아치는 감격에 누구 하나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
아니, 딱 한 명 있었다.
두 개의 성혈을 모아온 일등 공신.
프랑코 백작만은 그저 덤덤한 표정으로, 말없이 검은 비석 사이를 걸었다.
평범한 추모객처럼.
***
에센스 공장에서의 사건이 있은 직후.
우리는 아공간을 통해 그라디바에 있는 정착촌으로 향했다.
주어진 단서는 그라디바의 검은 비석뿐이었다.
만약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그 장소만큼은 그라디바가 되리라, 본능적으로 그렇게 느껴졌기에 내린 선택이었다.
다차원을 통틀어 십수 개나 존재하는 그라디바지만, 최근 차원 폭풍이 일어났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중에서도 특히 이곳이 가장 유력했다.
“우리는 일단 그렇게 됐고······.”
혈겸은 베레슈티에 남겨두었다.
당초 계획했던 대로, 혈맹에 접촉하도록 해볼 요량.
성혈을 탈취한 프랑코 백작의 목적과 비석의 정체를 확인해볼 생각이었다.
우리가 그라디바에서 상황을 대비하는 사이, 일종의 정보원 역할을 해줄 터.
위험한 일인 것은 분명하지만······.
‘탈출은 언제든 할 수 있으니까.’
이능 검사지를 추가로 챙겨주고 온 참이다.
문제가 생기더라도 <상품회수>를 발동해 도망쳐 나오면 될 터.
겸사겸사 베레슈티를 점령한 연합군의 분위기도 함께 염탐해볼 생각이었다.
“일단은 은신부터.”
소파에 앉은 형이 고개를 끄덕이며 혈겸을 조작했다.
슈루루룩!
커다란 날개가 혈겸을 알처럼 감쌌고, 혈겸의 시선 또한 흐릿하게 물들었다.
베레슈티 백작이 건네준 <은신 날개>를 사용한 것.
물류상황실의 위성으로 확인해보니, 과연 혈겸의 모습이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때마침······.
덜컹!
대여섯 명의 마법사들이 우르르 공장 안으로 들어왔다.
-서둘러 움직여라, 단번에 치워야 한다.
-예!
현재 공장의 내부 상황은 처참했다.
에센스 생산 설비가 모조리 박살 난 것은 물론, 싸늘한 크라고 공작의 시체가 붉은 피를 죽죽 흘려보내고 있었으니.
-컷피스.
-디솔루션.
-클린.
갖가지 마법이 사방으로 날아다녔다.
공작의 시체가 탁탁 토막이 났고, 곧 흐물흐물해지며 사르르 녹아내렸다.
마지막으로는 빗자루처럼 생긴 환영이 몰아치며 바닥에 남은 흔적은 말끔히 지워버렸다.
‘살벌하네······.’
증거 인멸의 현장을 보고 있자니 속이 메스꺼웠다.
그들 모두가 하나같이 붉은 넥타이를 맨, 적색 마법사였다.
행여 발각이라도 된다면 다음 차례에 녹아 없어지는 건 혈겸이 될 터.
성겸이 심혈을 기울여 조작한 덕분에, 다행히 들키지 않고 공장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렇게 공장 출입구에 다다랐을 즈음······.
-그래서 다시 봉쇄 명령입니까? 잘 좀 풀리나 싶었더니······.
-그래, 혈맹의 공작이 직접 와서 다 때려 부수고 갔다고 하더군. 하여간 그 꼴통들은 좀처럼 대화가 안 통한다니까.
입구를 지키는 청색 마법사들의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백작님께서 시설을 복구하고 계신다. 집중이 깨지면 수식이 꼬인다고 하니······. 철통같이 막아놓으라고 적색 마법사님들께서 단단히 당부하셨어.
‘교묘하게 둘러대고 갔군.’
생산설비를 부순 건 따지고 보면 나였다.
반마력탄으로 굳어진 에센스를 끌어당기며 수조가 단숨에 박살 났으니까.
백작이 이곳에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 아니었는데, 크라고 공작의 죽음 때문인 것 같았다.
비슷한 시점에 자리를 벗어난다면, 아무래도 의심을 사게 될 테니.
혈겸이 마저 출입구를 빠져나가는 사이, 마법사들의 사담이 계속해서 들려왔다.
-백작님도 정신력이 대단하시네요. 조카라고는 하지만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였는데······.
-그래서인지도 모르지. 전후 복구에 열중이신 게······. 아무튼 베레슈티나, 베로니카나 씹어 먹어도 시원치가 않아. 감히 대 아케인의 귀족을 건드렸다고 생각하면······.
.
.
.
“후······.”
밖으로 빠져나온 혈겸은 베레슈티의 상황을 살펴보았다.
-다차원의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
-위하여!
대체적으로는 베레슈티에서의 승리를 자축하는 분위기였다.
막심한 피해를 묻어두고, 어떻게든 상처를 봉합하려는 외침.
천사들이 조금 어수선해 보이는 게 특징이라면 특징이었다.
그리고 그때,
탓! 타닷!
‘흡혈귀들?’
서너 명의 흡혈귀들이 다급히 건물을 넘어가는 것이 포착됐다.
혈겸과 마찬가지로, 공장 지대에서 밖으로 빠져나가려는 움직임.
유난히 풍채가 좋은 게 눈에 띄었는데, 생각해 보니 크라고 공작 또한 그랬다는 게 떠올랐다.
‘공작이 데려온 놈들인가?’
그러고 보니 지난 싸움에서는 확실히 본 적이 없는 놈들이었다.
어쩌면 혈맹의 수뇌부에서 파견된 놈들일 지도.
공작의 유언을 전하기에는 저만한 상대가 없을 것이라는 판단에, 혈겸은 재빨리 따라붙었다.
탁!
타다닥!
창틀과 지붕을 아슬아슬하게 밟으며 튀어 올랐다
<은신 날개>로 몸을 두르고 있는 탓에 날개는 쓸 수 없었지만, 다행히 다리의 근력만으로도 뒤처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연합군의 지휘부, 그중에서도 혈맹에게 할당된 구역이었다.
베레슈티의 혈귀들을 동원해, 야밤에 약팔이를 했던 장소.
크라고 공작가를 비롯한 혈맹의 수뇌부들이 이곳에 있는 모양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막사 뒤편을 어슬렁거리는 흡혈귀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마침 딱 좋은 놈이 있네.’
싸르르······.
혈겸의 피가 반응했다.
녀석에게도 드라칸의 진혈이 흐르고 있다는 것.
공작이 그러했듯, 시조의 피를 나눈 존재끼리 서로를 알아볼 수 있는 모양이었다.
녀석 또한 뭔가를 감지하고 있는지,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혈겸은 좀 더 녀석에게 가까이 접근했다.
그러곤 스르륵 은신을 풀고는, 진혈의 기운을 풀풀 풍기며 말했다.
“크라고 공작의 전언을 가져왔다.”
“뭐?”
녀석은 화들짝 놀란 눈치였다.
하지만 곧 눈알을 번뜩이며,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그렇군, 너로구나.”
“뭐?”
혈겸이 되물었다.
이미 뭔가를 알고 있다는 듯한 눈치.
그러나 의문을 가지고 있을 여유조차 없었다.
탁! 타닥! 탁!
사방에서 튀어나온 흡혈귀들이 혈겸을 에워쌌으니까.
진혈 뱀파이어 녀석이 황망한 표정으로 말했다.
“프랑코 백작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도무지 믿기지 않지만······ 네가 공작님을 암살했다는 게 사실이냐?”
“뭐?”
“그래······. 네 입으로 말할 리는 없겠지. 무슨 배짱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살아 돌아갈 생각은 말아라. 혈주술에 며칠간 시달려 보면 배후도 술술 불게 될 거야.”
그제야 프랑코 백작이 혈겸에게 남긴 말이 떠올랐다.
마법사들이 오기 전에 몸을 피하라는 조언.
백작은 자신을 대신할 도망자가 필요했던 것이었으니까.
“아, 스승님······.”
그 하해와 같은 은혜에, 혈겸이 몸서리쳤다.
***
“빨리 말해라, 누구의 사주인지.”
한껏 포박되어 있는 혈겸에게, 진혈귀가 날카롭게 물었다.
분위기로 봐서는 아직 혈맹은 공작의 생사조차 파악하지 못한 모양.
공작의 시체는 조금 전 액체가 되어 사라졌으니,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일단은 순순히 잡혀 주었다.
혈맹에 접촉해 백작의 속내를 알아내는 것이 당초의 목적이었으니.
물론 그 전에 이 어처구니없는 누명부터 벗어야 할 터였다.
혈겸이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공작을 살해한 것은 프랑코 백작이지, 제가 아닙니다.”
“허튼소리!”
콰앙!
진혈귀가 탁상을 내리쳤다.
혈겸의 말을 믿지 않는 것을 넘어, 이제야 공작의 죽음을 확신하는 분위기였다.
그 때문인지, 놈의 언성이 한층 더 높아졌다.
“수가 틀리니 해괴한 소리를 지껄이는구나. 그래, 아예 그렇게 다물고 있어라. 곧 혈주물(血呪物)이 도착하면 좋으나 싫으나 다 털어놓게 될 테니까. 온 혈관이 뒤집어지는 기분이 어떤 건지 알게 해주마.”
혈주물은 혈주술이 가미된 아이템의 일종이었다.
진혈귀는 혈주물의 효력에 대해 한껏 떠들어댔는데, 대충 은실로 만든 동아줄을 저주받은 피에 적신 것으로, 자백제 이상의 효력을 지니고 있는 모양이었다.
줄줄 이야기를 늘어놓던 중, 녀석은 또다시 혈겸에게 윽박질렀다.
“네가 무슨 짓을 한 줄 아느냐? 공작께서는 네 몸에 흐르는 드라칸의 피를 찾으셨다! 네 피를 인정하고 거둬주려 하셨다는 것이지! 평생 갚지도 못할 은혜를 감히······! 원수로 갚다니······!”
그렇게 분노를 참지 못한 녀석이 입에서 왈칵 피를 쏟아냈을 즈음······.
벌컥!
문이 열리며, 흡혈귀 몇이 안으로 들어왔다.
놈들의 손에는 혈주물이라던 은색 동아줄이 들려있었는데,
혈겸을 결박해 의자와 함께 팔, 다리, 그리고 허리를 꽁꽁 묶어 버렸다.
‘이 정도면 충분히 모였나.’
흡혈귀 다섯, 마음을 담아 호소하기엔 딱 좋은 머릿수였다.
천천히 심호흡을 한 혈겸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억울합니다. 제 진심을 아신다면 이렇게 못 하실 겁니다.”
“웃기는 소리 하고 있네. 이제 와서 무······.”
진혈귀가 말을 멈췄다.
쿵. 쿵.
조금 전부터 정체 모를 박동이 녀석의 가슴을 울리고 있었으니까.
슬슬 혈겸의 진심이 전해지고 있을 터였다.
“자, 잠깐! 이 박동은······! 공작님의······?!”
아무렴 대책도 없이 잡혀들어왔을까.
크라고 공작의 전언은 단순한 말이 아니었다.
진동을 이용한 심장 박동은 공작만의 고유한 능력.
그는 죽기 직전, 혈겸에게 일종의 ‘다잉 메시지’를 남겨놓은 참이었다.
“말도 안 돼······. 그렇다면 정말 백작이?”
두근! 두근!
이제야 혈겸의 진술에 귀를 기울이는 진혈귀.
공작이 남긴 박동이 혈겸을 ‘믿으라’ 촉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공작의 뜻은 혈겸의 말을 믿으라는 것이지, ‘혈겸을’ 믿으라는 소리는 아니었겠지만······.
‘그딴 건 내 알 바가 아니지.’
이참에 이 ‘신뢰의 증표’를 이용해, 혈맹의 내부정보까지 모조리 털어먹을 작정이었다.
“아아!”
흡혈귀들이 탄식했다.
꽁꽁 묶인 와중에도, 혈겸은 가슴을 높게 쳐들었다.
그렇게 온 방이 가득 차도록······.
쿵! 쿵!
“느껴지십니까? 제 진심이?”
혈겸이 그들의 심장을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