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ding a Logistics Center in the Apocalypse RAW novel - Chapter (206)
아포칼립스에 물류센터를 숨김-206화(206/240)
아포칼립스에 물류센터를 숨김 206화
진심 (2)
“진즉 말을 하지 그랬나!”
진혈귀가 투덜거렸다.
심장의 두근거림을 전해준 이후로, 한결 누그러진 분위기였다.
손발에 묶여있던 밧줄이 스르륵 풀려나갔고, 비교적 친근한 분위기로 다시금 안내를 받았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취조실이 아닌, 혈맹의 지휘부였다.
지휘부에는 대략 10명 정도 되는 흡혈귀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 모두가 진혈을 가지고 있었지만, 드라칸의 피를 물려받은 이는 조금까지 혈겸을 취조했던 진혈귀 말고는 없었다.
방으로 들어서니 눈썹이 희게 샌, 노년의 흡혈귀가 손을 내밀었다.
“이야기는 들었네. 공작께서 자네에게 유언을 남기셨다는 게 사실인가?”
“예, 그렇습니다.”
혈겸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가슴을 내밀어 쿵쿵 심장소리를 들려주고는, 재빨리 덧붙였다.
“공작께서는 프랑코 백작의 더러운 음모를 간파하셨습니다. 제게 그것을 막으라 간곡히 당부하셨죠. 드라칸의 피를 물려받아 공작님의 유지를 이은, 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서요. 혈맹에 저의 가족들이 있으니······ 분명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거라 하셨습니다.”
“맙소사······ 사실이군!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혼을 빼놓는 박동 소리에 흡혈귀들은 귀를 쫑긋 세웠으나, 사실 처음 한 문장 빼고는 모조리 거짓말이었다.
공작이 프랑코 공작의 음모를 혈맹에 알리라 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 이상 이야기한 건 없었으니까.
‘그래도 믿을 수밖에 없겠지.’
나름 노하우가 생긴 참이었다.
오로지 진실을 이야기할 때만 발동되는 공작의 박동.
하지만 그렇다 한들, 거짓에 진실을 한 스푼 첨가해 주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이야기한 덕분에······.
“잠깐만, 아무리 그래도 오늘 처음 본 녀석 아닙니까? 벌써부터 정보를 나누기에는······.”
“어허, 지금 저 심장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공작님께서 직접 복수를 맡기신 녀석일세. 충분히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는 뜻이지.”
혈맹 지도부의 회의에 자연스레 끼어들 수 있었다.
물론 그래도 찜찜했던지, 회의를 주재하던 흡혈귀는 여전히 혈겸을 의식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쿵쿵 심장소리를 울려주면, 다른 간부들의 등쌀에 못 이긴 녀석이 기밀 정보를 술술 말해주었다.
“······해서 지금까지의 상황은 그렇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첫 번째 안건은 프랑코 백작이 공작을 살해한 이유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주어진 단서는 두 개의 성혈, 그리고 검은 비석이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목적을 짐작하는 이가 있었다.
혈겸에게 손을 내밀었던, 흰 백발의 노인 흡혈귀였다.
“개화파(開化派)······. 설마 아직까지 남아 있었을 줄이야.”
“개화······? 그게 무슨 뜻입니까, 장로님?”
나이가 있어 보이는 흡혈귀 몇몇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중년 이하의 대다수 흡혈귀는 모르는 눈치였기에, 흡혈귀 장로가 작은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했다.
“상공회의소의 급진 세력을 부르던 옛 이름이야. 세력 싸움에 밀려 수백 년 전에 궤멸되었다고 들었는데······. 아직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줄은 생각조차 못 했어.”
아무래도 상공회의소 내에도 모종의 비밀결사가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다차원을 쥐락펴락하는 거대 이권 집단에 파벌이 없을 리 없었으니.
다만 이번에는 오래전에 사라졌던 집단이 다시금 수면 위로 드러난 참이었다.
흡혈귀 장로가 말을 이었다.
“혈겸, 자네가 말한 검은 비석의 진짜 이름은 ‘흑색법률’일세. 상공회의소의 시설이 발전한 지금에야 거의 사용하지 않지만······. 과거에는 대지에 법률이나 계약을 부여하는 용도로 곧잘 사용했었다고 하지. 백작이 흑색법률을 지닌 채, 드라칸과 베로니카의 성혈을 노렸다는 건······. 솔직히 다른 의도를 떠올리기 어렵군. 그라디바를 깨우려는 게야.”
“그라디바를 깨운다니요?”
젊은 흡혈귀 하나가 물었고, 혈겸도 귀를 기울였다.
상공회의소의 마석이 채집되고, 이따금 차원폭풍이 몰아치는 정체불명의 존재.
젊은 흡혈귀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장로에게 되물었다.
“그라디바는······ 다차원의 가치를 꽃피우는, 축복의 화수분이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저희가 마석을 모으고, 다시 또 그라디바의 양분으로 주었던······.”
녀석으로부터 그라디바의 원래 기능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마석을 양분으로 삼아 넓은, 주변 차원 존재들의 각성 능력을 꽃피우는 것.
각성 능력을 얻은 존재들은 더 많은 양의 마석을 품게 되고, 그것을 ‘수확’해 다시 그라디바에 투자하는 것이 이들이 말하는 ‘선순환’의 구조였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군······.’
이들에게는 우리 모두가 열매이고, 또 씨앗인 셈이었다.
누구든 농부가, 누구든 열매가 될 수 있는 구조.
공교롭게도 상공회의소의 비밀을 알게 된 참이지만······. 이어지는 이야기는 더더욱 황당한 것이었다.
흡혈귀 장로가 대답했다.
“그야 물론이지. 나 또한 그것이 그라디바의 진정한 모습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하지만 다른 주장을 하는 놈들도 있었어. 이제 그라디바를 ‘완성’할 때가 되었다며······. 그라디바를 깨워내려 한다는 뜻에서 ‘개화파’라고 이름이 붙여졌지.”
“그라디바가 깨어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겁니까?”
이번에는 혈겸이 손을 들고 물었다.
그러자 장로가 섬찟한 눈빛을 보내며 대답했다.
“완성이라는 게 무얼 의미하겠나? 다차원의 통합. 항구적인 과정의 종결이자, 완성된 형태로의 귀의······. 놈들은 깨워낸 그라디바를 움직여 또 다른 그라디바로 향할 걸세. 그렇게 합쳐지고 합쳐져, 모든 그라디바가 하나가 된다면······. 세계에는 그라디바 외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게 되겠지.”
‘젠장.’
사실상 세상의 멸망이나 다를 바 없는 소리였다.
상공회의소의 ‘선순환’ 구조 이상의 처참한 디스토피아.
이번만큼은 놈들도 다르지 않은지, 흡혈귀들 모두 아연실색한 표정이었다.
젊은 흡혈귀가 다시 물었다.
갑작스런 시한부 선고에,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그러면 이미 틀린 일이 아닙니까? 이미 백작에게 성혈 두 개가 모두 넘어간 상황인데······.”
“그라디바를 깨우고, 움직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흑색법률’이 심어져야 해. 그것만 막을 수 있다면······. 개화파 놈들의 계획도 물거품이 되겠지.”
요컨대 그라디바가 하드웨어라면, 검은 비석은 그것을 움직이는 소프트웨어인 셈이었다.
운영 체제인 검은 비석이 없다면, 그라디바 또한 깨어날 수 없다는 것.
성혈이 필요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는데, ‘흑색법률’이 그라디바의 맹렬한 순수성에도 지워지지 않을만큼 강력한 생명력으로 각인되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장로는 덧붙였다.
“놈들이 그라디바 중······ 어느 것을 먼저 깨울지부터 알아내야 하네. 다차원에 존재하는 그라디바만 해도 한두 개가 아니니······.”
“그거라면 짐작 가는 바가 하나 있습니다.”
고심하는 장로에게 혈겸이 대답했다.
질문도 단서도 한 번씩 내어놓으니, 이제 슬슬 신뢰에 찬 눈빛이 날아왔다.
“프랑코 백작은 제법 오래 인재개발원의 부원장을 역임하고 있습니다. 그게 만약 그라디바를 살피기 위한 것이었다면······.”
모든 것을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나름 근거가 있는 이야기였다.
내가 직접 막아냈던 그라디바에서의 차원 폭풍.
당시 검은 비석이 박혀 있었던 점을 미루어 본다면······. 어쩌면 백작이 일종의 실험 같은 걸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프랑코 백작에게 가장 가까이 있었던 그라디바.
혈겸의 추론에, 장로를 비롯한 다른 흡혈귀들 모두 납득하는 분위기였다.
촤르르륵!
장로가 커다란 탁상 위에 지도 한장을 펼쳤다.
혈주술이 각인된 종이에는 인재개발원, 그라디바, 그리고 주변 차원들의 위치가 촘촘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장로가 말했다.
“깨어난 그라디바는 주변 차원들을 집어삼키며 이동을 시작할 걸세. 또 다른 위치에 있는 그라디바까지 도착하려면 상당한 양분이 필요할 테니까 말이야.”
혈겸은 지도에 표시된 지명들을 빠르게 읽어내렸다.
정확히는 그라디바의 사정권에 있는 주변 차원들의 이름을.
그중에는 분명······.
‘······제기랄.’
지구의 이름도 있었다.
.
.
.
혈맹의 흡혈귀들은 빠르게 움직였다.
비밀리에 다른 연합군 세력과 회동을 가지며 계획을 수립한 것.
작전의 전반적인 얼개는 역시, 그라디바가 깨어나기 전에 미리 검은 비석을 탈취하자는 것이었다.
흡혈귀 장로가 말했다.
“흑색법률은 이제 생산이 금지된 물건이야. 물론 제법 가지고 있겠지만······. 그래도 무한은 아닐걸세. 비석만 빠짐없이 회수한다면, 어떻게든 이 사태도 해결할 수 있겠지.”
그렇다면 관건은 비석을 찾아내는 일이었다.
위치는 당연히 그라디바 주변.
드라칸의 피를 이은, 진혈 이상의 흡혈귀들이 비석을 탐색하기로 했다.
비석에는 드라칸의 성혈이 새겨져 있을 테고, 그 기운 또한 감지할 수 있을 테니까.
“찾은 다음에는 어떻게 합니까?”
“성혈이 각인돼 있으면 파괴하기도 어려워. 혈맹의 십자선(十字船)들로 비석을 회수해 안전한 장소로 옮길 걸세.”
십자선이란 차원비행선의 일종이었다.
이 또한 혈맹이 다루는 혈주물 중 하나였는데, 튼튼하고 신속한 것이 특징으로 원래는 혈액팩을 나르는 수송선으로 쓰이고 물건이라고.
아까 봤던 은실을 꼬아 만든 동아줄도 그렇고, 왜 흡혈귀들이 십자가로 된 우주선을 타고 다니는지 도무지 모를 일이었다.
혈맹의 모든 계획을 파악한 뒤, 혈겸은 홀로 생각에 잠겼다.
그들의 작전을 진지하게 살핀 건 사실이었지만, 애당초 우리는 한편이 아니었으니까.
‘한 편일 수가 없지. 실상 이놈들도 똑같은 놈들인데.’
프랑코 백작이 개화파라면 이놈들은 온건파라 불러도 좋을 성싶었다.
하지만 이러나저러나, 우리 입장에서 악질이라는 점은 똑같았다.
그라디바를 깨우려는 개화파의 계획을 저지한들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온건파 놈들은 그라디바에 양분을 줘야겠다며, 다시금 지구로 쳐들어와 인간들을 학살할 것이 불 보듯 뻔한데.
‘물론 지금은 그라디바를 막는 게 우선이기는 하지만.’
그래서였다.
당장 혈맹을 내 도구로 삼은 것은.
드라칸의 후예들은 ‘흑색법률’을 쫓는 훌륭한 탐지견이 되어줄 테니까.
하지만 개화파의 계획을 저지한 뒤에는, 어떻게든 온건파 녀석들에게도 적잖은 피해를 안겨줄 생각이었다.
혈맹의 흡혈귀들이 결의를 다지며 회의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그때, 혈맹의 장로가 혈겸을 향해 천천히 다가와 말했다.
“이곳에서 들은 이야기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바깥으로 전해져서는 안 되네. 특히 개화파의 귀에 들어가면 놈들도 대비를 할 테니까. 이점 꼭 명심해 주게. 우리는 자네를 믿고 있으니.”
장로가 눈을 게슴츠레 뜨며 미소 지었다.
진짜 믿는 사이라면 저런 소리는 하지 않을 터.
혈겸은 등 뒤의 검은 날개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걱정 마십시오. 저는 뼛속 깊이 박쥐니까요.”
펄럭.
중의적인 표현이었다.
***
이틀의 시간이 흘렀다.
그라디바에서 개화파의 움직임이 포착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