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ding a Logistics Center in the Apocalypse RAW novel - Chapter (207)
아포칼립스에 물류센터를 숨김-207화(207/240)
아포칼립스에 물류센터를 숨김 207화
그라디바 (1)
휘이이이······.
쿠구구구구······.
싸늘한 바람이 사방에서 몰아쳤다.
몸에 스칠 때마다 혼이 다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
끓어오르는 플라스마를 보며, 제르가 입을 열었다.
“······뭐가 시작되긴 하려나 봅니다.”
이곳 그라디바의 정착촌을 지키던 제르였다.
꾸준히 이곳의 기후를 관찰하고 있었는데, 최근 들어 폭풍이 잦아졌다고.
일전에 겪었던 차원 폭풍만큼 거센 것은 아니었지만, 자연적인 현상은 결코 아니었다.
쓸려나가는 옷깃을 붙잡으며 나는 물었다.
“정착촌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일단은 최대한 밖으로 못 나가게 하고 있습니다. 말씀하신 ‘개화파’도 문제지만······. 지금 상공회의소 측에서도 분위기가 흉흉해서요.”
개화파에 맞서는 상공회의소 세력, 즉 온건파 또한 움직이고 있었다.
이곳 그라디바에 병력을 파견해 수색 작업에 들어간 것.
마석운반선까지 꼼꼼히 뒤지는 통에, 당분간 해적질도 접어 두는 수밖에 없었다.
‘일단 타이밍 좋게 챙겨두긴 했는데······.’
아우렐과 죄수들이 마지막 운반선을 털고 돌아왔다.
액수는 대략 150만 개가량, 적지는 않지만, 베레슈티의 전쟁을 겪은 지금, 군자금으로는 아쉽게 느껴지는 금액이었다.
더욱이, 그라디바를 깨우려는 개화파 때문에 당분간 해적질 또한 공을 친 상황이니.
드드득, 폭풍에 흔들리는 정착촌의 지붕들을 보며, 제르에게 제안했다.
“일단 정착촌 사람들은 대피시켜 두죠. 포탈을 열어드리겠습니다.”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적당히 엘븐하임으로 보내놓을 참이었다.
그라디바가 깨어난다면 지구는 첫 번째 타깃이 될 테니 위험한 건 도긴개긴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코앞에서 개화에 휩쓸리는 것보다는 나을 터였다.
하지만 난민들이 포탈을 통과하는 중에도, 제르만큼은 이곳 정착촌에 남기로 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꼭 두 눈에 담았으면 해서요.”
지난번 차원 폭풍이 있은 직후, 제르는 새 망원경을 설치해둔 참이었다.
일평생 그라디바를 관찰해왔으니, 이번에도 그러겠다는 것.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그라디바를 둘러싸고 시시각각 급변할 전장.
그가 우리의 눈이 되어준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제르 한 사람쯤이야 보호해주는 것이 그리 어렵지만은 않을 터.
휘이이······.
차원풍이 불었고, 가만히 그라디바를 들여다보았다.
궤도를 도는 운반선들의 움직임이 어쩐지 위태롭게만 보였다.
***
펄럭!
쿠당탕!
혈겸이 무리와 함께 운반선을 급습했다.
피렌의 천사들, 그리고 혈맹의 흡혈귀들이 뒤섞인 이른바 ‘온건파’ 세력.
혈겸은 이들과 함께 그라디바의 궤도를 도는 운반선을 찾아, 창고와 적재함을 샅샅이 뒤져댔다.
아니나 다를까, 몸에 흐르는 드라칸의 진혈이 찌릿하게 올라왔다.
예민한 코를 씰룩거리며, 혈겸이 적재실로 내려가는 갑판 계단을 가리켰다.
“저기, 아래서 혈향이 납니다. 계단 옆쪽입니다.”
“이쪽! 와서 여기 벽 좀 뜯어봐!”
피렌의 천사들이 지팡이로 벽면을 깨부수었다.
과연 기우가 아니었다는 듯, 커다란 벽을 따라 숨겨져 있던 흑색 표면이 모습을 드러냈다.
“젠장! 어느새!”
다름 아닌 ‘흑색법률’이었다.
베로니카의 성혈과 드라칸의 성혈이 모두 담긴 완성본.
당최 어떻게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개화파 세력이 운반선에 비석을 숨겨둔 것이었다.
“이게 그대로 있었다면······. 정말이지 상상도 하고 싶지 않군.”
찾아서 망정이었지만, 안심할 수도 없었다.
다른 운반선들에도 속속들이 흑색법률이 발견되고 있었으니까.
“11번 선박에서도 찾았다는 보고입니다!”
“8번 선박도 그렇습니다!”
그라디바를 맴도는 수십 개의 운반선.
간간이 해적질을 당한, 그러니까 적재함이 텅 빈 운반선들도 있었지만, 크게 신경 쓰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 모두를 개화파의 소행으로 치부하며, 검은 비석을 찾는 일에 몰두할 뿐.
“끌어내!”
지이이이잉!
피렌의 천사들이 지팡이를 휘둘렀다.
지팡이에서 뿜어져 나온 빛의 사슬이 숨어있던 비석을 휘감았다.
여러 명의 천사들이 한꺼번에 달라붙자, 결국 힘을 이기지 못한 비석이 으드득 벽으로부터 뜯겨 나왔다.
“십자선 도착했습니다!”
드드드드득!
갑판에 있던 흡혈귀 하나가 소리쳤다.
차원 폭풍에 뒤섞인 바람이 갑판을 빠르게 쓸었고, 그라디바를 가린 거대한 비행체가 십자가 모양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하나, 둘!”
천사들이 구호와 함께 지팡이를 휘둘렀다.
빛으로 된 그물에 휩싸인 흑색법률이 스르륵 십자선의 하부 적재함에 결속됐다.
이번 것까지 총 4개의 검은 비석이 수용되었고, 그라디바에 동원된 십자선의 수가 3대라는 점을 감안하면 지금껏 최소 10개 이상의 비석을 찾아낸 셈이었다.
‘이상하게 잠잠한데······.’
아직은 개화파로부터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그새 운반선에 비석을 숨겨놓은 노력이 가상하게 느껴질 뿐.
하지만 이렇게 계속 비석을 내어주게 된다면, 그라디바의 각성은 잠깐의 해프닝으로 그치고 말 터였다.
그리고 역시나······.
“17번 선박에서 통신 두절입니다!”
“6번, 2번도 끊어졌습니다!”
개화파 또한 가만히 있지 않았다.
펄럭, 피렌의 전령들이 부산스레 날개를 펄럭이는 사이,
“적습! 적습이다!”
개화파의 공격이 시작됐다.
***
혈겸이 연합군 세력과 함께 비석을 찾아다니는 사이,
나는 제르와 함께 그라디바 주변의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직접 나설 필요는 없겠지.’
당장 그라디바가 깨어나는 것만 아니라면, 특별히 내가 개입할 필요는 없었다.
온건파라고 한들 딱히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고, 운반선에 숨겨져 있던 비석을 차례차례 발견하면서 상황이 잘 풀려가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하지만 몇몇 운반선에 잠복해 있던 개화파 세력이 활동을 시작하면서, 상황을 한 치 앞을 알 수 없을 만큼 급변하기 시작했다.
퍼어어엉!
퍼어엉!
운반선에 숨어 있던 아케인의 마법사들이 폭발을 일으켰다.
온건파들이 점거하고 있던 운반선 몇 척이 빛과 함께 사라졌고, 천사들이 회수하고 있던 비석 하나가 허공에 부유했다.
-잡아!
-제기랄!
덩그러 놓인 ‘흑색법률’을 두고, 개화파 세력과 온건파 세력이 맞붙었다.
콰아아아아아앙!
‘······누가 누군 줄 모르겠네.’
개화파에는 마법사들을 비롯한 여러 이종족들이 섞여 있었고, 온건파에는 피엔의 천사들과 흡혈귀들, 그리고 마찬가지로 이종족이 섞여 있었다.
상공회의소의 내부 분열인 탓에, 겉으로 보기엔 어느 쪽이 개화파인지, 온건파인지 모를 지경.
유일한 피아식별 방법이 있다면······.
-못 지나간다!
-크윽!
한쪽이 비석을 그라디바로 날려 보내려 한다면, 다른 한쪽은 그것을 막으려 한다는 것.
쉬리리릭!
파아아앙!
먼저 움직인 것은 마법사들 쪽이었다.
불과 전격으로 이루어진 다채로운 속성 마법에, 전장을 교란하는 이능 마법까지.
변화무쌍한 공격이 시시각각 방어선을 공략했지만······.
-잡았습니다!
-그대로 몰아넣어!
온건파는 그라디바의 궤도를 둘러싼 채, 무난히 개화파의 공격을 막아 세웠다.
내부 갈등이라고 했지만, 개화파는 어디까지나 소수로 구성된 비밀 세력.
온건파로 결집된 상공회의소의 나머지 세력을 상대하기엔 그 수가 절대적으로 모자랐으니까.
-34척 운반선 점거, 그밖에 40척도 포위 완료했습니다.
그렇게, 순탄하게 정리되는 것만 같았다.
-어, 저게 뭐야?
-미친놈들이!
지이이잉!
사방에서 포탈이 우후죽순 생겨나기 전에는.
궤도를 따라 촘촘히 늘어선 포탈들이 듬성듬성 검은 비석을 뱉어내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온건파의 방어선은 삽시간에 무너졌다.
온건파의 수가 압도적인 것은 맞다.
하지만 애당초 이건 불리한 싸움이기도 했다.
그라디바 전체를 보호해야 하는 온건파와는 달리, 개화파는 단 한 개의 비석만 꽂아 넣으면 그만이었으니까.
‘······하는 수 없지.’
잠깐만 손을 거들기로 했다.
상공회의소 놈들이 저들끼리치고 박는 거야 알 바 아니었지만, 그라디바가 깨어난다면 지구까지 위험해질 테니.
“출하.”
띠링!
[알겠습니다.]팍스가 주문을 받았다.
주문을 넣는 건 나여도, 대상을 겨냥하는 건 이 녀석의 역할이었다.
그렇게······.
콰아아아아앙!
-무, 무슨 일이야?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주변에서 소행성들이······!
그라디바의 궤도 곳곳에서 큼지막한 돌덩이들이 발사됐다.
그러곤 포탈에서 빠져나온 ‘흑색법률’을 모조리 타격하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앙!
콰앙!
파사삭!
무슨 효과가 가미되어 있는 것인지, 파괴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제자리에 멈춰 세우는 것만큼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팍스, 일단은 계속 쏘고 있어. 부딪힌 것들은 방해 안 되게 다시 회수하고.”
띠링!
[알겠습니다.]지난 며칠 사이, 나는 그라디바 근처에 수십 개의 차원 본부를 띄워둔 참이었다.
겉보기엔 평범한 소행성이나 다를 바가 없었는데, 하나같이 아공간 포탈을 설치해 둔 것들.
따라서 이곳 그라디바의 궤도는 통째로 내 영역이나 다름이 없었다.
슈우우우우웅!
콰아아아앙!
소행성들이 설치된 포탈을 통해, 또 다른 소행성을 토해냈다.
사출된 소행성이 검은 비석을 타격하고 난 뒤, 다시 원래의 소행성으로 돌아가 집어삼켜지는 기현상이 반복됐다.
하나하나 살필 필요도 없었다.
팍스가 알아서 포탈에서 나온 비석의 움직임을 계산했고, <추적 배송>으로 정확하게 타격까지 완료 해줬으니까.
-이게 무슨······.
온건파 세력들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대뜸 날아온 돌덩이들이 개화파의 검은 비석을 빠짐없이 요격하고 있었으니까.
그저 피렌의 천사들이 허둥지둥 올가미를 펼쳐, 궤도에 멈춰 선 비석을 회수할 따름이었다.
휘이이이이이잉!
파가가가가각!
“폭풍이······ 점점 거세지는군요.”
망원경에서 잠시 눈을 뗀 제르가 말했다.
덜그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망원경을 고정해놓은 하판 나사가 파르르 떨려왔다.
사방에서 몰아치는 폭풍 탓에, 제대로 서 있는 것조차 힘에 부쳤다.
아직 그라디바에 도달한 비석은 없다.
하지만 주변에 불순물이 많아진 것만으로도, 그라디바는 당장이라도 터질 듯 달아올랐다.
겨울잠에든 곰이 봄기운에 몸을 뒤척이는 것처럼.
그러던 중······.
“큰일입니다!”
“뭐?”
제르가 달칵 위치를 고정하고는, 서둘러 망원경에서 벗어났다.
재빨리 눈을 가져다 대자마자, 속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젠장!’
검은 비석을 탄 프랑코 백작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팍스가 발사한 소행성이 녀석을 향해 날아들었지만······.
휘익!
놈의 손짓 한 번에, 방향이 비틀렸다.
아슬아슬하게 놈의 근처를 비켜 지나갈 뿐.
장애물을 벗어난 프랑코 백작은 다시금 비석을 조작해, 그라디바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죽어도 상관없다 이건가?’
목숨을 건 각오였다.
염동력을 이용한다면 비석을 안전하게 운반할 수 있을 테니.
하지만 그라디바의 폭풍에 휘말린다면 아무리 프랑코 백작이라 한들,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었다.
“······팍스, 저거 사버려.”
띠링!
[알겠습니다.] [카테고리에 부합하는 사물입니다.] [할인이 적용됩니다.]나로서도 마지막 방법이었다.
저 ‘불순물’은 한두 푼 하는 물건이 아니었으니까.
카테고리 할인이 적용된다는 게 감지덕지할 따름이었다.
덕분에······.
-······!?
갑자기 타고 있던 비석을 잃은 백작이 중심을 잃었다.
허공을 떠다니던 그는 난파선에서 조각난 판자에 기대듯, 떠돌아다니는 암석 조각에 가까스로 몸을 의탁했다.
그라디바를 깨우려던 놈의 마지막 수를 성공적으로 저지한 것.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잠깐, 저거 뭐야?”
완전히 사각이다.
포탈에서 쏟아진 비석을 모조리 요격해 멈춰 세운 상황.
온건파 세력이 비석을 회수하기 위해 움직인 사이, 운반선 하나가 홀연히 포위망을 벗어났다.
그러곤······.
콰아아아아아앙!
그대로 그라디바의 표면에 선체를 처박아버렸다.
“미친······.”
안에 뭐가 들어 있었을지는 불 보듯 뻔한 일.
쿠구구구구구구구구······.
‘흑색법률’을 품은 그라디바가 요동치기 시작했다.